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3.
단절의 도시로 올라가지 않고 ‘하프 오크 마을’로 향한다는 내 결정에 오크 영감과 드워프 친구 둘 다 싫어했지만 그 ‘대응’은 서로 달랐다.
오크 영감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냥 이곳-분뇨 수거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입장이었다. 몰래 금을 가지러 왔었던 드워프들이 거주할 공간도 만들어놨고, 비상식량도 잔뜩 쟁여 뒀거든. 외부의 간섭이 없다면 혼자서 서너 달도 버틸 만했다.
반면에 드워프 친구는 날 따라가겠다는 입장이었다.
‘뒤앙밍크, 그 시체박이가 또 뭔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 아무래도 나라는 강자 옆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 같더라. 그에 난 ‘방해만 하지 않으면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로 승낙했다.
그렇게 오크 영감님은 분뇨 수거장에서 기다리고, 드워프 친구는 나를 따라서 움직이는 걸로 결정될 줄 알았지만…….
“X발.”
“거, 좀 조용히 하고 가도록 하죠?”
“아니, 욕이 안 나오게 생겼소?! 저 개 같은 난쟁이 새끼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하게 생겼는데?!”
결국, 다 같이 움직이게 됐다.
욕 좀 그만하라는 내 말에 언성을 높이며 맨 뒤에서 따라오는 드워프 친구를 노려보는 오크 영감. 그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따라오는 드워프 친구도 가래침을 ‘탁!’ 뱉은 후, 한쪽 눈구덩이가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어쩔 건데?’ 하는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마주 바라본다.
난 영감을 놓고 가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드워프 친구는 ‘오크 영감도 데려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크 영감은 말 그대로 ‘오크’, 잘 입을 턴다면 유입 오크들이 점령한 마을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없을 때 저 오크 영감이 금을 다 챙겨서 올라가면 어떡하냐?’는 게 드워프 친구의 주장이었지.
확실히, 영감탱이 행실들을 떠올려보니 좀 그렇더라고?
빚을 갚을 만한 장비를 챙기자마자 시시각각 런각을 재는 걸 아주 똑똑히 봤지. 진짜 도망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랑 같이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내가 마음의 상처를 입었거든. 나와 얽혀서 험한 꼴을 봤기에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좀 괘씸하잖아?
그에 영감님에게 ‘드워프 친구가 이러이러한 문제 제기를 했고, 그래서 영감님도 같이 가야겠다.’고 말하니 오크 영감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돌연 드워프에게 죽빵을 날렸다.
그에 드워프도 반격을 날렸다.
대장장이의 도제로 활동했다는 사람답게 힘 하나는 대단히 좋더라. 똑같이 죽빵을 날렸는데 한 방에 오크 영감탱이의 왼쪽 아래 어금니가 날아갔거든. 그렇게 잠깐 둘이서 투닥거리며 X밥 싸움을 하는 걸 지켜보다가 적당히 뜯어 말렸다.
그리고 이렇게 사이좋게 오게 된 거고.
“X발, 금 받고 올라가면 다시는 단절의 도시 아래론 내려가지 않을……. 아니, 그냥 상층에서 평생 머물 거야!”
“알겠어요. 알겠어.”
내가 독으로 쓰러트린 괴물을 확인사살하며 투덜거리는 영감탱이, 그에 건성으로 대꾸하며 난 머릿속 <메모장>에 있는 지도를 다시 살폈다. 쓰레기장에서 가까운 마을이라고 했으니, 분명 이쪽 부근에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게 ‘우그 타람’에서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내 머릿속의 지도에 의심스러운 곳을 하나씩 확인한 끝에-.
“찾았다!”
하프 오크 마을을 찾았다.
거의 20m가량 되는 두꺼운 콘크리트 벽 너머에 보이는 생활공간, 우그 타람의 생도들을 대상으로 <과거시>를 했을 때 봤었던 공간과 똑같았다. 내가 쾌재를 지르자 일행들의 시선이 쏟아지고, 난 앞의 콘크리트 벽을 턱짓했다.
