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36화 (236/350)

제236화

4.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쥬라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닥에 착지하기 전까지 그 어떤 기척도 느낄 수 없었던 흉악한 괴물, 이어서 그것은 그를 무시한 채 미친 해골바가지를 주시하며 쥐쟁이처럼 ‘찍. 찍!’ 소리를 내더니 돌연 엄청난 속도로 맞붙기 시작했다.

그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한 공방(攻防).

미친 해골바가지는 뒤로 빠지면서 찐득한 독숨결을 뿜어내는 동시에 황금빛 창날을 속사하듯이 쏘아냈고, 정체불명의 검은 갑주의 괴물은 꼬리와 양손에 쥔 3개의 좀 어중간한 길이의 단검을 폭풍처럼 휘두르며 검은 연기를 날려버리고 창을 쳐내면서 쫓아갔다.

그렇게 불과 몇 초간의 짧지만 격렬한 부딪침이 이어진 뒤-.

“찌-이이익!”

검은 갑주의 괴인이 ‘쥐쟁이 같은 기성’을 내지르자, 그 몸이 검은 일렁임으로 뒤덮이며 ‘똑같은 외형의 검은 형상’이 미친 해골바가지의 등 뒤에 생긴다. 그렇게 앞과 뒤를 포위하는 순간, 검은 갑주의 괴인은 방어 따윈 신경 쓰지 않고 회전한다.

-스가가가각!

-스가가각!

그 흉악한 소음을 내는 검은 돌개바람 2개가 맞부딪쳤을 때, 쥬라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고-.

“찍! 찌지지직!”

-팍! 팍!

쇳소리 같은, 하지만 동시에 쥐쟁이의 찍찍거림 같은 노성(怒聲)에 두 눈을 떴다.

보이는 건 ‘검은 괴인’과 그를 흉내 낸 ‘검은 형상’뿐, 미친 해골바가지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분하다는 듯이 소리치며 발로 바닥을 구르는 걸 보면 도망친 것 같았다.

-스르륵…….

그렇게 잠깐 괴인이 분노에 몸을 떤 후, ‘일렁이는 검은 형상’이 무너지며 천이 바닥에 쓸리는 듯한 소음과 함께 검은 갑주의 괴인 발밑으로 빨려 들어가서 그림자를 만든다. 그 광경에 쥬라카는 그제야 괴인의 ‘그림자’가 없었단 걸 눈치챘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없었다!

“……꿀꺽.”

쥬라카가 침을 삼키는 가운데, 등만 보이던 검은 갑주의 괴인이 그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린다.

2m는 넘을 것 같은 체격, 범상찮은 검은 갑주, 꽉 찬 근육, 투구 속 빛이 번쩍번쩍하는 것 같은 붉은 눈, 쥐를 닮은 뾰족한 주둥이, 섬뜩한 이빨, 4~5m는 넘을 것 같은 긴 꼬리…….

쥐쟁이.

지난 평생 봤었던 ‘비루하고 비천한 쥐새끼’가 아닌, 고위 기사도 가뿐하게 회 쳐버릴 듯한 무지막지한 괴물이긴 하지만 분명히 쥐쟁이다. 뜨거운 김과 같은 하얀 숨결을 내뱉는 그 흉악한 모습에 쥬라카는 문득 작년경에 들었던 한 소문을 떠올렸다.

‘단절의 도시 지하에 있는 쥐쟁이에게 오크 정규군이 패배했다.’라는 소문.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던 건 확실했었다. 지하 청소에 투입됐던 수많은 전사들과 기사들, 심지어 전쟁 군주의 최측근이라는 ‘고위 기사’까지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그저 ‘소문’일 뿐이었다. 일을 끝마치고 운전기사들끼리 술자리에서 떠드는 가십거리…….

“……!!”

상식을 무시하는 존재의 등장에 쥬라카가 반쯤 넋이 나간 사이, 그 거대한 쥐쟁이의 몸이 돌연 그림자 속에 쑤욱 잠겨든다. 그와 함께 쥬라카는 돌연 등 뒤에서 한기를 느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뒤앙밍크의 졸개 옷, 동족의 피 냄새와 오크 냄새…….”

어느새 목을 겨누고 있는 서늘한 은빛 칼날,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는 ‘찍-찍!’거리는 것 같은 불쾌한 오크어…… 쥬라카가 딱딱하게 굳은 가운데, 꼬리가 쥐고 있는 녹색 칼날이 오른손의 팔뚝으로 슬며시 향한다.

“너어, 뒤앙밍크의 노예 맞~지?”

“그, 그렇습니다!”

노예라는 수치스러운 말, 하지만 목숨 앞에서 ‘고작 그런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말을 더듬으며 대꾸하자 증명해보라는 듯이 꼬리가 쥔 단검이 톡톡 팔뚝을 두드리고, 쥬라카는 조심스럽게 들고 있는 무기와 방패를 놓고 오른손의 건틀릿을 벗었다.

