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61화 (261/350)

제261화

그 선언과 함께 킬가레스의 몸에 새겨진 황금빛 진언들이 일제히 빛났다.

그의 믿음을 증명하듯 웅혼하고 찬란한 ‘오크만을 위한 신성’, 거기에 ‘전쟁 군주 특유의 존재감’이 뒤섞이니 킬가레스를 중심으로 찬란한 여명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다른 오크들이 그 ‘선지자’의 모습에 압도당해 하나둘씩 무릎을 꿇는 가운데, 킬가레스는 강당 위에 서서 나지막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입을 열었다.

“……세로쉬여.”

그리고, 바소즈는 강당의 입구 쪽에 서서 성호를 그으며 벅찬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상의 인간들이 그린 종교화에서 나올 법한 광경. 하지만, 그 감동과 위엄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그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계획’이 자신과 대화하면서 나눴던 것이라면 더더욱 벅차다. 그렇게 바소즈가 역사의 한 장면을 보고 있다고 감격하고 있던 도중-.

“거기, 자네. 바소즈……라고 했던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가래 끓는 목소리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다신 없을 감동의 순간을 망치다니! 짜증이 치밀었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이의 목소리였기에 얼굴을 찌푸리며 고갤 돌아보았다. 검은 로브를 걸친 음침한 늙은이, 그 몸에선 희미한 유황 냄새가 풍기고 눈은 지옥의 녹색 광채가 희미하게 번들거린다.

“……왜 그러십니까, 시로카 님.”

시로카, 울락 순교회 계열 지파의 고위 사제. 그동안, 킬가레스 님을 근거리에서 모시며 참모 역할을 하던 늙은이. 자신 밑에 소속된 부하들을 은연중에 떠보며 소문을 취합해본 바, 세로쉬보다 악마를 더 숭배하는 것 같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지독한 놈이었다.

바소즈가 바라보자 시로카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가죽을 보란 듯이 펼쳤다.

“아, 다름이 아니고. 자네가 급히 해줬으면 하는 일이 생겨서 말일세.”

<악마술>로 만들어졌는지 약한 유황 냄새를 풍기는 가죽, 그 위에는 올림픽 공원 내부의 형상이 대충 그려져 있었다. 시로카가 주문을 웅얼거리자 유황 냄새가 진해지며 지도 곳곳에 푸른색 점이 찍히기 시작한다.

“이건, 시르카그의 속에 있는 랜턴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표현해주는 지도라네. 그런데,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하나 있어.”

“……어떤 것이죠?”

“임무를 받고 떠났던 일행이 외부에서 온 일행과 접촉한 뒤에 함께 움직이고 있더군.”

깡마른 손으로 그 점들 중 하나를 짚는 시로카, 그가 짚은 푸른 점은 자세히 보니 2개가 겹쳐 있었다. 그에 바소즈도 얼굴을 굳혔다. 랜턴을 받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 ‘랜턴을 든 이들끼리 무리지어 함께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라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그런 바소즈의 반응에 시로카는 끌끌거리며 말을 이어나간다.

“이 외부에서 온 푸른 점은 처음부터 좀 이상하게 움직였지. 형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라서 헤매는 건가 싶었는데……. 지금 경로를 되짚어 보니 병력을 배치도 하지 않은 작은 폐허들 위주로 방문했더군.”

“침입자일 확률이 높다는 거군요.”

“그래, 맞아. 이 시기에 랜턴을 들고 있는 침입자라니 심상치 않지!”

다시 지도를 둘둘 말아 품 안에 넣으며 시로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다.

“놈들은 현재 길을 따라서 병영 쪽으로 이동 중이야. 전사들에게 말해뒀지.”

“……그럼 된 거 아닙니까?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오, 아니지. 전사 놈들은 충성스럽긴 하지만 ‘무식해서’ 그냥 놈들을 죽여 버릴 게 뻔해.”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몸을 숙여 바소즈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그 ‘요원’이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 심문 기술도 가졌겠지?”

“…….”

“그놈들을 사로잡아서 심문을 해주게. 이 늙은이는 고통을 주는 것밖에 몰라서 말이야. 한번 알아보고 싶거든. 뉴 송파구에만 있다는 ‘요원’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야.”

이건 견제였다.

경쟁자를 고꾸라트리기 위한, 그리고 괴롭히기 위한 견제. 이곳에서 있는 이들 모두 킬가레스 님의 부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서열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번에 큰 공을 세우고 나서 참모로서 한번 활동하니까 이러는 거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바소즈는 알겠다고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시로카가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하니까. 게다가, 철저하게 뉴 송파구 내부에서 활동한 덕분에 이곳의 이들에게 자신은 그저 ‘막 굴러들어온 돌’일 뿐이었다. 함부로 거절하기엔 자신의 권위와 명분이 부족했다.

