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드워프 한 명이 분뇨 더미 속에 엎드려서 숨을 죽인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공간 이동>으로 나타난 게 놀라운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드워프. 매복한 적이라고 보기엔…… 검댕 묻은 멜빵바지에 고글을 보면 인부에 가깝다. 뭔지 몰라도 그 괴물 쥐쟁이를 피해 숨은 것 같구만. 딱히, 간섭할 이유는 없기에 무시하고 움직이려는데-.
“이…… 이봐! 기다려! 아니, [도움!]”
한국어로 다급하게 도움을 낮게 외치고, 일어나서 짧은 다리를 놀리며 다가온다. 그에 난 <투명화>를 풀며 창을 들이밀었다.
“오지 마세요.”
“우, 우리말?! 오, 제기랄! 감사합니다!”
내 말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드워프는 애원하듯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작은 목소리로-하지만 절박하게 외쳤다.
“그, 나타난 걸 보니까 공간 계열 마법을 쓸 줄 아는 것 같은데…… 나 좀 살려주시오! 여, 여기에 미친 괴물 쥐쟁이가 있어! 그놈에게서 벗어나게 해주면 내 사례하겠소!”
“죄송합니다만 전 <공간 마법> 쓸 줄 몰라요.”
“그럼 혹시 공간 이동 계열의 도구를 지니고 있소?”
속사포처럼 말하는 드워프 양반, 다급한 건 이해하는데 이제 마지막 한 번만 쓸 수 있는 공간 이동 반지를 생판 남에게 줄 순 없지.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난 고갤 저었다.
“방금 나타난 건, 일회용 탈출 도구였고 더 이상 없어요. 직접 벗어나야 하기에 전 이만…….”
“나…… 나도 같이 갑시다! 분명, 도움이 될 거요!”
“조용히!”
언성이 높아지려 하기에 살짝 살기를 흘리며 창을 내밀자 드워프는 ‘흡!’하며 자기의 입을 막는다. 지금 내 실력으론 감당하기 힘든 괴물 쥐쟁이가 어슬렁대고 있는 상황, 당장 런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혹까지 더 붙일 순 없다.
무시하고 그냥 가려고 했는데…….
“나, 난 길을 잘 아오!”
“……길이요?”
“그렇소, 여기엔 샛길이 있소! 비밀 공간도 여럿 있고! 난 그걸 아오! 게다가 마법사이기도 하니 분명 도움이 될 거요!”
살짝 고민된다.
길잡이인 쥬라카 영감과 짐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상황, 게다가 버린 짐에는 ‘진동의 에메랄드’도 함께 포함되어 있어. 어찌어찌 이곳은 벗어난다고 해도 움직이는 것은 힘들어. 영감처럼 샛길을 안다면…… 대단히 도움 될 거다.
“하아, 좋아요. 은밀하게 움직일 방법 있어요?”
“나름 조심스럽게 움직일 줄 아오! 이곳에서 3일이나 숨어 있었으니 확실하지!”
호언장담하며 오물 속을 헤쳐 나오는 드워프, 하지만 그다지 행동이 은밀하진 않다. 게다가 눈깔도 조급함에 충혈된 게 좀 불안한데…… 에이, X발, 정 뭣하면 반지로 한 번 더 도망치면 되니까.
“좋아요. 함께 움직이죠. 괴물 쥐쟁이는 지금 채석장 쪽에 있을 거예요. 그쪽 방향 말고 통로나 쉴 만한 곳이 있습니까?”
“채석장에 있을 거라고? 화, 확실하오?”
“네, 조금 전에 놈과 싸웠거든요. 그러다가 힘에 부쳐서 도망친 거고.”
“그, 그럼…… 이쪽으로.”
내 말에 갈등하던 드워프는 황급히 고갤 끄덕이곤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면서 난 주위를 훑었다.
“그나저나 이곳은 어디죠?”
분뇨 더미 위에 있어서 몰랐는데, 여긴 공장의 입구가 아니었다. 그 질문에 드워프는 떨리는 눈을 뒤룩뒤룩 굴려 가며 말을 이어 나간다.
“분뇨를 썩히는 공간이라고 하오.”
“분뇨를 썩히는 공간?”
“그렇소. 로세툼을 섬기는 귀쟁이들이 ‘부패의 권능’을 이용해서 분뇨를 퇴비로 만드는 곳이라더군.”
“흠, 입구 근처에 오물이 쌓여있어서 그쪽에서 썩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그, 그건 우리가 일부러 쏟아놓은 거요! 뭔진 몰라도 여기에 지독한 냄새의 분뇨가 쏟아지는 하수도가 연결되어 있는데…….”
“……일부러 쌓아둬요?”
우리? 그리고 일부러 쌓아둬? 내 지적에 드워프는 움찔하더니 허둥지둥 변명하듯이 말을 쏟아낸다.
“그, 침입자를 막기 위해 쌓아둔 거요! 알겠지만 유입 오크들이 엄청 난폭해서 사람도 막 죽이지 않소?! 우린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미처 대피하지 못해서 여기에 갇혀 있으니 이렇게라도 보호하는 거지. 그 파리 떼를 뚫고 들어올 인간이 어디 있겠소?”
