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5화
49화. 기다리던(?) 사람(?)
1.
잠시 숨을 돌린 후, 우린 다시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롤들을 피해 난데없이 떨어진 미지의 장소, 나 혼자였다면 좀 난감했겠지만 다행히 영감님이 길을 안다고 했다. 내가 준 3m 에메랄드 지팡이…… 아니, 40kg짜리 기둥을 어깨에 걸친 채 영감님은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면서 난 터널을 훑어보았다.
“……이곳은 어디인가요?”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동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터널, 경사도 제멋대로에 그 구조 또한 난잡하기 그지없어서 어떤 곳은 터널이 크고 또 어떤 곳은 작았다. 게다가 터널과 터널이 연결된 교차로와 공동(空洞)이 계속 나와.
그 질문에 영감님은 계속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두더지굴이오.”
“……두더지굴?”
“가공되지 않은 뉴 송파구의 터널을 뜻하는 은어지.”
주위를 스윽 훑으면서 영감님은 말을 이어 나간다.
“지하와 지상이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뚫린 굴’이오. 무작위로 얼기설기 이어진 난잡한 공간, 보통 마을 사이를 연결한 도로가 일종의 대동맥이면 이런 두더지굴은 실핏줄이라고 볼 수 있지.”
“오호, 그렇군요.”
“하지만, 정식으로 뚫린 마을과 도로는 이런 두더지굴과 연결되어 있지 않소.”
교차로를 지나면서 영감님은 보란 듯이 손으로 한쪽 통로를 가리킨다. 도중에 막힌 통로, 하지만 자세히 보면 주위의 일반적인 벽이 아니라 자갈에 콘크리트가 섞여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벽이다. 특이한 건 아니고 5분 남짓 걸으면서 저런 걸 3~4번가량 봤지.
“저기, 저 벽처럼 콘크리트와 돌로 막아버리지. 보다시피 좀 미로 같아서 평범한 놈들은 길을 잃기에 십상이거든. 게다가 뭘 마주칠지도 모르고.”
“……잠깐만요, 그럼 우리 사실상 갇힌 거잖아요?!”
식겁하는 내 반응에 영감은 피식 웃으며 고갤 젓는다.
“갇힌 건 아니오. 개척이 많이 이뤄지지 않은 하층은 사실상 이런 두더지굴로 되어있으니까. 아래쪽으로 쭈~욱 내려간다면 자연스럽게 하층으로 빠져나갈 수 있소. 그리고, 설령 막혔다고 해도 뭔 상관이오? 그 바위를 부수는 에메랄드가 있는데?”
“아…….”
“지금 당장 저쪽 벽을 박살 내고 나가도 되긴 하지만…… 이곳 지리는 내가 빠삭하게 아오.”
영감님은 발걸음을 멈추곤 고갤 돌려 날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자기 관자놀이를 검지로 톡톡 두드린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한번 갔던 길’은 잊지 않소. 머릿속에 지도를 그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경로 자체는 몇 년이 지나도 정확히 기억하지. 좀 달라진 곳이 있긴 하다만, 4~5km 부근은 내가 전사로 한창 활동할 때 자주 활동하던 지점이거든.”
“그럼……?”
“우리 목적지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으니, 그쪽에 가서 저런 콘크리트 석벽을 박살 내고 진입하면 되오.”
역시, 자신만만해하던 이유가 있었다. 확실히, 유능한 영감님이구만. 그럼 그쪽으로 쭈욱…….
“아, 잠시만요.”
“왜 그러오?”
다시 앞으로 가려다가 돌연 어깨를 붙잡는 내 행동에 멈칫하며 돌아보는 영감님, 난 곧바로 앞쪽 교차로를 턱짓했다.
“앞 교차로에 그물과 흉기를 든 쥐쟁이 매복, 숫자는 10마리, 전사 하나에 나머지는 보통.”
“쯧, 두더지굴을 막는 이유가 이런 거요. 온갖 잡놈이 스멀스멀 나오거든.”
전방에 배치한 <눈>이 교차로 쪽에서 숨죽이고 있는 헐벗은 쥐쟁이들을 포착했다. 작게 혀를 찬 영감님이 어깨에 걸친 에메랄드 기둥을 놓고 등에 멘 방패와 허리춤의 도끼를 뽑는 가운데-.
-파파파팡!
난 먼저 움직였다.
“켁! 아파! 눈!”
“드…… 들킴!”
“손! 손이 탄다! 불-탄다!”
“마…… 마법사! 도망!”
열 개의 손가락에서 튀어나온 열 개의 <독침>이 직선 궤도로 느릿하게 움직이다가 교차로 부근에서 꺾어지며 순간적으로 가속, 대기하고 있던 쥐쟁이들의 눈알 혹은 급소에 박힌다. 그 선물에 쥐쟁이들이 질겁하지만-.