“여기 벽을 뚫으면 곧바로 하프 오크 마을이 나와요.”
“……그럼?!”
“네, 그곳에서 한 사람만 찾으면 끝이에요.”
내 말에 반색하는 오크 영감, 드워프 친구에게도 말해주자 똑같이 기뻐한다. 마을을 찾았으니 이제 근처를 돌며 마을 정문 쪽을 찾아서 벽을 뚫고 나가면 되는데…….
“내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드워프가 ‘진동의 에메랄드’를 가방에서 꺼내고, 사납게 그걸 낚아챈 오크 영감님은 다짜고짜 내가 가리켰던 콘크리트 벽을 뚫기 시작한다. 어, 저러면 그냥 가정집 벽을 부수고 나오는 꼴인데…….
“쩝.”
말릴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뒀다.
나도 이 생활이 지긋지긋했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내 목에 걸린 폭탄 목걸이를 내던지고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프 오크들이 항의하겠지만, 내겐 그런 항의를 묵살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적당히 드워프 친구가 가방에 여비로 챙겨온 금 쪼가리를 던져주면 되겠지.
-드드드드드!
“후욱! 후욱! 어우, 뭘 섞었는지 몰라도 더럽게 안 뚫리네! 야! 교대하자!”
뭔 짓을 했는진 몰라도 유별나게 <굴착>이 통하지 않는 콘크리트벽, 5분 동안 고작 5m 가량을 뚫어낸 영감은 쌍욕을 내뱉으며 에메랄드를 드워프에게 내던졌다. 그에 방패로 바닥의 잔해를 치우고 있던 드워프는 얼굴을 찡그리며 에메랄드를 받곤 역할을 교대해서 벽을 뚫기 시작한다.
“천천히 쉬엄쉬엄 해요. 쉬엄쉬엄. 다 왔어요.”
난, 그런 두 사람의 뒤쪽에 서서 혹시라도 나타날 괴물을 경계했다.
에메랄드를 사용한 <굴착>은 마력을 소모하는데, 상당히 힘들었다. 유일한 전투원인 내가 지치면 불리하니 이렇게 역할 분담을 해뒀지. 그렇게 힘겹게 몇십 분 가량 벽을 뚫자, 반대쪽에 있는 거주자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화들짝 놀라며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무장한 전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으로 파악되는 강함을 보니 평범한 마력 각성자 정도, 여러 명이지만 나 혼자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야지. 그렇게 서로 교대하며 1m 가량 남았을 때, 난 교대하고 쉬고 있던 영감님에게 턱짓했다.
“슬슬 벽이 뚫릴 것 같은데…….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지거든요? 교대하고 영감님이 앞장서세요.”
“제길.”
욕을 하면서도 순순히 드워프와 바통 터치하는 오크 영감. 현재, 영감탱이는 내가 쥐쟁이에게 얻은 갑옷을 입고 있다. 두고 갔다가 혹여 잃어버리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아서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입혔지. 순수 몸빵으로 보면 영감님은 우리 일행 중에서 가장 튼튼해.
-드드득! 후두두둑…….
그렇게 영감님이 다시 굴착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콘크리트벽이 자갈로 쪼개져 내리고 안쪽이 드러난다. 뚫는 도중에 기사급 실력자로 보이는 인원이 나타났지만 그래도 제압하는 건 문제 없……는데, 자세히 보니 내가 아는 얼굴이네?
“어라? 오랜만이네요. 그쪽 분.”
영감님 뒤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며 난 구면인 기사님을 향해 아는 척했다.
4.
“저 기억하시죠? 단절의 도시에서 만났었는데.”
갑자기 아는 척하며 앞으로 나오는 용의자, 그에 드라릭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고갤 끄덕였다.
“그렇소, 오랜만이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나저나 그쪽은 무슨 일로…….”
-덜컥! 쿵!
용의자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돌연 입구 쪽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리고, 자연스럽게 용의자와 드라릭의 시선이 소음이 들린 현관문으로 향했다.
