제231화
48화. 더러운 트롤 새끼들
1.
생명체는 먹어야 살 수 있다.
그건 트롤 또한 마찬가지다. 하루에 3번씩 있는 정규 식사 시간, 우쥴 할아버지의 식사 담당으로 내정된 트롤 주술사-‘우탄’은 이번 원정에서 얻은 ‘고기’를 돌 쟁반에 가득 담은 채로 1층의 문 앞에 도달했다.
“할아버지, 아침 식사 왔어요!”
주술사의 돌 지팡이에 특유의 마력을 담아서 우탄은 돌문을 ‘통! 통!’ 두들겼다. 평소라면 우쥴 할아버지가 그 노크를 듣고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할아버지? 할아버지!”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에 우탄은 다시 한번 돌 지팡이를 두드렸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다. 그에 우탄은 얼굴을 찡그렸다. 간혹가다가 ‘식사를 하지 않겠다.’라고 할 때가 있긴 했었지만, 이렇게 대꾸도 안 하시는 건 처음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걱정되는 건, 어제저녁도 이렇게 대꾸도 안 하고 안 드셨다는 것.
한 끼만 굶더라도 눈이 돌아갈 만큼 괴로운데 이렇게 2끼를 연속해서 안 드시다니? 게다가 자느라고 더더욱 허기졌을 텐데 아침 식사를 거른다? 다른 트롤에 비해 삐쩍 마르고 먹는 양이 적으신 할아버지지만 이렇게 안 먹는 건 뭔가 이상했다. 그에 우탄은 망설이다가 결심을 했다.
“할아버지! 나 들어간다!”
대지술을 이용, 억지로 잠긴 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가 평소에 앉아 있는 작은 틈새 사이를 바라보았고…….
“할아버지!”
엎어진 ‘우쥴’을 보았다.
음식이 든 돌 접시를 내팽개치며 우탄은 허겁지겁 달려가서 우쥴을 일으켰다. 너무나도 가벼운 몸,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로브를 눅진하게 적신 붉은 피?
“그어어어어억!”
공포에 젖은 트롤의 비명이 홀에 울려 퍼졌다.
2.
요즘 들어 꿈을 자주 꾸는 것 같다.
여기에 내려오기 전에는 싸장님과 시장 오크 양반이 서로 ‘하하 호호’하는 꿈을 꿨는데, 이젠 트롤 새끼들이 꿈에 나오네. 저놈들을 보는 순간, ‘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하고 자각했다.
색색의 4마리 트롤들.
‘텔레트롤’이라는 영상에서 나온 놈들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텔레트롤 동산이고.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운데, 4마리의 트롤 새끼들은 날 보자마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수정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든다. 그에 나도 창을 쥐고 싸웠다.
근데, 이놈들…… 꽤 친다?
독 내성이 강해서 그런지 내가 쓰는 마법들은 터프하게 몸으로 버티고, 흉악한 대지 마법을 펑펑 써댄다. <독숨결> 연막을 깔고 근접전을 해보려고도 했는데, 이건 뭐…… 급소를 찔러도 버틴다. 목의 경추를 꿰뚫어도 죽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회복해버린다.
……흠, 상성이 매우 나쁘네.
싸우는 걸 포기하고 도망치려는데, 돌연 바닥이 늪지로 변한다. 그와 함께 빨려 들어가는 몸,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트롤들이 달려와서 내가 빠진 늪지에 몽둥이를 휘두른다. 다행히 꿈이라서 그런지 맞아도 그리 아프진 않네. 근데, 얼굴에 진흙이…… 윽!
“에게게게겍! 켈록! 콜록! 콜록!”
“일어나!”
코로 들어간 물이 역류하는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을 휘저으며 일어나니 옆 토굴에 있어야 할 오크 영감이 내 멱살을 붙잡고 투구 위에 생수를 들입다 퍼붓고 있다. 이 미친 투구는 인육 아니면 못 먹게 하는 주제에 물을 막아줄 생각도 안 하네. 도대체 뭔 개짓거리냐고 소리치려고 했는데…… 오크 영감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누가 봐도 ‘X됐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트롤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소!”
“……네?”
“X발! 미친 식인 괴물들이 온다고! 살기를 풀풀 풍기면서! 진짜 장난이 아니오!”
내 멱살을 쥐고 흔들며 토굴 바깥쪽을 가리키는 영감탱이, 그에 <눈>을 이동시켜서 보니까…….
“시X?”
지팡이를 쥔 트롤 주술사 수십 마리가 이쪽 토굴을 향해 포위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핏발선 두 눈인 걸 보면 딱 봐도 좋은 의도로 오는 건 아닌 것 같구만. 오크 영감님이 과민 반응을 보일만 하다.
“어떻게 할 거요! 아니, X발! 알아서 한다면서! 괜찮다면서!”
“알겠으니까, 잠시 이것 좀 풀어보세요.”
내 말에 조용히 멱살을 푸는 오크 영감, 심호흡하면서 주위의 환경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미친 트롤 늙은이를 만날 때처럼 ‘-Tele’ 상태는 아니다. 언제든지 도주 가능, 최후의 보루가 남아있다는 생각에 좀 안심이 된다. 하지만, 그건 이 유용한 길잡이 영감을 버려야 하니 최후의 사항이지.
