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85화 (285/350)

제285화

5.

“X발, 뭐라고?!”

성난 고함을 내지르며 박차고 일어서는 아가씨, 마빡에 커다란 핏줄을 세우며 몸에서 기세를 뿜어내시는데 반사적으로 마력이 룬문자를 형성하며 정전기가 몸에서 ‘빠직빠직!’ 번져나간다.

“아, 아가씨! 진정하세요!”

“야, 이게 진정이 되는 일이야?! 남의 일이 아니야! 네 일이라고! 네 일!”

손을 뻗어 말리자 아가씨가 버럭 화를 내는 가운데, 난 철수를 변호했다.

“설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겠어요? 그냥 순진한 애를 구슬리기 위해 립서비스한 거라고 생각하겠죠!”

“아니, 이 녀석이 ‘마력 각성’한 게 밝혀지면……. 하아, 됐다!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고갤 숙인 철수를 노려보며 ‘빠득!’ 이를 갈곤 문을 박차며 사무실을 나가는 아가씨. 평소답지 않게 감정에 휘둘리는 그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화내는 것도 결국엔 날 걱정해서 그러는 거니까. 진짜, 내가 눈에 콩깍지가 씌었구나. 마냥 다 좋게 보이네.

어쨌든 좀 싸늘해진 분위기에 헛기침을 하며 철수를 바라보았다.

“큼큼, 시간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우리 아가씨가 다혈질 기질이 좀 세서.”

“…….”

“자, 앉아서 이야기하죠.”

죄인처럼 고갤 숙인 철수를 향해 앉으라고 손짓한 뒤,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에 넣어둔 양젖우유를 2병 꺼냈다. 그러곤 철수의 앞에 하나를 내려놓으며 다시 내 자리에 앉았다.

“좀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그것이…….”

천천히 입을 여는 철수, 그 ‘조선족 사업가’와 술을 마시고 ‘약간의 유흥’을 하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남자 앞에서 기묘하게 마음이 풀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술에 취해서 묻는 말에 떠들다 보니 나-한새벽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 나왔다고.

그리고, 거기서 떠들었던 것들은…….

“……일단, 생각나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이 뒤로는 술에 취해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흐음.”

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팔짱을 끼자 철수의 어깨가 더 움츠러든다.

‘마력 각성제’를 주겠다는 약속, 영체 관련 연구를 한답시고 지하실에서 시체를 만지작거린 것, 심연 관련된 일을 하게 된 계기, 소환수를 만들다가 폭발을 일으킨 것……. 그냥 여기서 있던 일을 싹 다 주절주절 말했다. 지금 보니 이런 것들도 다 ‘정보’가 되는구나.

……하지만, 어쩌겠어?

철수가 어른스럽고 몸도 건장하지만 이제 고1~2 나이 대 남자애다. 초강대국의 스파이가 작정하고 마법까지 걸면서 정보를 뽑아내는데, 그걸 눈치채고 말 안 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아니, 자신의 치부를 숨길 법한데 이렇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대단한 거다.

그렇게 잔뜩 움츠러든 철수를 향해 난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숨길 법도 한데 이렇게 말해주다니……. 덕분에 훨씬 대응하기 편하겠어요.”

“그…….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더 흘러 들어간 말이…….”

“아닙니다. 저에 관한 겁니다.”

양젖유를 마시며 해보라는 듯이 고갯짓하자 철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언제부턴가 대장을 떠올리면……. 계속 부정적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법 때문일 거예요.”

“아닙니다. 그놈을 만나고 더 심해지긴 했지만 그 전에도 느꼈습니다. 여름방학 이후에 계……. 아니, 대장이 그렇게 변한 뒤에 만났을 때부터입니다.”

담담히 속마음을 털어놓는 철수. 아니, 왜 나한테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갤 갸웃하자 철수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대장이 지금처럼 변하게 된 걸 파악한 뒤에……. 전 계속 대장을 ‘제가 알고 따르던 대장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심 시기와 질투도 했고요. 그래서 감히 보육원을 차지하려고도 했습니다. 물론, 첫날부터 처참하게 박살 났지만.”

“하, 하하하. 그거 말하려고 한 거예요?”

딴마음 품었다는 고백에 피식 웃었다.

뭐, 당연한 것을 말하네. 겉으로나 속으로나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내가 철수 입장이어도 그러겠다. 유리병에 남은 양젖유를 기울여 비운 후, 난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요. 저도 ‘이전의 한새벽’과 ‘지금의 저’는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고. 전 신경도 안 써요.”

“그래도 지금까지 대장이 베푼 것을 생각…….”

“아니, 오히려 잘됐어요.”

손을 들어 철수의 말을 도중에 끊은 뒤, 난 빈 유리병을 내려놓으며 철수를 향해 씨익 웃었다.

“사실, 제가 이번에 여기에 온 건 ‘북쪽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랍니다.”

