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화
3.
급작스럽게 시작된 전투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마을의 몰살’이 목적이었으면 아주 쉬웠을 거다. 안전한 곳에 숨어서 닥치는 대로 마법만 펑펑 써대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혜영이의 행적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나중에 혜영이를 볼 면목을 생각해서라도 하프 오크들은 살려놔야 했다.
그리고, 오크들은 그런 내 약점을 얼마 안 가 파악했다.
-탕! 타타타탕!
“모두 중앙으로 모여! 건물 안에 있으면 각개격파당해 죽는다!”
건물에 숨어있던 한 무리의 오크를 처리하고 다음 층으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이미 한번 정리한 공터 쪽에서 총성과 함께 마력이 섞인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고갤 돌려 확인하니 깝치다가 내 살기에 빤스런 쳤던 오크 녀석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그 주위에 있는 30명가량의 인파, 오크뿐이라면 곧바로 마법을 한 번 갈겨주겠지만-.
“반푼이들도 모여라! 놈은 닥치는 대로 죽인다! 살기 위해 뭉쳐야 해!”
그 사이에 피를 질질 흘리는 하프 오크들이 섞여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을 두들겨 맞거나 다리를 저는 모습, 내가 하프 오크를 안 죽이니까 인질로 끌고 온 거다. 어이쿠, 부두목님도 계시네? 유별나게 많이 두들겨 맞은 듯, 팔다리가 부러진 채 정신을 잃고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살짝 고민했다.
솔직히, 인질 따윈 무시하고 마법을 갈기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맷집이 허약한 나는 총알 한 방이라도 맞으면 치명적이니까. 은·엄폐가 안 되는 공터에 있는 적을 처리하는 건 마법으로 하는 게 이치에 맞지. 뭐, 인질 몇 명 정도 죽는 건 밖에서도 일상다반사잖아?
하지만, 혜영이의 추적을 위해 하프 오크들의 협조들이 필요한 상황이다.
호의를 얻기 위해선 인질들을 ‘구하는 시늉’ 정도는 해야 할 텐데……. 다짜고짜 마법을 갈기는 건 ‘니들 목숨은 전혀 신경 안 쓴다.’는 티가 너무 나. <독침>과 <악취 구름>으로 와해시켜 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것들은 결정타를 먹이기엔 너무 약하고.
“쩝, 어쩔 수 없네요.”
내키지 않지만 위험을 좀 무릅쓰고 근접해서 처리하는 수밖에.
마음을 다잡은 후, <눈>을 굴리며 방패막이로 쓸 만한 놈이 있나 살펴보니……. 근처에 공터에 합류하기 위해 서두르는 오크 무리가 있었다. 그에 재빨리 기척을 죽이고 반지의 <투명화>를 사용해 놈들의 뒤에 따라붙었다.
곧바로 층계참을 내려가 공터로 내달리는 놈들, 그 등 뒤에 붙어서 순조롭게 접근하나 싶었는데-.
“……저놈들 뒤!”
빤스런 쳤던 오크 새끼가 두 눈을 부릅뜨며 날 포착한다.
아직도 반지의 <투명화>에 숙달되지 않아서 묘한 일렁임이 있는데, 꼴에 기사급 실력자라고 그걸 기어코 포착했다. 앞에 오크들이 있어서 많이 가려져 있는데도 말이다.
앞에 합류하려는 동료들이 있음에도 거리낌 없이 소총을 겨누는 오크들.
곧바로 <투명화>는 내던지고 장갑 안에서 들끓는 ‘유혈의 광기’를 몸에 받아들였다. 이어서 목에 걸린 목걸이-잘린 손가락에 끼워진 아티팩트 반지에 마력을 쑤셔 넣으며 그 능력을 발동했다.
어둠의 장막 (Veil of Darkness)
·효과 : 사용자의 현 위치를 중심으로 그늘진 자의 축복이 깃든 ‘안개 형태의 어둠’을 불러일으킵니다. 안개의 범위와 지속시간은 마력을 주입한 정도에 따라 달라지며 그 속에서 시전자가 내는 모든 형태의 기척은 극도로 희미해집니다.
그늘진 자의 신도가 사용할 경우, 장막을 생성하는 데 들어가는 마력이 대폭 줄어들며 생성된 장막은 ‘생명체의 그림자’ 판정을 받아 안쪽으로 <그림자 도약>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목걸이에서 흘러나오는 꿈틀거리는 검은 기운이 터지듯이 뿜어져 반경 10m 주위를 시커멓게 물들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인위적인 어둠, 괴물 쥐쟁이가 싸움 도중에 내 시야를 교란시키기 위해 종종 사용했던 스킬이다. 그래 봤자 내 <눈>엔 죄다 포착돼서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말이지. 하지만, 저 오크들에겐 다를 거다.
