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막간. 전쟁의 전령
1.
뉴 송파구에 있는 두 명의 ‘오크 전쟁 군주’ 중 하나, 모르칸쉬는 미궁 밖 생활이 퍽 마음에 들었다.
아니, 솔직히 이젠 미궁 안에서의 일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2~3일 주기로 모든 것의 재배치가 일어나는 ‘변천’ 때문에 영원히 새로운 곳을 방랑하면서 살아남는 ‘위험하고 단조로운 삶’, 지상의 삶을 몰랐을 땐 그냥 받아들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고문이 따로 없다.
그에 비해 미궁 밖의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위험하진 않지만 짜릿한 자극이 넘친다. 가끔씩 아름다운 여자와 밤을 보내고, 뜨끈한 물에 샤워한 뒤에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커다란 TV로 영화와 예능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가? 물론, 모든 면이 좋은 건 아니다. 미궁에 있었던 때와는 달리 ‘복잡한 일’들이 있지만 그래도 충분히 감당할 만…….
“기사가 되고 싶다.”
“전쟁 군주시여…….”
“하루 2시간 수면이 아니라 8시간씩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싶다.”
하지 않았다.
뉴 송파구 상층에 위치한 모르칸쉬의 휴식처, 지상에서 외유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반겨주는 개인 탁자 위 서류의 탑에 모르칸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놀고 와서 일이 쌓였으면 그래도 억울하진 않았을 거다.
군사 훈련장에서 ‘지상 진출 병력’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고, 미국에서 초대한 군사 전문가에게 수집한 정보-북한의 잔당을 사용하는 무기 정보, 중국의 개입 가능성, 북두혈통의 변수-를 바탕으로 고안한 워 게임을 고위 기사들과 함께 하는 등 일주일간 빡세게 일하고 왔다.
그런데, 돌아오니 일이 또 쌓였다.
무르굴이 살아 있을 적엔 이런 일이 없었다. 간단한 일 몇 개가 전부, 적당히 하층민 오크들을 돌아다니며 1~2시간 정도 선동해준 뒤에 서류 몇 장 처리-그것도 사실상 정보의 전달에 가까운 것 몇 개 읽으면 끝이었다. 남은 시간은 여비서와 함께 오붓하게 보내면 됐고. 참 즐거운 생활이었는데…….
“일정을 조정할까요?”
“…….”
“모르칸…….”
“아니, 아니야. 푸념한 것뿐이다. 하도 짜증 나서 말이야. 도대체 일이란 게 사라지지 않는군. 젠장, 무르굴 그 새끼가 나가는 걸 반드시 막았어야 했는데.”
여비서의 걱정스런 음성에 작게 푸념하며 모르칸쉬는 군장 차림으로 털썩 의자에 앉아서 피곤한 눈으로 서류를 훑었다. 이것도 실무자들이 줄이고 줄인 것, 실무 쪽에서 선택하기 힘들어서 올린 걸 테니 나중에 잡음이 안 나오려면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결연하게 집었지만-.
“이 새끼들은 왜 또 싸우려고 하는데…….”
“이곳에 오기 전 ‘울락 순교회’와 ‘황금 여명단’은 아프리카에서 자주 부딪쳤으니까요. 앙숙이기도 했고요.”
첫 보고서부터 짜증 난다.
유입된 오크들이 서로 쌈박질을, 그것도 하나가 멸망할 정도로 대규모로 싸우려고 한다는 첩보. 같은 세로쉬를 섬긴다고 해서 전부 사이가 좋은 게 아니다. 머릿수를 자랑하는 오크답게 세로쉬 교단은 그 종파가 많이 갈라졌고 사용하는 세로쉬의 권능들도 약간씩 다르다.
수면 부족으로 인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라는 누르며 모르칸쉬는 입을 열었다.
“두 세력 간에 정리한 보고서 좀 줘봐.”
여비서에게 요청하자 그녀는 미리 빼놓은 서류들을 재빠르게 건넨다. 다크 서클이 짙은 눈으로 보고서를 빠르게 훑으며 생각하던 모르칸쉬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펜을 들었다. 그리고, 빈 A4용지에 글을 적으며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
“이 기회에 울락 순교회를 없애도록 하지.”
“너무 과격한 거 아닌지요? 저번처럼 중재하실 줄 알았는데…….”
