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55화. 조우
1.
이 ‘소설 속 세상’에 떨어진 뒤, 난 대부분의 시간을 송파구에서 보냈다.
근데, 말이 송파구지 그냥 신도시 시가지나 다름없어. 내가 알고 있던 유명한 랜드 마크-롯데 타워와 올림픽 경기장&공원은 없고 죄다 새로 지어진 건물들밖에 없었으니까. 솔직히, 먹고 살기 바빠서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고.
“오오…….”
그리고 지금, 난 ‘진짜 송파구’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 이곳에 떨어지기 전, ‘소설 주인공’을 관찰했을 때 송파구를 한번 봤었지만 그때는 주인공에게 시선을 집중하느라 경관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상에서 떨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평범해 보였고.
하지만, 16년이 지난 지금의 송파구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커다란 돔에 갇힌 도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직도 우뚝 솟은 ‘롯데 월드 타워’다. 그동안 유지보수가 전혀 없었을 텐데도 신기하게도 무너지지 않고 그 위용을 과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건물들도 식물이 자라거나 부서졌지만 아직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고.
그곳에 괴물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이종족들이 살아가는 ‘단절의 도시’와 전혀 다른 느낌, 인류 멸망 후에 식물로 뒤덮인 도시라고 해야 하나? 문명의 편린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생생한 야생’이 무너진 문명의 흔적에서 번영하고 있다. 이거 완전 사파리 같…….
“……아니, 이럴 때가 아니죠.”
이국적인 풍광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지하 송파구’에 진입한 목적을 상기하며 난 혜영이가 향한 ‘올림픽 공원’을 주시했다.
수 km 떨어진 이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자욱하게 깔린 회색의 안개
혜영이가 마을에 남겨놨던 자료에 의하면 뭔가 마법적인 거라 그냥 안으로 들어가면 길을 잃는다고 했다. ‘특별한 랜턴’이 있어야만 길을 잃지 않는다고. 혜영이와 기사님은 나중에 올 오크 병력을 위해 저 안개를 걷거나 랜턴을 더 얻으러 갔다고 써 놨다. 내가 보기에는 저건…….
악마다.
서강 아저씨가 한번 소환해서 보여줬던 ‘임프’라는 것과 유사한 아우라. 물론, 그 규모나 세기는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강력하지만 말이다. 겉으로만 봐도 만만찮은 게 실감되는구만. 일단, 근처에 가서 혜영이를 찾아봐야겠다. 뭣하면 기절이라도 시켜서 억지로 빼내야지.
“흡!”
<눈>으로 공원까지의 경로를 훑은 후, 옆쪽 건물의 창문 난간을 향해 튀어 올랐다.
과격한 움직임을 하자 기껏 몸을 덮은 <투명화>가 무너지며 물감이 섞이는 것처럼 심하게 일그러지지만 괜찮다. 파쿠르하듯이 연거푸 빠르게 건물을 오르며-.
-푸슈슈슛!
오른손을 뻗어 옥상을 향해 <독침>을 연발로 쏴 갈겼다.
“케륵!?”
“켁!”
솟구치다가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느긋하게 오크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괴물들에게 쏟아지는 <독침>들. 난데없는 봉변에 옥상에 있는 괴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리는 사이, 난 옥상에 올라가 곧바로 다음 건물의 창문을 향해 도약했다.
2.
올림픽 공원에 진입한 뒤, 드라릭은 주위를 둘러보며 살짝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일행을 덮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랜턴에서 불과 3~4m 경계를 두고 일렁이는 안개, 그 모습은 마치 먹잇감이 울타리에서 나오기를 호시탐탐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불길한 광경에 일행들은 신경이 곤두섰지만-.
안개 너머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장막을 덮은 것처럼 한 치도 보이지 않았고, 귀를 기울여 봐도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으며, 바람 한 점 불지 않아서 냄새 또한 느낄 수 없다. 마치, 안개 너머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처럼 느껴졌지만 랜턴을 들고 나아가면 새로운 것들이 있었다.
그 감각과 현실의 괴리가 기묘할 정도의 섬뜩함을 자아냈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옆에서 걷는 오혜영의 질문, 그에 드라릭은 신중하게 근처의 보도블록 모양과 대충 걸어온 거리를 계산해 입을 열었다.
“아직 한참 가야 한다. 이 길에서 한 번 꺾어야 해.”
“흐음.”
“우리는 소수고 안개 때문에 섣부르게 움직일 수도 없다. 그나마 기습으로 점령이 가능한 조그만 건물 위주로 방문해야 해. 그나마도 총기와 폭약만 믿고 도박하는 수준이지.”