“흐음, 역시 뒤앙밍크가 보낸 오크-졸개구나.”

드러난 수치스러운 시커먼 낙인, 그에 목을 겨눈 은빛 칼날이 거둬진다. 뭔진 몰라도 죽이지는 않을 것 같은 행동에 쥬라카가 잠시 방심했을 때-.

-스칵! 툭!

“근데, 왜 그 ‘인간’이랑 같이 행동했지?”

붉은 렌즈의 방독면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졌고 쥐쟁이의 왼손에 쥔 보랏빛 칼날의 단검이 그의 눈을 찌를 것처럼 앞에 있었다. 그와 함께 전신을 압박하는 서늘한 살기, 설령 기사라 할지라도 제정신을 못 차릴 완급 조절이 된 위협이었지만-.

생존본능이 뛰어난 쥬라카의 머릿속은 오히려 팽팽 돌아갔다.

자신을 바로 죽이지 않고 뒤앙밍크를 언급하며 잠깐 풀어준 걸 보아하니 뒤앙밍크와 ‘우호적인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반면에 미친 해골바가지와는…… ‘원한’이 있는 것 같고. 불과 어제 만난 사이지만, 그 미친 새끼의 행동을 보건대 이 괴물 같은 쥐쟁이를 도발하고도 남는다.

그 생존본능에 따라서 쥬라카는 순식간에 자기가 취해야 할 태도를 정했다.

“그, 급작스럽게 동행하게 된 사이입니다!”

“동행!?”

“예, 아래쪽에 가게 되면서 만나게 됐는데…….”

만나게 된 정황에 대해서 쥬라카는 적당히 각색해서 들려줬다. 다분히 어쩔 수 없었단 부분을 강조해서. 다행히,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음에도 이 거대한 쥐쟁이는 목소리나 몸의 떨림을 통해 반응을 읽기 쉬웠고 쥬라카는 즉각즉각 그 비위를 맞출 수 있었다.

“찍! 그러니까 너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네, 돌연 나타나서 원정대를 구해줬으니까요. 게다가 뒤앙…… 아니, 주인님이 말해주신 말, ‘이 공장에 미리 도착한 사람’에 대해서도 언급했고요. 그게 자신이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요.”

“잠깐, 뒤앙밍크가 그 말을 언제 했지?!”

“그…… 어제 새벽입니다. 분뇨 수거차를 보내기에 앞서서 제가 당부했습니다. 운전기사 출신에 나름 유일한 전사라서 인솔자를 맡았거든요.”

그에 쥐쟁이는 뭔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찍! 찍!’거리더니 칼을 거두고 미친 해골바가지가 던져놨던 짐으로 향한다. 거두어진 위협에 쥬라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주인님께서 이곳에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을 사람의 지시를 따르라고 했는데…….”

“찍, 찌직! 그래, 그게 나다! 그 해골바가지가 아니라!”

“어, 어쩐지. 좀 이상했습니다. 마을을 습격한 트롤 거주지를 방문하자고 하는 것 하며…….”

경악을 숨기며 쥬라카는 허겁지겁 고갤 끄덕였다. 이 끔찍한 쥐쟁이는 역시 뒤앙밍크와 연관이 있었다. 만약, 이 사실을 오크 정부에 알린다면…….

아니, 생각해보니 소용없다.

뒤앙밍크는 오크 고위층과의 인맥 또한 탄탄하기로 유명하다.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라지만 수많은 오크들이 ‘죽음의 빚’에 쫓겨 고문당하다가 죽고, 심지어는 시체로 되살아나는데도 간섭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이 사실을 증명할 증거도 없고.

그사이, 그 괴물 쥐쟁이는 해골바가지가 가지고 다니던 짐을 풀었다.

-후두두둑…….

“흐음~”

심상치 않은 붉은 광채가 흘러나오는 투명한 양손 도끼, 두둑하게 쌓인 지상의 돈-현찰 다발, 각종 마법적인 물약과 식량, 그리고 스마트 폰까지. 쥐쟁이가 그 짐을 들어 올리며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가운데, 쥬라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글쎄~”

꺼낸 내용물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대꾸하는 쥐쟁이, 이내 그것은 모가지만 180도 돌려 쥬라카를 바라보며 웃는다.

“네 말을 들어보니 뒤앙밍크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진 않는 듯하군. 그렇지?”

“그, 그렇습니다! 유입 오크들은 아직 화장실에 대해서 중요치 않게 생각합니다. 설령 분뇨 같은 게 넘치더라도요!”

“쮝! 쮝! 맞아, 맞아! 놈들은 똥·오줌 같은 거 신경 안 써! 그래-그래! 게다가…….”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일어선 그 거대 쥐쟁이가 한쪽으로 다가갔다. 파리가 잔뜩 달라붙어 있는 덩어리, 잡고 들어 올리자 파리가 흩어지며 드러난 건 붉은 피가 주르륵 흐르는 옷으로 만든 천 자루였다.