“종교쟁이 새끼들 하는 짓거리가 죄다 마음에 안 들지만, 이놈들은 너무 과격해. 회유하는 것도 너무 오래 걸리고 그냥 가지치기로 없애는 게 나아. 쓸 만한 인재들을 추려서 위로 보내라고 교단에 잠입한 첩보원에게 보내. 그리고, 제롬에게 보낼 보고서는 내가 작성하지.”
지친 목소리로 말하는 모르칸쉬, 그에 여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게 그녀가 모시는 전쟁 군주의 스타일이기도 했다. 결정이 떨어졌으니 어떻게 일을 전파해야 할지 그녀가 생각하는 동안, 모르칸쉬는 연거푸 서류들을 읽어나가며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중간쯤 가서 모르칸쉬가 멈칫한다. 그가 들고 있는 서류의 앞장을 보곤 뭔지 파악한 여비서는 재빨리 첨언했다.
“단절의 도시, 화요일 새벽에 벌어진 ‘이종족 지구’의 지하 폭발 보고서입니다. 그 여파로 도시 밑에서 암약하던 ‘검은 칼날단’이 그 사태로 인해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두목인 ‘스미릭’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요.”
“전멸? 하하, 좋은 소식도 있네. 쥐새끼들이 박멸됐다니……. 하지만, 스미릭이 있다면 언젠간 다시 복구될 테지. 근데, 이렇게 보고서까지 올라올 일은 아니지 않나?”
“그 폐허에서 심상찮은 흔적이 발견됐기에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그 말에 모르칸쉬는 다시 서류를 넘기며 읽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구겼다. 역시, 그냥 통보에 가까운 일인데 보고서가 두껍다고 생각했더니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끼어있다.
“지하의 폭발 폐허에서 화약과 총기류가 발견?”
“예.”
“발견된 권총의 총탄이 근래 우리 고위층 암살에 사용된 것과 똑같군.”
착 가라앉은 얼굴로 모르칸쉬는 보고서를 읽어나갔다.
그와 제롬은 같은 한통속이지만 겉으론 대립하고 있었다. 그편이 오크들의 통제가 쉬워지기에 취한 스탠스. 하지만, 근래에 들어 묘한 기류가 돌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할 만한 짓거리들이 벌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폭약과 총탄이 사용된 오크 고위급 인사들의 암살이다.
“그동안 상층에서 벌어진 암살에 쥐쟁이가 관여했을 수도 있다는 거군.”
“100%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 쥐쟁이 소굴을 쓸어버린 괴인이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뒤쪽에 이번 지하 폭발 사태의 ‘용의자’의 프로필 파일이 있습니다. 사진도 확보했어요.”
그에 모르칸쉬는 보고서를 넘겼고, 거기에 찍힌 CCTV 사진을 보며 모르칸쉬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 귀쟁이네?”
“운이 좋았습니다. 그와 마주쳤던 질서 유지관이 마침 조사대의 일원으로 파견됐거든요. 쥐쟁이 생존자가 말한 괴인의 대략적인 외형 묘사를 듣곤 바로 알아차렸죠. 체형을 확인해 본 결과 거의 확실합니다.”
그 뒤에 나와 있는 건, 어떻게 해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종족 지구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한 용의자, 뇌물을 주며 뒤앙밍크를 만나고 싶다고 하다가 쫓겨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하프 엘프’라고 밝혔다. 그걸 바탕으로 탐문하니 실제로 사고가 터지고 난 다음 날, 정체불명의 하프 엘프가 이종족 지구에 나타난 걸 확인했고 마침 호텔에 묵었기에 그 CCTV를 확인해 본 모습을 확보했다.
“귀쟁이 놈들에게 용의자에 대해 물어봤나?”
“등록되지 않은 인원이라고 합니다. 단절의 도시에 귀쟁이 피가 섞인 이들을 보내지 않았다고 하고요. 오리발을 내미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게 교섭한 이들의 사견입니다.”
“귀쟁이들이 모르는 반 귀쟁이라……. 그럼 아래에서 올라왔나?”
머릴 긁적이는 모르칸쉬, 이내 그는 보고서를 뒤적거리다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허의 잔재에 대해선 ‘강령술 계열’의 흔적이 발견, 생존자 쥐쟁이를 심문한 결과 악령까지 사역했다고 하니 강령술사에 가까움……. 그러고 보니, 이 반 귀쟁이. 정문에서 뒤앙밍크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
“네.”
“묘하구만. 무너진 건물이 뒤앙밍크의 것이야. 쥐쟁이들도 뒤앙밍크가 거주하는 건물 아래를 중심으로 똬리를 틀고 있었고……. 강령술사끼리 원한 관계인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번 기회에 뒤앙밍크, 그 새끼도 좀 죽었으면 좋겠군.”
