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49화 (249/350)

제249화

52화. 망했어요

1.

성공적으로 공권력을 설득한 뒤, 난 산책하듯이 찬찬히 하프 오크 마을을 거닐었다.

하지만, 느긋한 겉모습과는 달리 열심히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정보들을 수집했다. 건물 내부의 구조, 침략자 오크들의 위치, 숨겨진 소총과 무기, 하프 오크가 있는 곳…….

‘뉴 송파구 공권력’이 마을을 정리하기로 했지만 이쪽도 마냥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하프 오크들의 피해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게 뻔한데, 자칫 잘못하면 마을이 박살 날지도 몰라. 아쉬운 대로 나도 뛰어야지 뭐. 그렇게 마을을 전체적으로 한 바퀴 돈 후, 파악한 정보들을 토대로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려는 찰나-.

“……?”

마을 한쪽에서 작은 소란이 들렸다.

비명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조용한 터라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했다. 위치는 거주 지역 11시 방향 3층 복도, 한 방문이 열려 있고 하프 오크 남성 하나가 문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그 방 안에 살색 피부의 오크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방금 전, 건물을 한번 훑었을 때는 없었던 오크. 복장은 뉴 송파구의 기사들이 입는 택티컬하게 생긴 군장이었는데, 부상을 입은 듯 엎어진 바닥엔 피가 흥건했다.

-탁! 타탁!

곧바로 원숭이처럼 옆의 건물 벽을 타고 3층 복도에 착지한 뒤, 정체불명의 오크가 있는 방을 향해 내달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수상하니 일단 봐야지. 허겁지고 달려오는 약탈자 오크들보다 한 발자국 먼저 도착해서 본 결과-.

“……?!”

방금 전에 헤어졌던 오크 기사였다.

<눈>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복부 안쪽을 확인하니 작은 쇳조각에 오른쪽 폐는 완전히 작살나고 내장은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 아직 살아있긴 했지만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왜 이곳에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구하는 게 먼저다!

“비켜욧!”

“어, 어어!”

문 옆에 있는 하프 오크를 밀치며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간 후, 무릎을 꿇고 앉아 응급조치를 취하려 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포션은 쥐쟁이에게 털려서 없고, <연금술>을 이용한 치료도 내 마력의 특성 때문에 불가능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옷으로 지혈하는 것 정도. 뒤늦게 방에 도착한 두 명의 오크 놈들이 안을 보곤 흠칫하는 가운데, 난 기사님의 갑옷을 벗기며 녀석들을 향해 소리쳤다.

“포션! 포션 가진 거 없어요?!”

“어, 없습니다!”

내 말에도 당황하며 없다고 하는 놈들, <눈>으로 놈들을 훑었지만 진짜 포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개떡 같은…….

“아.”

그 순간, 깨달음이 내 머리를 스쳤다.

곧바로 옆에 놔둔 창을 쥐고 놈들을 향해 돌진했다. 내 돌발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손에 쥔 도끼를 휘두르며 대처하는 오크 전사들, 하지만 성장한 내겐 전사 정도는 너무 쉬운 상대다. 교묘하게 창의 찌르는 속도를 조절해 페이크를 걸어 앞에 있는 놈의 목울대를 꿰뚫었다.

“우와아아악!”

“여기 적이……!”

밖에서 서 있던 하프 오크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난 연이어서 창을 뽑고 두 번째 녀석을 향해 찔러 넣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두 명을 처리한 후, 난 비명을 지르는 하프 오크를 무시한 채 그 시신을 들어 투구의 아가리에 우겨넣었다.

-콰드득! 콰득! 버적! 버적!

소름끼치는 소음을 내며 시신을 먹어치우는 투구, 그렇게 한 명을 다 쑤셔 넣고 투구를 벗자 순순히 벗겨진다. 그리고 곧바로 기사에게 다가가 내 투구를 씌웠다.

“읏차!”

-콰드득! 콰득!

그 투구 앞에 시신을 밀어 넣자 알아서 시체를 처먹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투구는 시신에서 뽑아낸 ‘생명의 힘’을 기사에게 밀어 넣는다. 그래, 포션이 없으면 오크라도 먹어야지! 닥치는 대로 죽인 뒤에 쑤셔 넣으면 회복될 거야! 실제로 지금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많이 멎었어!

-비상! 외부인이 살인을 저질렀다!