“크크, 그럼 잘 부탁하겠네.”

음침하게 클클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는 시로카, 이어서 놈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곤 대놓고 감탄하며 킬가레스 님의 연설을 듣기 시작한다.

“…….”

그 모습을 보며 ‘나중에 반드시 저 늙은이를 짓눌러 버리겠다.’고 살짝 이를 간 후, 바소즈는 몸을 돌려 사납게 건물 밖을 향해 발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4.

적과 조우한 후, 척후조는 적이 출발했던 방향을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갈림길 앞에서 짐꾼 역할을 하던 하프 오크가 바닥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사이, 드라릭은 오혜영이 건네줬던 낡은 공원 팸플릿을 꺼내 확인했다. 지금까지 향하는 방향으로 계속 가면…….

“그만, 어디로 가는지 파악됐으니까 냄새는 더 안 맡아도 된다.”

“그럼 습격을 준비할까요?”

한 하프 오크가 짐꾼이 내려놓은 가방 옆에 매달린 로켓 발사기를 응시하자, 드라릭은 고갤 저으며 다가가 가방을 뒤져서 마을에서 가져온 구형 스마트 폰과 셀카봉을 꺼냈다. 그러곤 물어봤던 하프 오크에게 던졌다.

“일단, 정찰이 먼저야. 이 셀카봉을 안개 너머에 뻗도록. 바닥 쪽에 바짝 대서 들키지 않게. 그러면 들키지 않고 안전하게 정탐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안개 때문에 촬영이…….”

“놈들의 거처엔 안개가 없을 확률이 높다. 이런 불길한 안개를 계속 곁에 두고 생활할 수는 없을 테니까.”

오혜영이 턱짓하자 하프 오크는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셀카봉에 스마트 폰을 끼우곤 안개벽 앞으로 다가갔다. 비명을 지르는 얼굴이 솟구치는 것 같은 꿈틀거리는 안개, 대단히 껄끄러웠지만 하프 오크는 허릴 숙여 천천히 스마트폰을 속에 넣었다 뺐다.

“없습니다.”

“1m씩 이동. 그리고 계속해라.”

천천히 셀카봉을 찔렀다 빼고, 그 녹화 영상을 확인하며 척후조 일행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응?”

“왜 그러지?”

“아니, 뭔가 셀카봉에 걸린 느낌이 나서-.”

셀카봉을 찌르곤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는 하프 오크, 그 순간-.

-피융!

-피유웅!

바람 빠지는 소음과 함께 허릴 숙이고 셀카봉을 들고 있던 하프 오크가 ‘털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렇게 엎어진 그의 얼굴에선 검붉은 피와 희끄무레한 뇌수가 아스팔트를 적셨다.

-팅! 텅!

“으으으윽!”

“켁!”

오혜영은 운 좋게도 들고 있던 방패로, 드라릭은 착용한 전투복 곳곳에 끼워진 티타늄 강판으로 그 공격을 튕겨냈지만, 다른 하프 오크들 또한 돌연 하반신이나 복부 쪽에서 올라오는 충격과 통증에 휘청거렸다.

한번 맞은 순간, 드라릭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공격’의 정체를 파악했다.

“제기랄! 안개 너머에서 총을 쏘고 있다! 소리까지 차단하니까 총성이 안 들린 거야!”

“내 뒤로 모여!”

총탄이 쏟아지는 방향을 향해 방패를 들어 올리며 몸을 숙이는 오혜영, 그에 하프 오크들이 쩔뚝거리면서 그 뒤로 숨었다. 한 명은 허리를 숙이고 있던 터라 즉사했지만 나머지는 살아있었다. 하프 오크들이 입은 총상의 위치를 보면서 드라릭은 상황을 파악하곤 입을 열었다.

“사격이 들쑥날쑥한 걸 보면 놈들도 우리의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가슴팍 아래를 노리는 걸 보면……. 사로잡을 생각이다!”

“……!”

“곧 총격이 끝나고 놈들이 올 거다. 준비……. 아니, 도망쳐야 한다!”

티타늄 방탄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며 외치는 드라릭, 그의 경고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성이 그치고 돌연 앞쪽의 시야가 밝아지며 적들이 튀어나왔다.

-쾅!

이전에 마주쳤던 놈들과는 달리 커다란 금속 방패를 앞세운 전사들, 드라릭이 도끼창을 내리찍었지만 전사들은 방패를 뻗어 그 공격을 받아냈다. 방패에 박힌 도끼창, 평상시 같았다면 연이어 도끼날을 방패에 걸고 끌어내리듯이 당겨 가드를 억지로 뜯어냈겠지만-.

