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55화 (255/350)

제255화

4.

연거푸 회복 포션을 섭취하며 모르칸쉬는 질주했다.

들어설 때와는 달리 회색 안개 없이 깨끗한 건물 내부, 경기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마자 모르칸쉬는 품 안에 있는 ‘순간이동 스크롤’을 하나 더 꺼내 찢었으나-.

-푸쉬쉬쉬……

“쯧.”

앞선 스크롤처럼 불발했다.

아쉬움에 혀를 차면서도 모르칸쉬는 계속 내달렸다. 어떤 수단으로 순간이동을 막는지는 모르겠다만 그 범위가 무한하진 않을 거다. 순간이동 스크롤은 아직 몇 개 더 있으니 더 멀리 떨어져서 써봐야겠다. 그렇게 열심히 밖을 향해 달리던 도중-.

-스하아아아…….

뒤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이미 느껴본 적이 있는 ‘섬뜩함’, 얼굴을 구기며 모르칸쉬는 도끼를 들어 그 매끄러운 표면에 비친 것을 확인했다. 뒤쪽 통로에서 폭발하듯이 밀려드는 회색 안개, 아무리 봐도 자신이 달리는 속도보다 더 빠르다.

결국, 따라잡혀 안개에 휩싸이는 순간-.

-하하하하!

-깔깔깔깔!

-아아아아악!

환각과 환청이 덮쳤다.

돌연 벽이 앞을 가로막고, 비명을 지르는 괴물들이 발목을 낚아채며, 방향 감각 또한 심하게 어그러진다. 곧바로 해제 포션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모르칸쉬는 세 번째 순간이동 스크롤을 꺼냈다. 그리고, 건물에서 나가면서 찢으려 했으나-.

-타다다다당!

그보다 먼저, 총성과 함께 강렬한 충격이 그의 손과 얼굴을 때렸다.

얕은 ‘가짜 통증’이 아닌 ‘진짜 피부가 찢기는 감각’, 총탄은 그의 단단한 두개골을 뚫어내진 못했지만 안면 근육을 으깨고 피부를 찢어발기기엔 충분했다. 주춤거리며 모르칸쉬는 도끼를 들어 얼굴에 쏟아지는 총격을 막았다. 그나마 눈에 맞지 않은 게 다행-.

-콰-앙!

이라고 생각했는데, 연거푸 날아온 수류탄이 터졌다.

대(對)마력 각성자용이 아닌 평범한 수류탄, 음속의 4~5배로 날아오는 쇳조각에도 강건한 육신은 조금 멈칫했을 뿐 터프하게 버텨냈지만 꺼낸 스크롤은 그러지 못했다. 완전히 형체도 없이 찢겼다.

“쓰읍-!”

신경질적으로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하니 2층 난간 쪽에서 바소즈라고 하던 요원 녀석이 허겁지겁 기둥 뒤로 숨는 게 보였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 당장 달려들어 박살 내주고 싶었지만 모르칸쉬는 그 충동을 참았다. 지금 중요한 건, 여기서 벗어나는 거다.

무시하고 다시 달리려 했으나-.

-■■ ■■■.

-휘오오오오……!

어느새 상반신만 있는 안개의 거인이 노란 발광체를 깜빡이며 출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멈칫했지만 이내 모르칸쉬는 이를 악물고 돌진했다. 안개로 이뤄진 거인, 당연히 그대로 뚫고 들어갔지만 용암에 빠진 것 같은 감각이 밀려들어 왔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미리 각오한 덕분에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간 뒤에 스크롤을 찢으면-.

-퍼엉!

얼굴에 꽂히는 강렬한 물리적 충격과 함께 모르칸쉬의 의식이 잠시 끊어졌다.

몸이 트럭에 치인 것처럼 ‘부웅-!’ 뒤로 날아가 그대로 벽에 부딪히곤 앞으로 엎어졌다. 다시 정신을 차린 후, 모르칸쉬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회복 포션을 꺼내 입에 털어 넣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총으로 얼굴을 맞은 것보다 훨씬 강렬한 충격.

왼쪽 눈은 터진 것 같고 광대뼈가 부러져서 푸욱 들어간다. ‘케흑!’거리면서 입에서 피를 토하니 어금니가 부러져서 나왔다. 벨트에서 즉효성 진통제를 꺼내 목에 주사한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거, 실컷 때려놓곤 갚을 기회도 안 주고 도망치면 쓰나.”