“마……무리 말입니까?”

“네, ‘마무리’죠. 여름방학 때, ‘힘이 달려서 못 했던 일들’을 처리하려고 온 거예요.”

우그 타람에서 일하기 바쁜 내가 괜히 휴가까지 내면서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철수에게 약속했던 ‘마력 각성제’를 전달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그것보단 나머지 ‘신경 쓰이는 북쪽의 일들’을 정리하려고 온 거지. 그리고 그 일들 중에는…….

“그중 하나가 여기 북쪽의 것들을 철수와 시아에게 완전히 넘기는 것이랍니다.”

“……!?”

철수의 눈이 부릅떠진 가운데, 난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그래서 좀 무리해서 마력 각성제를 준 거예요. 마력 각성자가 주인이면 함부로 못 건드릴 테니까.”

“하, 하지만! 이곳만 하더라도 엄청 돈이 들어간…….”

“20억이라고 했었나요?”

내 말에 고갤 끄덕이는 철수, 대충 20억이라고 철수가 언급했었지. 눈이 돌아가는 엄청난 액수이긴 하다만, 난 그 돈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살해한 조폭들의 현물이나 부동산 등이었거든. 이곳 목장의 소유권을 정식으로 가져가는 조건으로 국정원이 싹 쓸어갔지.

머릴 긁적이며 난 어깰 으쓱였다.

“돈이 진짜 나갔다면 포기 안 했을 것 같지만, 솔직히 우연하게 얻은 느낌이라서 그런지 별로 제 거라는 생각은 없어요. 그냥 애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느낌?”

“…….”

“근데, 전 조직 운영 같은 거 신경 쓰는 것보단 연구나 구하는 게 좋아요. 여름방학 때 봤죠? 그냥 하루 죙일 지하실에 처박혀서 <연금술> 연구하는 거?”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신경 써야 할 게 많으면 연구도 잘 안 돼죠. 그래서 철수와 시아에게 완전히 넘기려고 해요. 따지고 보면 지금도 그렇긴 하다만.”

이전엔 철수에게 하청 맡기고 간간이 돈을 뽑아내는 걸 생각했는데, 이젠 이야기가 다르다.

돈 주고도 못 구하는 ‘마력 각성제’를 만들 수 있게 됐고, 아직 이름도 없는 ‘쓰레기 처리 기업’의 지분도 3%나 가지고 있다. 월 1억씩 배당금 나온다고 하니까 가지고만 있어도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 정 뭣하면 아가씨에게 달라붙어서 데릴사위짓 하면 되고.

그래, 이곳은 이제 계륵(鷄肋) 같다.

가지고 있기엔 은근히 신경이 많이 가고, 그렇다고 팔아치우기엔 아이들이 있어서 팔 수 없는 좀 ‘애매한 곳’. 하지만, ‘철수와 시아’에게 넘긴다면? 씩씩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

그런 내 말에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못 하는 철수, 나름 꽃미남이 저러니 웃기네. 그에 빙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냥 두 사람이 가지시죠? 이미, 변호사에게서 자문을 받아 소유권 이전에 대한 서류도 준비해왔는데.”

“어, 어어어…….”

고장 난 장난감처럼 잠시 ‘어?’만 반복하다가 철수는 이내 고갤 흔들더니 양 뺨을 세게 ‘찰싹!’ 후려쳤다. 그러곤 특유의 차가운 갈색 왕자님 같은 표정으로 돌아오며 입을 열었다.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 거절하시는 건가요?”

20억짜리 목장을 준다는 건데 거부? 솔직히, 그럴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하지만, <눈>으로 여러 방향에서 철수를 관찰하니 은연중에 흥분한 기색이 보인다. 그냥 덥석 제안을 받아들이면 보기가 안 좋으니 말만 저렇게 한 거겠네.

그에 난 머릴 긁적였다.

“하긴, 마력 각성자가 됐으니까 북쪽은 신경 안 쓰고 남쪽에서 새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죠. 저처럼 생각 외의 적성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

“…….”

“그럼 제가 계속 가지고 있어야겠…….”

“아닙니다.”

재빨리 대답하는 철수, 겉으론 감정을 숨기곤 있지만 내 말을 도중에 끊었는데도 그걸 인지 못 할 정도로 흥분했다. 내가 바라보자 철수는 고갤 젓는다.

“거부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몰라서…….”

“지금껏 잘 이끌었잖아요, 뭘.”

“하지만, 사실상 전부 대장이 판을 깔아준 것 아닙니까? 군벌과의 교섭은 물론이고 국정원의…….”

어깨를 살짝 늘어트리며 철수는 ‘자신이 왜 부족한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대충, 내 비호가 없으면 조폭들이 달라붙을 거라는 이야기. 하지만, 나도 ‘그 정돈’ 생각했다. 진짜 두 사람에게 무작정 알아서 하라고 방치할 생각 없었어.