음침하게 생긴 뒤앙밍크의 면상을 떠올리며 모르칸쉬는 얼굴을 찌푸렸다. 시체를 끌고 다니는 그 기분 나쁜 딥 드워프 새끼, 하는 짓거리를 보면 솔직히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여비서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죽일까요? 아래에 쥐쟁이 거처가 있었던 것과 이종족 지구 형성에 끼친 영향 같은 걸 보면 어떻게 쥐쟁이와 한통속이었던 걸로 엮어 넣을 수 있습니다. 정 뭣하면 요원들을 동원해서 암살할 수도 있…….”
“아니, 아니야. 그냥 해본 말이야. 뒤앙밍크는 쓸모가 많아. 역겨운 새끼라서 좀 사라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을 말한 것뿐이지.”
미궁에서라면 그냥 대가리를 깼겠지만, 지상에선 안 된다. 조직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짜증 나도 살려둬야 하는 인물이니까. 고갤 저으며 이번 사태의 ‘용의자’에 대한 자료를 다 읽은 모르칸쉬는 턱을 매만졌다.
“흠, 골치 아프군. 만만하면 한번 사로잡아서 심문해보겠는데, 직접 조우한 ‘질서 유지관’의 사견으론 불경하지만 ‘전쟁 군주의 존재감과 비견됐다.’고 평가했다라…….”
“꽤나 신빙성이 있습니다. 드라릭 경은 무르굴 휘하에 있던 오크 기사 중 하나입니다.”
“괜히 건드리면 적만 늘어나고……. 그 용의자와 마주쳤다는 이 친구 좀 불러볼 수 있나?”
그에 옆에 둔 태블릿 PC로 확인한 여비서는 고갤 끄덕였다.
“마침, 휴식을 위해 퇴근 상태입니다. 거처는 상층에 있고요. 호출했으니 30분 이내에 올 겁니다.”
“퇴근이라니 부럽구만.”
부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후, 모르칸쉬는 그 용의자에 관한 보고서는 잠시 옆에 밀어두고 다음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지시 방향을 조정하고 있는데……. 한 보고서 앞에서 멈칫했다.
“트롤피 목장 난동?”
“예, 목장에 있는 트롤들이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 인근의 오크 마을을 습격했다고 합니다. 마을 5개가 박살 났다고 합니다.”
“아니, 왜 이러는 거야. 안 그래도 오크 새끼들 때문에 머리 아픈데 트롤까지…….”
수면 부족으로 지끈거리는 머리가 한층 더 아파지는 느낌에 모르칸쉬는 주먹으로 이마를 짚었다.
‘트롤피 목장’, 무르굴이 남긴 사업 중 하나였다. 이번에 무르굴이 사라지고 그가 맡았던 일을 떠맡게 되면서 그가 담당하게 됐다. 보고서를 보니 별다른 관리·투자 없이 막대한 순이익이 들어오는 짭짤한 돈통이었는데, 그게 문제를 일으킨다니…….
“무슨 문제가 있던 거지?”
“식량, 그러니까 고기가 제때 납품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바꾸지 않고 무르굴이 남겨준 인원들 그대로 굴리고 있잖아? 분명히, 기사단도 포함시켜서 배달한 것 같았는데?”
“배달업자가 빼돌렸답니다.”
그 대답에 모르칸쉬는 한숨을 내뱉었다. 배달업자가 식량을 빼돌리다니……. 이해할 만하다. 탐욕이란 건, 주체하기 힘드니까. 꽤나 무르굴이 신경 써서 배치한 사람일 텐데도 이런 일어 벌어진다. 보고서를 넘겨가며 모르칸쉬는 고갤 끄덕였다.
“당장 그놈을 해고하고, 놈이 고길 빼돌려서 얻은 수익과 재산은 모두…….”
“참고로 배달업자가 얻은 수익은 없습니다.”
“……뭐?”
“정확히 말하면 트롤들이 고기를 가져가기 전에 먼저 오크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정보를 흘렸답니다. 뭔진 몰라도 동족이 배 곪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서 일을 저질렀다고……. 담당 수사관들이 조사해 보니 진짜였습니다.”
“…….”
“이번 일로 수사관들이 사업체를 포함해서 탈탈 털었는데, 사익은 취하지 않는 성실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객관성 유지를 위해 난쟁이 수사관들도 몇 포함됐는데, 그들의 평가도 비슷하고요.”
