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화
4.
내가 아는 건 ‘날 엿 먹인 새끼’의 이름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 같은 상황이라면 되게 난감했을 것이다. 국정원 요원에 관한 정보는 한낱 민간인이 알고 싶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마 조사하는 데만 최소 몇 개월은 잡아야 했을걸. 그 과정에서 내가 뭔 짓을 하려는지 탄로가 났을 수도 있겠고.
하지만, 내게 <눈>이라는 ‘치트키’가 있다.
내 앞의 물체를 자세히 보는 걸 넘어서 그 <과거>까지 볼 수 있는……. 르피너스에게 너프만 안 당했다면 <미래>까지 보는 게 가능했을 것 같은 능력이. 그리고 난, 아가씨에게 구출되면서 반사적으로 날 실컷 고문한 비실이 녀석의 2~3일 치 <과거>를 훑었다. 그 이유는 나도 잘……. 아마, 내 추악한 본성이 이미 그때부터 보복을 결정해뒀기에 그런 것 아닐까?
어쨌든 그 덕분에 비실이의 집을 찾아갈 수 있었고, 거기서 국정원 놈들의 행적을 알 만한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들을 수 있었다.
“흠~♬”
‘평양 종합 병원’이라는 꽤나 깔끔한 시설의 대형 병원. 근처 가게에서 병문안용 과일 바구니를 하나 산 후, 난 병문안을 온 것처럼 방문객 무리에 뒤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런 제지도 없이 비실이의 <과거>에서 봤던 병실까지 직행했다.
“거, 근질근질하지 않나? 볼 것도 없고. 남쪽 인터넷이 안 되는 게 말이 되나?”
“그래도 산재(産災)로 놀고먹으면서 월급 받는 게 어디간?”
“뭐, 그렇긴 하디.”
널찍한 4인 병실, 환자복을 입은 건장한 3명의 남자들이 중앙의 탁자에 앉아서 배달 치킨을 뜯고 있었다. 비실이의 <과거>에서 본 것처럼 나이롱 환자들이구만. 어쨌든 가볍게 노크를 한 후, 난 그대로 병실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병문안 과일 바구니를 들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
내 인사에 눈을 끔뻑이며 서로 ‘누군지 아냐?’는 듯이 바라보는 남자들, 비실이완 달리 내가 누군지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다. 좀 서운하구만. 고작 머리카락 염색하고 스타일 바꾼 것뿐인데 몰라보다니.
살짝 입맛을 다신 뒤, 난 선글라스를 벗고 두 육안을 뜨고 웃었다.
“이러면 기억나시려나?”
“…….”
“우리 3일 만이죠?”
내 자줏빛 홍채를 보고 나서야 내가 누군지 눈치채고 얼굴이 굳어지는 남자들, 하나같이 살짝 허릴 숙이거나 다리 근육을 수축시키는 등 곧바로 몸을 쓸 준비를 하며 긴장한다. 그에 난 적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깰 으쓱였다.
“전 그쪽들에게 별다른 악감정 없어요.”
“…….”
“그쪽에게 고문을 당한 것도 아니고……. 물론, 잡혀 가긴 했지만 전부 위에서 시키니까 했을 거 아니에요? 게다가, 지금 병원에 입원한 것도 제 동료들에게 호되게 당하신 것 때문이고. 그냥 질문할 게 좀 있어서 왔으니까 긴장 풀어요.”
천천히 다가가서 탁자 위에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내가 무방비로 코앞까지 오자 남자들의 분위기도 살짝 누그러진다. 이어서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남자가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왜 찾아온 건지 모르겠지만……. 우린 할 말 없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근데, 한 명은 어디 갔어요? 4명이지 않았나요?”
빈 의자에 앉으며 난 사근사근하게 남자를 향해 질문했다. 날 잡으러 왔었던 ‘전투조’ 인원은 4명, 근데 탁자에 앉아 있는 이는 3명뿐이다. 비실이의 <과거>엔 분명 4명이었는데 말이지? 내 질문에 남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가장 연장자가 고갤 젓는다.
