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58화 (258/350)

제258화

4.

혜영이가 깨어난 것까지 확인한 후, 난 새로 배정받은 1인실 방으로 돌아가-.

“하아~ 끝났다아~!”

옆구리에 낀 해골 투구를 내던지고 상쾌한 기분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사실, 침대도 아니고 벽을 깎아서 만든 석제 평상에 천을 깔아놓은 거지만 그래도 마음이 가벼우니 편~안하다. 이제 폭탄 목걸이는 없어! 성공적으로 배달 완료했으니 다시 올라가면 끝이지! 지도도 있으니 최단 거리로 올라갈…….

“……돌겠네요, 증말.”

행복회로를 돌리다가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뱉었다.

‘오무혁 양반이 맡긴 일’은 다 끝냈다. 이대로 돌아가도 ‘난’ 안 죽어. 하지만, ‘혜영이’가 남아있다는 게 문제다. 나를 따라 위로 올라간다고 하면 걱정이 없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혜영인 여길 쉽게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 이 망한 곳을 어떻게 해보려고 아등바등할 것이 뻔해.

솔직히, 여기에 있는 하프 오크들이 뒤지건 말건 내 알 바 아닌데 혜영이는 다르지. 내 처참한 인맥에 얼마 없는 지인, 같은 동아리의 꽤 친한 선후배……. 아니, 같이 술 먹고 노는 친구에 가깝지? 혜영이를 여기에 던져놓고 혼자 올라가는 건 일말의 양심에 걸려.

근데,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도 아닌데…….

-똑! 똑!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린다. <눈>으로 확인하니 오크 영감과 드워프 친구, 편한 옷차림이 아닌 금방이라도 떠날 수 있게 단단히 차려입은 상태다. ‘들어와요.’라고 말하자 오크 영감탱이는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거, 일은 다 끝나셨소?”

“……뭐, 거진 다 끝났죠.”

“그럼 돌아갑시다.”

곧바로 여길 뜨자고 말하는 영감탱이, 내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자 영감은 숨을 고르곤 고갤 젓는다.

“오늘까지 여기서 쉬기로 한 건 아는데……. 아무리 봐도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소. 반푼이들이 갑자기 분주하게 총을 챙기고 갑옷을 입기 시작했어! 이대로 있다간 휘말릴 게 뻔해! 게다가 그 기사가 했던 ‘전쟁 군주를 소환할 수 있는 팔찌’에 대한 것도 심상찮고!”

“…….”

“좀 피곤해도 휘말리기 전에 빨리 갑시다. 곧 이곳은……. 아니, 뉴 송파구 전체가 위험해질 거요! 안전을 생각하면 최소한 상층으로 몸을 피해야 해!”

이 바퀴벌레 같은 영감탱이, 위험한 곳 하나는 귀신같이 파악해서 피하려고 하네. 근데, 하나같이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도 없다. 나 같아도 혜영이만 아니라면 ‘튑시다!’하고 바로 빤스런 쳤을 테니까.

재촉하는 그 모습에 난 몸을 일으켜 평상에 앉곤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나도 알아요. 근데…….”

-똑똑!

“새벽 오빠, 계심니까.”

또다시 울리는 현관문 노크, 목소리를 들으니 혜영이다. <눈>으로 확인하니 진짜 심상찮게 무장하고 왔네. 또 한숨을 내쉬며 들어오라고 말하자 현관문이 열리고, 헤영이는 떨거지들을 보곤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일행분들이 계셨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나저나 혜영 씨, 왜 갑옷을 입고 있죠?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할 텐데요? 빼내긴 했지만, 방금 전까지 몸에 총알이 11발, 쇠 파편은 셀 수도 없이 박혀 있었어요! 그러니 곱게 침대로 돌아가서 안정을…….”

“안 됨다.”

고갤 저으며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내 말을 도중에 끊는 혜영이, 그리곤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무조건 지금 해야 하는 일임다. 지금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

“그리고, 염치없지만……. 새벽 오빠의 힘이 필요함다.”

그러곤,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단단히 각오한 그 표정을 보니 그냥…… 깊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네. 방독면을 써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영감탱이는 ‘X발!’하는 표정이고. 드워프 친구는……. 오크어를 몰라서 그냥 멀뚱히 있구만.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이마를 주먹으로 짚으며 난 고갤 숙였다.

“도와 달라고요?”

“예.”

“……뭐하려고 하는데요?”

