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3화
62화. 난 당하고는 못 살아!
1.
점심시간, 난 침대에 걸터앉아 전자 담배를 뻐끔였다.
충동적인 짜증과 울분은 아가씨를 괴롭히며 어느 정도 해소한 상황, 게다가 심신을 나른하게 풀어주는 대마초 계열의 연무를 뱉어내며 냉정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하아…….”
여전히 짜증과 울분은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정원은 그놈을 ‘형식상으로’ 처벌할 생각밖에 없다. 그래, 딱 봐도 그래 보여. 우리 싸장님에게 부탁해서 ‘보이콧’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길어야 몇 개월이다. 결국, 내가 당한 것 때문에 우리 싸장님의 사업을 방해하는 꼴이니까.
-뿌득!
“에이씨…….”
반사적으로 이를 갈다가 아직 완벽히 뿌리가 내리지 않은 이빨 몇 개가 틀어졌다.
입 안에 손을 넣어 다시 이빨을 제자리에 고정시키면서 손가락들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런 짓도 안 한 선량한 날……. 아니, 상장을 죽이긴 했지만 증거도 없이 날 일부러 엿 먹인 X새끼들이 아무런 보복 없이 발 쭉 뻗고 잠잔다?!
“스읍, 하아아.”
느릿하게 연무를 뱉어내며 난 다시 ‘여기서 멈춰야 할 이유’를 응시했다.
해부용 개구리처럼 다릴 벌린 채 무방비로 자빠진 아가씨, 두 눈을 뜨고 있지만 눈동자의 초점이 맞지 않았고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여체는 여운에 이따금씩 ‘움찔!’거리며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전자 담배를 쥐지 않은 오른손을 뻗어 경련 때마다 살짝 흔들리는 과실을 움켜쥐며 민감해하는 그 꼭지를 가볍게 검지로 튕기자-.
“……히힉!!”
숨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아가씨의 허리가 활처럼 휜다.
전기가 통하는 개구리 같은 모습, 이미 축축해진 하체 쪽 시트는 더 축축해진다. 하긴, 쾌락 신경의 반응을 일일이 보고 극한으로 괴롭혔으니 저럴 만도 하지……. 텅 빈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는 아가씨의 모습을 보며 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사적 보복’을 하는 순간, 내가 사회에서 얻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몇 없는 지인들과의 관계도, 지금껏 쌓아온 내 사회적 지위도, 이 아름다운 여체도……. 심지어 목숨까지 위험해.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참고 사는 거겠지. 억울하고 분하지만,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참는 거겠지. 그러니 나도 참아야 한다. 그래,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이성적으…….
“…….”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못 참겠다.
이 개자식들에게 엿을 먹여주고 싶다. 함부로 장난치면 X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무리 충동을 억제하려고 해도……. ‘그놈들에게 엿을 먹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어느새 메아리처럼 머릿속에 가득 차버린다!
그래, 미르가 유혈에 잠겼을 당시에 도망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
혹여 ‘르피너스의 선물’이 장난친 거 아닐까 해서 <눈>으로 내 상태를 확인했지만 아니다. 그러니, 순전히 내 생각……. 아니, 확신할 수는 없네. 내 존재 자체가 일종의 ‘조작’이 가해진 상태니까.
엿 먹일 능력도 충분한데, 왜 참아야 하지?
르피너스에게 엿 먹어서 이 꼴이 됐는데, 왜 다른 새끼가 내게 악의(惡意)를 가지고 일부러 엿 먹이는 것도 참아야 하지?? 왜 나만 참아야 하냐?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온전한 존재에 대한 ‘시기와 질투’처럼……. 이것도 참기 힘들다! 아니, 참을 수 없어!
X발, 르피너스는 무리라고 해도 이 새끼들은 아니잖아!?
“하, 하하핫…….”
……그래, 열등감과 시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쓰레기가 이런 짓을 당하고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아가씨에겐 정말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스스로의 저열함에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린 뒤, 난 왼손에 쥔 전자 담배를 부스러트리며 이를 갈았다.
“역시, 난 당하고는 못 살아요.”
2.
취침용 수면제를 인사불성이 된 아가씨에게 먹인 뒤. 난 옷을 걸치고 별장 밖으로 나왔다.
감정에 치우쳐서 ‘비이성적인 짓’을 하기로 결심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머리가 돌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맨몸으로 놈들에게 가는 것은 위험해. 어느 정도의 준비는 하고 가야지. 도핑 약물은 이미 옷에 충분히 챙겼고, 내 비루한 신체 스펙을 커버할 장비가 필요한데…….
다행히, 내겐 장비를 빌려줄 사람이 있었다.
“무기를 피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셈. 무기를 쫓으면 더 피하기 어려움.”