“손전화를 받고 잠시 나갔다. 친구의 마누라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나…….”
“친구 마누라요?”
여기 없는 놈은 비실이가 병문안을 왔던 친구 녀석인데, 녀석의 친구 마누라라고 하면……. 비실이네 아내인가? 거, 비실이를 ‘좀 더 엿 먹이는 느낌’이 좋아서 일부러 전화 통화를 켜놓고 조롱했는데 이렇게 일이 흘러가네.
가볍게 입맛을 다신 후, 난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꺼내 과도로 깎으며 본론에 들어갔다.
“제가 불편하신 것 같은데, 진짜 하나만 질문하고 갈게요.”
“……뭐지?”
“절 잡으라고 한 녀석들, 그리니까 ‘대북 통제단’ 쪽의 녀석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내 추궁에 얼굴이 굳어지는 남자들, 하지만 난 인내심을 가지고 사과를 깎았다.
비실이를 죽인 건, 그날 하루 종일 당한 게 있어서 충동적으로 저질렀지만 이 친구들에게 그다지 악감정은 없다. 게다가 얘네들은 아가씨와 서예린에게 한번 크게 당하기도 했잖아? 그래, 꼴린다고 그냥 닥치는 대로 죽여선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난 ‘이성적’이니까!
그렇게 잠시 동안 묘한 침묵이 감돌던 와중에-.
-드르륵.
뒤쪽에서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에 없던 녀석인 비실이의 친구. 그 등장에 자연스레 방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나도 슬쩍 고갤 돌려서 바라봤다. 다른 놈들과는 달리 녀석은 나를 보곤 곧바로 누군지 알아차린 듯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니-.
“잡아!”
돌연 소리친다.
그와 함께 내 양옆에 앉는 놈들이 날 덮쳤다. 하지만, 내 <눈>에 사각(死角)은 없지. 덮치려고 한 순간부터 그 기색을 포착해 서예린의 회색 스카프를 활용해 체중을 줄였고-.
-스걱!
“크윽!”
뒤로 피하며 가볍게 과도를 휘둘렀다.
팔이 꽤 깊게 베였음에도 멈추지 않고 달려드는 놈들, 럭비공에 몸을 던지는 미식축구 선수마냥 몸을 던져서 날 뭉개려 한다. 문 쪽에서도 방금 들어온 놈이 달려드는 상황, 딱히 이놈들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까-득!”
혀 밑에 넣어놨던 앰플을 씹었다.
싸장님 레시피의 특제 도핑 약물, 이전엔 그냥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곱게 잡혔지만 이젠 아니지. 그 내용물이 연무(煙霧) 형태로 폭발적으로 증발하고, 난 그 약물을 그대로 폐로 빨아들이면서 놈들을 향해 파고들었다.
‘뉴 송파구’에서 소총을 갈겨대는 오크 무리를 상대로 압도하던 나다.
그때와 비교하면 내 장비가 좀 부실하긴 해도……. 이 잡것들 상대하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야. 여러 방향에서 배치된 <눈>을 통해 그려지는 조감도로 놈들의 움직임을 읽으며 난 과도를 휘둘렀다.
-스걱! 콰직!
허릴 숙여 한 놈의 허벅지를 긁고 지나치고, 보디 태클을 하는 놈의 어깨에 과도를 내리꽂았다. 정확히 쇄골 아래에 동맥이 지나는 방향으로. 그에 동맥이 터지고 칼을 뽑자 피 분수가 쏟아지며 내 얼굴에 약간 튀겼다. 날붙이 가지고 싸우면 흔히 벌어지는 상황이지만-.
“이……!”
짜증이 치솟았다.
식인 투구가 버려놓은 식성(食性), 식인종으로 살아갈 수 없기에 난 나름 열심히 재활 노력을 하고 있다. 억지로 식사도 하고 정 역겨워서 못 먹겠으면 흙 맛이 나는 압축 식량으로 때웠지. 그래, 사실상 미각을 거의 포기하고 살았는데 지금 입가에 튀긴 혈액이…….
달았다. 아득히, 달았다.
