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65화 (265/350)

제265화

4.

“이 개 같은 새끼가!”

상처 입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노호성을 내지르며 거대한 둔기를 휘두르는 킬가레스. 그에 지면이 박살 나서 흩날린다. 이전에 있던 곳이라면 보도블록이 산탄처럼 날아왔겠지만-.

-후두둑!

지금은 흙과 자갈, 그리고 박살 난 나무 조각 파편뿐.

이 정도는 맷집이 약한 나도 버틸 수 있지. 슬라이딩하듯이 미끄러지며 접근하면서 왼손으론 부지런히 <독침>을 날려 상처 입은 눈깔을 집중 공략했다. 신체 강화 버프가 끝나서 그런지 좀 박히긴 하네. 어쨌든 그렇게 5발의 <독침>을 모두 소진한 후-.

“까드득!”

이를 악물고 장갑에서 올라오는 기운-<광폭화>를 받아들였다.

강건해진 육신의 힘으로 튀어 오르며 오른손에 쥔 창을 내질렀다. 킬가레스가 입고 있는 튼튼한 ‘진주용 갑주’, 아무리 <광폭화> 버프를 받았다고 해도 내 창으로 뚫을 만한 물건은 아니다.

-푹!

“……!!”

그래서 <눈>의 보조를 받아 ‘정확하게’ 갑옷 사이의 틈을 찔렀다.

왼쪽 무릎 관절부, 미세한 틈을 뚫고 박히는 순간 킬가레스가 이를 악문다. 허리를 뒤틀어 스윙했던 둔기를 내 기척이 있는 곳을 향해 내리찍지만, 난 이미 찌르는 순간 곧바로 뒤로 빠졌다. 이어서 기동력이 상실된 킬가레스를 중심에 두고-.

-푹! 푹! 푹! 푹!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짤짤이를 날렸다.

머리는 필사적으로 막았기에 주된 목표는 갑옷의 작은 틈 사이. 어떻게 눈을 뜨려고 하기에 <어둠의 장막>까지 펼쳤다. 더 희미해진 내 기척에 킬가레스는 우왕좌왕한다. 꼭 불 끄고 멍석말이하는 것 같아서 즐겁구만.

“[야성의 힘이 내 손에 깃드니!]”

결국, 둔기를 내던지며 다시 한번 힘이 담긴 말을 내뱉는 킬가레스. 세로쉬의 신성이 그의 양손에 깃들며 기괴하게 뒤틀린다. 살짝 커지며 그 손톱이 길게 자라났는데-.

-촤학! 촤하아악!

휘두르는 순간, 공기 찢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둔기보단 약하지만 그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내겐 더 위협적인 맹공, 하지만 감각이 차단됐는데 어쩔? 창의 우월한 거리를 살려서 계속 ‘쿡! 쿡!’ 찌르며 우리 속의 짐승을 건드리는 것처럼 괴롭혔다.

-푸욱!

“……어!?”

그러던 도중에 킬가레스가 기어코 내 창을 낚아챘다.

내 창날에 걸린 <염기성 무기> 인챈트는 그 위력도 절륜하지만, 무엇보다 닿는 피를 염기성 물질로 변하게 해서 매우 ‘미끌미끌’하게 만든다. 찔린 부위의 근육을 있는 힘껏 쥐어짜 봤자 결코 낚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찌르고 빠지기가 용이하지.

킬가레스는 오히려 창날에 몸을 던졌다.

복부를 뚫고 완전히 관통된 창, 다급하게 빼려고 했지만 창날 앞부분만 박힌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단단함으로 고정시키며 변이된 괴수의 손을 내 머리통을 향해 휘두른다. 주저앉듯이 그 손을 피하며 다급히 창을 놓고 뒤로 빠졌다.

“우오오오오!”

-후웅! 훙!

상처 입은 짐승처럼 괴성을 내지르며 손을 사방으로 휘두르다가 숨을 헐떡이는 킬가레스, 그렇게 내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 복부에 박힌 창을 뽑아낸다. 피가 독성 물질로 변해 혈관을 돌아다니면서 고통이 엄청날 텐데 꿋꿋하게 움직이네.

“쯧.”

<광폭화> 상태라 마법 사용이 제한된 상황, 그렇다고 창이 없으니 근접전을 이어나가는 것도 애매하다. <광폭화>를 해제하고 마법을 사용한다 해도 놈에게 먹힐 만한 유일한 마법-<소환 : 검은 독기의 망령>은 ‘영혼의 영액’도 다 떨어져서 불가능한데…….

그럼, 보충해야겠네.

<눈>을 높이 띄워 현 위치를 확인한 후, 내가 죽였던 오크들의 시신이 남은 장소를 향해 질주했다. 그렇게 숲에서 빠져나온 뒤, 일행들이 한쪽에 정리해놓은 그 시신들을-.

-콰득! 콰드드득!

<광폭화> 상태를 해제하며 연거푸 씹어 먹었다.

내 근육을 쥐어짜고, 또는 대체해서 움직였던 <광폭화> 기운이 사라지며 잊었던 피로와 통증이 한 번에 밀려든다. 하지만, 투구가 제공하는 ‘생명의 힘’이 빠르게 그 피로를 호전시킨다.