그렇게 걱정 가득한 철수를 향해 나는 빙긋 웃었다.

“마력 각성자 2명이 있는데 뭘 걱정해요? 두 사람 모두 나중에 미르에서 ‘전투 교육’을 좀 받으면 꽤 실력자가 될 거예요.”

“하지만, 박범기 상장이…….”

“그 인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품 안에 챙겨온 USB를 꺼낸 뒤, 난 탁자에 내려놓고 철수 쪽을 향해 밀었다.

“그놈도 제가 이번에 처리해야 할 일들 중 하나거든요.”

생각지도 못한 ‘세뇌’와 ‘중국의 스파이’에 시선이 쏠렸지만, 사실 이번 방문의 ‘가장 중요한 일’은 나의 사회적 약점-진짜 한새벽이 억지로 찍은 스너프 비디오를 없애는 거다.

그리고, 그건 아직 개성의 군벌-박범기 상장에게 있지.

국정원에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걸 처리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여름방학 시점에선 무력이 딸렸기에 ‘나도 놈의 비디오를 확보했으니 협박하면 그걸로 대응하면 된다.’고 끝냈지만……. 이젠 군부대를 뚫고 가서 증거를 없앨 만해.

이게 뭐냐는 듯이 USB를 바라보는 철수를 향해 난 입을 열었다.

“목장의 이전 주인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알죠? 그 스너프 비디오 중 하나예요. 정확히 말하면 박범기 상장의 것. 그 새끼, 소년 취향이더라고요. 역겹게시리.”

“그, 그런……!?”

“괜히 제가 여길 턴 게 아니랍니다? 아, 그거 다른 USB에 복사해두세요. 거기 있는 건, 놈에게 보여주며 협박용으로 써야 해서.”

또다시 경악하는 철수를 향해 난 고갤 주억였다.

“어쨌든 협박하면서 여길 건드리지 말라고 할 거예요. 자기 치부가 드러나긴 싫을 테니 아래 조직들을 알아서 자제시키겠죠.”

“하,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구랑 일하는지 알잖아요?”

내 마지막 말에 멈칫하다가 이내 고갤 끄덕이는 철수, 국정원을 생각하고 안심한 것이겠지만……. 거짓말이다. 국정원은 몰라, 괜히 말해봤자 하지 말라고 할 수 있으니까. 저지른 뒤엔 좀 꺼림칙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내 약점은 없애야지!

그런 철수를 향해 난 고갤 까닥였다.

“뭐, 그 ‘중국 스파이’에 대한 건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죠. 철수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하면 자신하고 보육원 애들을 보호할지에 대해. 미르에 대한 것도 생각해보시고.”

“알겠습니다. 대장.”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철수, 가보라는 듯이 손을 까닥이자 소파에 일어나 공손하게 허릴 숙인 뒤 밖으로 나갔고…….

“……!?”

싸늘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가씨를 보곤 움찔한다.

별다른 말 없이 비키란 듯이 손짓하는 아가씨. 철수가 살짝 고갤 숙이며 서둘러 사라진 뒤, 아가씨는 안으로 들어와 사무실 문을 닫고 내 옆쪽 소파에 앉았다. 그러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날 바라보신다.

“어떻게 할 거야? 중국 스파이라는 놈, 당장 국정원에 알려야 하는 거 아니야? 정신까지 주무른다며? 이거 보통 심각한 사안이 아니야.”

“……일단, 여기 방문한 목적부터 처리한 뒤에 생각해보려고요.”

“…….”

“사실, 별다른 물증이 없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국정원에 신고하면 ‘여기 오기 전에 계획한 일’을 하기 힘들어요.”

“하아, 그렇긴 하네.”

한숨을 내쉰 후, 고갤 주억이는 아가씨. 당연히 아가씨도 내가 여기로 온 ‘목적들’을 알고 있다. 북쪽에서 손을 떼겠다고 하니까 엄청 반기셨지. 목장 처분에 관한 것도 아가씨의 도움을 받았고.

어쨌든 그런 내 대답에 아가씬 결연한 표정으로 다시 날 바라봤다.

“좋아, 오늘 밤에 바로 그 일부터 처리하자!”

“……근데, 꼭 같이 가셔야겠어요?”

내 말에 아가씨는 ‘째릿!’하며 바라보지만 이번엔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하고 예린이 둘이서 할 수 있어서 그래요. 여러 명이 가봤자 들킬 위험만 커지니까 말한 거고.”

“그래서 밖에서 대기하기로 했잖아. 혹여 사고가 터지면 지원하기로.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내 실력 알잖아? 유혈에 잠겼을 때보다 더 강해졌거든?!”

“…….”

“그럼 나만 손 놓고 있으란 거야?”

삐딱하게 날 바라보는 아가씨에 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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