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꿈에서 꿨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 근접전으로 맞서면 결국엔 <광폭화>를 쓸 수밖에 없기에 난 재빠르게 <눈>으로 주위의 건물 구조를 확인하며 뒤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놈이 칼을 휘두르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 한 블록 건너에 있었다.
“스읍……! 푸화아아악!”
나를 따라서 골목길로 진입하는 쥐쟁이, 어느새 가까워진 놈을 향해 타르 같은 질감의 <독숨결>을 내뱉는 동시에 가볍게 견제하듯이 창을 찔렀다. 이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연막 속에서 찔러오는 내 공격을 쳐내며 ‘그림자 분신’을 만들어내려 하지만-.
난, 통하지 않는 수단을 또 쓸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다.
“찌-찌직!?”
내 창을 막다가 돌연 고통 섞인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쥐쟁이는 움찔하듯이 뒤로 빠진다. 그런 놈의 발밑에는 검은색 뼛조각이 바스러져 있었다. ‘고통의 마름쇠’. 도망치면서 회수해뒀던 놈의 장난감이다. <독숨결>을 뱉으면서 로브 안쪽 주머니에 넣어뒀던 물품을 꺼내 흩뿌렸지.
“이…… 고양이 같은 인간이!”
날카로운 기성을 토해내며 쫓아오는 녀석, 하지만 이쪽도 좀 여유가 생겼다. 놈이 물러선 걸 확인하자마자 로브 안주머니에서 꺼낸 ‘영혼의 영액’, 두더지굴에서 죽인 쥐쟁이를 가공한 5개의 영액을 손바닥 안에서 <연금술>로 용해시키며 크게 흡입했다.
이어서 ‘검은 독기의 망령’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끼아아아아으으아앍!
뭉클거리는 독기 덩어리가 악령의 형상으로 변하며 괴물 쥐쟁이를 향해 달려든다. 옆으로 피할 수도 없는 일직선 통로, 괴성을 지르며 정면에서 달려오는 내 분신 한 마리에 쥐쟁이는 짜증난다는 듯이 골목길 옆의 건물 벽을 밟으며 위로 솟구쳤다.
-캬, 캬캬캬!
그런 쥐쟁이를 낚아채려는 것처럼 튀어 오르는 내 분신을 보면서 <독의 연소> 주문을 외웠다. 안쪽에서부터 불길이 일렁이며 달아오르는 망령의 모습에 쥐쟁이는 신의 권능을 끌어모으더니 ‘펑!’하는 검은 연막을 남기며 근처 오크의 그림자 속으로 단숨에 ‘도약’한다.
“젠장……!”
-콰-앙!
그리고, 반 박자 느리게 망령이 폭발했다.
수류탄이나 크레모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폭발력, 그 충격에 골목길 양옆의 허술한 단층 건물들이 박살 나서 산산조각 흩어진다. 망령이 터지기 직전, 골목길 코너를 돌아서 폭발에 정통으로 휘말리는 건 피했지만-.
-챙! 챙! 채채챙!
쉴 틈은 없다.
쥐쟁이가 도약 대상으로 택한 오크는 내가 도주하던 방향에 있던 놈, 곧바로 녀석은 오크의 모가지를 날려버리곤 내 쪽으로 따라붙었다. 그에 어쩔 수 없이 <광폭화>를 사용해 몸을 가속시켜 채찍처럼 날아오는 칼날을 쳐내고 반격했다.
“끼아아아악!”
“찌익-!”
빠르게 뒤로 빠지면서 창을 찌르고 쥐쟁이도 기성을 터트리며 칼날을 휘두른다.
겉으로 보면 막상막하처럼 보이는 상황, 하지만 <광폭화>가 끝나고 탈진 상태가 되는 순간 이쪽의 패배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 <광폭화>가 끝나기 전에 판을 뒤덮을 변수를 만들어야 한다. 항상 지기만 했던 내 자각몽에선 없었던 ‘변수’를. 하지만, 어떻게?
……도구를 사용한다?
나쁘지 않다. 꿈속에서의 나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쥐쟁이와 부딪쳤으니까. 실제로 마름쇠를 사용해서 잠깐이지만 숨을 돌릴 수 있었고. 일단, 지금 내 품 속에 남아있는 건…… ‘수류탄’과 ‘엘프 머리칼 와이어’, ‘용숨결 물약’과 ‘액상 도핑’이 든 전자 담배 앰플 4가지.
수류탄 빼고는 죄다 애매하네.
머리칼 와이어? 설치할 틈 없어. 용숨결 물약과 도핑제? ‘영혼의 영액’과는 달리 물질적인 것이기에 투구가 아예 섭취하는 걸 막는다. 목구멍에 상처 내고 들이붓기에도 급박해. 또 다른 변수를 만들 만한 것이…….
-뭐, 뭐야! 폭발?