“흐흡……!”

그렇게 체력을 회복하면서 연이어 <피의 승화> 마법을 사용했다.

몸의 생기를 마력으로 치환하는 마법, 원래는 내 몸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만 내 몸속을 쇄도하고 있는 ‘생명의 힘’을 대상으로. 다행히, 시도는 성공해 마력이 급격하게 차올랐다. 그 마력을 사용해 <연금술>을 사용, 시체에 남아있는 ‘영혼의 영액’까지 살뜰하게 채취해 폐에 축적했다.

그렇게 짧은 휴식을 취하며 열심히 소진한 체력과 마력, 그리고 소모품을 보충하고 있는데-.

-쿵! 쿵! 쿵! 쿵! 쿵!

지축이 울리는 소음과 진동이 들린다.

지옥의 안개가 보여주는 환각이 아닌 ‘진짜 감각’, 뒤늦게 내가 도망쳤다는 걸 파악한 킬가레스가 둔기를 들고 맹렬하게 이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혹여 <신성 강타>가 떨어질까, <독숨결>을 내뱉으려는 순간-.

-투쾅!

황금빛 섬광이 내 쪽으로 날아와 꽂힌다.

잽싸게 몸을 움직여 피해냈지만 연이어 2타가 날아온다. 날아온 황금빛의 정체는 두 동강 난 내 창, 싸장님이 만든 걸작이라 <연금술>로 만지지 않는 한 그 강도가 웬만한 미궁 재료가 들어간 합금강 수준인데 이렇게 절반으로 박살을 내놨네.

“스읍, 푸후우우우……!”

곧바로 <독숨결>을 내뱉어서 내 모습을 감춘 후, 지면과 건물 벽에 처박힌 내 창들을 회수했다. 그동안 맹렬하게 다가온 킬가레스는 내 ‘식사의 흔적’들을 보곤 멈칫하더니 돌진을 멈추곤 이빨을 바드득 간다.

“넌, 구제할 바가 없는 악귀 새끼구나……!”

“악귀라뇨, 그냥 ‘식사’를 한 것뿐인데요?”

“…….”

“아, 그리고 무기 되돌려주셔서 감사요!”

뱉어낸 <독숨결> 연막 밖으로 다시 붙인 창을 보란 듯이 휘둘러줬다. 음, 아주 잘 붙었네. 몸도 잘 움직이고. 그런 내 자랑질에 진짜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는 킬가레스의 얼굴, 아주 붉으락푸르락하는 게 보인다. 나 같아도 이런 짓 당하면 매우 빡칠 것 같긴 해.

어쨌든 <광폭화> 후유증까지 어느 정도 호전된 걸 확인한 후, 난 킬가레스를 향해 연이어 도발했다.

“자, 다시 붙어보죠.”

“…….”

“쫄았나요? 하긴, 당신 좀 허접하긴 해요! 무기 휘두르는 꼬라지 하며!”

직접 경험해본바, 킬가레스는 전투 스타일이 많이 투박하다.

물론, 약한 건 아니다. 전쟁 군주 기준으로도 ‘엄청난 괴력’에 ‘막강한 세로쉬의 권능’, 그리고 대단한 장비발로 무장했으니까. 근데, 내겐 이전에 싸웠던 거대 쥐쟁이가 훨씬 까다로워. 뭐, 그 거대 쥐쟁이 자체도 전쟁 군주와 비견될 강자긴 하지만 말이지.

그래,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전형적인 보스몹’ 같다.

플레이어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 맷집’과 ‘흉악한 공격’을 날리는 보스몹, 제대로 맞으면 탱커도 즉사한다. 하지만, 동작이 좀 둔해서 즉사기 패턴이 쉽게 읽힌다. 반면에 거대 쥐쟁이는……. 미쳐 날뛰는 PvP 고수 같은 느낌?

근데, 난 맷집이 약해서 보스 몹에게나 플레이어에게나 똑같이 한 방이야.

그러니 이쪽이 더 쉽게 느껴질 수밖에. 아니, 좀 생각해보니 거대 쥐쟁이와 비교할 필요도 없다. 마을을 점거했던 오크 무리들이 총을 난사하면서 저항했을 때가 더 난이도가 높아. 저런 괴물과는 달리 난 총알 맞으면 꾀꼬닥하니까.

그렇게 인터넷으로 단련된 인성질을 하며 킬가레스를 도발하는데…….

“이건, 웬만해선 쓰기 싫었는데……. 인정하마.”

-쿠웅!

킬가레스는 거대한 철퇴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허리 벨트 왼쪽에 걸어둔 ‘황금빛 쇠사슬로 봉인된 커다란 경전’을 손에 쥔다.

킬가레스가 착용한 것들 중 가장 강력하고 불길해 보였던 장비

겉으로 보기엔 그냥 두툼한 중세 고서(古書) 같지만 그 속엔 ‘악마의 아우라’가 넘실거리고 영혼의 찌꺼기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곧바로 그 경전에 시선을 집중하자 <감정>이 이뤄지며 그 정보가 떠오른다.