-총! 총부터 꺼내! 그 해골바가지 녀석, 괴물이야! 보통 무기론 답이 없어!

밖에서 울려 퍼지는 고함 소리, 전사들은 소리치기 전에 빠르게 격살했지만 하프 오크가 비명을 지르면서 산통이 깨졌다.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창을 쥐었다. 투구를 벗어서 좀 위험하긴 하다만……. 그래도 안 맞으면 되지.

“후우, 좋아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독숨결>을 준비한 후, 난 다시 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2.

쥬라카와 카리드, 두 사람이 안내받은 숙소는 가장 높은 5층에 위치한 곳이었다.

안에 들어가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잘 꾸며져 있어서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 화장실엔 수도가 있었고 심지어 ‘뜨거운 물’이 콸콸 나왔다. 그걸 파악한 순간, 쥬라카는 화장실 문을 잠그고 장비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몸을 담갔다.

“하아, 좀 살겠군.”

기반 시설이 깔린 상층 혹은 단절의 도시에 있는 호텔에서나 맛볼 수 있는 사치, 여기까지 오면서 쌓인 몸의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좀 노곤하게 풀어진 채, 쥬라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솔직히, 그리 좋진 않았다.

그 ‘미친 해골 대가리’가 찾던 반푼이가 이곳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동안 옆에서 봐왔던 그 새끼의 성격을 보건데, ‘반푼이를 찾을 때까지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지랄할지도 몰랐……. 아니, 그러고도 남을 미친 새끼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쥬라카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오른손 팔뚝의 ‘시커먼 손바닥 낙인’을 보니 더 엿 같았다. 폐허에 금을 숨겼다곤 하지만 100% 안전한 건 아니다. 뒤앙밍크가 그 괴물 쥐쟁이 같은 걸 또 보낼 수도 있었고. 어서 빨리 이 굴레를 벗어던져야 하는데, 이렇게 시간 낭비만 하다니…….

“어떻게 그 미친 해골 대가리를 설득해야 할…….”

-타탕! 타타타탕! 타탕!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도중에 들려오는 화약의 폭음, 환청이 아니라는 것처럼 총성으로 들리는 폭음이 연이어서 밖에서 들려왔다. 그에 쥬라카는 곧바로 욕조에서 일어나 화장실 바닥에 던져뒀던 장비에 손을 뻗었다.

-촤르르륵!

착용 부위에 가져대자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알아서 착용되는 칠흑의 갑주, 그 든든한 모습에 쥬라카는 살짝 안도감을 느꼈다. 입어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진귀한 장비, 이 갑주뿐만 아니라 방패와 무기까지 모두 뛰어나다.

그러니, 설령 총이라고 한들 이 무구 앞에선 문제없을…….

-쾅! 쾅!

“[야, 늙다리! 빨리 나와! 지금 밖이 장난 아니야!]”

“닥쳐라, 난쟁이 놈아! 지금 나갈 거니까!”

밖에서 문을 후려치는 난쟁이 새끼. 말이 안 통해서 뭐라고 지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대꾸한 뒤에 쥬라카는 빠르게 장비를 마저 착용하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두타다다다다다!

-검은 연막에 가까이 가지 마! 독이다!

-쏘지 마! 나 맞았어! 이거 뭐야!

욕실에서 나오자 좀 더 또렷하게 현관 쪽에서 총성과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그 내용에 쥬라카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뭔진 모르겠다만 밖에 있는 미친 해골 대가리가 또 일을 벌인 것 같다. 그나마 곁에 없어서 다행이다. 옆에 있었으면 뭔 봉변을-.

-타다탁!

“망할, 이쪽으로 온다!”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쥬라카가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현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뭔가 꼼지락거리던 난쟁이가 허겁지겁 뒤로 빠진다. 그런 현관 바닥에는 쫙 펼친 손바닥만 한 붉은 낙서가 몇 개 그려져 있었다.

-타다다당!

-탕! 탕!

-콰드드득!

불청객의 발자국 소리가 멈추고 총탄이 현관 문고리와 경첩을 부순다.

이어서 문짝이 뜯겨지는 것을 본 순간, 쥬라카는 코너 쪽에 등을 붙이고 몸을 숨겼다. 든든한 갑옷과 방패를 얻긴 했다만 그래도 총탄 세례에 노출되는 것은 껄끄러웠다. 이제 안쪽으로 들어설 터, 접근하는 순간까지 최대한 기다렸다가 기습을-.