“돌격- 습격해! 죽여!”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마력 각성자 쥐쟁이가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독침>을 맞고 나뒹구는 한 놈의 대가리를 후려친다. 그에 도망칠 것 같던 나머지가 흉기를 입에 물고 네발로 발악하듯 돌격한다. 근데, 정작 그 전사 놈은 뭣하면 뒤로 내뺄 준비를 하는 것이 참…….
“우와아아아아!”
“어, 잠깐…….”
준비했던 <독숨결>을 내뱉으며 연이어 <독의 연소> 콤보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영감님이 돌연 함성을 내지르며 돌진한다. 당황해서 말리려 했는데-.
-텅!
-콰직!
생각보다 되게 잘 싸우네.
방패를 앞세운 채로 돌진, 맞은 선두의 쥐쟁이들은 볼링공에 맞은 핀처럼 튕겨 나가고 이어서 안쪽에 있던 투척 그물을 쥔 놈들에게 난입해 도끼를 휘두른다.
“찌이이익!”
-콰득!
이미 전사 놈은 어디 갔는지 없는 상황, 순식간에 서너 마리의 팔과 머리가 날아가는 광경에 쥐쟁이들이 재빠르게 도주한다. 부상당해 도망치지도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쥐쟁이들의 머리통을 발로 으깬 영감님은 방독면을 벗으며 숨을 내뱉었다.
“잘 싸우시네요.”
“후우, 고작 고만고만한 쥐쟁이인데 뭐.”
내가 다가가자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깰 으쓱인 후, 방패를 등에 메고 뒤쪽에 던져둔 에메랄드 기둥을 가지러 가시는 영감님. 그사이에 난 쥐쟁이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죽은 쥐쟁이는 5마리, 가까이서 보니 위에서 죽였던 쥐쟁이보다 확실히 더 볼품없네. 그래도-.
-우드드득! 으적! 으적!
“……?!”
-쿵!
먹을 수 있다.
박살 난 쥐쟁이의 잔해를 투구의 아가리에 쑤셔 넣자 소름끼치는 소음과 함께 투구가 버적버적 씹어 먹는다. 에메랄드 기둥을 들던 영감님이 투구의 시식 장면을 보곤 질겁하며 손에서 기둥을 떨어트린 가운데, 난 한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내 투구를 두드렸다.
“이 투구 때문에 그래요. 저주받은 장비라서 함부로 못 벗는데, 이게 ‘사람 고기’밖에 안 먹거든요.”
“…….”
“상처 때문에 좀 허기가 져서.”
“……알아서 하시구려.”
허벅지의 빠른 재생을 위해선 어쩔 수 없지. 그에 고갤 까닥인 후, 난 나머지 쥐쟁이의 시신을 투구의 아가리에 쑤셔 넣었다.
2.
적당한 도로로 빠져나온 후, 우린 정식으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상의 지도와 비교하면 송파구의 외곽 지역, 영감님의 말로는 아무도 없는 ‘폐허’라고 했다. 널찍한 공간이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생활감이 없어서 유입 오크들도 똬리를 틀지 않았다고. 근데…….
-웨애애애앵!
-웨애애애~앵!
“……오크 대신에 파리가 있네요?”
“관리가 안 돼서 그런지 생각보다 좀 심하긴 하군.”
내 타박에 어깰 으쓱이며 대꾸하는 영감님. 다가갈수록 심상찮은 소음에 ‘혹시 누군가가 살고 있나?’ 싶었는데, 그 정체를 확인하니 더 가관이다. 파리, ‘들끓는 파리 떼’가 입구에서부터 윙윙거리고 있었다. 끄응, 냄새도 진짜 하수도 같구만.
“아무튼 들어가도록 하지.”
“아니, 저기로 들어가자고요?”
“여기 공장 입구 가까이에 분뇨 처리 시설이 있소. 아마, 그것 때문에 저런 꼴일 테지. 더 안쪽의 채석장은 괜찮을 거야.”
얼굴 쪽으로 날아드는 왕파리들을 손으로 휘~ 휘~ 걷어내 태연하게 앞을 향해 걸어가는 영감님, 그에 난 얼굴을 찡그렸다.
“……하아, 잠시만요! 최소한 파리를 좀 정리하고 들어가죠.”
솔직히, 태클을 걸고 싶지만…… 내 멋대로 굴다가 트롤들에게 호되게 당한 걸 생각하니 염치가 없었다. 그냥 베테랑이 하자는 대로 해야지. 가볍게 숨을 들이켠 후, 손바닥 위에 <독숨결 구체>를 뱉어서 내던졌다. 그와 함께 구체가 터지며 먹물 같은 연기가 퍼져나간다.
