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막간. 이미 늦었다니까요?
1.
“아, 죄송하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난데없이 날 고용하겠다는 기사님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애초에 용병으로 뛰기도 싫을뿐더러 ‘배신자’라는 말이 나온 시점에서 X나 꼬인 일이 분명하거든. 하지만, 그런 내 대답에도 기사님은 포기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가신다.
“그 ‘하프 오크’ 하나를 찾는 것보다 훨씬 급하고 중요한 일이오. 아니, 당신과도 연관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뉴 송파구가 전쟁터가 되면 당신이 찾는 사람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
“그리고, 여기에 있는 이들도.”
주위에 있는 이들을 훑으며 말하는 오크 기사, 당신이 뭔데 뭐가 더 중요하니 마니 판단하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워낙 비장한 태도로 말하는 덕분에 태클을 걸기 애매했다. 아니, 그렇게 급한 일이면 만지작거리던 팔찌로 전쟁 군주를 소환하면…….
“팔……찌는 어디에 있죠?”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기사의 손목에 팔찌가 없었다. 내 지적에 오크 기사는 멈칫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배신자에게 빼앗겼소.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저지른 실수 중에서 가장 커다란 일이기도 하지. 그건…….”
“소집의 팔찌죠. 다른 한 짝을 낀 상대를 <순간 이동>으로 불러올 수 있는 마법의 물품.”
“…….”
“저와 이야기할 때, 자꾸 팔찌를 만지는 게 보이더군요. 다행히 알고 있는 물품이었고.”
선수 쳐서 말하며 먹고 있던 시체를 완전히 꿀꺽 삼켰다. 그에 기사는 힘이 빠진 얼굴로 고갤 끄덕인다.
“맞소. 그리고 그 소집의 팔찌로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은…… 모르칸쉬 님이오. 동명이인이 아닌 전쟁 군주.”
“……뭐요?”
그 대답에 기사를 부축하고 있던 오크 영감이 기겁한다.
한 박자 늦게 파악한 다른 하프 오크들도 마찬가지. 난 이미 감정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딱히 큰 감흥은 없었다. 몸의 회복을 위해 부지런히 네 번째 시체를 씹어 먹기 시작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기사는 말을 계속했다.
“총기 밀수에 관한 건, 뉴 송파구의 질서를 해치는 매우 큰 범죄요. 게다가, 요즘 총기와 폭약을 이용한 오크 고위층들 사이의 암살과 분쟁이 벌어졌지. 며칠 전, 단절의 도시에서 벌어진 폭발에 폭약이 사용됐다는 걸 파악하고 우린 당신을 용의자로 분류했소.”
“…….”
“당신이 진짜 범인이라면 평범한 기사급 병력으론 상대가 안 될 것이라 판단한 전쟁 군주께서 그 팔찌를 내게 건네주셨지. 일이 꼬이면 자기가 직접 상대하겠다고. 생전 처음 보는 내게, 당신을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는 오크 영감의 부축을 밀어내고 혼자서 자리에 섰다.
“당신과의 면담이 끝나고 복귀하려고 할 때, 난 일이 다 끝났다는 들뜬 마음에 질문하는 배신자에게 어리석게도 내 팔찌를 자랑했소. 전쟁 군주님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표이니까 자랑할 만했지. 하지만, 결과는 이렇게 됐고.”
“…….”
“놈들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전쟁 분위기를 부추기고 있었소. 그런 놈들에게 팔찌가 넘어갔어. 사이가 나쁘다고 알려진 두 전쟁 군주님이지만 지금은 싸워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소. 한 분이 사라지면 이곳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오크 기사의 말에 분위기는 가라앉다 못해 바닥까지 처박혔다.
다들, 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네. 근데, 솔직히…… 내 알 바인가? 씹고 있던 시체를 완전히 입에 털어 넣은 후, 난 어깰 으쓱이며 다섯 번째 시체를 집어 들었다.
“솔직히, 여기서 뭐라 떠드는 것보다는 위로 올라가서 알리는 게 먼저 아닐까요? 잘하면 소집의 팔찌를 쓰기 전에 말릴 수도 있을 텐데?”
“불가능하오.”
“왜요?”
“내가 타고 내려온 승강기는 특수한 카드를 가지고 있어야 작동시킬 수 있소. 배신자 녀석이 그 카드를 가지고 있지. 지금 당장 소식을 알리는 건 무리야.”
오크 기사의 말이 맞는다는 듯, 이야기를 들은 하프 오크들이 고갤 끄덕인다. 부두목은 살짝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쓰레기가 제대로 처리가 됐는지 확인하는 관리관이 비정기적으로 승강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데…… 3~4일은 있다가 올 겁니다. 게다가 놈이 협조할지도 의문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온 관리관은 여기 마을을 장악한 놈들과 한패였거든요. 저희가 위에 알리려는 걸 막았죠.”