여비서의 대꾸, 그에 모르칸쉬는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두 배로 아파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무르굴, 아니 ‘성자’님이 거하게 날뛰어주신 덕분에 ‘성령이 충만하게 된 오크’들이 이렇게 되도 않는 짓을 대규모로 벌이고 있다.
“……너무 심하게 처벌하면 눈치가 안 좋으니 벌금 좀 물리고 다른 곳으로 배치해야겠군. 프로필 뽑아와 봐.”
“알겠습니다. 참고로 그 일은 제롬 님이 ‘빨리 처리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돈이 부족하다면서요.”
충분히 이해한다. 안 그래도 돈 들어올 구석이 별로 없는데, ‘북한 원정 준비’나 ‘유입 오크로 인한 식량 소모 증가’ 등 돈 나갈 일은 X나게 많아졌으니까. 트롤피 목장까지 엎어지면 돌아버리겠지. 진짜 엿 같다고 한숨을 푹 내쉰 후, 모르칸쉬는 여비서 겸 애인에게 푸념했다.
“미궁에 있을 때가 좋았던 것 같기도……. 그냥 딱 눈 감고 오크 히틀러 될까?”
“전쟁 군주시여.”
“알아.”
무르굴이 남겼던 유언, 그건 대충 ‘자신이 추진했던 일이 맞으니 계속 유지해라.’라는 거였다. 진짜 성자의 판단을 모른다면 ‘오크 히틀러 돼볼까?’하고 고민했겠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옳다는 걸 아는데 안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모르칸쉬가 밀린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 지 50분가량 지났을 때, 여비서는 태블릿 PC 한구석에 뜬 알람을 보곤 입을 열었다.
“부르셨던 질서 유지관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커피 좀 타주고.”
자연스럽게 여비서를 밖으로 보내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처의 문이 열리며 잔뜩 긴장한 오크 기사가 들어온다. 무장은 하지 않고 편한 일상복 차림, 전쟁 군주의 모습에 그가 잔뜩 긴장한 가운데 모르칸쉬는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티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내가 있어서 놀랐나 보군. 놀랄 만하지. 난데없이 불려 나왔는데, 강경 주의자들의 우두머리가 나왔으니…….”
“아, 아닙니다.”
“일단, 자네가 온 건 제롬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거야. 우리 둘은 대립하긴 하지만 싸울 생각은 전혀 없다네. 그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일단, 앉아. 좀 마시면서 하지.”
드라릭이 공손하게 맞은편 소파에 앉은 가운데, 여비서가 커다란 잔에 커피를 타서 왔다. 그에 전쟁 군주가 커피를 커피잔을 들어 올리고 드라릭도 조심스럽게 커피를 마셨…….
“윽?!”
“음…….”
너무 달았다.
좀 과장해서 커피가 아니라 녹인 설탕에 원두를 탄 수준, 전쟁 군주도 비슷한지 떨떠름한 얼굴로 여비서를 바라본다. 그에 비서는 찔끔하며 죄송하다는 듯이 커피를 다시 가져간다. 그사이, 모르칸쉬는 고갤 저은 후, 본격적으로 드라릭에게 입을 열었다.
“다른 건 아니고 자네가 만났다던 그 괴인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불렀네. 알다시피 ‘총과 폭약’이 연관되어서 일이 복잡하게 됐거든.”
“예.”
“그, 쥐쟁이 소굴을 몰살시킨 자의 살기를 한 번 느꼈다고 했지? 그리고 전쟁 군주와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했고?”
그 말에 드라릭은 찔끔하며 고갤 저었다.
“아, 그게 전쟁 군주님을 모욕하려고 한 게 아니…….”
“그런 걸 따지려고 부른 게 아니야. 확실한지 확인하려고 부른 거지. 미안하지만 그 살기와 내 것을 한번 비교해줄 수 있겠나?”
변호해보려는 드라릭을 향해 고갤 저으며 담담히 말하는 모르칸쉬, 그에 드라릭이 천천히 고갤 끄덕이자 그는 작정하고 살기를 내뿜었다. 그 기세에 드라릭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었다.
그가 모셨던 전쟁 군주-무르굴 님의 살기는 거대한 사자를 연상케 했다.
상대방을 짓누르는 동시에 위에서 오연하게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 그 ‘제왕의 위엄’이 서려 있는 기세에 많은 오크들이 굴복했다. 하지만, 모르칸쉬의 살기는 또 달랐다.