이어서 내 <눈>에 집중했다.
8개로 쪼개져 사방에 배치했던 시야가 순식간에 수백 개로 쪼개져 반경 30m 안쪽을 뒤덮는다. 여러 각도에서 본 오크들의 형상과 내 모습, 인간의 뇌로는 한 번에 처리하기 힘든 막대한 정보를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머리는 한순간에 받아들여 ‘정확한 조감도’를 그려낸다.
이어서 내 경험이 덧씌워진 ‘전쟁 군주’의 감각에 따라 움직였다.
“어, 어어! 쏘지…….”
-드르르르륵!
-타타타탕! 타타탕! 타탕!
앞에 서있는 오크들을 무시한 채, 내가 몸을 숨긴 <어둠의 장막>을 향해 탄환이 쏟아졌다.
비처럼 쏟아지는 탄환에 찢겨지는 전방의 오크들, 그 총구의 궤적이 향하는 곳을 피하고 반동에 의해 수정되는 궤적을 실시간으로 계산해서 움직였다. 그 본능적인 계산에 머리가 익어버릴 것처럼 뜨겁지만…….
-팅! 팅팅팅! 팅!
불가능한 건 아니다.
창날에 맞은 탄환은 옆으로 튕겨지고, 그 반동을 이용해 더 빠르게 가속해서 이어지는 총탄을 튕겨낸다. 동시에 몸을 움직여서 피하기 힘들 정도로 총탄의 궤적이 겹치는 구역을 벗어난다.
그렇게 연발로 4~5초 만에 한 탄창을 순식간에 비우고 생겨난 빈틈-!
“미친……!”
<어둠의 장막> 속을 빠져나와 돌진했다.
기어코 접근한 날 보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는 오크, 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하프 오크를 무시하며 크게 창을 휘둘렀다. 빈 소총으로 어떻게 막아보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어.
-콰드득!
가로막는 소총을 피해 정확히 목 경추 틈을 베어내고, 원심력의 힘을 살려서 옆에 있는 오크 두 명까지 사이좋게 모가지를 베어냈다. 그리고, 곧바로 힘을 잃고 무너지려는 그 시신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드드드득!
동료를 쏘는 것을 꺼리는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날 향해 소총을 쏴 갈기는 빤스런 친 오크 새끼, 그에 아직 쓰러지지 않은 부하 오크들의 몸뚱이가 터져나간다. 내가 힘들게 구한 하프 오크들도 그 탄환에 쓸려나가고.
거, 기껏 구했는데 아깝게…….
역시, 마법을 갈기나 직접 달려들어서 구하나 차이는 별로 없구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최대한 몸을 낮추고 내달렸다. 내게 향하는 탄환의 궤적은 피하고, 피할 수 없는 궤적은 창날을 가져대 튕겨내며 다른 오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초, 총알을 튕겨……!”
“불가능해!”
경악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다가 내 창에 베여나가는 오크들. 확실히,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알을 피하고 쳐내는 건 전쟁 군주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도 내 <눈>이 있다면 해낼……. 아니, 몸뚱이들이 워낙 커서 힘들지도?
어쨌든 간에 성공적으로 파고든 순간부터 오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급격하게 무너졌다.
“후우, 되게 귀찮게 구시네요.”
서너 호흡 안에 중앙에 모여 있던 놈들을 정리한 후, 마지막 남은 녀석을 바라보았다. 까불다가 내 살기를 맛보곤 쫄아서 도망친 녀석. 놈은 내게 총을 겨누는 대신에 자기 앞에 쓰러진 하프 오크 부두목의 머리통에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오면 죽이겠…….”
협박을 하려는 놈의 머리를 향해 다짜고짜 창을 내질렀다.
이 정도면 하프 오크들에게 ‘나름 인질을 구하려는 시늉’은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상황에선 이해해 주겠지. 부두목이 죽어도 다른 놈에게 혜영이의 행방에 대해 물어보면 되고.
-퍼걱!
인질이 죽건 말건 내지른 일격, 녀석은 싱겁게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통을 꿰뚫렸다. 가볍게 창을 비틀어 뇌를 휘저어주고 뽑아냈다. ‘털썩’ 쓰러지는 시체를 뒤로한 채,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적에 휩싸인 마을.
곳곳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방금 전에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인상 깊었던 것인지 하프 오크들은 물론이고 적인 오크들까지 눈에 경악과 공포의 감정을 띤 채 날 바라볼 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에 <광폭화>를 해제했다.