배교자의 말로 (The End of the renegade)

악마가 속삭이는 <악마술> 마법에 심취해 결국 세로쉬의 품을 벗어난 오크 사제들의 얼굴 가죽으로 만들어낸 경전. 그 얼굴 가죽 페이지 하나하나마다 사악한 <악마술> 마법과 ‘어둠의 의식’을 치르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다. 매우 강력한 아티팩트지만, 착용 시에 수많은 배신자들의 의식이 사용자의 머릿속에 타락을 속삭인다.

‘울락 순교회-<지배의 힘>’을 이용해 사역하는 ‘악마의 힘’을 주입할 시, 별다른 숙련도가 없더라도 마법서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오브, 마법서

·주문력 증폭-<악마술> 마법에 한정.

·사악한 주해 : 악마의 힘이 주입될 시, 저장된 주문이라면 어떤 것이든 시전에 성공한다.

·정수 저장 중-증오의 정수 92개, 슬픔의 정수 17개, 공포의 정수 71개…….

동시에 ‘설명서&마법서로 보이는 물품 감지 – 지식 습득을 시도해 보시겠습니까?’가 떴지만 무시하며-

“스읍, 푸후우우우!”

미리 준비해둔 룬문자로 폐 속에 고여 있던 영체를 가공해 악령들을 쏟아내며 전력으로 도주했다.

딱 봐도 마법을 난사할 것 같은데 굳이 상대해줄 필요 없다. 처음부터 내 목적은 혜영이네가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게 시간은 벌었어! 상공으로 <눈>을 띄워서 확인하니 열심히 미궁 입구 근처 호위들을 죽이고 있구만!

……근데, 이쪽으로 웬 오크들이 오고 있네?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으로 오는 놈들 말고도 많은 오크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임을 보건대 행선지는 대부분 모르칸쉬가 있는 미궁의 입구 쪽, 아무래도 랜턴의 위치가 이상해서 경계가 떨어진 것 같다.

-캬캬캬캬!

-찢어! 찢어! 찢어!

내가 오크들을 관찰하는 사이, 내 분신들은 맹렬하게 킬가레스에게 달려든다.

“[시르카그!]”

‘힘이 담긴 말’로 악마의 이름을 부르는 킬가레스, 그 순간 주위의 안개가 맥동하며 현실의 이면에 숨어있던 악마가 노란 발광체의 모습으로 킬가레스의 머리 위쪽에 나온다. 이어서 그는 빈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

불쾌한 쇳소리와 함께 노란색 발광체가 흔들리며 ‘불길한 힘’이 경전으로 빨려 들어가고 왼손에 쥔 경전이 알아서 활짝 펼쳐진다. 그의 오른손이 남색으로 반짝이며-.

-으아아앙! 으앙!

-으앙! 아아앙!

-응애! 응애!

그 앞에 수많은 갓난아기의 유령들로 이뤄진 거대한 남색의 손이 떠오른다.

-콰-앙!

도대체 뭔 마법인지 모르겠다만 곧바로 <독의 연소>를 사용해 근접한 분신들을 모조리 터트리곤 이쪽으로 다가오는 오크들을 향해 방향을 꺾어 질주했다.

“킬가레스 님-! 킬가레스 님-!”

숫자는 10명, 그 중심엔 검은 로브를 걸친 깡마른 늙은 오크가 다급한 목소리로 킬가레스를 찾고 있었다. 배신자의 <과거>를 본바, 푸른 랜턴의 위치를 파악하는 녀석, 아마 현 상황을 알리러 온 놈일 거다. 빨리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

푸른 불길이 이글거리는 놈의 눈동자가 ‘지옥의 안개’ 속에 있는 날 그대로 꿰뚫어본다.

“저기다! 쏴!”

-타타다다당! 타당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주위에 있던 다른 오크들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무작정 ‘드르륵!’ 연발로 소총을 갈기기 시작한다.

“으익!?”

허겁지겁 몸을 숙이며 방향을 꺾었다.

하프 오크 마을에서 총탄을 튕겨내며 접근하는 기예를 보인 적이 있지만, 그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서 할 수 있는 거였고 이렇게 갑자기 기습을 당하면 좀 당혹스럽지! 다행히, 다른 오크들은 안개 속을 뚫고 보지 못하는 듯 사격이 중구난방이라 맞진 않았다.

“시로카!?”

그 총성에 킬가레스도 이쪽을 인지했다.

커다란 남색의 손아귀 안에서 상처 하나 없이 나온 킬가레스가 그 거대한 영체를 앞세운 채 빠르게 이쪽을 향해 붙는다. 늙은 오크가 그 모습을 보곤-.

“미궁 입구에 누군가가 접근했습니다!”

커다란 마력을 담아서 비명을 지르듯 소리친다.

결국, 소식을 차단하는 건 실패. 하지만,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그 목소리에 킬가레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가운데, 난 혀를 차며 왼 손가락에 낀 ‘공간 이동의 반지’에 마력을 주었다. 그리고 날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남색의 유령 손아귀를 보며-.

“헤헤.”

주먹 감자를 먹이며 반지를 발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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