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56화. 격돌!
1.
‘푸른 랜턴’은 지옥의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등불이자,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적에게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랜턴을 들면 적에게 실시간으로 그 움직임을 들키는 상황, 그 상태에서 모르칸쉬가 잡혀있는 곳으로 향한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그 움직임을 보고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걸 적이 파악할 게 뻔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랜턴 없이 안개 속을 돌아다닐 수 있는 인간’이 모르칸쉬를 구출하는 거다.
“에휴…….”
홀로 지옥의 안개 속을 내달리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오크 기사님이 되게 언짢아하는 + 이게 잘하는 걸까 고민하는 기색으로 나 혼자 가라고 부탁했을 땐 황당하긴 했다. 근데, 위의 이유를 들으니 반박할 수가 없더라.
……결국, 이렇게 나 혼자 움직이게 됐다.
다른 일행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쉬면서 내가 올 때까지 대기하기로 했고. 그냥 공원 밖으로 나가는 것도 고려했지만, 눈에 찍힌 이상 함부로 움직이는 것도 위험하니 사로잡힌 것처럼 있겠다는 게 기사님의 의견이었다.
진짜, 나만 X 빠지게 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착각일까?
오크 기사님이 나중에 뉴 송파구 정부 측에 말해서 돈으로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돈보다는 ‘혜영이가 제안했던 보상’이 훨씬 더 끌리는데 말이지. 제기랄,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준다고 할 때 받을걸…….
그렇게 이전의 선택에 후회하며 안개 속을 내달리고 있는데-.
“……?”
저 멀리서 ‘신성한 광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킬가레스가 뿜어내는 아우라, 혹시 모르니 계속해서 그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데 놈이 향하는 방향이 심상치 않았다. 혜영이 일행이 있는 장소로 쭈욱 가고 있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목표까지의 거리를 확인했다.
모르칸쉬가 유폐됐다는 미궁의 입구까지 한 2/3 정도 왔다. 이제 1/3만 더 가면 돼. 하지만, 가서 그 양반을 구출하고 시간 내에 혜영이 일행에게 되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힘들다.
킬가레스가 움직이는 속도는 천천히 도보로 걷는 정도지만, 애초에 일행이 있는 곳과 별로 떨어지지 않아서 금방 도착할 거다. 지금 내가 돌아간다고 해도 킬가레스랑 비슷하게 도착할걸? 결국, 모르칸쉬를 구하느냐, 혜영이를 구하느냐 선택해야 하는…….
아니, 생각해보니 그 오크 히틀러가 죽건 말건 뭔 상관이람?
설령, 변천이 일어났어도 그 양반은 죽진 않을 거다. 내가 죽인 오크 놈의 <과거>를 훑은바, 미궁 1층에 떨어지는 거라고 해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고 했으니까. 포기해도 죽진 않을 거야. 하지만, 혜영이는 100% 죽……. 아, 혜영이도 목걸이의 <부활>이 있으니 죽진 않으려나?
“……그래도 혜영이를 구하는 게 낫죠.”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3개의 보석이 박힌 ‘공간이동 반지’, 그중 2개의 보석은 그 빛을 잃고 탁해졌지만 하나는 여전히 광채가 선명하다. 오크 전쟁 군주와 부딪칠 수도 있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시간을 벌다가 도주하는 건……. 충분히 할 만하지.
결정을 내린 후, 난 몸을 돌려 다시 일행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2.
상황이 정리된 뒤, 드라릭 일행은 앉아서 짧은 휴식을 취했다.
불길한 안개 속에서 쉰다는 게 불안했지만 그래도 지금 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죽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한 후, 일행은 푸른 랜턴을 최대한 넓게 펼치고 피가 흐르지 않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너희들 총 맞은 거 괜찮냐? 움직일 만해?”
하프 오크 동료들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오혜영, 그에 하프 오크들은 씨익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당연하죠, 대장! 포션도 마셨는데요?”
“맞아요. 피도 별로 안 흘려서 아주 멀쩡하- 으윽.”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뛰려다가 비틀거리고, 그에 오혜영이 황급히 놀라서 부축한다. 그 촌극에 초코바를 씹고 있던 드라릭은 입을 열었다.
“움직이다가 갑자기 찌릿찌릿 저리나?”
“으으윽……. 네.”
“총탄의 파편이 근육 사이의 신경을 누르는 거다. 나중에 총탄을 제거하면 나아질 거야. 그래도 증상을 보니 심한 건 아니니까 의식적으로 참고 움직여라.”
수많은 전투를 치러온 기사답게 드라릭은 나름 신체적 부상에 대해선 해박했다. 지금 저 하프 오크가 보이는 증상은 총탄 파편이 신경을 누를 때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겪고 있는 것이기도 했고.
그에 하프 오크가 고갤 끄덕이며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는 가운데, 드라릭은 그 하프 오크를 부축하는 오혜영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그쪽은 그 ‘괴물 같은 인간’이랑은 뭔 사이요? 하는 말을 보아하니 꽤 친한 사이인 것 같은데.”
