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3.
흉악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전쟁 군주를 보며 조그맣게 심호흡했다.
마력을 투사하는 ‘기세’만큼은 거의 비등하게 뿜어내고 있지만, 실질적인 육체적인 능력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삐끗했다간 죽는다. 그 사실에 살짝 혼미하고 흐느적대던 의식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달려오면서 생각했던 ‘배신자 오크 놈의 기억’을 한 번 더 되짚었다.
모르칸쉬가 킬가레스를 거의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가 악마를 소환하니까 도망쳤지. 그 전까지 파악된 놈의 움직임과 권능들을 생각할 때, 여기서 나는 모르칸쉬와 달리 선공을 취하면 불리하다. 그러니 일단 적의 공격을 유도…….
아니. 근데, 왜 싸우지 않고 가만히 서 있냐??
“뭐해요? 안 싸워요? 이러다가 다 도망치겠는데?”
기세등등하게 선언했던 킬가레스가 그냥 멀찍이 서있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 내가 말을 꺼내자 그는 정신을 차린 듯 작게 고갤 젓곤 날 바라본다.
“말은 그렇게 했다만, 솔직히 반푼이하고 오크 기사 하나가 도망쳐봤자 그리 큰일은 아니다. 바뀌는 건 없을 테니까.”
“아, 그러신가요?”
이 양반, 지금 도망친 애들이 모르칸쉬가 있는 미궁 입구 쪽으로 달려가는 중이라는 거 모르네. 나로선 나쁘지 않은 일이기에 대충 맞장구쳐 주는데,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내 얼굴-투구를 빤히 응시한다.
“오히려, 난 네가 신경 쓰이는군. 그 정체가 수상해.”
“제 정체요?”
“그래.”
고갤 끄덕이며 킬가레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내 심복이 널 ‘전쟁 군주급의 강자’라고 보고했을 때, 좀 과장이 섞여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전혀 과장이 아니군. 그래서 오히려 이해할 수가 없어.”
“아니, 뭐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냥 용병인데.”
“너 같은 용병은 이 세상에 별로 없다. 그 정도 힘이면 용병 같은 ‘번거로운 짓’은 안 하고도 거의 모든 것을 쟁취할 수 있으니까.”
고갤 저으며 딱 잘라 말하는 킬가레스, 이어서 그는 날 추궁한다.
“설령, 널 고용했다고 해도 너 같은 강자를 포섭하기 위해 그 반푼이가 도대체 뭘 제공했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 들더군.”
저 말을 들으니 자연스레 ‘호구처럼 대가도 없이 그냥 도와주게 됐다.’는 잔혹한 사실이 떠오른다. 그냥 줄 때 받을걸……. 서글프구만. 어찌 됐든 이것도 시간을 끄는 것이니 한숨을 내쉬며 삐딱하게 대꾸해줬다.
“……알아서 뭐하시게요? 고용이라도 해보시게?”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때, 그것도 고려했었지. 어차피 내게 ‘인간의 돈’은 썩어 넘치게 많으니까.”
대답과 함께 한쪽 어깨에 걸친 철퇴를 양손으로 잡는 킬가레스, <눈>으로 보니 그의 몸에서 마력의 흐름이 퍼져나가며 다리의 각반과 장화가 활성화되는 것이 보인다. <감정>으로 파악되는 그 능력은……. 그에 맞춰서 나도 자세를 다잡았다.
“하지만, 내 동족들과 신앙의 형제들을 죽인 이상…….”
“…….”
“그 더러운 피로 죗값을 갚아라!”
-콰-앙!
노호성과 함께 킬가레스가 움직였다.
한 발자국, 거의 땅을 내리찍듯이 크게 박차자 군화에 새겨진 마법이 발동하며 그의 몸이 급가속한다. 전속력으로 덤프트럭이 돌진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빠르기, 동시에 그의 몸에서 흐르는 ‘세로쉬의 신성’이 맥동했다.
그와 연결된 권능이 빛을 발하려는 순간-.
“……!?”
나도 시뮬레이션한 대로 움직였다.
목걸이에서 흘러나오는 꿈틀거리는 검은 기운이 터지듯이 뿜어져 나와 반경 10m 주위를 즉시 시커멓게 물들인다. <어둠의 장막>, 내가 그 속에 몸을 숨기자 킬가레스의 몸에서 꿈틀거리던 신성은 그 목표를 잃는다.
<신성 강타>, 그 필중(必中)의 천벌도 대상을 보지 못하면 맞출 수 없다.
-콰드드득!
어둠 속에도 킬가레스는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철퇴를 휘둘렀다.
헬스장의 바벨 한쪽에만 무게추를 잔뜩 달아놓은 것 같은 거대 철퇴가 골프 클럽처럼 경쾌하게 움직인다. 그 움직임이 만들어낸 돌풍에도 <어둠의 장막>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노후하여 박살 났었던 보도블록들은 모조리 튀어 올라 산탄처럼 안쪽을 찢어발긴다.