“[대장간의 불길을 지펴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난쟁이 새끼가 뭐라고 소리를 꽥꽥 지르며 손뼉을 친다. 그와 함께 소매를 걷어붙인 난쟁이의 양 팔뚝의 문신들이 돌연 붉게 빛나면서-

·푸화아아아악!

현관 바닥에 새겨진 낙서에서 푸른 불길이 쏟아졌다.

불길을 지펴라! (Light the forge fire!)

레벨 3 주술/화염

시전 소음 : 3

주문 소음 : 15

최대 SP : 50

지속시간 : 18 + 2d(Spell power) min

최소 소모 재화 : 마력 2p

효과 : 간이 대장간 화로에 불길을 붙이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 오직 불길을 뿜는 데에만 능력이 한정된 설치 형태의 마법이다. 시전자의 마력을 연료로 마법적인 불길을 뿜어내며, 그 불길은 생명체에겐 그리 뜨겁지 않게 느껴지지만 금속만큼은 급속도로 달아오르게 만든다.

마력의 조절을 통해 그 화력과 형태·지속 시간 등을 조절할 수 있다.

-탕! 타탕! 탕!

“우와아아악!”

“[가서 죽여!]”

쥬라카가 등을 기댄 코너 쪽에서도 느껴지는 불길의 번쩍임, 갑작스런 불길에 안쪽으로 들어서던 침입자들은 기겁하는 가운데,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난쟁이가 쥬라카를 향해 고함을 지른다. 뭐라고 떠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와아아아아!”

쥬라카는 방패를 들어 올리며 푸른 불길 속에 있는 침입자들에게 돌진했다.

전사 계급의 인원이 쥬라카를 보고 총을 겨눴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들고 있는 총은 말을 듣지 않았다. 반쯤 패닉에 빠져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마법적 불길에 휩싸이면서 순식간에 달아오른 총탄은 거의 대부분 폭발했다.

-팅!

그래도 몇몇 총탄은 정상적으로 쥬라카를 향해 쏘아졌으나 그것도 방패와 갑옷에 막혀 허무하게 튕겨져 나갔다. 그렇게 불길에 휩싸여 정신없는 놈들을 상대로 쥬라카는 닥치는 대로 무기를 휘둘렀다.

-콰직! 콰직! 쩌적!

불과 십여 초 만에 정리된 현관, 침입자 6명 중 두 놈은 쥬라카처럼 전사 계급이었으나 제대로 무기를 뽑아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으스러졌다. 그렇게 적을 다 처리한 후, 쥬라카는 숨을 내쉬며 현관문 밖 복도를 한번 훑었다.

“[더 남았냐?]”

코너에서 뺴꼼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보는 난쟁이 새끼, 대충 뉘앙스를 파악한 쥬라카는 고갤 저었다. 다행히, 자신들을 죽이려는 적은 더 이상 없었지만 공터와 다른 복도에서는 살벌한 총성과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기! 여기에 있다!

-아냐! 여기에 없어! 미친놈아! 쏘지 마!

-반푼이 새끼들아! 칼 줄 테니까 움직여! 니들도 위험해!

광범위하게 흩뿌려진 짙은 타르 같은 연기, 그 독가스에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고 있었다. 하프 오크들 또한 마찬가지.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혼란 상태인 것 같은데…….

-푸슛! 푹!

돌연, 연기 사이에서 한 형체가 튀어나와 하프 오크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오크의 머리통을 황금빛 창날로 날려버린다. 이어서 소름끼치는 살기를 뿜어내며 무리 사이로 파고들어 학살을 시작한다. 들고 있는 창과 체형을 보니 분명 미친 해골 대가리가 맞는데…….

“뭐지?”

투구를 쓰고 있지 않았다.

아주 곱상하게 생긴……. 소년? 진짜 인간이긴 했는데, 얼굴을 보니 아직 다 성장하지도 않은 어린애였다. 어쨌든 간에 순식간에 무리로 파고든 소년은 그 입에서 기괴한 악령들을 토해내며 닥치는 대로 오크와 하프오크를 죽였다.

“[허, 지금 보니까 다 크지도 않은 애새끼군! 악마 같은 살기를 뿜어낸 자라곤 믿기지 않아!]”

어느새 옆으로 와서 뭐라 떠드는 난쟁이 새끼, 어찌 됐든 간에 자신들이 참견할 만한 수준의 전투는 아니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 두 사람은 다시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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