그 말을 끝으로 오크 기사는 물론이고 하프 오크들과 오크 영감탱이까지 날 바라본다. 그 묘한 시선에 난 영양 섭취를 중단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저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당신의 힘이 필요하오.”
대꾸하며 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는 오크 기사, 시체가 뜯기며 흘러나온 피에 무릎과 정강이가 흠뻑 젖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비장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뉴 송파구 정부의 요원이 배신자였소. 지상에 나와서 몇 년 동안 구 정부에서 직접 육성한 ‘특수 병종’이 말이오. 지금 난, 아무도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당신은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했던 ‘적’이 아니란 게 확실해. 믿을 수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한 자요.”
“…….”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약속하겠소. 어쩌면 송파구 정부에서도 더 보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부탁합니다.”
이어서 내 앞에 머리까지 박으신다.
그, 저런 제스처는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아하니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분위기다. 심지어 오크 영감까지도. 그에 난 다섯 번째 시체를 다시 씹어 먹으며 고갤 저었다.
“일단, 혜영이부터 구할 겁니다.”
“……!”
“지금 막 혜영이의 행적을 파악했거든요. 마침, 근처에 있기도 하고요.”
먹고 있던 시체를 완전히 처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순식간에 회복되고 있는 육신, 몸과 머리를 짓누르는 피로도 많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진 당장 자야 할 금요일 수준의 피곤함이었다면…… 지금은 수~목요일 정도? 진짜, 투구가 사기긴 사기야.
두 눈을 부릅뜨며 날 올려다보고 있는 오크 기사를 향해 어깰 으쓱였다.
“모르는 것 같은데, 당신이 여기에 떨어진 지 1시간 이상 지났어요. 팔찌로 일을 저질렀으면 이미 벌어지고도 남았을 겁니다. 서두른다고 호들갑 떨어 봤자 늦었어요.”
“…….”
“그러니 몸을 추스르면서 뭘 해야 할지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자, 그럼 우린 혜영이가 있는 곳으로 갑시다.”
혜영이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말한 조장에게 턱짓했다. 그에 화들짝 놀라며 앞장서는 조장. 그렇게 무릎 꿇고 절하는 기사님을 뒤로한 채, 난 혜영이가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2.
대한민국에 송파구는 3개가 존재한다.
16년 전에 가라앉은 송파구를 대신해서 새롭게 지어진 ‘지상 송파구’, 지상과 지하를 연결해주는 개미굴같이 난잡하게 뚫린 공간을 개척해서 만들어진 ‘뉴 송파구’, 그리고 16년 전에 7km 지하에 가라앉은 ‘지하 송파구’.
그중, ‘지하 송파구’는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
지하 송파구엔 미궁으로 향하는 ‘계단’이 뚫렸고, 그 미궁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원주민들이 현실로 넘어왔다. 평범한 통로를 통해 올라오는 거라면 뉴 송파구처럼 그 입구를 틀어막았겠지만, 수많은 미궁의 원주민들이 게임 속 몬스터가 ‘리스폰’되는 것처럼 지하 송파구의 거리 곳곳에서 공간을 찢고 튀어나왔다.
‘붉은 계단’이라는 미궁 구조물의 효과였다.
미궁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른 계층으로 이동하기 위해선 ‘계단’이라는 구조물을 사용해야 했다. 보통의 계단이 한 번에 한 층씩 내려가거나 올라가지만 이 ‘붉은 계단’은 한 번에 1~5계층씩 이동하고 미궁 내의 무작위적인 장소에 떨어진다.
그리고, 지하 송파구는 변천(變天)이 일어나지 않지만 ‘미궁의 일부분’으로 취급되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나타나는 괴물들 때문에 뉴 송파구처럼 최소한의 출입도 통제를 할 수가 없었고, 그에 대한민국은 지하 송파구의 탈환을 포기했다. 혹여 모를 룬 수호자같이 ‘재앙급 괴물’의 등장을 염려해 주기적으로 탐사 드론을 날려 감시하지만 그것 말곤 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현실에 튀어나온 그 ‘미궁의 편린’에 뉴 송파구를 나선 몇몇 오크들이 들어섰다.
“내게 바짝 붙어라. 안개 속에서 길을 잃으면 끝장이다!”
뒤따라오는 부하들에게 경고하며 요원-‘바소즈’는 푸른 랜턴을 들어 올렸다.
한때, ‘올림픽 공원’이라고 불렸던 거대 공원. 지하 송파구에서 얼마 없는 녹지에 수원(水源)인 몽촌호와 88호수가 있어서 수많은 야만 오우거와 트롤, 오크 부족들이 거주하며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던 땅.