음식물 쓰레기만 먹다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것 같은 느낌. 피를 맛보는 순간, 내 앞에 있는 인간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꼭 ‘움직이는 음식’으로 보인다. 진짜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구만. 이대로 과도로 더 썰어대다가 왠지 식욕이 폭발할 것 같기에-.
난, 칼을 쓰는 대신에 내 앞에 달려오는 놈에게 빈 왼손을 뻗었다.
맹독의 말뚝 (Venom Spike)
레벨 5 독(연금술)/파괴/대기
시전 소음 : 10
주문 소음 : 5
대미지 공식 : 3d(4+0.15*SP) 독 + 2d(4+0.15*SP) 물리
최대 SP : 200
최소 소모 마력 : 5
효과 : <독침>과 <액체 질소 대포> 마법을 바탕으로 한새벽과 강수영이 새롭게 만들어낸 독마법. 순간적으로 공기를 압축+변형해서 팔뚝만 한 독성 투사체를 만들어낸 후, 다시 폭발시켜 발사한다.
흉악한 물리력을 지녔으며 이 말뚝에 스친 ‘피와 살점을 가진 살아있는 적’은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쓰가가가아악!
병실 내부의 공기가 한순간에 압축, 내 왼 손바닥에 빨려 들어가며 날카로운 돌풍이 몰아친다. 연이어 손바닥에 모인 공기 덩어리에 ‘다른 차원의 법칙’이 적용되어 고체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만들어진 불쾌한 광채가 번뜩이는 말뚝은-.
-부우우우웅!
벌 떼가 날아오는 소음을 수백 배 증폭시킨 듯한 굉음과 함께 달려드는 놈에게 쏘아졌다.
내게 돌진하던 놈도 뭔가 심상찮은 것을 느낀 것 같았지만 이미 몸을 던진 상태라서 어떻게 피하기엔 애매했다. 그에 양손을 교차해 말뚝을 막으면서 보디 태클을 걸려 했지만-.
-콰드득!
“……!”
“크흑!”
교차한 양 팔뚝은 물론이고 몸통의 정중앙까지 관통, 그 등을 뚫고 뒤쪽에 무릎을 꿇고 있던 부상자의 얼굴을 스치고 병원의 벽을 꿰뚫었다. 심장이 터진 놈은 제대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즉사, 그대로 그 몸뚱이가 달리던 관성에 바닥을 굴렀고-.
“끄……끄으으얽!?”
말뚝에 뺨이 스친 놈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과도에 쇄골이 내리찍힐 때도 내지르지 않았던 비명. 나머지 두 명이 흠칫한 가운데, 스친 뺨에서부터 올라오는 ‘비현실의 맹독’은 비정상적인 속도로 놈의 얼굴로 퍼져나가면서 그의 신경을 마비-과부화시켰다.
“얽! 얽거거걲!”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경련하며 떨리는 것과 함께 그 부분을 중심으로 말라비틀어지며 기괴한 악취를 풍기며 순식간에 썩어가기 시작한다. 어떻게 손으로 상처를 쥐어뜯지만 뇌가 녹아내리면서 경련하다가 불과 몇 초 만에 사망했다.
‘뉴 송파구 원정’ 뒤에 만든 마법들 중 하나다.
원정을 하고 나서 느낀 수많은 단점들 중 하나-강력한 단일 대상에 써먹을 만한 독마법이 없다-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지. 제작 과정에서 싸장님에게 자문을 많이 받았는데, 완성된 마법을 보곤 ‘이건 나도 써야겠다.’면서 주문의 수식을 받아 가셨지. 뭐, 어쨌든 간에-.
“좋게 말하니까 저를 병신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쓰가가가아악!
-쓰가가가아악!
오른손의 과도를 내던진 후, 난 양 손바닥 위에 <맹독의 말뚝>을 만들어냈다.
병실 창문이 깨질 정도로 거칠게 칼바람이 휘몰아친 뒤에 내 양 손바닥 위에 떠오른 두 개의 시커먼 말뚝, 그에 두 사람이 움찔하는 것을 보며 나는 연이어서 내 기세를 터트렸다.