“그렇군요.”
좀 수상한데…… 게다가 좀 초췌한 꼴이지만 조난했다고 보기엔 너무 건강하고. 이 정체불명의 생존자에 대해 의심이 더 깊어지는 동안, 드워프는 벽 한쪽에 있는 커다란 철문 쪽에 다가가더니 조심스럽게 연다.
-끼이이익…….
지상의 밝기에 따라 ‘광원을 알 수 없는 빛’이 뒤덮는 지하, 하지만 철문의 안쪽은 짙은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눈>으로 보건대, 쥐쟁이의 몸에서 꿈틀거리던 ‘코드 108’과 똑같은 종류의 힘이 안쪽에서 맴돌면서 주위의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 부자연스러운 어둠에 드워프가 움찔하고-.
“브, 브론카! X발, 역시…….”
입구 근처에 있는 찢겨서 흩어진 살점과 피 묻은 옷 쪼가리를 보곤 덜덜 떨기 시작한다. <눈>을 움직이며 주위를 훑어보니 함정들이 좀 깔렸다. 하지만, 그 괴물 쥐쟁이는 없다.
“빨리 가죠.”
“위, 위험해 보이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겠소! 다른 곳으로…….”
서둘러 철문을 닫으려고 하는 드워프, 그에 재빨리 창을 뻗어 문틈 사이에 끼워 넣었다.
“지랄하지 말고 앞으로 가세요.”
“진짜란 말이오! 그, 검은 쥐쟁이는 어둠을 몰고 다녔소! 게다가 여기는 채석장 쪽과 연결된 곳이오! 놈이 여기로 이동했을 수도 있어! 좀 무리하더라도 입구 쪽으로 가는…… 윽!”
“쉬잇……! 여기, 그냥, 갑니다. 지금 저 안은 안전해요.”
이어서 창날을 날카롭게 세워서 등을 찔렀다. 적이 없다는 게 확실한데 괜한 모험을 할 수는 없지. 그에 드워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상을 짓더니 속삭인다.
“제, 젠장…… 도망치려던 내 친구가 이쪽으로 가다가 저렇게 됐는데…….”
“시간 끌다가 괴물 쥐쟁이가 올 수도 있어요.”
“아, 알았소! 그럼 작지만 빛이라도…….”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마법을 사용하려 하는 드워프, 그에 재빨리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냥 들어갑니다.”
“아니…….”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 빛을 살라 먹는 ‘신의 힘’이 맴도는 공간이에요. 왠지 빛을 쬐게 하면 안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저 코드 108은 빛을 살라 먹고 있었다. 사용하려는 마법을 보건대, 별 효과도 없을뿐더러 왠지 빛을 내는 게 안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런 내 말에 드워프는 멈칫하더니-.
“젠장.”
최대한 두 눈을 부릅뜨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보아하니 이곳은 일종의 창고+기반 시설. 천장엔 정체를 알 수 없는 파이프가 줄줄이 연결되어 있고, 중심엔 깔때기 모양의 뭔가 섞는 용도인 것 같은 기계가 있는데 죄다 성치 않다. 그리고, 곳곳에 얼마 되지 않은 살육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잠깐만요.”
“……?”
“바닥에 함정이 있어서.”
바닥에 흩뿌려진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 창을 움직여 그 위에 뿌려져 있는 검은색의 뼛조각들을 옆으로 쓸어버렸다.
고통의 마름쇠 (Caltrop of Pain)
고블린의 뼈로 가공된 작은 마름쇠, 내구성이 약하기에 튼튼한 신발만 신어도 살을 뚫지 못하고 부서진다. 하지만 부서지는 순간, 그 안에 있는 주술적인 저주에 의해 다치지 않더라도 못에 꿰뚫리는 것 같은 통증과 미약한 마비를 유발한다.
·발동 효과 : 밟은 대상에게 통증 유발
마법적인 효과가 있는 마름쇠, 멋모르고 이 어둠 속에서 밟는다면 기겁했겠지. 허릴 숙여 마름쇠 몇 개를 집어 든 후, 보란 듯이 한 번 들이밀었다.
“함정이 있어요.”
“지, 진짜군. 눈치채기 힘든 미약한 마력…… 보니까 강령술과 주술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부수면 고통을 가하는 종류에요. 아마 밟았다가 비명을 지르면 쥐쟁이가 듣고 찾아왔겠죠.”
“그, 그래! 그러고 보니 들어갔었던 녀석이 비명을 질렀었지……!”
떨리는 눈으로 고갤 끄덕이는 드워프, 이젠 텅 빈 로브 안쪽 주머니에 마름쇠들을 집어넣으며 난 턱짓했다.
“아무튼 이런 건 제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으니 천천히 움직이세요.”
“아, 알겠소!”
한 번 고비를 넘기자 좀 믿음이 가는 듯, 드워프의 표정이 훨씬 나아졌다.
그렇게 드워프는 천천히 움직이고 난 그 앞을 가로막는 함정을 해체했다. 엘프의 머리칼로 만들어졌다는 날카로운 마법 와이어, 근처 철골 구조물을 즉석에서 잘라내서 만든 것 같은 분뇨가 발린 쇠말뚝…….