양손 도끼를 손에 쥔 채,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거구의 오크.
그 모습에 드라릭은 얼굴을 찡그렸다. 뿜어져 나오는 기세를 보건대 최소 기사급의 실력자, 걸친 장비도 꽤나 튼실해 보인다. 싸워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일선에서 물러나 질서 집행관을 하고 있는 그보다 더 강해 보였다.
“야, 이 반푼이 새끼야!?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밖에서 들어오는 놈들 막으라고 했지?”
그리고, 나타난 거한은 다짜고짜 일행과 함께 있는 박재석 쪽을 향해 소리친다. 마을의 우두머리에게 했다고 하기엔 대단히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아니, 그것이…….”
박재석은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하고 쩔쩔 맸다. 그에 드라릭이 어떻게 말려 보려는 찰나…….
“무례하네요.”
용의자가 한 발자국 더 나오며 먼저 입을 열었다.
작지만 또렷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에 거한의 시선이 용의자 쪽을 향해 돌아가고, 용의자를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자기에게 피해가 갈까 황급히 비켜섰다. 그제서야 거한은 상황을 파악했는지 천천히 집 안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며 으르렁거렸다.
“설마, 바위 뚫고 들어오는 놈 때문에 외부인을 받자고 한 거냐? 이런 개…….”
그 순간, 소리가 사라졌다.
용의자를 중심으로 살기(殺氣)가 폭발한다. 시커먼 어둠이 순식간에 집 안을 휘감고, 그 어둠에 잠식된 몸뚱이는 진창에 질척하게 빠져 산 채로 썩어 들어가는 듯한……. 그 끔찍한 감각에 집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숨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오직, 이미 한 번 경험해본 드라릭만이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꼭 실체를 가진 것처럼 사람을 옭아매는 살기. 역시, 전쟁 군주들이 뿜어내는 살기나 이와 비견될……. 아니, 기세란 것도 의념(意念)에 마력이 감응하는 것이란 걸 생각하면 더 위험하다. 저 앞의 존재는 이 저주 같은 살의(殺意)를 품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집 안의 모든 이들이 한순간 굳은 가운데, 살기를 뿜어내는 주체는 현관문에 선 거한을 향해 조곤조곤 속삭였다.
“다른 마을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면……. 난, 곧바로 당신을 찢어 죽였을 거예요.”
“…….”
“하지만, 여기선 그러지 않을 겁니다.”
환상이었다는 것마냥 주위를 잠식한 기세가 사라지고, 그제야 집 안에 있던 이들이 숨통이 트인 것처럼 발작하듯이 숨을 헐떡인다. 나름 강렬한 기세를 흘리며 나타난 거구의 기사 또한 마찬가지.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았건만 그 이마엔 팥죽 같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가세요. 제 생각이 바뀌기 전에.”
집주인인 것마냥, 나가라는 듯이 손짓하는 용의자. 그에 거한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현관문 밖으로 나서자 내달린다. 그렇게 불청객이 사라진 후, 용의자는-.
“벽을 부수고 나와서 죄송합니다. 정확한 길을 몰라서 급한 대로 이렇게 나왔어요.”
놀랍게도 박재석을 향해 정중하게 고갤 숙였다.
“하지만, 맹세컨대 마을분들을 해칠 생각은 없답니다. 벽을 부순 것에 대한 피해 보상도 드릴게요.”
“아, 네! 네네!”
자기를 향해 괴물이 고갤 숙이자 당황하더니 이내 황급히 고갤 끄덕이는 바지 사장, 이어서 용의자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건 그렇고 잠시 ‘오혜영’ 씨를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머무는 걸로 알고 있는…….”
“잠깐.”
크게 숨을 들이쉰 후, 드라릭은 그런 용의자의 말을 끊었다.
실로 목숨이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그에겐 지금 전쟁 군주가 내려준 임무가 있었다. 용의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드라릭은 반사적으로 왼 손목에 낀 소집의 팔찌를 매만지며 말을 이어나갔다.
