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77화 (277/350)

제277화

2.

그 말에 난 굳어버렸다.

그 대단한 재벌집 아가씨가…… 날 좋아한다?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네. 자극적인 아침 드라마도 이딴 거 썼다간 욕 처먹고 조기 방영 종료될 거야. 하지만, 지금 내 앞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멍하니 굳어있는 가운데, 아가씨는 날 외면하듯 시선을 돌리며 소주만 홀짝인다.

“어, 어……. 생각지도 못한 거라 당혹스럽네요. 너무 황송하고…….”

허둥지둥 대꾸하자 붉어진 눈길로 날 흘겨보는 아가씨, 그동안 마빡이와 친하게 지냈지만 진짜 이런 경우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너무 급작스러운 거 아닌가? 날 좋아한다면 눈치라도 챌 수 있도록 기색이라도 평소에 보이든…….

……잠시만, 지금 생각하니 ‘묘한 기색’은 이전에 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

여름방학 당시에 북한에 방문했던 것, 그때는 그냥 ‘아가씨가 사업에 관심이 많구나.’ 정도로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하니 순전히 날 위해서 방문했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내가 아가씨를 노리는 북한 조폭들을 죽이면서 ‘넌 쓰레기가 아니다.’라고 했었지?

개학한 뒤에도 아가씨에게 마법 관련 수학을 배운답시고 거의 맨날 붙어 다녔지.

항상 같이 카페에서 음료수하고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공부했고……. 게다가 우그 타람에 테러가 벌어졌을 때에도 혜영이같이 직접적인 당사자도 아니면서도 굳이 날 보러 왔었네? 그때, 아가씨 집에 하룻밤 자게 되면서 라면 끓여 주냐고 드립 치다가 맞았지.

……생각해보니 되게 많이 얽혔네.

설마, 그동안 내가 둔해서 몰랐던 건가? 나……. 난감하네. 차라리 내 재력과 능력을 보고 접근한 사이라면 대하기 쉽겠는데, 내게 아쉬울 것도 꿀릴 것도 전혀 없는 대단한 사람이 ‘진지하게’ 날 좋아한다고 하니 당혹스러워. 내 마력 돌연변이-[꺼림칙한 존재감]을 알고 사실상 연애는 포기했는데…….

그에 한 번 헛기침을 한 뒤, 난 쉽게 떼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그, 근데……. 절 왜 좋아하세요? 솔직히, 전 쬐끄맣고 볼품없어요? 아가씨보다 키도 작고……. 무엇보다 신분도 별로라고요? 북쪽 출신에 천애고아.”

“……외모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어. 난, 너 같은 여리여리한 애가 좋아.”

“거, 취향 한번 독특하시네.”

우리 아가씨 취향이 이런 쪽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제주도에서 꽐라 됐을 때, 피부가 보들보들해 보이니 만져 봐도 되냐고 했었지? 내 대꾸에 ‘째릿!’하며 흘겨보는 마빡이, 그 살벌한 눈초리에 반사적으로 움찔하자 아가씨는 한숨을 내쉬고 소주잔을 채우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이번에 널 좋아한단 걸 깨닫고 생각해봤어. 왜,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를 말이야. 근데, 솔직히 나도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어. 이런 적이 없으니까.”

“음.”

“하지만, 너와 함께한 시간을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이지만 내 인생에 다시 이런 날들이 올 것 같지 않더라.”

지금까지 우울한 표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사르르 사그라지고, 평소처럼 태양같이 밝게 빛나는 웃음이 아가씨의 입가에 걸렸다.

“처음엔 좀 그랬었지. 뭔가 나약하고 재수 없게 보였어.”

“확실히, 우리 첫 만남이 그렇긴 했죠. 왜 자기를 졸졸 따라다니느냐고 말했던 것도 전 다 기억하고 있답니다. 나중에 나왔던 패드립에 좀 상처받았어요…….”

“야, 그런 걸 기억할 필욘 없잖아!”

내 말에 살짝 찔끔하며 빼액 소리치는 마빡이, 나도 피식 웃으며 말해 보라는 듯이 손짓하자 아가씨는 소주잔을 오른손에 쥔 채 찰랑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중국의 산업 스파이, 그년의 자료를 빼돌렸을 때 참 짜릿했어! 설마, 그런 걸 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 그 덕분에 예린이랑도 친해질 수 있었고! 그것뿐인가!? 미르가 유혈에 잠겼을 때, 넌 내게 경고해줬지! 그리고, 우린 함께 사선을 뚫었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며 흥분한 모습, 살짝 날 향해 고갤 들이밀며 아가씨는 두 눈을 반짝였다.