-후드득, 툭, 투툭.
“편리하구만.”
“으으.”
그 연기에 닿은 파리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가운데, 우린 바닥에 깔린 파리 떼를 밟으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뒤덮인 파리 사체 사이로 보이는 시커먼 핏자국과 나뒹구는 해골들, 오래된 습격의 흔적이 공장 안쪽에 진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300~400m가량을 걷자 웬만한 마을 수준으로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꼭 지상의 채석장 같은 공간, 건물은 하나도 없고 계단식으로 네모반듯하게 돌이 깎여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파리 떼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난 영감님을 타박하지 않았다.
“시신이 있네요.”
“……사람이 살았던 것 같소. 최근에 습격당한 것 같고.”
채석장에 핏자국과 함께 파리 떼가 달라붙은 덩어리들이 드문드문 나뒹굴고 있었다.
핏자국이 아직 붉은 것을 보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그에 영감님이 짐을 내려놓고 무기를 든다. 나도 거추장스러운 건 내려놓고 허리띠로 만들어 놓은 ‘순수한 물’을 창 형태로 변환시키며 <눈>을 사방으로 배치했고…….
“이런 개……!”
천장에서 소리 없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콰앙!
곧바로 튕기듯이 옆으로 빠지고 영감님은 무작정 방패를 세웠다. 은밀하게 떨어졌던 것과는 달리 바닥에 닿는 순간, 굉음을 내며 착지하는 검은 그림자. 그 익숙한 형상에 침을 삼켰다. 이종족 지구로 들어가기 위해 기반 시설 쪽으로 들어갔을 때 만났던…….
“찌, 찌직. 찾았다……! 이 X발- 고양이 새끼!”
검은 갑주의 쥐쟁이였다.
3.
지면에 착지한 쥐쟁이 녀석은 흉흉한 말과 함께 허리를 쫘악 편다.
그와 함께 꾸부정하게 있던 체격이 꼿꼿하게 펼쳐지는데…… 기반 시설 내에서 봤을 때도 180cm는 넘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2m도 넘는다. 게다가 전신이 근육질이어서 그런지 위압감이 미쳤구만.
“하, 하하…… 우, 우리 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오해?”
쥐쟁이 언어로 말을 걸었지만 그다지 놀란 기색도 없이 고갤 갸웃하더니 이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게 달려든다. 마치, 그림자가 쫘악 늘어나는 듯한 형상!
-푸화아악!
압도적인 속도에 기겁하며 살충용으로 준비해둔 짙은 <독숨결>을 내뱉었지만, 놈의 포악한 붉은 눈동자는 타르 같은 연무를 뚫고 정확하게 날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뚫고 와서 칼날을 휘두른다.
-슈숙! 슉!! 슈슈슉!
다급하게 뒤로 빠지면서 나도 창을 휘둘렀다.
양손과 꼬리, 각각에 들린 날의 길이만 50cm는 되는 3개의 단검. 그건 마치 칼날 믹서 같았다. 아니, 차라리 믹서면 좋았을 거야. 최소한 4~5m는 되는 기다란 꼬리가 변칙적으로 육안의 사각(死角)에서 은밀하게 내 발목을 자르려고 시시때때로 날아들진 않을 테니까.
-챙!
내가 찌른 창을 놈이 단검으로 걷어낸 순간 깨달았다.
나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와 힘, <눈>을 통한 보조로 ‘정확한 판단’과 ‘정교하게’ 무기를 다뤄봤자 이건 답이 없다. 그나마 여기에 오기 전에 쥐쟁이를 먹어둬서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반응이 늦어져서 더 가까이 붙었을 테니까.
“우와아아아!”
곧바로 <광폭화>를 사용했다.
-챙! 채챙! 챙! 챙!
그에 간신히 내 움직임이 놈을 따라간다. 그래 봤자 아슬아슬하게 보조를 맞출 수준, 창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더 가까이 오는 건 막았지만, 여전히 채찍 같은 긴 꼬리에 달린 단검이 날 위협한다. 그래도 양손의 단검에 찢기는 것보단 낫지만.
“찍!”
내가 어느 정도 저항하자 놈의 몸에 있는 정체불명의 코드 108의 신성이 꿈틀거리고 그 몸이 돌연 어둡게 물든다. 이미 본 적 있는 현상이다. 이제 놈의 그림자가 실체를 가지고 꿈틀거리며 일어나 움직이겠지.
그에 난 깔끔하게 내 왼손에 착용한 ‘공간이동 반지’를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