안개 거인의 몸속에서 킬가레스가 걸어 나왔다.

무기는 없고 맨손, 살짝 헐떡이며 웃는 걸 보면 저쪽도 전력으로 뒤따라온 듯싶었다. 상처가 대부분 회복된 그 모습에 모르칸쉬는 속으로 얼굴을 구겼지만,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옆에 이빨 섞인 침을 ‘퉤!’ 뱉곤 어깨를 으쓱였다.

“함정에 빠진 거라면 벗어나는 게 당연하잖아? 오히려 그 안에서 발버둥 치는 게 멍청한 거지.”

“흐, 그래도 무길 버리고 도망치는 꼴이 좀 추했어.”

“뭔 상관이람.”

모르칸쉬의 ‘과감한 일 처리 방식’은 성공했을 땐 좋지만 실패하면 위험하다.

당연히, 그러한 방식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고 모르칸쉬도 여러 번 실패를 겪었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던 건, 뭔가 틀어진 것 같음을 느낄 때 과감하게 ‘손절’한 덕분이다. 당연히, 체면 같은 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대답에 킬가레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흐, 꽤 독특한 사고방식이군…… 근데, 좀 착각하는 것 같군. 이건 함정이 아니네. 나도 <순간이동>을 못 쓰는 것은 마찬가지야. 그리고, 이 존재는 엄연히 ‘내가 가진 힘’이고.”

뒤에 서 있는 안개의 거인을 가리키는 킬가레스, 이어서 보란 듯이 안개의 거인의 몸 위로 황금빛 사슬이 나타난다.

“이건, 울락 순교회의…….”

“<지배의 힘>이군.”

“잘 아는군?”

울락 순교회의 세력이 끼치는 민폐에 뉴 송파구의 이종족과 하층민들의 원성이 얼마나 쏟아졌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모르칸쉬가 숨을 고르며 포션을 하나 더 까먹고 있는 동안, 킬가레스는 안개 거인의 샛노란 외눈을 올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시르카그’라고 하는 지옥의 존재네. 케냐에서 복속시킨 울락 순교회 한 계파에서 봉인하고 있던 놈인데, 워낙 강력한 존재라서 제대로 통제를 못 하고 족족 희생양만 바치고 있던 걸 내가 제압했지. 보다시피 매우 강력하고.”

“그러셔?”

-착!

빈정거리며 모르칸쉬는 맞는 순간 놓친 도끼를 다시 불러들여 손에 쥐곤 숨을 골랐다.

킬가레스는 무기가 없는 상황. 한번 붙어본바, 놈은 맨손 격투에 그리 능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기는 건 솔직히 힘들다만…… 뚫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싸울 준비하는 모르칸쉬의 모습에 킬가레스는 쓰게 웃었다.

“같은 전쟁 군주를 상대론 처음 싸워보는데…… 역시, 그냥 싸워선 이기기 힘들군. 기교에서부터 차이가 커.”

“흐, 실력이 떨어진다고 고백하는 거냐?”

모르칸쉬의 조롱에 킬가레스는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난, 자네들과는 달리 ‘사제’ 출신이야. 뭐, 힘이 워낙 좋아서 반쯤 전사로도 활동했지만. 어쨌든 근접전에서 지더라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지.”

“사제님이시다? 확실히, 아주 잡스럽게 권능을 쓰더군.”

“그래서 날 ‘교단 파괴자’나 ‘통합의 주먹’이라 부르는 이도 많…….”

대답하는 킬가레스를 향해 다시 한번 도끼를 던지며 모르칸쉬는 돌진했다.

그에 킬가레스는 몸을 구르며 뒤쪽에 꿈틀거리는 안개의 거인 속으로 피한다. 그 대처에 모르칸쉬가 발을 멈추며 얼굴을 구기는 가운데, 킬가레스는 안개 속에서 씁쓸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다른 권능과 근접 전투술로 제압해보려 했는데…… 인정하겠네. 자넨 그렇게 제압할 수 없겠어. 그러니, 나도 ‘진지하게’ 가지. 좀 비겁하게 보일지라도 말이야.”