“…….”
“…….”
하지만, 지금 그들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도 않고 오직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회색 안개’만이 가득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정적, 거기에서 비롯되는 묘한 불안감이 오크 무리를 휘감은 가운데 오직 ‘바소즈’가 든 랜턴만이 그 자욱한 안개 속에서 희미한 푸른 불빛을 일렁이며 길을 안내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 걸었을까?
“……왔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던 안개 속에서 마치 신기루처럼 건물이 나타났다.
지상에 있었을 당시엔 ‘우리 금융 아트홀’이라고 불리던 뮤지컬 전용 극장, 지하에 내려오고 난 뒤에 유지·보수 없이 시간이 흘러 시설 대부분이 망가졌지만 건물 자체는 건재했다. 서둘러 건물 안에 들어선 후, 바소즈는 부하들에게 대기하라 말하고 한때 뮤지컬 공연장이었던 곳의 철문을 두드렸다.
“킬가레스 님! 저 바소즈입니다!”
-음, 들어와라.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굵고 낮은 목소리, 허락이 떨어지자 바소즈는 조심스럽게 그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좌석이 다 뜯겨 나간 공연장 내부, 양옆에 거뭇한 화톳불이 담긴 화로들이 주르르 도열해 있고 그 벽면에는 수많은 깃발이 걸려있었다. 방패 문양, 태양을 손에 쥐는 문양, 피를 흘리는 문양…… 모두 ‘세로쉬 교단’의 수많은 분파를 상징하는 깃발들이.
그리고, 홀의 무대 쪽에 등을 보이고 앉은 거대한 오크가 있었다.
한쪽 어깨가 드러나는 토가 형식의 흰색 사제복, 드러난 커다란 등은 거친 황소를 보는 것처럼 근육으로 꽉꽉 찼고 그 피부 위엔 손톱만 한 황금빛 오크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탁자에 앉아 업무를 하고 있는 모습.
별다른 행위를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치 공간이 그라는 ‘존재’에 압도된 것처럼 느껴졌다. 화롯불의 타오르는 불티조차도 묘하게 엄숙했고, 흘러나오는 연기는 고요하게 위로 일렁였다. 그에 바소즈도 압도됨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그 오크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에 그는 펜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무대 아래 있는 바소즈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직접 내려오다니, 거의 한 달 만이구나.”
“그렇습니다, 킬가레스 님.”
거대한 몸에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 하지만 두 눈에는 학자의 것처럼 부드러운 지성이 번쩍이고 동시에 그 뒤에서 오크를 감화시키는 ‘황금빛 미광’이 바소즈의 피부 위에 내리쬔다. 그에 바소즈는 다시 한번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느꼈다.
벅찬 감동을 느끼며 바소즈가 고갤 숙이자,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지하를 정찰할 시기도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네가 직접 왔다면 뭔가 심상찮은 일이겠지. 무엇 때문에 왔느냐?”
“예, 아마 더 이상 위쪽에서 요원으로 활동할 순 없을 겁니다. 배신자라는 게 드러났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모든 걸 그만둬도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걸 습득했기에 이렇게 왔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바소즈는 가져온 물건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모르칸쉬 님을 소환할 수 있는 ‘소집의 팔찌’입니다.”
“소집의 팔찌……? 그것도 모르칸쉬를 소환할 수 있는?”
“예, 사실은 제가 우연히 임무를…….”
의아함과 놀람이 감도는 음성, 그에 바소즈는 이 물품을 얻게 된 경위에 대해 말했다. 총기와 폭발물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상한 괴인, 그를 추적하기 위한 추적대, 일이 어느 정도 끝난 후 귀환하던 도중에 알게 된 팔찌.
그 모든 말을 듣고 난 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무대 아래로 내려가 팔찌를 집어 들었다.
“모르칸쉬가 과감한 투자를 했구나. 심복도 아닌 이에게 자신을 소환할 수 있는 장비를 선뜻 건네주다니…… 하긴, 그런 무모할 정도의 과감함과 과단성이 그의 특징이기도 하지.”
“하지만, 실패했지요.”
“기사도 설마 요원이 배신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바소즈의 말에 대꾸한 후,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안에 쥔 팔찌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세로쉬 님의 인도일 지도 모르겠구나. 안 그래도 세로쉬 님의 축복을 받은 이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기회가 오다니 말이야.”
“곧바로 소환한 뒤, 포획할 수 있도록 준비를…….”
“아니, 그런 짓은 필요 없단다.”
요원의 대꾸에 고갤 저으며 그-킬가레스는 두 눈에서 세로쉬의 축복이 깃든 황금빛 광채를 번쩍였다.
“나 혼자서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