순식간에 살기(殺氣)가 병실을 뒤덮는다.
그 질척한 악의에 남은 두 놈의 얼굴이 공포로 물든다. 고작해야 오크 기사급도 안 되는 녀석들이 이 기세에 대항할 수 있을 리 없지. 병실에서 벌어진 소란에 달려오던 몇몇 간호사들이 복도에서 내 기세에 노출되곤 거품 물고 기절하는 가운데-.
“먼저 대답하는 사람은 ‘안’ 죽일게요.”
난 조금 거친 최후통첩을 날렸다.
5.
마력 각성자가 ‘작정하고 일으킨 범죄’는 평범한 경찰로는 대응이 힘들다.
훈련받지 않은 마력 각성자 해도 그 위험도는 ‘맹수’에 비견되고, 고작 권총이나 테이저건을 지닌 ‘평범한 인간’인 경찰이 대응하기엔 무리인 감이 있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경찰은 마력 각성자를 상대하기 위한 마력 각성자 부대인 ‘집행관’을 운용한다.
하지만, 북쪽-평양에선 좀 이야기가 다르다.
대한민국 사람인 이상, 남쪽에서 머무르려고 하지 북쪽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게 북쪽에서 그나마 안전하고 평온하다고 하는 평양이라 할지라도. 그런 이유로 평양의 인원이 부족해지자 정부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게 허락되지 않는 이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남쪽에 들이기엔 껄끄럽다고 평가되는 마력 각성자들.
그런 이들에게 평양에 거주할 권리와 안정된 일자리, 임기를 채우면 그 가족들이 남쪽으로 이주할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인물들을 한데 모아놨다가 새로운 사조직이 되면 골치 아프기에 그들을 통제할 만한 이들로 방첩·첩보 전문가들인 ‘국정원’을 기용했다. 그것이 제3차장 휘하 ‘대북 통제단’의 시작이었다.
당연히, 평양에서 신고된 ‘마력 각성자 관련 범죄’는 대북 통제단에 보고됐다.
“여기, 신고자가 말한 내용을 정리한 문서입니다.”
평양 관리 본부 청사, 토요일 당직인 ‘대북 통제단 요원’은 얼굴을 찡그린 채로 현지인 직원이 건넨 문서의 내용을 읽어나갔다.
신고가 들어온 지 10여 분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사건, 평양 경찰서를 통해 정식 이첩된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현지 북쪽 협력자가 대북 통제단에 직통으로 걸어온 신고였다.
그 내용도 심각했다.
아직 확인되진 않았지만 그들에게 협력하고 있는 북쪽 마력 각성자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것,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남쪽에 거주하고 있는 살해자의 가족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가 문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이어서 남편이 악을 내지르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습격자는 전화 통화를 끊지 않은 채 자신들을 조롱했다. 남편이 사람 고문하고 죽이는 인간 백정이라고 비하했다.”
“현재, 인근 평양 경찰서 병력이 김관우 씨가 있는 주택을 확인하러 출동했습니다. 그리고, 김관우 씨는…….”
“나도 알아. 보위부 출신의 고문 기술자지.”
파일을 훑으며 당직 요원은 ‘김관우’에게 원한을 가졌을 만한 이들에 대해 떠올렸다.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가족의 증언 중엔 ‘범인을 특정할 만한 단서’도 있었다.
“통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소녀 같았다. 그리고, 그 말투는 조롱조였지만 존댓말이었다.”
“…….”
“이거, 너무 증거가 뚜렷해서 오히려 의심이 드는데.”
이런 특징을 가진 이는 딱 하나밖에 없다.
‘한새벽’, 그리고 최근에 대북 통제단이 분위기가 좀 가라앉은 이유이기도 했다. 다른 차장실에서 ‘중요한 경제 협력자를 고문해 관계가 틀어지게 했다.’고 쌍욕이 들어오기도 했고. 그에 요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와중-.
“평양 종합 병원에서 살인 사건! 신고 내용에 따르면 ‘마법 사용자’로 추정됨!”
경찰서 연락 담당 직원이 커다랗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