“끄응.”

이전에 무방비로 맞았던 흉악한 권총, 상처는 아물었지만 파편이 속에 남아 뭔가 잘못됐는지 과격하게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밀려들었다. 당기려는 순간, 밀려드는 통증에 살짝 힘이 빠졌고 당기는 타이밍이 어긋났고 드라릭은 결국 신음하며 도끼창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방패 뒤에서 적들의 외침이 울린다.

“여기야!”

“뉴 송파구의 기사다!”

-타다다당! 타당!

이젠 주저앉은 하프 오크들이 연거푸 소총을 갈겼지만, 거의 벽에 가까운 금속 덩어리 방패를 뚫지는 못했다. 이어서 측면에서도 안개가 돌연 걷히며 방패를 앞세운 전사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하프 오크들이 어떻게 대처하기도 전에-.

-철커덕!

딴짓하면 쏠 거리는 것마냥, 전사들은 장전된 소총을 겨눴다.

그에 일행들이 움찔하는 사이, 다른 방향에서도 오크 전사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소총을, 다른 한 손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방패를 앞세운 전사들. 방패와 소총을 제외하면 다른 장비는 질이 떨어졌지만 그 기세만큼은 진짜였다. 드라릭과 오혜영이 등을 맞대며 경계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의 20명에 가까운 전사가 일행을 반원형으로 감싼 뒤-.

“설마, 드라릭 경입니까?”

한 오크의 목소리가 전사들 뒤에서 들려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드라릭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어서 전사들 사이로 한 특수한 가죽 경장을 걸친 오크가 모습을 드러내고 드라릭은 그 낯짝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바소즈……!”

“목소리를 들어보니 진짜 드라릭 경이군요. 뒤에는…… 반푼이들이고.”

피를 흘리며 주저앉은 하프 오크들을 힐끗 보며 말하는 바소즈, 그런 그를 향해 드라릭은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팔찌, 팔찌는 어떻게 했지!”

“걱정 마십시오. 모르칸쉬 님은 무사하시니까요.”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짧게 대꾸하며 그는 하프 오크들을 자세히 살폈다.

“총기로 무장한 걸 보면 마을은 점령당했군요. 등판을 꿰뚫린 기사 하나가 마을을 점령할 수는 없으니 그 ‘용병’이라는 정체불명의 강자를 구슬리셨겠죠. 마을에 150명이나 있을 텐데, 벌써 정리당하다니…….”

“…….”

“다행히, 그 괴물은 여기에 없는 것 같고. 순순히 투항하면 살려드리지요. 반푼이들은…… 힘들겠지만.”

경멸의 눈으로 하프 오크들을 응시하는 바소즈, 그에 드라릭은 투항하는 대신에 도끼창을 꽉 움켜쥐었다. 그에 바소즈가 고갤 저으며 손을 들어 올리려고 하는 순간-

“……?”

짙은 회색의 안개 속에서 돌연 황금빛 섬광이 번쩍였다. 벼를 추수하는 농부의 낫처럼 정확하게 전사들의 목을 가르고 빠져나가는 황금빛, 이어서 한 박자 늦게-.

-촤하아아악!

-촤학!

“……!?”

“!!”

한 쪽을 포위했던 5명의 오크 전사들의 머리통이 일제히 허공에 떠오른다. 강렬한 피분수가 솟구치는 것은 덤. 돌발 상황에 기겁하면서도 전사들은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총구를 겨눴지만-.

“이, 무……!”

오히려, 그들의 등 뒤에서 회색 안개를 뚫고 검은 누더기 로브의 괴인이 튀어나온다.

순식간에 파고들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무방비로 드러난 전사들의 등판과 모가지를 쳐버린다. 너무 빨라서 드라릭의 동체시력으로도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것 같은 형상, 이어서 솟구치는 검은 연무를 뱉어내며 주위를 완전히 뒤덮는다.

“독이…….”

“뭉쳐! 뭉쳐서……!”

“밖으로 빠져나…….”

그 흑색 연무 속에서 총성과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불과 2~3초도 되지 않아 잠잠해졌다. 난데없이 벌어진 상황에 일행들이 반응을 하지 못하고 두 눈만 끔뻑이는 가운데-.

“하아, 진짜……. 더럽게 손이 많이 가요.”

작은 푸념 소리와 함께 어깨에 황금빛 창을 걸친 누더기 로브의 괴인이 흑색 연무를 뚫고 일행들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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