“질서 집행관을 맡고 있는 드라릭이라 하오. 현재는 뉴 송파구 정부에서 임무를 받고 움직이고 있지.”
“……임무요?”
“그쪽의 행적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거든. 이 마을에 용건이 있는 것 같다만, 먼저 우리에게 순순히 협조해주길 바라오.”
-철커덕!
드라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열리는 현관문, 그리고 중무장한 추적팀 일행이 들어왔다. 그에 용의자는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듯이 고갤 까닥였다.
“……쓰읍, 좋아요. 협력하도록 하죠.”
5.
단절의 도시에서 만났던 오크 기사님, 적당히 아는 척하면서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려고 했는데 돌연 현관문 쪽에서 웬 무례한 오크 새끼가 하나 튀어나왔다.
<눈>으로 보아하니 꽤나 힘 좀 쓸 것 같은 녀석. 놈은 다짜고짜 한 사람에게 쌍욕을 날렸는데, 내려오기 전에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혜영이가 없을 때 대장 노릇을 하던 하프 오크였다. 그 순간, 난 대충 이 마을이 돌아가는 꼴을 짐작했다.
중층의 다른 마을처럼 유입 오크에게 먹혔구나!
아마, 혜영이도 이런 이유 때문에 못 올라오고 있던 것 같았다. 그에 작정하고 기세를 내뿜으며 꺼지라고 한 뒤, 예의를 갖춰서 미안하다고 고갤 숙였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자기네들을 순식간에 죽여 버릴 수 있을 강자가 미안하다고 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이제, 혜영이에게 폭탄 목걸이를 넘기고 저 유입 오크 새끼들을 족쳐주고 나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질서 집행관을 맡고 있는 드라릭이라 하오. 현재는 뉴 송파구 정부에서 임무를 받고 움직이고 있지.”
“……임무요?”
“그쪽의 행적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거든. 이 마을에 용건이 있는 것 같다만, 먼저 우리에게 순순히 협조해주길 바라오.”
생각지도 못한 오크 기사님이 태클을 걸었다.
솔직히, 좀 당혹스러웠다. 법보다 주먹이 ‘한참’ 앞서는 이곳에서 작정하고 전쟁 군주가 피워 올릴 만한 기세를 뿜어냈는데도 당당히 말하다니? 내가 빤히 바라보자 왼쪽 팔목에 낀 팔찌를 만지기에 뭔가 싶었는데…….
소집의 팔찌 (Bracelet of Recall)
한 쌍의 세트로 이뤄진 골동품 마법 팔찌, 대단히 낡았으며 현재는 잊혀진 고대의 마법인 <소집>이 새겨져있다. 장비에 마력을 주입할 수 있는 회로 부분이 망가져 ‘재사용 대기시간’이 끔찍할 정도로 늘어났지만 사용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20km 이내에 다른 팔찌 한 짝을 낀 대상을 <공간 이동>으로 불러올 수 있다.
·발동 효과 : <소집> (1/1, 충전 완료)
·현재 소집될 것으로 예상되는 대상 : 오크 전쟁 군주-모르칸쉬
믿는 구석이 있어서 태클을 건 거였다.
무려, ‘전쟁 군주’를 부를 수 있는 장비. 아니, 왜 기사 따위가 저런 장비를 가지고 있는 건지……. 그냥 기습적으로 쓱싹할까 생각도 했지만 실패하면 리스크가 너무 컸다.
전쟁 군주와 싸우라고?
오무혁 양반의 경험을 얻었기에 단언할 수 있다. 붙으면 박살 난다. 살기 같은 ‘무형의 기세’는 전쟁 군주에 못지않게 뿜어낼 수 있다만, 피지컬 부분에서 절망적인 차이가 있어. 괴물 쥐쟁이와 싸웠을 때보다 더 극심하게 밀릴 거다.
“……쓰읍, 좋아요. 협력하도록 하죠.”
그에 난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