그리고, 다시 안개 밖으로 나온다. 그런 그의 왼손에는 허리 벨트에 걸려있던 두꺼운 경전이 펼쳐져 들려 있었는데, 그 페이지에서 녹색 불길이 일어나더니-.

-■■ ■■……!

뒤에 서 있던 안개 거인의 외눈, 노란색 발광체가 흔들리며 ‘불길한 힘’이 경전으로 빨려 들어가고 킬가레스의 몸이 경전을 든 손에서부터 시커멓게 물들어간다.

그와 함께 피어오르는 짙은 유황 냄새.

지옥의 악마와 관련된 ‘불길한 징조’에 모르칸쉬가 던졌던 도끼를 다시 불러들이는 가운데, 잠깐 사이에 완전히 흑색 피부로 변한 킬가레스는 불길한 녹색으로 불타오르는 눈으로 모르칸쉬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자네, ‘울락 순교회’의 기원을 알고 있나?”

“내가 알아야 하나?”

이전의 커다란 울림통 같았던 호쾌한 목소리와는 다른 ‘쇳소리에 가까운 불길한 음성’, 모르칸쉬는 대꾸하며 다시 도끼를 던졌다. 하지만, 킬가레스의 몸은 그대로 도끼를 뚫고 안개처럼 흩어진다.

“……!?”

어느새 감각이 일그러져 있었다.

<고문>의 효과에 몸이 심하게 느려져서 통각을 좀 둔하게 하는 진통제를 사용했더니 벌어진 참사, 황급히 던진 도끼를 불러들이며 마지막 해제 포션을 꺼내 씹는 가운데 킬가레스는 2층 난간 쪽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먼 옛날, 미궁에 ‘울락’이라는 사제가 있었다네. 어떤 신인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지만, 부족이 ‘세로쉬’ 대신에 다른 미궁의 신을 섬기기 시작하자 그는 눈물을 머금고 세로쉬를 따르는 부족민을 모아서 배신자들을 징치하려 했지. 하지만…… 오히려 형편없이 밀렸다네.”

“…….”

“사실, 당연한 결과야. 상대방을 해하는 ‘세로쉬의 권능’은 같은 오크에겐 그 효과가 대폭 감소하니까. 설령, ‘다른 신을 섬기는 오크’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에 그는 혼자 도망쳐서 변절한 동포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징치하기 위한 수단을 찾기 시작했지.”

왼손에 펼쳐진 경전이 지옥의 광채를 뿜어내고, 킬가레스의 오른손이 녹색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증오의 불길 (Hatred Flame)

레벨 5 악마/화염

시전 소음 : 10

주문 소음 : 15

대미지 공식 : 3d(10/3+SP/6) 화염/음에너지

최대 SP : 200

최소 소모 마력 : 3, 증오의 정수

특이 사항 : <점착 화염> 상태 이상-매 1턴마다 2d4 화염/음에너지 대미지, <부여술> 수준에 따라 지속시간 증가.

효과 : 제물에서 추출한 ‘증오의 감정’을 ‘마력적인 불길’과 섞어서 던지는 화염 마법. 흉악한 화염 피해와 함께 그 불길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끈적하게 적에게 달라붙어 계속 불길을 일으킨다. 지옥의 악마가 고안해냈으며 그 위력이 마법 난이도에 비해 매우 절륜하다.

다른 악마술 마법처럼 사용자의 심성을 서서히 무뎌지고 사악하게 만들기에 사용에 주의가 필요하다.

곧바로 킬가레스가 그 녹색 불길을 던지고 모르칸쉬는 본능적으로 뒤로 빠졌다.

-끼아아아아악!

모르칸쉬가 있던 자리에서부터 치솟는 녹색 불벽, 그 속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갇힌 것처럼 타오르는 얼굴들이 꿈틀거리며 비명이 울려 퍼진다. 그에 모르칸쉬가 식은땀을 흘리는 가운데, 난간 위에서 킬가레스의 말이 이어졌다.

“같은 오크를 징벌하기 위해서 세워진 분파, 그게 울락 순교회의 시초야. 최소한 내가 파악한 울락 순교회 계열 지파들의 기록을 모아서 확인한 바는 그래. 그들이 구사하는 <악마술>은 같은 오크에게도 치명적이지.”

“…….”

“이번엔 쉽지 않을 거야.”