“우리가 토굴로 안내받은 지 몇 시간 지났나요?”
“하루 조금 안 됐소.”
“흐음, 그렇군요.”
차분하게 몸 상태를 점검했다. 머리가 먹먹하고, 다리의 상처도 아직 움푹 파인 것조차 회복이 덜 된 상황. 걷는 건 어찌 되겠다만 격렬한 움직임은 힘들다. 여러모로 싸움이 벌어지면 불리해. 그렇게 몸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쿵! 쿵!’ 거리며 다가온 트롤들은 우리가 있는 토굴 앞을 둘러싼다.
-쿵!
“나와라!”
화려한 복장의 주술사 트롤이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으며 소리친다.
곱게 나갈까 생각했지만, 주술사 놈들이 하나같이 지팡이를 들고 마력을 응집한 상태인 걸 보곤 포기했다. 저건, 사실상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나 다름없어. 그냥 믿고 나가기엔 너무 위협적. 다행히 우리가 있는 토굴이 꽤나 깊고, ㄱ자 형태로 밖에선 안 보이는 형태라 버틸만하다.
“X발, 소릴 들어보니 코 앞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요!”
“좀 조용히 있어 봐요.”
<눈>을 이리저리 굴려 가며 주위를 훑었다.
다행히,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각이 보이긴 하는데…… 그렇게 우리가 토굴 깊숙이 숨어서 나오질 않자 주술사들이 진입하려 하고, 그에 한 트롤이 앞서 나선다.
“사형, 제가 나가겠습니다. 저기에 여러 명 들어가기엔 너무 좁아요.”
어제, 미친 늙은 트롤에게 우리를 안내해줬던 주술사 트롤.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나서자 무리의 대장인 화려한 트롤 주술사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되묻는다.
“할아버지를 죽인 놈들이다. 우둔, 넌 너무 약해. 막내다.”
“내가 안내했으니 책임이 있어요. 내가 안 했더라면…….”
자책하는 표정으로 우리가 있는 토굴을 응시하는 트롤 주술사. 그 대화를 듣자 왜 저렇게 트롤들이 분노했는지 이해했다. 자고 있는 동안에 미친 트롤 늙은이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 같다. 그리고, 트롤들은 이미 범인을 우리로 단정 지은 것 같고.
……이 누명을 어떻게 벗을 수 있을까?
냉정히 말해 힘들지. 인간도 중세 시대에는 일단 의심되면 ‘사실을 실토해라!’라면서 반병X이 될 때까지 고문하는 게 일상이었다. 인권 같은 게 없는 이곳에선 뻔하지. 어제도 한 번 미친 늙은이에게 데어서 다리가 병X이 된 걸 생각하면 도주가 답이다.
재빨리 내 짐을 모아둔 곳에 간 후, 난 물품을 꺼내 오크 영감에게 던졌다.
“받으세요.”
“이건……?”
약탈자 대장이 쓰던 화려한 ‘검은 방패’와 ‘진동의 에메랄드’. 2개를 받고 당황하는 영감을 향해 난 턱짓했다.
“그 에메랄드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바위를 자갈로 만드는 빛이 뿜어져 나와요. 방향도 조절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이 방향을 파세요. 부서지면서 나오는 자갈은 그 방패를 삽 대용으로 써서 퍼내고. 한 10m 정도 파면 반대편 영감님이 있던 굴과 연결될 거예요.”
“아니, 나 이런 마법 물품은 잘 못 쓰오!”
“그럼 뒤지는 거죠. 불평할 시간에 빨리 파세요.”
내 재촉에 ‘X발!’ 거리면서 억지로 에메랄드에 마력을 불어넣는 영감님, 마법 장비를 잘 못 다룬다는 게 사실인 듯 뿜어져 나오는 광채의 방향이 중구난방이다. 그렇게 어떻게든 영감님이 필사적으로 굴을 파는 사이-.
-쿵! 쿵! 쿵!
우둔이라고 불린 주술사가 토굴 안으로 들어섰다.
지팡이를 쥔 채, 바윗덩이가 굴러오는 듯한 소음을 내며 들어오는 트롤 주술사. 그에 맞춰서 난 ‘순수한 물’을 창 형태로 바꾼 후-.
“RA-TI-AM.”
<염기성 무기> 인챈트를 걸고 싸울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마침내 ㄱ자 터널 코너에서 트롤 주술사는 나와 마주쳤다.
“너……!”
날 보며 이를 부드득 갈며 살기를 피워 올리는 주술사, 멀리서 볼 땐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보니 펑펑 울었는지 충혈된 두 눈이 부어있었다. 분노에 찬 트롤의 등장에 뒤쪽 오크 영감님의 움직임이 빨라진 가운데 난 담담히 트롤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콰앙!
내 질문에 지팡이로 옆의 돌벽을 후려치는 트롤, 그에 한 방에 암석이 터지듯이 박살 나고 그 파편이 튄다. ……뚱뚱한 트롤이라서 그런지 힘이 무지막지하네. 내가 한 손을 올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이, 트롤은 스산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린다.