“아니, 미친…….”
심지어 수류탄 부비트랩까지 있었다.
표면에 ‘K413 세열수류탄’하고 로트번호까지 인쇄됐네. 생각해보면 단절의 도시에서도 쥐쟁이가 폭약을 사용했었지? 도대체 이런 걸 어디서 구하는 거냐…… <눈>을 최대한 활성화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마력만 대충 감지하고 갔다간 뒤졌겠네.
“왜 그러시오?”
“아니, 아니에요. 기다려요.”
어쨌든 간에 함정을 해체하고 수류탄도 습득했다. 그렇게 간간이 깔린 부비트랩을 지나 도착한 곳은 구석에 낮게 쌓인 흙 포대였다. 드워프가 조심스럽게 그 흙 포대를 옆으로 치우자 울퉁불퉁한 암석 벽이 드러난다.
“후우, 여기요.”
하지만, 그 밑바닥 안쪽엔 드워프 하나가 기어서 지나갈 정도의 굴이 뻥 뚫려있다. <눈>으로 보니 두더지굴과 연결되어 있네. 드워프가 밑바닥의 튀어나온 울퉁불퉁한 부분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뽑아내자 ‘그그그극!’하는 소음과 함께 바윗덩이 속의 통로가 드러난다.
“따라붙으시오. 그리고, 보다시피 바위 뚜껑 뒤에 고리가 있으니 붙잡고 닫아놓고.”
“예.”
드워프가 앞장서서 들어가고 나도 그를 뒤따랐다. 그렇게 10m가량 열심히 기어가서 반대쪽 뚜껑을 열고 두더지굴로 나왔다. 개구멍에서 빠져나오자 ‘살았다!’라는 듯이 축 바닥에 늘어지는 드워프,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기에 난 가볍게 지팡이로 그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직 다 도망친 거 아니에요. 킁킁, 어흐. 그나저나 몸에 묻은 것부터 좀 처리해야겠는데요? 뭔진 몰라도 냄새가 지독하네.”
“……그, 그렇소! 쥐쟁이는 냄새를 잘 맡아! 그놈이 냄새를 맡고 따라올지도 모르오! 제, 제기랄! 몸을 먼저 씻었어야 했는데.”
“근처에 물 나오는 곳 없어요?”
“분뇨 수거장에 암반수가 나오는 곳이 있었소…… 제기랄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잊어먹고 있었어.”
오물투성이인 채로 얼굴을 쥐어뜯으며 자책하는 드워프, 안타깝게도 여기선 몸을 씻는 방법은 없는 것 같구만. 그럼 답은 하나밖에 없네.
“일단, 최대한 멀리 벗어나죠.”
6.
괴물 쥐쟁이를 피해 우린 두더지굴을 따라 움직였다.
그냥 말없이 가기도 좀 그렇기에 구해낸 드워프랑 정식으로 통성명을 나눴다. 가론 혈족의 카리드, ‘가론 카리드’가 이 드워프 양반의 이름이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길을 모른다고요?”
“당연한 거 아니요? 전문 길잡이도 아니고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아니, 길을 안다면서요?”
이 드워프, 길을 몰랐다. 처음엔 자신감 있게 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멈칫하더니 고민하기에 물어봤는데 이런 답변이 나온다. 내 황당하다는 반응에 드워프도 황당하단 반응이다.
“그 덕분에 공장에서 빠져나왔잖소?”
“네??”
“내가 길을 알고 있단 건, 공장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건데…… 설마, 길잡이로 착각한 거요?”
그 대꾸에 내 투구의 이마를 ‘탁!’ 쳤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그렇게 좌절하는 내 반응에 드워프는 살짝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아예 모르는 건 아니오. 길잡이를 따라서 공장과 단절의 도시를 두 번 왔다 갔다 했으니 최대한 길을 더듬어 보겠소.”
“두 번이나 왔다 갔어요?! 조난자라면서요!?”
“어? 그, 그게…….”
하도 황당해서 물어보니 찔끔하며 허둥지둥하는 드워프, 그 모습을 보니 오히려 더 의구심이 든다. 지금 본 것만 하더라도 이상하기 그지없다. 폐허인 곳에 드워프가 숨어들었다? 게다가 무지막지한 실력자인 괴물 쥐쟁이까지 있다? 이건, 말이 안 돼!
그런 내 짜증 난 기색에 드워프는 망설이다가 한숨을 푹 내뱉는다.
“하아, 그래. 말해줘도 될 것 같군. 어차피 다 망한 것 같으니까. 금 때문이요.”
“금?”
뭔 소리지? 그런 내 의문을 읽은 건지 드워프는 입고 있는 멜빵바지 앞주머니에서 손가락 크기의 작은 덩어리를 꺼냈다. 갈색 오물이 묻어서 더럽긴 했지만…… 그건 분명 ‘황금’이었다. 내가 그 조각을 황망하게 바라보자 드워프는 고갤 끄덕였다.
“금맥, 아주 굵직한 금맥(金脈)이 그 쓰레기 공장 안에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