하지만, 난 이미 그 자리에 없다.
-푸화아아악!
뒤로 빠지면서 열심히 폐 안에 만들어뒀던 짙은 <독숨결>을 내뿜어 연막을 쳤다. 모두 <신성 강타>를 피하기 위한 눈물겨운 짓이야. 그런 내 모습에 킬가레스는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을 흘리곤 당당하게 내 <독숨결> 속을 향해 계속 질주한다.
“[강건한 야성의 피가 내 심장에 솟구치니!]”
찰나의 순간에 머릿속을 울리는 ‘힘이 깃든 말’. 그와 함께 놈의 몸에 새겨진 경전의 문구들이 번쩍이며 황금빛 불길이 몸을 뒤덮는다. 배신자의 <과거>를 확인하면서 봤던 기술, <눈>으로 자세히 분석해보니 그 신체능력이 증가했고 외부로부터의 마력을 극단적으로 튕겨낸다. 역시, 잠깐 동안 유지되는 ‘자가 버프’구만.
-부-우웅!
내 기척이 있는 곳을 향해 돌진하면서 원형으로 거대한 철퇴를 휘두르는 전쟁 군주, 이어서 빙그르르 회전하며 ‘점점 더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현상, 하지만 신체의 마력에 의해 주위의 물리법칙이 재정립되며-.
-콰드드득! 두두두두!
그 불가능한 움직임을 현실에 구현한다.
그저 빙글빙글 돌며 날아드는 것이지만 그 회전이 만들어낸 돌풍과 파편이 <독숨결>을 걷어버린다. 와, 휠 윈드(wheel wind)도 보네? 노후한 보도블록들을 사방으로 ‘터트리듯’이 박살 내며 다가오는 그 모습에 다급하게 옆의 숲 쪽으로 빠졌지만-.
-콰! 콰콰쾅! 쾅!
-우지직! 우적! 쾅!
지난 16년 동안, 거목으로 자라난 공원의 나무들도 그 철퇴의 궤적에 휘말리는 순간 젓가락처럼 박살 났다. 내 안에 있는 ‘오크 전쟁 군주’의 경험으로 봐도 저건…… 진짜 비상적인 괴력이야. 그래도 장애물 덕분에 그 기세가 더 커지지 않는 게 다행이다.
-프수수숫!
연거푸 뒤로 빠지면서 폐에선 <독숨결>을, 한 손으로 <독침>들을 날리며 견제했다.
허공을 날아올랐다가 내리꽂히듯이 정밀하게 킬가레스의 눈·코·귀를 노리며 쏟아지는 <독침> 다트들, <눈>으로 실시간으로 궤적을 조절했기에 빗나가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독침>은 킬가레스의 눈조차 꿰뚫진 못한다. 그저 눈꺼풀을 감게 해서 잠시 시야를 가렸을 뿐.
그래도 충분하다.
“스하하……!”
눈을 노리는 연이은 공격에 그 휠 윈드 태풍의 움직임이 살짝 더뎌진 사이, <소환 : 검은 독기의 망령>을 이루는 룬문자들을 공명시켜서 폐에 흡수시켜뒀던 ‘영혼의 영액’들을 가공했다. 하프 오크 마을을 떠나면서 섭취한 시체들에서 추출한 10개의 영혼 중 5개를.
“파아아악!”
입을 쩌억 벌리며 토해냈다. 평범한 <독숨결>보다도 훨씬 더 맹렬한 기세로 뿜어져 나오는 연무, 시커먼 구정물이 솟구치는 것 같은 그 숨결 안에서 곧 자줏빛 안광들이 빛나며-.
-캬하하하학!
-죽여! 찢어! 죽여!!
-낄낄낄!
잔학한 웃음을 터트리며 악귀들이 쏟아졌다.
감각을 일그러트리는 ‘지옥의 안개’, 하지만 나의 심령과 연결된 소환수들은 내가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킬가레스를 향해 정확하게 쇄도했다. 그렇게 지네처럼 몸뚱이에 솟은 팔다리를 놀리며 기어가는 내 분신들은-.
-콰드드득!
믹서에 빠진 야채처럼 휠 윈드에 그대로 갈려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갈린 게 아니라 터져나갔다. 무기에 엄청난 마력이 담겼는지 웬만한 물리력에 내성을 지닌 내 분신들 5마리가 한 방에 터져나가며 즉사. 근데, 어차피 저걸로 킬가레스를 붙잡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딱!
곧바로 나무 뒤에 숨으며 <독의 연소> 콤보를 갈겼다.
박살 났지만 분신들이 터지면서 흩어진 ‘영혼의 찌꺼기로 만들어진 독기’가 폭풍에 흩어지기 전에 내 손에서 뻗어나간 마력의 파장과 닿자 격렬하게 타오르고-.
-콰-아앙!