본관 지하의 체력 단련실, 내려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한 손에 쥔 단검 크기의 단봉으로 새로운 마력 각성자 두 사람-철수와 시아-을 몰아붙이고 있는 서예린이었다. 대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두 사람의 신체 스펙에 맞춰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음에도-.
-딱! 딱! 탁!
서예린은 두 사람을 농락했다.
시아와 철수, 두 사람 모두 웬만한 동갑내기 미르 생도 정도로 움직임이 빨랐는데 서예린은 ‘툭! 툭!’ 가볍게 쳐내면서 두 사람의 몸에 연거푸 몽둥이찜질을 해준다. 그녀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무기를 움직이는 건 사람이고, 사람은 움직이기 전에 필연적으로 드러남.”
“몸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한발 앞서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멈칫하는 서예린, 그걸 놓치지 않고 두 사람이 전력으로 달려들었지만 작정하고 단봉을 휘두르자 두 사람의 목봉이 동시에 손아귀에서 튕겨져 나간다. 그 뒤, 시아와 철수도 뒤늦게 내가 내려온 걸 눈치챘다.
-짝짝짝짝.
“훌륭하네요. 벌써 웬만한 미르 4학년생 수준이에요.”
“그 정돈 아님.”
박수를 치며 칭찬하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갤 젓는 서예린, ‘전투 I’을 듣는 생도 수준으로 평가한 것 같기에 그걸 지적하자 맞다면서 고갤 끄덕인다. 어쨌든 철수와 시아에겐 점심시간이니 가서 밥부터 먹으라고 한 후, 난 서예린을 바라보았다.
“내키지 않아 했으면서 생각보다 잘 가르쳐주시네요?”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음?”
어깰 으쓱이며 대꾸하는 서예린, 그에 난 한 번 더 찔렀다.
“근데, 제게 고백할 거 있지 않나요? 그 상장의 집에서 몰래 가져온 게 있다거나…….”
“나, 난 모르는 일임.”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오리발을 내매는 서예린, 하지만 그 누가 봐도 범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난다. 내가 미간을 좁히자 서예린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그런 사고가 없었더라도 놈들은 너에게 왔을 거임! 그 비디오 없다고 하면서 네게 찾아왔잖음?! 내가 보기엔 이미 범인을 너로 정해놓고, 증거를 끼워 맞추기 한 거임!”
“……그렇긴 하죠.”
그 주장에 나도 순순히 동의했다.
추측의 영역이지만 서예린이 ‘전리품 회수’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놈들은 날 찾아왔을 것 같다. 놈들이 제시한 증거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내 스너프 비디오가 없다.’와 ‘창고 쪽에 청소한 흔적이 있다.’가 있으니까. 마냥 서예린의 탓만 하기엔 좀 그렇지. 하지만…….
“근데, 누가 그걸 가져갔을까요? 함부로 팔지도 못할 텐데 말이에요. 마법장비로 쓸 게 아니면 아예 뭉그러트려서 금덩이로 만들어 봤자 고작해야 100~200만 원도 안 될 텐데.”
“…….”
“누가 가져갔을까? 흐음~”
“끄응.”
살짝 비꼬는 말에 두 눈을 감고 신음을 흘리는 서예린, 하지만 이내 한숨을 푸욱 내뱉곤 날 내려다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친다.
“그래! 내가 가져갔음! 전리품 회수가 몸에 습관이 돼서 그랬음! 됐음?!”
“……안 미안해요?”
내 지적에 순순히 입을 다무는 서예린, 아무래도 내가 어떤 꼴이 됐는지 봤기에 순순히 말을 못 하는 거겠지. 그래, 사람이라면 최소한 미안한 마음은 가져야지!? 그렇게 말을 못 하는 서예린을 향해 난 팔꿈치로 그 옆구리를 쳤다.
“그런 의미에서 저 좀 도와주시죠?”
“……뭘 도와줌.”
“이번에 챙겨온 장비들 있잖아요? 지금 끼고 계신 반지하고 목걸이, 스카프……. 그거 좀 빌려주실래요? 달라는 게 아니고 쓰고 돌려드릴게.”
내 요구에 잠시 머리에 ?를 띄운 서예린은 이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너 복수하러 갈 거임?”
“글쎄요?”
내 오리발에 서예린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안 됨. 못 빌려줌.”
“아니, 양심이…….”
“보복하고 싶은 마음, 나도 잘 암. 하지만, 지상에서 사적 보복하면 큰일 남!”
이어서 서예린은 날 향해 가르치듯 검지를 편 손으로 까닥였다.
“가장 많이 배운 거임. 지상 인간들이 나서서 사냥하기 시작함!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엔 사냥당할 수밖에 없음! 나, 올라오기 전에 그와 관련된 영상자료 많이 봄. 아주 지겹게 틀어줬음!”
“…….”
“그러니 참으셈.”
서예린이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진지하게 말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 하지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완강히 거부하는 기색에 난 준비해뒀던 딜을 걸었다.