되돌아온 도끼를 손에 쥔 채, 모르칸쉬는 대꾸 대신에 이를 악물고 사악한 힘에 이글거리는 킬가레스를 향해 도약했다.

5.

도망치는 모르칸쉬에게 불시의 기습을 한 뒤, 바소즈는 킬가레스가 도착한 것을 보고 황급히 건물 밖으로 물러났다.

전쟁 군주들 간의 싸움, 그 여파에 휩쓸렸다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이 될 게 뻔했다. 밖으로 나온 바소즈는 숨을 고르며 결판이 나기를 기다렸다. 회색 안개에 가려져 있음에도 느껴지는 불길한 기세, 쇠끼리 부딪치는 굉음과 피 끓는 전쟁 군주의 함성. 그렇게 몇 분가량 지나고-.

-저벅저벅.

승자가 가려졌다.

건물 입구의 회색 안개가 잦아들고 킬가레스가 짧은 검은색 단망토를 휘날리며 밖으로 나온다. 그런 그의 오른쪽 어깨 위에는 새카맣게 타서 초연(硝煙)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축 늘어진 모르칸쉬가 걸쳐져 있었다. 그에 바소즈는 재빨리 앞에 부복하며 고갤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킬가레스 님.”

“그래, 너도 잘했다. 자칫 잘못하면 눈앞에서 놓칠 뻔했어.”

치하의 말을 하며 킬가레스는 한숨과 함께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그렇게 거침없이 도망칠 줄이야. 먼저 가서 발을 붙잡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제한 범위 밖으로 나갔을 거다.”

“저도 관중석에서 볼 때 좀 당황했습니다. 다행히, 건물 구조도를 익히고 있었기에 어디서 나올지 예상하고 대기할 수 있었지만요. 모두 세로쉬님의 보우하심입니다.”

“그래, 세로쉬님의 보살핌이지.”

신실한 신도의 말에 흐뭇하게 고갤 끄덕인 킬가레스는 이어서 어깨에 걸친 모르칸쉬를 바닥에 내려놓고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갑옷을 보며 쓰게 웃었다.

“역시, 전쟁 군주들 상대로는 울락 순교회의 <악마술>을 써야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군. 쉽지 않아.”

“그래도 이긴다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양새가 좋지 않지. 악마를 통해 사용하는 불길한 ‘지옥의 힘’이니까. 그래서 울락 순교회가 대다수의 오크들에게 이단 취급당하는 거고. 나중에 제롬을 사로잡을 때는 좀 외진 곳에서 해야겠어.”

턱을 매만지며 고갤 주억이는 킬가레스, 바소즈는 기절한 모르칸쉬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모르칸쉬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솔직히, 좀 많이 얄밉지만…… 죽일 순 없지. 세로쉬님의 축복을 받은 존재니 말이야. 일단, 치료는 어느 정도 해놨으니 방해하지 못하도록 미궁에 던져버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근처 ‘붉은 계단’에…….”

바소즈의 말에 킬가레스는 고갤 저었다.

“아니, 붉은 계단은 너무 위험해. 혹여 정신을 잃은 채로 너무 심층으로 떨어지면 전쟁 군주라도 위험할 수 있어.”

“그럼……?”

“변천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변천(變天), 미궁 속 사물이 무작위로 다시 재배치되는 현상. 그에 바소즈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틀 전에 있었으니까 빠르면 3~4시간 정도 뒤에 벌어질 겁니다.”

“그래? [시르카그!]”

힘이 담긴 말을 꺼내는 킬가레스, 이어서 회색 안개가 그 주위에 나타나고 킬가레스는 모르칸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불길한 악마어를 중얼거렸다. 정신을 잃은 모르칸쉬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는 가운데, 킬가레스는 손을 떼며 고갤 끄덕였다.

“악몽을 심어줬으니 앞으로 5~6시간은 못 일어날 거야. 변천 직전에 미궁으로 던져버리도록. 1층이면 별로 위험하지도 않을 거야. 아, 건물 안에 녀석의 도끼가 있으니 부하들에게 회수하게 해서 손에 쥐여 주게. 미궁 안에서 그래도 무기는 있어야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내 거처로 오게. 어떻게 제롬을 제압할지 한번 논의하지.”

고갤 숙이는 바소즈의 어깨를 두드린 킬가레스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자신의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