“……글쎄요. 동아리 선배인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혜영은 쓰게 웃었다.
동료들에게서 이미 한새벽의 활약상을 듣긴 했지만 직접 보니 더더욱 놀라웠다. 안개를 뚫고 나와 순식간에 전사 20명을 박살 내다니……. 나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다. 그 대답에 드라릭은 혀를 차곤 어깰 으쓱였다.
“뭐, 그래도 그쪽의 인맥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소.”
“하하, 나중에 갚아야 할 ‘빚’을 생각하면 막막한데요.”
“빚? 그건 그냥…….”
한숨을 내뱉는 오혜영, 그에 드라릭이 대꾸하려는 순간-.
-저벅.
육중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돌연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일행을 강타했다.
짙은 회색의 안개를 뚫고 나오는 거대한 체격의 오크, 신성한 진줏빛 갑주를 입고 한손에는 거대한 철퇴를 쥔 그의 얼굴의 뒤에선 은은한 금빛 후광에 뿜어져 나왔다.
“…….”
“…….”
그 겉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위압감이 넘치는데, 오크들을 굴복시키는 ‘전쟁 군주의 존재감’과 ‘세로쉬의 신성’이 더해지니 일행들로서는 하나의 산이 걸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오크는-.
“……이런 일이 벌어졌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주위에 나뒹구는 오크들의 시신을 보며 입을 뗐다.
담담하게 울리는 음성, 하지만 그 아래에는 선명한 분노가 서려있었다. 그 사실에 하프 오크들은 물론이고, 전쟁 군주를 몇 번 봤던 드라릭도 순간 압도되어 정신을 못 차렸지만-.
“당신이 킬가레스군요.”
오혜영은 정신을 차렸다.
그 대꾸에 킬가레스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매우 훌륭한 장비를 갖춘……. 반푼이, 장비에 비해 실력은 좀 많이 부실해 보였다. 전사 정도? 결코, 기사급은 아니다. 자신의 기세에 압도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지만 그래도 배짱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겠지만 왠지 모르게 드는 호감에 킬가레스는 피식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래, 내가 ‘킬가레스’다.”
“내 마을에 무기를 들여오게 시키신 분이겠고요.”
“내 마을……?”
이어진 그녀의 말에 킬가레스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가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 네가 ‘오혜영’이라고 하는 반푼인가?”
“…….”
“보고를 들은 기억이 나는군. 몇 주 전에 반푼이 마을에서 벌어진 반란의 주역, 하마터면 밀수 통로를 잃어버리고 들킬 뻔했다고 했었지……. 확실히, 비범하긴 하구나. 흥미로워. 더 성장하면 볼만하겠군.”
킬가레스의 칭찬, 그녀의 핏속에서 흐르는 ‘오크로서의 본능’이 그 칭찬을 황송하게 느끼게 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굴복하려고 하는 자신의 본능에 저항하기 위해 일부러 적의를 불태우며 다른 일행들도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사납게 소리쳤다.
“내 동료들은 어디에 있죠?”
“동료?”
“포로를 잡아갔잖아! 여자들과 자식들을, 더 반항하면 죽이겠다고!”
적개심 어린 외침에 킬가레스는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며칠 전에 들었던 마을의 반란 보고와 함께 포로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포로를 어떻게 써먹었는지도.
“아아, 기억났다. 그 일을 말하는 거군.”
그 대답에 오혜영은 불길함을 느끼는 가운데, 킬가레스는 한쪽 어깨에 짊어진 거대한 철퇴를 바닥에 ‘쿵!’하고 내리찍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울락 순교회의 사제들은 악마를 찍어 누르며 지배하여 사역하지.”
“…….”
“하지만, 계속 찍어 누를 수만은 없는 법이란다. 어느 정도 당근을 쥐어줘야 하거든. 그리고 악마는……. 오로지 ‘지성체의 고통과 절망’을 바랄 뿐이고.”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포로로 잡혀갔을 때부터 최악을 가정하고는 있었지만……. 가슴이 철렁하는 감각에 다리를 휘청거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이, 아이들도……?”
“아마, 그렇겠지. 알아서 하겠다고 했으니까.”
“당신은…… 가슴이 아프지 않은 거야? 그런 신성함을 두르고 있으면서?”
그에 오혜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비록 적이지만 그녀가 보기에 킬가레스의 모습은…… 상서롭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핏속에 흐르는 오크로서의 본능이 그가 ‘구원자’라고 속삭였다. 그런 그녀의 대꾸에 킬가레스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런 질문을 하다니……. 미궁을 겪지 않은 세대답구나. 미궁에선 상대의 어린애를 죽이는 것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지.”
“…….”
“그래도 굳이 대답한다면…….”
작게 한숨을 내쉰 후, 킬가레스는 고갤 저었다.