-적습이다! 나와! 나와!
곳곳에서 들리는 오크들의 목소리, 내 분신을 <독의 연소>로 터트리면서 생긴 폭발에 다 깨어난 듯싶었다.
오크? 이것도 변수라면 변수긴 한데, 내게 유리한 것일까? 도움을 요청해? 가능할 리가 없지. 설령, 도와준다 하더라도 수준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사실상 쓸모가 없을…… 아니, 쓸모가 있네?
-푸화아아아악!
“찍!”
곧바로 <소환 : 검은 독기의 망령>의 룬문자를 만들어내며 폐 안에 고여 있는 4개의 영체들을 싹 한 번에 토해냈다. 무기를 맞대고 있던 상태에서 내 아가리에서 쏟아지는 망령들의 모습에 쥐쟁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빠르게 뒤로 빠지는 가운데-.
“우웁……!”
이를 악물며 올라오는 피를 삼키며 왼손으로 로브 안주머니에 넣어둔 수류탄의 안전핀을 깠다.
<광폭화> 상태에서 마법을 사용한 부작용, 트롤에게서 도망칠 때 이미 한 번 겪어봤지만 반동이 아주 강하다. 통증도 꽤 심각하지만 무엇보다 <광폭화>의 기운이 빠르게 흩어지며 근육에 힘이 풀리기 시작해. 하지만, 쥐쟁이는 내가 지금 병신이란 걸 모르지.
-주…… 주겨!
-쥐! 쥐! 쥐를 잡아!
코앞에 있는 생명체-괴물 쥐쟁이를 눈이 돌아간 채로 쫓는 망령들. 하지만, 전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독의 연소>의 폭발 위험 때문에 쥐쟁이가 조심스럽게 대처하는 중, 별다른 상처를 입히지도 못했고 반면에 쥐쟁이가 휘두른 칼날 한 번에 베이면 기세가 팍 수그러진다.
깝치다가 허무하게 망령들이 찢겨지기 전에 명령을 내렸다.
살육에 미쳐 제멋대로 날뛰는 것들, 내가 명령한다고 해서 듣는 놈들이 아니지만 ‘살육을 더 부추기는 방향’으로 지시한다면 어느 정돈 듣는다. 그렇게 느슨하게 연결된 심령으로 지시와 단편적인 시각 정보를 보내자…….
-캬하하하학!
-죽여! 죽여! 독기에 범벅!
-캬아아아악! 오크! 오크! 오크!
-히히히히!
놈들은 쥐쟁이를 무시하고 최대한 <독구름>을 흩뿌리며 주위에 있는 오크를 죽이기 위해 흩어진다.
서로 경로가 겹치지 않도록 방향 또한 제대로 정해줬다. 타르 같은 검은 독기를 흩날리며 십자 모양으로 뻗어나가는 녀석들, 소독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연무를 흩뿌리며 아직 제대로 사태 파악도 못 한 오크들을 덮치기 시작한다.
“찍! 뭔……!?”
돌연 중구난방으로 뻗어나가는 망령들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보던 놈을 향해 뽑아둔 수류탄을 전력으로 던졌다. 야구 선수와 비견될만한 강속구, 하지만 쥐쟁이는 피하는 대신에 시뻘건 두 눈을 번뜩이며 날 베어내기 위해 달려든다.
수류탄의 핀을 뽑고 터지기까지 4~5초
초인들의 싸움에선 초 단위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길기에 수류탄을 그냥 던져 봤자 효과가 없다. 일부러 시간을 뒀다가 폭발하기 직전에 던지면 된다지만, 그 시간 조절은 생각보다 힘들어. 추가로 자칫 잘못하다간 손 안에서 터질 위험도 있고.
하지만, 난 <눈>으로 수류탄 안쪽을 확인해 정확히 타이밍을 맞춰서 던지는 게 가능하거든.
-콰-앙!
수류탄이 날아가던 도중에 폭발한다.
그리고, 아무리 초인이라고 한들 음속의 4~5배로 쏟아지는 파편에 휩쓸리면 무사하진 못하지. 쥐쟁이가 수류탄 폭발에 주춤하며 튕겨져 나가는 꼴을 보면서 나도 폭발에 떠밀리듯이 근처 1층 건물의 깨진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촤학!
“뭐, 뭐야!?”
“오크가 아니야! 죽여!”
밖에서 벌어진 소란과 흘러들어온 독무에 반쯤 패닉에 빠져 있던 전사 오크들, 들어오면서 기습적으로 창을 뻗어 한 놈의 목을 쳤다. 나름 베테랑답게 나머지 두 놈이 반사적으로 도끼를 휘두르지만 흩뿌린 ‘독구름’에 당해 행동이 느리다.
-촤학! 촤학! 푹!