전쟁터의 한복판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
무르굴 같은 위엄은 없지만 어디서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무기가 날아올지 모르는 흉흉함과 음험함에 절로 신경이 사방으로 곤두섰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여비서가 커피를 가져오자 모르칸쉬는 살기를 거둬들였다.
“그래, 비교하면 어떻지?”
커피를 마시며 대답하는 모르칸쉬, 그에 드라릭은 고갤 끄덕였다.
“무르굴 님과 모르칸쉬 님의 살기와 비교해서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숙련된 전사의 기세……. 다만, 느껴지는 게 훨씬 더 악랄했습니다.”
“악랄하다?”
“예, 악마의 것과 비슷한 기세였습니다. 다만, 제가 본 상급악마의 살기보다 더.”
“그래서 임시로 ‘황금창을 든 악마’라고 불렀던 거구만?”
“네.”
그 대답에 모르칸쉬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지고, 드라릭은 조심스럽게 자신 몫의 커피를 홀짝였다. 잠시 뒤, 전쟁 군주는 한숨을 내쉬곤 일어나 서랍장으로 다가가서 작은 목함 하나를 꺼내 가져왔다.
“쉬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일 좀 시켜야겠네.”
“어떤 것을…….”
“그 괴인의 추적 및 조사.”
그 말에 드라릭의 얼굴이 굳어지는 가운데, 모르칸쉬는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좀 걸려. 굳이 적대할 필요는 없어. 권총과 폭약에 대해서 확실한 질문을 해주게.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나서고 싶지만……. 일이 너무 바빠서 못하겠군.”
“하지만, 어디에 놈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
탁자 위에서 가져온 보고서를 내밀며 모르칸쉬는 말을 이어 나갔다.
“뒤앙밍크의 주위를 조사하니 놈이 어디로 향했는지 확인했네. 뒤앙밍크가 이번에 인수한 분뇨 수거 공장을 다시 돌리려고 노력 중인데, 그 분뇨 수거 공장을 돌리기 위한 원정대에 끼어있다더군. 어제 트롤 가죽 장비를 판매하려는 한 원정대원이 돌아와서 파악한 거야.”
“…….”
“한번 가서 확인 좀 해보게. 그리고, 만약 위험해지면 이걸 쓰고.”
가져온 목함을 여는 모르칸쉬, 그 안에 있는 밋밋한 금속 팔찌의 모습에 드라릭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그건…….”
“소집의 팔찌야. 잘난 귀쟁이 마법사들도 못 만드는 귀중한 물품이지.”
소집의 팔찌, 한 쌍으로 된 물건이며 발동할 시 착용하고 있는 다른 이를 <공간 이동>으로 불러올 수 있는 장비였다. 매우 희귀하고 비싼 물품, 모르칸쉬는 보란 듯이 자신의 팔목에 찬 같은 모양의 팔찌를 보여줬다.
“한 달에 한 번, 20km 이내에 있으면 <소집>을 사용할 수 있네. 충전되면 이렇게 은빛 광택을 흘리지.”
“그럼…….”
“위험하면 이걸 사용해서 날 부르라는 거야. 당분간, 뉴 송파구 안에 있으니까.”
그에 드라릭은 침을 삼켰다. 소집의 팔찌는 유용하기도 하지만 굉장히 위험하다. 말 그대로 준비한 함정에 상대방을 빠트려 죽여 버릴 수도 있으니까. 지금, 전쟁 군주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자신에 넘겨주고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그래, 전쟁 군주급의 상대에게 기사보고 무작정 달라붙으라고 할 순 없으니까. 최소한 저항 거리는 줘야지. 무작위 텔레포트 스크롤도 하나 주겠네. 정 뭣하면 도망치고 와도 되고.”
그에 드라릭은 고갤 끄덕였다. 비록 모시는 분은 아니지만, 전쟁 군주가 이렇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데 안 할 수가 없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임무를 달성하겠습니다.”
“그럼 비서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모르칸쉬의 대꾸에 작게 고갤 끄덕이는 여비서. 그렇게 드라릭과 여비서가 밖으로 나간 후, 모르칸쉬는 보고서에 나와 있는 괴인의 몽타주를 보며 머릴 긁적였다. 근데, 왠지 누더기 후드 안에 있는 해골 투구가 좀 낯이 익어 보이는…….
“에휴, 일이나 하자.”
탁자에 쌓여 있는 보고서 더미에 모르칸쉬는 한숨을 내뱉곤 다시 비척비척 자리에 가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