“잡혀간 여자애들과 아이들을 구출할 겁니다.”

예상한 말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난감하기 그지없네. 친구가 ‘보증 좀 서줘!’라고 계약서를 내미는 느낌이 이럴까? 같이 지옥으로 끌려들어가는 느낌이야. 간절히 날 바라보는 혜영이를 향해 난 고갤 저었다.

“혜영 씨. 그건 솔직히 불가능한……. 아니, 정정할게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에요. 마을을 차지한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잖아요. 지상의 핵폐기물 처리 과정에 관여해서 총기류를 밀수한 놈들, 이번엔 전쟁 군주를 소환할 수 있는 팔찌까지 빼돌렸죠!”

“…….”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관여할 만한 수준이 아니에요. 이 마을에 애착이 있는 건 알지만, 포기할 건 포기해야…….”

“포기할 수 없어요.”

단호하지만 동시에 울먹이는 듯한 음성으로 대답하며 혜영이는 날 바라보았다.

“새벽 오빠, 기억은 안 나겠지만 예전에 저랑 이야기한 적 있어요. 그때, 새벽 오빠는 북한의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에 대해 말했었죠. 자신에겐 ‘가족’이나 다름없다면서요.”

“…….”

“저에겐……. 이 마을의 애들이 ‘가족’이에요. 여기에 정착하기 전까지 함께 밑바닥을 떠돌며, 서로에게 의지하며 위협을 헤쳐 나갔죠. 많은 애들이 죽어서 만들어진 곳이 여기에요. 전……. 여길 포기할 순 없어요.”

“동아리 애들이 엄청 걱정하고 있는데도요? 지아라 씨는 도와주지 못했다고 펑펑 울기까지 하던데?”

동아리 애들을 언급하자 살짝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빤히 바라보는 혜영이. 아, 괜시리 마음 약해지게시리…….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는 건 미친 짓이야.

근데, 생각해보니……. 좀 ‘괘씸’하네?

내가 없었으면 혜영이가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아니, 결국 이런 결정을 내린다 하더라도 이렇게 쉽게 결정했을까? 깨어난 지, 불과 한 시간도 안 돼서 적에게 쳐들어가겠다니?! 사실상, 나보고 다 해달라는 말 아닌가!? 간단한 일도 아니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을!

아무리 아는 사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하, 진짜.”

집어치우라는 제스처를 하며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곤 냉랭하게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전 안 가요. 목숨이 아깝거든요. 피곤하기도 하고.”

“…….”

“계속 떼써도 소용없어요. 솔직히, 너무한 거 아닌가요? 애들 몇 명이 죽었지만 마을을 구해주고, 자기 목숨까지 구해준 사람에게 또 목숨 걸고 이것까지 해달라는 건?? 너무 염치가 없잖아요!?”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슴다.”

내 말에 고갤 떨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혜영이, 그러곤 누워있는 날 향해 고갤 꾸벅한 후에 살짝 어깨를 늘어트리곤 몸을 돌려 걸어간다. ……가는 척하면 내가 잡을 줄 아나 본데, 보지 않겠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물론, <눈>은 혜영이를 보고 있었지만.

“아, 새벽 오빠.”

역시나, 혜영이는 나가려고 문고리에 손을 올리기 직전에 몸을 돌린다.

“안 들려요! 듣고 싶지도 않고!”

“그게 아니고 빌려주신 반지는 놓고 가겠슴다. 그리고……. 고마워요.”

다가와서 손에 낀 반지를 빼서 내 옆에 내려놓고 방을 나가는 혜영이. 반지 돌려주러 온 건 몰랐는데……. 좀 찝찝한 마음에 얼굴을 구기고 있는데, 오크 영감탱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후우! 일에 휘말리는 줄 알고 식겁했소! 그나저나 말하는 걸 보니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지인이에요. 얼마 없는 친구이기도 하고요. 아니, 내 착각인가. 좀 섭섭하네요.”

내 대꾸에 묘한 표정을 지은 영감탱이는 다시 날 재촉했다.

“뭐, 어찌 됐든 간에 일 터지기 전에 빠집…….”

“안 가요.”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영감탱이를 향해 난 치미는 짜증에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여기서 하루 쉬자고 했잖아요! 저 피곤해요! 약탈자들 조지고, 혜영이를 구하고, 심지어 수술까지 했어요!”

“…….”

“나가요. 좀 쉬게.”