이어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 화력’, 멀찍이 나무 뒤에 숨은 나도 충격파에 휘청일 정도지만 폭발의 중심에 있는 킬가레스는 죽지 않았다. 팽이가 돌아가던 힘을 잃고 쓰러지듯, 휘청이며 비틀거리다가 한쪽 무릎을 꿇는 킬가레스. 그 왼쪽 눈은 터졌고 양 귀에선 피를 질질 흘린다.
아주 좋아 죽으시는 것 같으니 한 번 더 드려야겠네!
“스하하……! 파아아악!”
남아있던 5개의 영체도 모조리 가공한 뒤에 내뱉었다.
앞선 놈들처럼 잔학한 괴성을 지르며 무작정 정면 돌진하는 내 분신들, 그렇게 뱉어낸 뒤에 폭발의 먼지 뒤에 숨으며 킬가레스의 시야가 제한되는 왼쪽으로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돌아갔다. 망가진 얼굴 위에 손을 대며 독특한 안수 치료를 하고 있던 킬가레스는 앞쪽에서 들리는 괴성에-.
“[이곳은 너희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투-웅!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힘이 깃든 음성’을 내뱉었다.
그와 함께 킬가레스의 전신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오며 거의 반경 7~8m를 황금빛 반구형 광채가 순식간에 뒤덮는다. 모르칸쉬와의 싸움에서 상대를 밀어냈던 힘, 내 분신들은 그 장벽에 가로막혀서 버둥거렸는데 어떻게 돌진하려 하지만 세찬 격류에 휩쓸리듯 밀려나간다.
……내 분신들이지만 진짜 멍청하네.
살의(殺意)에 잠식돼 무작정 ‘달려들어 찢어발길’ 생각만 하는 터라 삽질을 하고 있다. 저 기술의 약점은 이미 <과거>를 복기하며 확인했다. 날아오는 투사체 같은 물건은 막지 못한다는 것, 희미하게 연결된 심령으로 그 사실을 보내자 허겁지겁 몸을 가공해 <독침>을 쏘아내려 하지만-.
-피이이잉!
그보다도 먼저 킬가레스의 둔기가 기묘한 소음을 내며 번뜩이기 시작했다. ‘신의 권능’은 아니고 무기에 깃든 마법, 동시에 <감정>이 이뤄지며 플레이버 텍스트가 떠오른다.
힘의 강격 (Force smash)
·효과 : 마력을 소모해 둔기의 추와 똑같은 형상과 질량의 투명한 마법 역장(力場)을 생성, 둔기에 실린 ‘순수한 물리량’을 쳐내듯이 쏘아냅니다. 그 과정에서 시전자의 움직임은 모든 물리량이 사라져 반동·관성의 영향 없이 멈춥니다.
날아간 역장은 2~3초 뒤에 사라지며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여러 개로 쪼갤 수 있습니다.
왼손은 터진 왼눈을 감싼 채, 자리에서 일어서며 허릴 비틀어 오른손만으로 철퇴를 가볍게 횡으로 크게 휘두르는 킬가레스.
-퍼엉!
공기가 터지는 것 같은 소음과 함께 그 움직임이 중간에 ‘덜컥!’ 멈추고 황금빛 장벽 밖에서 어떻게든 들어오려고 발버둥치는 분신들을 향해 흉악한 기세로 역장이 날아간다. 샷건탄처럼 날아가면서 스물너덧 개로 쪼개진 그 힘의 덩어리가-.
-퍼버벅!
-퍽! 퍽!
아주 무참하게 내 분신들을 으깬다.
그냥 허리와 오른손의 힘만으로 날려서 이뤄진 일, 아주 흉악하다, 흉악해. 한 방이라도 맞으면 터지겠구만. 멍청한 분신들이 일을 못 하니 나라도 열심히 일해야지. 그렇게 분신들이 삽질하는 사이, 놈의 시야 뒤쪽에 가까이 접근한 나는-.
-투둑! 툭!
“!?”
숨어있던 나무 뒤에서 나와 재빨리 수류탄을 던졌다.
거대 쥐쟁이가 내게 던졌던 수류탄 3발, <연금술>로 안쪽에 심지를 강제로 진화시켰던 것을 그대로 다시 점화시켰다. 추가로 <연금술>로 폭약에 잠시지만 강화 효과도 붙였고. 귀 고막이 터지고 정신이 없을 텐데도 킬가레스는 흠칫하며 이쪽을 바라본다.
-콰앙! 쾅!
곧바로 터져나가는 수류탄, 다시 한번 킬가레스가 휘청이고 집중력이 순간적으로 깨지며 그가 유지하던 황금빛 보호막이 흔들린다. 그리고, 그 몸에 건 자가 버프 기술도 끝났다. 그렇게 휘청이고 있는 킬가레스를 향해-.
“RA-TI-AM!”
창날에 <염기성 무기> 인챈트를 걸고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