드라릭은 담담히 대꾸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고작 5명으로 움직이는 척후대, 적의 병력이 정확히 얼마 있는지 모르는 만큼 드라릭으로선 신중을 기했다. 그 대답에 다른 하프 오크들도 인내를 되새기며 다시 발걸음을 내디딜 때-.
“……!!”
“……!”
앞이 돌연 ‘확!’ 밝아진다.
그와 함께 일행의 앞에 정체불명의 집단이 나타났다. 이쪽의 인원과 똑같은 5명의 오크들, 중앙에 서 있는 검은 로브의 오크가 푸른 불빛의 랜턴을 들고 있었고, 그런 그의 주위를 4명의 전사들이 감싸고 있었다. 갑작스런 조우에 두 집단 모두 당황해서 움찔했지만-.
혹여, 아군인가 싶어서 주춤거린 상대방과는 달리 이쪽은 주춤거릴 이유가 없었다.
-타다다다당!
-타당! 탕!
한 박자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손에 쥔 소총을 갈기는 하프 오크들, 쏟아지는 7.62mm 탄환에 하체와 가슴팍 쪽을 맞은 오크들은 휘청거렸다. 튼튼한 오크, 거기에 마력 각성자답게 죽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입은 피해에 흔들렸고-.
-콰직!
-퉁!
그 틈에 드라릭과 오혜영이 돌진했다
드라릭의 도끼창이 한 전사의 목을 가르는 사이, 오혜영은 방패를 앞세워서 검은 로브의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로브의 오크는 비틀거리면서도 랜턴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뻗으며 뭔가를 하려 했지만-.
-스걱!
“끄아아악!”
오혜영의 도끼가 손목을 날려버린다.
이어서 물 흐르듯이 발길질을 날리며 로브 차림의 오크를 쓰러트리고 짓밟는다. 옆에서 호위들이 어떻게 대처해보려 했지만, 한번 총격을 가한 하프 오크들은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서 소총을 난사했다.
-타타탕! 타앙!
-탕! 탕!
방금 전과는 달리 얼굴 쪽에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총격, 오크 호위들은 머리가 터져나가고 하프 오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리며 총구를 내리자.-
“경계를 늦추지 마! 적이 더 나올 수도 있어!”
“네, 네! 대장!”
오혜영은 사납게 소리쳤다.
그 호령에 하프 오크들이 허겁지겁 소총의 빈 탄창을 갈아 끼우며 사방을 경계하고, 드라릭은 천천히 허릴 숙여 검은 로브의 오크가 놓친 랜턴을 집어 들어들었다. 그리고, 오혜영은 허릴 숙어 쓰러진 검은 로브의 오크의 목덜미에 도끼를 들이밀었다.
“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던 가지?”
“쿨럭! 쿨럭쿨럭! 으…….”
폐가 상한 듯, 붉은 피를 토해내는 검은 로브의 오크. 이어서 그는 오혜영을 올려다보며 혐오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역겨운 모조품……. 녀석! 세로쉬 님의 천벌이……!”
-퍼걱!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는 오크의 눈, 그 모습에 옆에 있던 드라릭이 다짜고짜 그 머리에 도끼창을 박아 넣었다. 오혜영이 항의하듯 얼굴을 찌푸리자 드라릭은 가래침을 뱉곤 고갤 저었다.
“세로쉬의 사제다. 이들에겐 심문은 통하지 않아. 순교는 곧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 이들이야.”
“……전사를 노렸어야 했군요.”
“그래, 호위를 노렸어야 했어.”
오혜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시신에서 발을 떼고, 드라릭은 쪼그리고 앉아 시신을 살폈다. 사제답게 품 안에 세로쉬의 징표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딱히 세력을 특정할 만한 소지품은 없었다. 그에 드라릭은 혀를 차며 다시 일어서는데-.
“킁킁, 킁.”
“……뭐하는 거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랜턴을 들고 있는 짐꾼, 방금 전 교전에서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녀석이 쪼그리고 앉아서 죽은 호위들의 신발의 밑창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그 질문에 오혜영은 씨익 웃었다.
“제가 괜히 정호를 합류시킨 게 아니에요. 얘는 냄새를 아주 잘 맡거든요.”
“냄새?”
“예, 그 덕에 밑바닥 생활을 할 때 위기를 몇 번 넘겼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신발 밑창을 보며 킁킁거리던 하프 오크는 이내 고갤 끄덕이며 오혜영을 향해 고갤 돌렸다.
“대장, 이 녀석. 최근에 커다란 곤충을 잡았는지 밑창에 투명한 체액이 묻어있어.”