“내가 와보니까 아주 ‘발칙한 불청객’도 있더라고?”

보란 듯이 자루를 던지는 쥐쟁이, 그에 안쪽에서 파리가 ‘웽~웽~’거리는 허연 눈깔의 드워프 머리통 3개가 데구루루 굴러 나온다.

“여기 와서 보니까 문제가 많아. 그래-그래! 폐허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놈들이 숨어 있었지! 아직도 몇 놈이 숨어 있어!”

“그, 그렇습니까?”

“그래, 왠지 모르게 공간 자체에 트롤 똥냄새가 진동을 하고 자기 체취는 흙냄새로 철저히 가려서 찾기 힘들지만 말이지…….”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쥐쟁이는 쥬라카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 기묘한 위압감에 그가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가운데, 쥐쟁이는 살짝 머릴 숙이며 속삭인다.

“내가 너에게 시킬 일은 아주 간단해. 저 대가리를 들고 가서 뒤앙밍크에게 이곳 상황을 전해. 그거면 됐어.”

“제, 제가 말입니까?”

“그래, 목숨줄을 틀어잡힌 너는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 그놈은 아주~아주 의심이 많거든! 쮝! 쮝! 선량-착한 나로서는 참 슬픈 일이야.”

선량? 착한?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지만 쥬라카는 일단 고갤 끄덕였다.

솔직히, 내려오면서 본 꼬라지를 보니 다시 올라갈 자신이 없지만…… 저 괴물 쥐쟁이에게 못하겠다고 하면 죽을 것 같았다. 그에 쥐쟁이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갤 주억이며 어깰 툭툭 두드린 후, 그에게 관심을 끈 듯이 다시 짐 앞으로 가서 쪼그려 앉는다.

“후우…….”

그 모습에 쥬라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크게 숨을 내뱉었다.

한시름 놨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온갖 잡생각이 들었다. 고작 분뇨에 돌가루를 섞고 썩혀서 흙을 만드는 공장일 뿐인데, 왜 저런 괴물이 있는 것일까? 돌아가지 않아서 이윤도 못 낼 텐데? 저 목이 잘린 난쟁이는 왜 여기에 있었고? 미친 해골바가지는 어디로 튀었지? 시체박이 난쟁이 새끼는 도대체 왜…….

-웨에에에엥~!

“젠장, 빚이 웬수지…….”

점점 복잡해지려는 생각을 접으며 쥬라카는 손을 휘저으며 얼굴에 달라붙는 파릴 쫓아냈다.

불과 이틀? 사이에 미친 짓이 너무 많이 벌어졌다. 세로쉬의 선택을 받은 오크 약탈자에 미친 해골 대가리, 날뛰는 트롤 새끼들, 그리고 저 괴물 쥐쟁이까지…… 한숨을 쉬며 그는 드워프 대가리가 든 주머니를 주섬주섬 담았고-.

그를 향해 붉은 눈을 번들거리며 소름 끼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5.

공간이동 반지.

<눈>의 감정에 따르면 반지의 <공간이동>은 반경 500m 이내, 중력이 작용하는 바닥에서 5m 안쪽의 무작위 공간의 기체와 치환되며 날아간다. 그 괴물 쥐쟁이가 내 등 뒤에 자신의 그림자를 소환해 움직이는 순간, 난 곧바로 망설임 없이 반지를 썼고-

-철퍽!

-웨에에에엥!

“…….”

분뇨 구덩이 위, 진동하는 파리 떼에 처박혔다.

<독숨결>로 한번 훑었는데도 또 맹렬하게 날뛰고 있는 파리들. 그 소음과 질척한 촉감, 그리고 악취까지. 순간, ‘피곤해 죽겠는데 도대체 내가 왜 이딴 짓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현타가 밀려든다. ……그래, 난 지금 혜영이에게 내 목에 걸린 폭탄을 넘기러 가는 중이었지.

그냥 올라가서 싸장님에게 혜영이 찾아달라고 할…….

“하아.”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며 <투명화>를 사용해 모습을 숨기고 신진대사를 마력으로 대체했다.

이곳에 내려오기 전, 서예린에게 배웠던 기척을 죽이는 방법. 가르쳐주면서도 항상 강조했었지. ‘자기보다 강한 놈은 널렸고 그런 놈에게서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라고. 그 말이 지금 진짜 절실하게 느껴지는구만.

<눈>의 기능을 최대한 강화했다.

그와 함께 난잡하게 밀려들어 오는 정보, 정보의 분류가 이뤄지면서 관자놀이에 얼음송곳이 박히는 것 같은 짜릿함이 밀려든다. 아직 안전한 게 아니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난 뒤에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하는데…….

“……?”

왜 드워프가 여기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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