“나, 그때 너 죽는 줄로만 알았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미친 인간이랑 뒤엉켜서 네가 화물차 밖으로 나가떨어졌을 때! 그때, 넌 구해달라는 말 대신에 그냥 가라고 소리쳤지.”

“…….”

“그뿐만이 아니야! 유혈이 지나고 난 뒤, 북한에 갔을 때에도 넌 내게 약을 먹이라고 한 녀석을 죽여 버렸어! 적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멋있었지.”

“하하, 그런가요?”

“그리고 함께 제주도 갔을 때도 정말 즐거웠어. 특히, 모에모에~ 뀽?”

“아, 진짜 그건…….”

“하하하!”

인터넷에 박제되어버린 흑역사를 말하면서 아가씨는 취한 사람답게 즐겁게 웃으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그 뒤, 빈 소주잔을 내려놓고 날 바라보며 발갛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빙그레 웃는다.

“너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즐겁고 행복하게 반짝여. 그냥, 널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고 좋아.”

“…….”

“물론, 좀 껄끄러운 기질이 있는 건 알지만 난 너의 진짜 모습을 아는걸? 그래서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아가씨의 고백에 나도 웃었다.

나도 마빡이와 함께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유쾌하다. ……그래, 그냥 고백을 받아들이고 싶어.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아름다운 사람이 날 좋아한다니? 게다가 함께한 즐거운 추억도 있네? 안 받아들이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난 마냥 받아들일 순 없었다.

아가씨에게 보인 것들은……. 사실, 일종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과연 아가씨가 ‘내 진짜 모습’들을 알고도 날 좋아할까? 그냥 숨기고 만날 수도 있지만……. 아가씨가 진지하게 나온 만큼 나도 진지해져야 했다. 비밀을 숨기면서 대하기엔……. 내게도 아가씨는 소중한 인연이니까.

“후우.”

빈 소주잔을 내려다보며 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꽁꽁 숨겨왔던 내 치부를 까발리는 일. 서예린에겐 그 사실을 막 깨달아서 우울감에 취해 중얼거렸고, 싸장님에게는 그 치부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기 위해 털어놓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내 치부를 밝혀야 한다. 그 사실이 정말 부끄럽고 싫다.

“하아, 좋아!”

결심을 굳게 다진 후, 난 아가씨 옆에 있는 소주병을 낚아채서-.

-꿀꺽! 꿀꺽! 꿀꺽!

“어!? 야!”

“파하!”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내 모습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아가씨, 어차피 1도 취하지 않지만 그래도 쓰린 화학 약품 냄새에 내 정신이 좀 무뎌지는 것 같다. 술에 취해 웃고 떠드는 주위 사람들의 분위기를 빌려 난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그 자색의 홍채를 똑똑히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정말로 고마워요. 절 좋아해줘서. 이런 고백을 받을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

“그러니 저도 진지하게 말할 게요. 아가씨, 전……. 괴물이에요. 아니, 남들 다 가진 건 없는 병신이죠.”

“괴물……이라고?”

“네. 인정하긴 싫지만요.”

그에 난 조심스럽게 내 현 상태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했다.

영혼이 결손된 상태, 코드 108 르피너스에 의해 만들어진 장난감, 어느 정도 감추고 통제할 수 있지만 정상인들을 보며 느끼는 ‘살인적인 질투심’, 그로 인한 주기적인 살인……. 사실상, 내가 소설 속에 빙의된 사람이란 거 빼고 다 말했다. 서예린과 싸장님에게 말했던 것처럼.

“…….”

그런 내 설명에 아가씨의 얼굴 표정이 점점 썩어 들어간다.

어느 정도 각오했지만 기분이 참……. X 같았다. 그래, 딱 그 말이 정확해. 좋다고 다가온 사람이 내 실체를 보고 질겁하는 느낌이란.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씁쓸하기 그지없구만. 그렇게 내 고해성사가 끝나자 아가씨는 굳은 얼굴로 소주를 비운 뒤 사납게 잔을 내려놓는다.

“그래서, 결국 거부하는 거네?”

“……네?”

“결국, 날 거부할 변명과 거짓말을 구질구질하게 늘어놓는 거잖아? 나 이렇게 안 좋다면서. 그러니 못 사귀겠다면서! 니가 늘어놓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 아니…….”

“됐어!”

뭔가 핀트가 어긋난 것 같기에 해명하려 했지만 빼액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을 향해 나가는 아가씨, <눈>으로 본 반대편 아가씨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있었다. 그에 나도 재빨리 일어나 그 손을 붙잡았다.

“놔.”

“아가씨, 전 진지해요! 거짓말도 아니에요!”

“안 놔? 그 딴 웃기지도 않는 말을 변명-.”

-치이이이익…….

소리치려는 아가씨를 보면서, 나는 증명을 위해 근처 테이블 위에 지글지글거리는 불판 위에 내 왼 손바닥을 얹었다.