“좋아요. 그럼 칼 하나 값을 깎아드릴게요. 어때요? 콜?”
“……안 됨.”
“거, 너무하네. 그럼 전부…….”
“그런 걸로 안 빌려줌. 식당에 가서 달달한 양젖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머리 좀 식히셈. 그럼 나아질 거임.”
고려할 일말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위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서예린, 그 뒷모습을 보며 난 얼굴을 구겼다. 칼 2개면 바로 ok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안 넘어오네. 반지와 목걸이만 빌렸어도 큰 도움이 됐을 텐데 아쉽구만.
“흐음.”
입맛을 다신 후, 체력 단련실 한켠에 있는 총기 보관함을 열었다.
쫘악 드러나는 총기류, 내가 없는 사이에 새로운 총기류가 많아졌네. 하나씩 살펴보며 가져가기 괜찮은 게 있나 살펴보고 있는데, 계단에서 인기척과 함께 서예린이 내려온다. 양손에 하나씩 양젖으로 만든 콘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모습, 총을 고르는 내 모습을 보더니 서예린은 한숨을 내쉰다.
“머리 식힐 생각은 없음?”
“아침에 일어나서 계속 생각했어요.”
“냄새를 맡아 보니까 생각한 게 아니라 진아랑 계속 뒹굴었던 것 같은데?”
핀잔하면서 내게 다가와 손에 든 양젖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서예린, 그래도 친구의 성의를 거부하기는 그렇기에 한숨을 내쉬며 받아 들고 크게 한입 삼켰다. 그런 내 먹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서예린이 미간을 찡그린다.
“그렇게 먹는 게 아님! 뭔, 음미도 안 하고 씹어 삼킴?”
“…….”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달콤함을 음미하면서 먹으셈. 나처럼.”
“흐음.”
시범을 보여주듯 부드럽게 혀를 아이스크림을 핥는 서예린, 솔직히 투구 남용 때문에 텁텁한 맛에 비릿하기만 할 뿐인데 말이지. 어쨌든 안 그러면 계속 간섭할 기세기에 난 총기를 만지던 걸 그만하고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그렇게 다 핥아 먹자 서예린이 다시 물어본다.
“이제 좀 진정이 됨?”
“……설마, 이거 진정하라고 준 거예요?”
“아직 진정 안 됨? 하나 더 줌?”
자기가 핥던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서예린, 그 모습에 쓰게 웃었다.
“말했잖아요. 전, 이미 결심 굳혔어요.”
“……장비 안 빌려주는데도 갈 거임? 목숨이 위험할 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부딪치는 수밖에.”
숨기기 좋은 권총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서예린은 한숨을 푸욱 내뱉곤 언성을 높인다.
“그럼 범죄자 되는 거임! 지상에서 생활 못 함!”
“알아요.”
“진아 생각 안 함? 그런 짓 하면 진아와 당당히 못 만나는…….”
“당연히, 알고 있어요. 저도 바보는 아니랍니다. 그리고, 이 행동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도 알고 있죠.”
서예린을 향해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난 고갤 들어 두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와 함께 그동안 감춰뒀던 육안의 자줏빛 홍채가 드러난다. 희뿌옇게 보이는 육안의 시야로 서예린의 황금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당장 ‘이 어리석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떠올리면 제 머릿속에 스치는 것만 해도 서너 개가 넘어요. 합리적인 판단이라면 이런 짓은 절대 안 하죠, 무익한 일에 불과하니까.”
“그럼 하지 마셈!”
“하지만, 제 가슴 속에는 이성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내 가슴팍을 가리키며 난 얼굴을 찡그렸다.
“합리적인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저 자신조차도 불살라 사그라진 뒤에야 만족할 것 같은 뜨거운 것, 르피너스가 선물해준 감정이죠.”
이 들끓는 감정은 날 엿 먹인 새끼를 불살라야만 끌 수 있다.
생각해보면 르피너스가 근본 원인이긴 한데……. 감히 그 ‘초월적인 존재’에게 복수심을 불태울 깡은 없어. 난 잘난 주인공은 아닌걸? 만만한 놈에게나 복수하겠다고 날뛰는 겁쟁이에 비굴한 새끼지. 그런 내 고백에 아무런 말 없이 굳어 있던 서예린은-.
“하아.”
이내 깊은 한숨을 내뱉곤 각 손에 낀 반지를 빼더니 내게 던졌다.
‘유령의 반지’와 ‘위대한 용사의 반지’. 내가 한 손으로 날아든 반지를 낚아채자 그녀는 쌀쌀맞은 얼굴로 턱짓했다.
“나머지 장비가 든 가방은 내가 배정받은 숙소에 있음.”
“……헤헤, 감사합니다.”
“난 폰 게임이나 할 거니 알아서 하셈.”
쌀쌀맞은 말과 함께 서예린은 다 녹아서 손까지 질질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계단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