“추적할 수 있겠어?”
“응,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아, 대장. 바닥에 코를 대보면 희미하지만 그 체액의 냄새가 나.”
그에 그녀도 고갤 끄덕이곤 드라릭을 바라보았다.
“놈들이 왔던 곳을 역추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오혜영의 제안에 드라릭은 침음성을 흘렸다. 잘하면 흉수 놈들이 모인 정확한 지점을 파악할 수 있는 제안, 나중에 오크 군대가 온다면 크게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위험 또한 커질 터. 잠시 고민하던 그는-.
“좋아, 그쪽으로 가지.”
승부수를 던졌다.
3.
모르칸쉬를 쓰러트린 후, 킬가레스는 거처로 돌아와 그간 기획하던 계략들을 모조리 탁자 위에서 쓸어내렸다.
지하 송파구에 도착한 후, 지금까지 칩거하며 계략으로 뉴 송파구를 분열시켰던 것은 서로 앙숙으로 알려진 뉴 송파구의 두 ‘전쟁 군주’가 실은 매우 긴밀한 사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눈치채지 못한 듯 했지만 킬가레스는 여러 정황 증거와 인간은 살짝 이해하기 힘든 오크의 사고방식으로 그러한 사실을 추론해냈다.
그래도 ‘신앙’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거리낌 없이 접촉했겠다만……. 그가 보기에 두 전쟁 군주 모두 신앙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오히려 신앙을 껄끄러워하면서 먼저 도착한 ‘신앙이 충만한 신도들’을 은연중에 탄압하려고 하려는 자들. 특히, 모르칸쉬는 겉으론 신앙을 긍정하지만 지금껏 해왔던 행보를 보면 신앙의 세력을 끊임없이 억누르고 와해시켰다. 그러한 추론은 올림픽 공원으로 정찰 나왔던 요원인 ‘바소즈’를 포섭하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그가 나타난다면 두 전쟁 군주가 동시에 적대할 게 뻔했다.
아무리 ‘신앙’이 그의 승리를 점친다고는 하지만, 두 전쟁 군주를 상대하는 것은 껄끄러웠기에 킬가레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움직였다. 혹여 들키지 않을까 세력의 확장은 최소한으로 줄였고, 두 전쟁 군주의 세력을 분열시키며 자신이 등장할 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모르칸쉬가 쓰러진 지금, 그러한 계략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내 호출을 받고 와줘서 고맙네, 형제들.”
한때, ‘올림픽 홀’이라 불리던 건축물. 넒은 강당에 드문드문 서 있는 수십 명의 오크들을 향해 킬가레스는 감사의 말과 함께 고갤 까닥였다.
하나같이 강한 개성을 지닌 오크들
감히 ‘킬가레스’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같이 ‘유입 오크’들 사이에서 나름 거물 취급을 받는 중진급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킬가레스가 포섭한 ‘신앙의 형제’들이기도 했다.
종단 사이의 갈등은 접어두고 성지(聖地)를 밟기 위해,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모인 신심 깊은 이들.
열망을 담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형제들의 모습에 킬가레스도 흡족하게 웃었다.
“몇몇 이들은 이미 들었겠지만 몇 시간 전에 모르칸쉬가 내 손에 제압당했네.”
“…….”
“그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사라진 거야. 그리고, 더 이상 숨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쿠웅!
선언하듯이 킬가레스는 들고 있던 거대한 철퇴를 지면에 꽂았다. 그 선언에 한층 더 눈을 빛내는 형제들을 보며 킬가레스는 회한에 잠긴 것처럼 두 눈을 감았다.
“뉴 송파구의 전쟁 군주들은 인간들과의 충돌을 두려워해서 신앙을 끊임없이 압박했지.”
“…….”
“이해는 한다. 신앙이 강해지면 ‘인간 세력’과 껄끄러워질 테니 말이야. 그래, 나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지.”
고갤 끄덕이다가 킬가레스는 얼굴을 굳히고 감았던 눈을 뜨며 단호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이 없기에 몰랐다!”
“…….”
“수많은 교단으로 갈라졌지만 세로쉬를 찾는 우리의 본능이 증명한다! 우리는 이성이 아닌 신앙 아래에 단결한다!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인가?! 무르굴이 이성적으로 유혈의 거인에 맞섰던가? 아니! 아니다! 신앙, 믿음으로 해낸 것이다.”
울림통처럼 강당을 전체를 울리는 킬가레스의 목소리, 열망이 이글거리는 신앙의 동포들의 보며 킬가레스는 당당히 선언했다.
“오늘부터, 우리는, 통합을 위한 다음 단계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