“우, 우와아악!”

“꺄아아악!”

곱창에서 나온 기름으로 튀겨지고 있는 불판, 술 마시던 아저씨들이 고기 불판에 난입한 내 손을 보며 기겁한다. 그 소란에 다른 사람들도 내가 벌인 짓을 보며 몇몇은 비명을 지른다.

“뭐, 뭐하는 거야! 손! 손 떼! 미친놈아!”

아가씨도 내 자해에 기겁하며 내 손바닥을 떼어 내려고 하지만-.

“웃기지도 않는 변명이 아니에요.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전부 진실이에요.”

난 한층 더 강하게 왼 손바닥을 불판에 짓누르면서 아가씨를 향해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에 아가씨도 울상이 된 얼굴로 내 손을 당긴다.

“아, 알았으니까 손부터 떼!”

“믿겠어요?”

“그래! 믿어! 그러…….”

천천히 왼 손바닥을 떼어냈다.

기름에 코팅이 되어있긴 했지만 손바닥이 약간 들러붙었네. 그렇게 곱창집 내부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아가씨는 당황하더니 허겁지겁 죄송하다며 지갑을 꺼내 5만 원짜리를 뭉텅이로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죄, 죄송합니다! 야! 따라와!”

내 익어버린 왼 손바닥에 물수건을 덮어주며 날 끌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사람들의 인적이 뜸한 건물 틈까지 가서 내 노릇하게 익어버린 손바닥을 물수건으로 누르며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생글거리고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나, 난. 거절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았어. 너무 말이 안 되는 소리라…….”

“아니에요. 아니, 아가씨 같은 사람이 좋아한다고 하면 어떻게 안 받아들여요? 당연히 OK죠. 같이 어울리긴 하지만 사실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사람이여서 생각도 안 했을 뿐이지.”

“그, 그래?”

반색하는 아가씨, 그 표정을 보며 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나중에 제 실체를 파악하곤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 말한 거예요. 다시 말하면……. 오히려 제가 테스트를 받던 거죠. ‘아, 사실 병신이니 없던 일로 하자.’하고 나간 것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아냐!”

단호하게 외친 아가씨는 내 양 어깨를 붙잡고, 감고 있는 내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신다.

“신분, 북쪽 출신……. 그런 건 내게 중요치 않아!”

“……마음이 괴물인데요.”

“날 해치진 않을 거잖아? 그럴 거였다면 진즉에 했겠지. 오히려 날 구해줬고……. 무엇보다 내가 널 계속 좋아한다는 게 중요해!”

눈을 빛내며 날 바라보는 그 모습에 나도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지금껏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그에 아가씨는 당당히 선언했다.

“국정원도, 그리고 예린이나 혜영이가 낚아채게 둘 순 없어. 사실, 이번에 엄청 배 아팠지. 그래, 널 빼앗기면……. 내가 못 버틸 것 같아.”

“하하.”

“난, 바보가 아니야. 그러니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아가씨는 돌연 허릴 숙이며 가볍게 나와 입술을 맞댔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치고 들어온다. 입술을 서투르게 비집고 들어오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것, 상대방의 호의에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에 그 반가운 불청객을 맞이했다. 잠시 서로 껴안고 체온을 나눈 뒤에 떨어졌다.

“하아, 하아.”

“후우.”

길게 늘어지는 침을 닦으며 내 기억 속에 이런 게 있나 떠올렸다. 음, 슬프게도 없네. 난 모쏠인 듯? 그리고 무엇보다…….

“첫 키스가 곱창맛이라니……. 무드하곤.”

“야!”

“하하하, 그래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입 안에서 느껴지는 곱창의 맛, 여전히 투구의 효과 덕분에 텁텁하게 느껴졌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서 그런가?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아가씨를 놀리며 웃고 있는데, 아가씨가 내 손바닥 위에 올라간 물수건을 보며 망설이다가-.

“그……. 우, 우리 집에서 쉬었다 갈래?”

연이어 폭탄을 던졌다.

서, 설마? 그 생각지도 못한 쾌속 진행에 내가 다시 ‘덜컥!’ 굳어버리자 아가씨는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금요일이잖아? 어차피 자야 할 텐데. 어, 지하로 돌아가는 것도 힘들고, 호텔에 머무르는 것도 그렇고……. 그 손바닥 치료도 해야 하고…….”

막판가선 우물쭈물하며 벌게진 얼굴로 고갤 숙이는 아가씨, 훤한 드러난 마빡처럼 정말 일직선 돌진이네. 왠지 모르게 술기운에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다. 피곤해서 그런가? 그에 피식 웃으며 난 마빡이의 어깨에 살짝 머릴 기댔다.

“그럼 피곤하니 신세 좀 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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