“당연히, 동족이 그런 짓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저린다. 특히, 어린애들이.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근데, 왜……?”
믿기 힘들다는 듯이 물어보는 그녀를 향해 킬가레스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반푼이니까.”
“……순혈 오크도 있었어.”
“반푼이들 사이에서 나온 게 순혈이라? 후후, 농담도 재미있게 하는군.”
오혜영의 대꾸에 나지막이 웃음을 흘리는 킬가레스, 그는 창백해진 그녀를 향해 이글거리는 황금빛 안광을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정말 우리와 같은 오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 어조와 얼굴에 섞인 ‘혐오와 경멸’, 수많은 오크들로부터 배척받는 게 일상이었고 이미 익숙한 그녀였지만 그래도 순간 충격을 받았다. 킬가레스의 경멸과 부정은……. 마치, ‘절대적인 존재’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받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충격에 휘청이는 그녀와 다른 반푼이들을 향해 그는 싸늘하게 선언했다.
“너희들은 역겨운 존재들이다. 인간이나 귀쟁이, 난쟁이 놈들보다 더한 이들이지. 오크의 순수성을 해치는 존재야.”
“…….”
“마음이 아프지 않냐고? 아플 리가 없잖나. 동족을 죽인 것처럼 말하지 마라. 너희야말로, 여기 다른 오크를 죽이면서 가슴 아프지 않았나?”
그 순간, 분노가 그녀의 전신을 장악했다.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그녀는 유형화된 ‘기세의 압박’을 뚫어내며 돌진했다. 붉게 타오르는 오혜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킬가레스는 바닥에 내리찍은 거대한 철퇴를 휘둘렀다. 전쟁 군주들 수준의 싸움에서는 느리고 둔한 취급을 받았지만-.
-퍼-엉!
다른 이들이 대항하기엔 너무나도 빠르고 강력했다.
오혜영이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려 막았지만, 그대로 방패가 찌그러지며 튕겨져 나갔다. 마치 파리채에 맞아 날아가는 파리마냥 그대로 근처 건물 벽으로 날아가 굉음을 내며 부딪치는 오혜영, 그 광경을 보며 일행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우웩……!”
킬가레스는 죽지 않고 피를 토하며 쓰러진 오혜영을 보며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역시, 과분할 정도로 좋은 장비들이군. 그 장비의 힘으로 내 동포들을, 신앙의 병사들을 죽였나? 이제 대…….”
휘둘렀던 철퇴를 다시 어깨에 걸치며 앞으로 나아가려던 킬가레스는 순간 입을 다물곤 ‘멈칫!’하며 한쪽을 응시했다.
“설마, 안개를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
그 시선이 향한 방향의 안개가 갈라지며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황금빛 창을 쥔 누더기 로브를 걸친 조그만 사람의 형체, 그 익숙한 모습에 지금까지 정신을 패닉에 빠져있던 드라릭은 정신을 차렸다.
“아니, 당신……!?”
“그럼 저 양반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는데 무시해요?! 되돌아왔죠!”
드라릭이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소리치는 괴인, 그 인상착의를 보면서 킬가레스는 곧 바소즈가 설명했던 것을 떠올렸다.
“자네는 반푼이 마을을 방문했다던 ‘용병’이군.”
“네, 그쪽은 킬가레스죠?”
“그래, 내가 킬가레스지. 안 그래도 혹시 모를 변수를 없애기 위해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군.”
나지막이 웃는 킬가레스, 그 모습을 보며 괴인은 황금빛 창을 앞으로 내밀면서 소리쳤다.
“혜영 씨 데리고 빠지세요. 이 양반은 제가 상대할 테니까.”
“그르르륵……! 그륵, 내…….”
“빨리!”
피를 토하면서 뭐라 대꾸하려는 오혜영을 무시하며 소리치는 괴인, 그에 킬가레스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하, 내 앞에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 선언과 함께 킬가레스는 자신의 기세를 터트렸다. 그 머리 뒤에 있는 찬란한 황금빛 후광이 짙어지며 마치 천상의 존재가 오연하게 내려다보는 것 같은 위압감이 일행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렸지만-.
“충분히 도망치죠. 제가 도와준다면.”
대꾸와 함께 그에 못지않은 기세가 괴인에게서 폭발했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질척한 살의에 몸이 산 채로 썩어 들어가는 듯한…… 끔찍한 감각. 킬가레스의 기세가 ‘신성한 천상의 존재’를 연상케 했다면 이것은 ‘지옥의 악귀’ 같았다. 하지만, 그 끔찍한 느낌과는 별개로 일행을 향하는 중압감은 몰라보게 줄어들었다.
“…….”
“…….”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각자의 기세-마력에 잠식된 공기가 그 사이에서 충돌하고 대기의 와류와 격돌이 묘한 흔들림을 자아내는 동안-.
일행들은 허겁지겁 쓰러진 오혜영을 메고 안개 속으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