결국, 한숨을 내뱉은 영감탱이가 나간다. 드워프 친구도 눈치가 있는지 영감을 따라서 나가고. 방해꾼이 전부 사라진 후, 난 걸치고 있던 갑옷과 로브도 다 벗어던지고 담요를 뒤집어썼다. 이래도 잠은 못자지만 멍 때리고 있으면 정신적 피로가 어느 정돈 회복되거든. 그래, 좀 쉬면…….

-근데, 너희들 이렇게……!

“에이씨!”

하지만, 얼마 안 가 밖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혜영이의 목소리에 담요를 박찼다.

어떻게 날 꿰어보려는 심산인 것 같은데 저~얼대 안 속지! 응~ 보지도 않아~ 듣지도 않고~ 그래, 이왕 옷 벗은 김에 샤워라도 하면 되겠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난 속옷을 벗어던지고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솨아아아…….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뜻한 물, 울적하던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물소리가 밖의 소음을 가리는 가운데, 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씻기 시작했다.

5.

“어떻게 됐소?”

“……안 간대요.”

“좀 더 꼬셔 보지 그랬소.”

밖에서 기다리던 드라릭의 질문, 오혜영이 고갤 젓자 드라릭은 작게 푸념했다. 그에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화를 내더라고요. 마을도 구해주고, 제 목숨도 구해줬는데, 또 자기 목숨 걸고 도와달라고 하다니 염치가 없냐면서요. 좀……. 부끄럽더라고요. 반박할 수도 없고.”

“하. 젠장.”

“저희끼리라도 해야죠. 설득할 시간은 없어요. 속도가 생명이잖아요.”

드라릭이 고갤 끄덕이고, 이어서 두 사람은 마을 입구로 향했다.

호리병 모양의 마을의 입구 쪽 작은 공터, 그곳에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하프 오크들이 도열해 있었다. 나름 단단히 무장한 상태, 제각각이지만 갑옷을 입고 약탈자들이 쓰던 소총과 무기들로 무장했지만-.

“오합지졸들이군.”

괜찮은 장비와는 달리 그 사기와 기세는 형편없었다.

옆에 있는 드라릭의 중얼거림에 오혜영도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묵묵히 걸어가 빈 목재 탄약 상자를 얼기설기 쌓아놓은 단상 위에 올라간 후, 그녀는 질서 없이 도열한 동포들의 모습을 훑어보곤 피식 웃었다.

“햐, 진짜 웃기네.”

“…….”

“뭐가 웃긴지 몰라? 너희들 주위의 얼굴을 봐! 하나같이 어떤 꼴인지!”

턱짓하는 오혜영, 그에 하프 오크들이 옆의 동료들을 바라보고 오혜영은 말을 이어나갔다.

“하나 같이 긴장하고 겁에 질렸어! 뭉쳐서 밑바닥을 떠돌던 4~5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 한 표정들이야. 안 그래? 그땐 하나같이 악에 받쳐서 지랄 같은 표정들이었는데.”

“…….”

“나도 그렇긴 하지만 너희들 많~이 유해졌다! 하긴, 가진 게 많아졌으니 달라질 수밖에!”

자조적인 쓴웃음을 내뱉은 후, 오혜영은 곧바로 정색하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근데, 우리 조졌다.”

“…….”

“X발, 이 마을이 세워지기 전! 4~5년 전의 그때로 돌아가게 생겼다고!”

-콰앙!

군화로 바닥을 후려 차는 오혜영, 그와 함께 단상의 일부분이었던 빈 상자 하나가 박살 나서 하프 오크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싸늘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그녀는 보란 듯이 밟고 선 나무 상자들을 발로 톡톡 두드린다.

“탄약 상자야. 우리 마을이 총기 밀수와 관여됐어! 정부에 알려지는 순간 끝장이지! 알려지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총기를 열심히 밀수했던 그 X새끼들이 총을 들고 곧 찾아올 테니까! 마을이 박살 나는 건 피할 수 없다!”

“…….”

“그래, 힘들게 세운 우리의 안식처는 사라질 거야.”

담담한 현실인식, 그에 어떤 이는 침울해하고, 또 어떤 이는 분노하며 다른 이들-처음에 배신자에게 동조했던 사람들을 향해 눈을 부라린다. 그렇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는 순간-.

“근데, 너희들 이렇게 곱게 죽을 거냐!”