나도 <광폭화> 부작용인 탈진 상태지만 그래도 이런 놈들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지. 곧바로 창으로 깔끔하게 남은 2명의 오크 전사를 회 쳐버린 후-.
-쩌억! 콰드득!
재빠르게 한 시신을 악귀 투구의 아가리에 밀어 넣었다.
인체 구조상 불가능한 크기까지 벌어진 투구의 아가리가 단숨에 오크의 머리통을 한 번 씹어 먹고 이어서, 상반신까지 쭉쭉 ‘버적! 버적!’ 씹어 삼킨다. 이어서 시체를 소화시키고, 그 미지의 활력을 육신에 보낸다.
“흐으으……!”
회복의 힘이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쇄도하며 빠르게 상처를 호전시킨다. 추가로 투구 안에서 소화 중인 시체의 영혼이 증발하기 전에 ‘영혼 추출 마법’을 사용해서 백(魄)를 뽑아내 빨아들였다.
그래, 주위에 널린 ‘오크’는 이렇게 써먹으면 된다.
꿈속에선 1:1로 싸우다 보니 이렇게 투구를 활용할 생각을 못 했어. 투구가 있는 한, 오크는 사실상 회복 포션+영혼의 영액이다! 이쪽이 유리한 변수야!
다행히, 쥐쟁이 놈도 방해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꽤나 타격을 입은 듯, 독구름이 깔리지 않은 3층 건물 쪽으로 뛰어올라 입에서 검은 고깃덩이를 ‘퉷!’하고 뱉어내더니 포션을 꺼내 꼴깍꼴깍 마시기 시작한다. 근데, 저 포션…… 내가 챙겨왔던 거네.
“미친 개 같은 쥐쟁이 새끼…….”
내 피 같은 포션…… 복수를 다짐하며 난 남은 시체들도 닥치는 대로 아가리에 쑤셔 넣었다.
4.
“미친 고양이 같은 인간 새끼…….”
망령이 흩뿌리고 간 독구름을 피해 한 3층 건물의 지붕에 올라간 스미릭은 인간이 숨은 건물 쪽을 내려다보며 목구멍에 넣어뒀던 물품을 ‘퉷!’하고 뱉어냈다.
고블린 정화통 (Goblin respirator)
질식해서 죽은 고블린의 폐로 만들어진 도구, 어떻게 든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친 집념과 공포가 깃들어있다. 입 안에 넣고 빨아들일 시, 10여 분 가량 살아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부풀어 올랐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정화통처럼 각종 독성 물질을 걸러버린다.
·발동 효과 : 사용 시, 일정 시간 동안 ‘호흡’ 관련 피해 무시.
폐암 말기 환자의 폐를 보는 것 같은 시커멓게 녹아내린 검은 살덩이, 놈이 독을 사용하는 걸 보곤 준비한 물품이었지만 1분 남짓한 시간 만에 이렇게 시커멓게 녹아버렸다. 이미 알고 있지만 진짜 지독한 독이다.
“꿀꺽, 꿀꺽, 캬하학!”
곧바로 포션을 꺼내 입에 털어 넣은 후, 스미릭은 심호흡을 하며 현 상황에 대해 냉정하게 고찰했다.
-악령이야! 보통 무기론 안 먹혀! 마법사! 아니, 아무나 막아봐!
-피해! 독구름부터 피해! 엄청 강하다! 최소 전사가 아니면 못 버텨! 휩쓸리면 죽는다!
-아이! 아이부터 구해!
타르 같은 짙은 독무(毒霧)에 휩싸인 마을, 여전히 미쳐 날뛰는 검은 악령들이 닥치는 대로 독기를 흩뿌리며 주위의 생명체를 살육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오크들의 비명과 고함이 울려 퍼졌다.
“찍, 의도-목적이 도대체 뭐지……?!”
분명, 저 살육엔 ‘의도’가 있었다.
문제는 도저히 그 의도를 모르겠다는 것. 마냥 무시하고 움직이기엔 심상치 않았다. 저 지독한 독기 안에서 계속 격렬히 움직이는 것도 힘들 뿐더러, 이전에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저 독무를 통째로 불태워버릴 수…….
“찍……!”
강하게 고갤 저으며 스미릭은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억지로 털어냈다.
판매자에게 들은 순간이동을 봉쇄하는 마법 도구의 지속 시간은 4~5분. 아니, 못 미더운 불량품도 좋다고 끼워서 파는 사기꾼 놈들인 걸 생각하면 더 빨리 끝날 수도 있다. 시간을 줬다간 저 간악한 원수 놈은 이전처럼 또 도망칠지 모른다.
뭔 수작을 부리는지 몰라도 지금 ‘이 기회’에 끝내야 한다.
-스르륵.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걸 확인한 후, 스미릭은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왼손을 뻗어 그림자 속에서 장구류를 꺼냈다. 새로운 정화통과 3개의 수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