“우쥴 할아버지가 죽었다.”
“그래요? 의외네요. 되게 오래 사실 것 같았는데.”
“살해당했다.”
이어서 트롤은 지팡이로 나를 가리키며 이를 간다.
“니가, 가장 나중에 들어간 놈. 니가 죽였다. 다리의 부상을 입은 것도 이상해!”
“……음, 전 아닌데요.”
“그럼 나와라. 아니라고 증명해라.”
나오라고 말하는 트롤에 난 마법을 준비하며 고갤 저었다.
“스으으으흡! 죄송하지만 자살하기는 싫어서요. 아주 흉흉하던-.”
“그르르르럭!”
-쿵! 쿵! 쿵! 쿵! 쿵!
거부의 뜻을 말하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트롤, 말 그대로 작은 봉고가 달려오는 기세에 곧바로 준비했던 짙은 타르 색의 <독숨결>을 내뱉으며 전방을 완전히 가렸다.
-쾅! 쾅! 쾅!
하지만, 그런 것조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무 속으로 뛰어들며 지팡이를 휘두른다. 마치 아이가 막무가내로 막대를 휘두르는 것 같은 모양새, 하지만 그 위력은 돌벽이 터져나간다. 살짝 쪼그리고 앉으며 난 팔에 낀 뼈 장갑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려고 하는 기운을 받아들였다.
<광폭화>.
칸의 신도들이 다루는 ‘진짜 신의 권능’과 비교하면 마력으로 만들어진 저열한 모조품, 하지만 효과는 충분하다. 신경을 내달리며 끊어진 근육과 인대 등을 잠식, 더 폭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고 심지어 뭉텅이로 사라진 허벅지 근육도 그 기괴한 마력이 대체한다.
-콰득!
바닥에 거의 밀착하듯이 몸을 숙인 채 돌진, 타이밍에 맞춰서 도약해 단숨에 트롤의 목에 창날을 찔러 넣었다. 힘겹게 돌 가죽을 뚫는 창, 정확히 경추를 꿰뚫고 그 안쪽의 신경을 <염기성 무기>가 녹였으나 난 그대로 창대를 놓고 뒤로 빠졌다.
-쾅!
트롤이 관성으로 휘두르던 돌 지팡이가 내가 있던 곳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과정에서 목에 찔러 넣었던 창이 튕겨 나간 것은 덤. 한발 늦게 트롤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려고 할 때, 재빨리 튀어 올라 튕겨 나간 창을 낚아채고 한 번 더 목의 상처를 후벼 팠다.
-콰득!
“그륵…….”
그제야 완전히 목을 꿰뚫고 나오는 창, 트롤 주술사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무릎을 꿇은 채로 엎어졌다. 하지만, 목을 꿰뚫린 상태로도 살아있다. 핏발선 두 눈을 번들거리며 이를 갈아대는 그 모습에 창을 놓고 트롤의 얼굴로 뛰어올라-.
-푸욱!
“……!”
뼈 장갑의 뾰족한 양 엄지손가락을 이용해서 눈깔을 후벼 팠다.
눈깔도 뭔 돌처럼 딴딴했지만 <광폭화>의 힘 덕분에 어떻게 양 안구를 짓뭉개며 엄지를 밀어 넣었다. 그 뒤, 연거푸 <독침> 주문을 외워서 엄지손가락 위에 만들어내 쏘아냈다. 그렇게 안구 뒤의 뇌를 벌집으로 만들고 나서야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하아…….”
<광폭화>를 해제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광폭화>를 쓴 후유증 중 하나인 극도의 허기짐과 몸의 삐걱거림, 곧바로 트롤의 시체를 뜯어먹어 보려 했지만…… 투구가 완강히 거부한다. 쥐쟁이는 되고 트롤은 안 되고. 도대체 ‘인간’ 취급의 기준을 모르겠구만. 그렇게 한숨을 내뱉고 있는데, 뒤의 오크 영감이 소리친다.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뭐라고 그러오?”
“트롤 우두머리가 죽었는데, 우리가 죽인 것 같다고 하네요. 어떻게 대화를 해보려 했는데, 이미 범인을 우리로 정해놓고 두들겨 패려는 것 같아요.”
“X발…….”
<독숨결>의 연막 덕분에 밖의 트롤들은 아직 대응 안 하는 상황.
급한 대로 트롤의 목에서 창날을 뽑아낸 후, 쇄골 사이의 움푹한 곳을 창날로 후벼 파서 울대까지 꿰뚫었다. 그리고, 상처 사이로 남은 ‘식사 대용 물질’을 쑤셔 넣으면서 내가 죽인 트롤을 보며 <과거시>를 사용했다.
범위는 대충 4~5시간.
그리고, 트롤들의 움직임과 병력 배치를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지 밖에 있는 우두머리 트롤의 지휘 아래에 아주 철저하게 준비해 놨다. 여기서 8층까지 올라가는 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불가능에 가깝지만……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네.
“계속 파고 계세요.”
뒤에서 발악 중인 오크 영감에게 말한 뒤, 난 널브러진 트롤의 시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