사자 같은 오혜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단상 아래에 팔짱을 낀 채로 시큰둥하게 있던 드라릭도 순간 화들짝 놀랄 정도의 기백, 그런 오혜영은 이내 살짝 붉은 아우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여자애들, 너희들 마누라가 끌려갔잖아!? 그리고 아이들도! 이대로 보고만 있을 거야!? 너희들, 마을에 정착하기 전에 한성깔 했잖아! 사람 한 명씩은 다들 죽여본 적 있잖아! 그 새끼들 최소한 엿은 먹여야지!”

“…….”

“아니, 이 마을이 박살 나더라도! 최소한 네 자식들은! 마누라들은 데리고 해체해야지! 겁쟁이처럼 있을 거야!? 새끼들아!”

그와 함께 하프 오크들의 몸에서도 변화가 벌어진다.

전신의 근육이 살짝 벌크 업(Bulk Up)되면서 체격이 커지고, 오혜영처럼 아주 희미하지만 붉은 아우라를 흘리기 시작한다. 알고 봐도 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했지만 드라릭은 그 모습을 포착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투 함성

뛰어난 극소수의 ‘오크’만이 할 수 있는 종족 기술, 투쟁심을 자극하는 오크의 힘이 분명했다. 놀라는 드라릭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혜영은 강렬한 기백을 토해내며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놈들은 ‘전쟁 군주’를 소환할 수 있는 도구를 손에 넣었다! 자칫하면 뉴 송파구 전체가 불타오를 만한 일이야! 아니, 불온한 꿍꿍이로 무기를 밀수하던 놈들이니만큼 100% 불타오를 거다!”

“…….”

“하지만, 이건 우리에겐 기회야!”

강렬하게 손짓하며 그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공(功)을 세우면 마을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설령, 우리가 실패해서 전멸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우리가 벌인 일이 위에 알려지고 오크들이 내려올 테니까! 헛된 일이 아니란 거야! 최소한 위에 우그 타람에 입학한 동료들은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겠지!”

“…….”

“뭐, 공부 잘해서 뽑혀간 잘난 새끼들이 살아남아 우대받는다는 게 좀 배알 꼴리긴 할 텐데…….”

불붙은 투쟁심에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오혜영은 쾌활하게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대신에 이 몸이 같이 가주잖아! 뉴 송파구 반푼이들 중에서 ‘제일 잘난 년’이! 솔직히, 위에 뽑혀간 새끼들 다 합쳐도 나보다 잘나진 않을걸?”

-흐, 하하하!

-대장은 그럴 만하죠!

유쾌하게 대답하며 웃는 반푼이들과 오혜영의 모습을 드라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흥미롭게 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이 있다. 말이라는 것은 단순한 단어의 조합이 아니다. 그 사이의 적절한 악센트, 제스처, 표정 등이 결합될 때 더 강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얻는다. 드라릭은 그런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한때 지근거리에 모셨던, 지금은 성자로 추존받는 ‘무르굴’ 님을 옆에서 보았으니까.

오크 전쟁 군주들은 하나같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만, 그분은 특히 ‘언변’이 탁월했다. 말의 내용은 물론이고, 듣는 이의 가슴을 쥐었다 펴는 어조의 완급, 그리고 적절한 제스처와 기세까지……. 그렇기에 인간들을 설득해 뉴 송파구를 설립하고, 서로 적대하거나 데면데면한 다른 전쟁 군주들을 규합하여 삼두정을 펼칠 수 있던 거였다.

“무르굴…… 님?”

그리고 지금, 불경하지만 저 반푼이 여자의 모습에 생전(生前) 무르굴 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지금 보니 무르굴 님과 얼굴도 묘하게 비슷해 보였다. 남아있는 그분의 친자식들보다도 훨씬 더. 아니, 인간의 나약한 얼굴이 섞여서 이질적이지만 분명……. 여러 부분에서 닳았다! 그렇게 드라릭이 혼란에 빠진 사이, 오혜영은 이글거리는 형제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난 살아도 너희들이랑 같이 살 거고, 죽으면 같이 죽을 거다!”

-우!

“그러니 가자! 가서 우리의 자매들과 자식들을 되찾자! 이게 마지막 기회다! 이번이 아니면 없어!”

발을 한 번 더 굴러서 탄약 상자로 된 단상을 완전히 박살 내며 바닥에 내려선 오혜영은 도끼로 앞을 가리켰다.

“죽어서라도! 우린, 우리 걸 되찾을 거다!”

호령과 함께 그녀가 앞장서고, 분노한 이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멍하니 있던 드라릭도 허겁지겁 꼬리에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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