밀려오는 피곤함. <광폭화>의 후유증과 <눈>과 머리를 과도하게 쓴 덕분에 쓰러질 것 같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여유롭게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완전히 꺾인 사기를 보건대, 잘하면 위협으로 끝낼 수 있을 것 같…….
“으, 으아아아악!”
-캬, 캬캬캬캬!
다고 생각했는데 정적에 휩싸였던 마을에 돌연 비명이 울려 퍼진다.
고갤 돌려 바라보니 복도식 아파트에서 한 하프 오크가 내가 소환한 악령에게 덮쳐지고 있었다. 고작해야 1~2초가량의 접촉, 하지만 그 손아귀에 스친 피부에 즙 가득한 낭포가 울긋불긋 솟구치고, 안구는 순식간에 썩어들어 흘러나온다.
-쮸, 쮸겨! 죽여!
-하나만! 하나만 더! 더더!
-더더더! 부족해! 부족해에!!
호리병 모양 마을의 입구, 침략자 오크들이 모여 있는 작은 지역에 던져놨던 악령들이 검은 타르 같은 <부패 구름>을 뚫고 나와 거주지 쪽으로 역류하고 있었다. 연결된 심령으로 파악하니 이미 거기에 있던 오크들을 몰살시켰고, 더 살육을 저지르고 싶어서 뛰쳐나온 거다.
여기로 오면 ‘역소환’하겠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어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이미 한번 신안에서 이런 문제로 크게 데인 덕분에 대처할 만한 수단은 고안해놨지. 자가 해독 기술로 만들어준 <연금 물질 해체> 마법을 변형, 손바닥에서 파동 형태로 뿜어내자-.
-고, 고깃덩이! 너만!
-너만 즐기!
그 파동에 휩쓸린 녀석들이 절규와 함께 ‘퍽! 퍽!’ 물풍선처럼 터져나간다.
터지면서 쏟아진 독기가 주위를 자욱하게 감싸지만……. 저건 어쩔 수 없지. 쉽게 분해가 안 될 정도로 난해한 물질이라서 말이지. 어쨌든 지랄하는 악령들을 가볍게 처리한 후, 난 마력을 담아서 소리쳤다.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앞으로 나와 항복하세요.]
다시 정적에 휩싸인 마을을 울리는 내 목소리, 이어서 살기를 끌어올리는 요령으로 기세를 터트리며 곳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선언했다.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다행히, 내 ‘진심을 담은 설득’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도 닿았다.
-땡그랑!
“하, 항복……! 항복!”
공터로 합류하려고 하다가 돌연 벌어진 학살극에 주춤했던 오크 무리 중 한 명이 무기를 떨어트리며 손을 든다. 그에 전염되듯이 다른 놈들도 무기를 바닥에 던지고, 난 창을 들어 올리며 회의실 안에 들어가서 대기하라고 턱짓했다.
그 모습을 본 대다수의 오크들이 건물에서 나와 투항하기 시작한다.
건물에서 나오는 족족 회의실로 보낸 포로의 숫자만 34명, 거주지에 있던 침략자 오크들이 104명이었으니까……. 내가 죽인 놈들의 숫자를 빼면 항복하지 않은 놈이 7~8명가량 남아있네. 나중에 한번 순찰해서 처리해야지.
“다 끝났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오크 영감탱이와 드워프 새끼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난다.
지금까지 숨어 있다가 나온 띠꺼운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려는데, 영감탱이가 한 손에 쥔 머리카락을 꿴 오크의 머리통을 들어올린다. 아주 놀고 계시진 않았네. 머리가 6개니까, 얼추 들어맞는구만. 고갤 끄덕이며 난 창을 들어 오크 기사를 발견했던 거주지를 가리켰다.
“영감님, 저기 3층에 문 열린 방이 보이시나요?”
“……음, 보이오.”
“거기에 제 투구를 쓴 오크 기사님이 너부러져 있을 거예요. 그 투구 아가리에 약탈자 놈들의 시체를……. 한 10명쯤? 쑤셔 넣어 주세요.”
내 말에 두 눈을 끔뻑이는 오크 영감. 드워프 친구에게도 똑같이 말해준 후, 어서 가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그렇게 영감탱이와 드워프 친구를 보낸 뒤, 난 인질로 잡혔던 부두목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우두둑!
“……!”
부러진 다리를 붙잡고 그 뼈를 맞췄다.
그 통증에 움찔하다가 힘겹게 두 눈을 뜨는 부두목 양반은 오크의 피를 뒤집어쓴 날 보며 흠칫한다. 그에 난 최대한 친절하게 웃었다.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