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02화 (297/350)

제302화

7.

놈이 아주 대놓고 ‘시간을 끌겠다.’고 선언한 뒤, 싸움은 긴장감이 팍 식었다.

-푸슛! 푸슛! 퓨슛!

우리의 ‘간격’을 파악하고 그 근처에서 견제를 날리는 말총머리, ㅏ형태 칼날 무기의 짧은 칼날 부분을 마치 송곳처럼 찔러 넣으면 그 끝에서 참격 형태가 아닌 투사체 형태의 <진공 칼날>이 뻗어 나온다. 그걸 피하거나 쳐내면서 우린 놈에게 달라붙었으나-.

-팡! 파팡! 팡!

“흐음, 정말 놀라워.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갖췄지?”

-푸슛! 풋!

“접촉했다는 코드 108 신상의 효과인가? 르피너스를 상징하는 조각이라고 들었는데 이상하군. 설령 신을 믿더라도 그런 효과가 나진 않을 텐데 말이지.”

녀석은 월등한 기동력을 뽐내면서 정확히 우리가 접근한 거리만큼 뒤로 빠진다.

얄미울 정도의 거리 조절. ‘쪼금만 무리하면 잡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꼬리를 흔드는데, 무시하려고 하면 저 송곳 형태의 <진공 칼날>을 ‘꾹! 꾹!’ 찔러 넣는다. 그렇게 우리 신경을 벅벅 긁으면서 계속 이쪽에 말을 건다.

“……그 아가리 좀 닥치면 안 되나요?”

“내가 왜?”

치미는 짜증에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웃음 섞은 음성으로 되묻는 말총머리, 지금 보니까 말 거는 것 자체도 신경을 긁는 것의 일환인 것 같구만. 말총머리가 날리는 견제를 피하면서 우린 놈을 완전히 코너 쪽으로 몰아가 포위하기 위해 6~7m 거리를 벌렸다.

이전 같았으면 우리가 떨어진 순간, 곧바로 내 쪽을 향해 튀어나와 치명적인 공격을 이어 나가겠지만-.

-팡! 파팡!

녀석은 공격하는 대신에 코너 천장 쪽으로 도약해서 벽을 박차며 홀 쪽으로 이동한다.

허공을 유영하는 순간, 곧바로 창을 내지르면서 가장 빠른 마법인 <독침>을 난사했으나 녀석은 날아가는 도중에도 <진공 칼날>을 뿜어내면서 우릴 견제하고, 한 번 더 공기를 터트려서 날아가는 궤적을 바꿔 피하기도 한다.

“…….”

-끼기기긱!

그에 난 침묵했고 내 분신은 짜증 섞인 기성을 내지르는 가운데-.

“싸움은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하는 게 최우선인걸?”

홀 중앙에 착지하며 대답하는 말총머리. 착지 과정에서 손을 교묘하게 휘둘러 기척을 최대한 죽인 <진공 칼날>을 날린다. 그래 봤자 룬 문자가 형성되는 걸 보는 우리에겐 통하진 않지만. 가볍게 창을 휘둘러 그 공격을 걷어낸 뒤에 난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짓이 한두 번도 아니고 거의 5분째다.

“……인정할게요. 그쪽이 제가 상대한 이들 중에서 제일 강하진 않아요. 하지만, 제일 ‘짜증 나’. 허점을 좀 드러내주면서 과감히 움직여도 전혀 노리질 않네요.”

“100%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고작 몇 분 아끼겠다고 60~70%짜리 도박을 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지. 그나저나 좀 궁금하군. 나보다 강한 놈이라? 도대체 누구랑 싸워봤지?”

왼쪽 뺨에 이빨과 잇몸을 고스란히 보이면서 웃는 말총머리, 그에 속입술을 질겅이며 내 분신을 바라보았다. 기존 복제품-망령과는 달리 ‘영체의 형상’이 대단히 안정적인 분신. 하지만, 그 정교한 형상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구만.

가볍게 입맛을 다신 후, 분신에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아주 찰떡같이 알아듣는 녀석, 말총머리에게 얼굴을 고정한 채 느릿하게 걸으면서 우린 각을 쟀다. 그리고 너무 위화감 주지 않도록 나도 말을 걸었다.

“오크 전쟁 군주하고, 거대한 쥐쟁이가 있었어요.”

“……거대한 쥐쟁이?”

“그쪽보다 날렵하진 않았지만 싸움에선 더 치명적이었죠. 그림자를 타고 이동했고, 꼬리를 활용해 휘두르는 3도류가……!”

대꾸하는 와중에 돌연 튀어 오르며 접근하는 말총머리, 하지만 <눈>으로 몸 내부 근육과 마력의 움직임까지 보는 우리에겐 통하지 않는다. 곧바로 최적의 방식으로 대응하려 하자 장난이라는 듯이 휙 빠진다.

“쓰읍, X 같네요, 증말.”

“하, 하하하!”

“그리고, 제가 이번에 잡혀가서 제일 짜증 났던 것이 뭔지 아세요?”

“글쎄? 잘 모르겠는걸?”

우리가 이동한 만큼, 슬금슬금 거리를 맞춰서 움직이는 말총머리. 그러면서도 가볍게 송곳 같은 <진공 칼날>을 날린다. 그 견제를 막고 피하면서 우린 계속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건, 남에게 제 ‘생사여탈권’이 쥐어졌다는 것이었어요. 저보다 강자이면 몰라도, 별 시답지도 않은 놈이 절 죽일 수 있다고 하니 더럽게 짜증 났죠.”

“그래? 하지만, 앞으론 익숙해져야 할 텐데? 아, 내가 더 강하니 그리 화가 나진 않겠군.”

우리의 간격에 바짝 따라붙어 들어왔다 나갔다 반복하며 신경을 긁는 녀석, 하지만 별 상관없다. 날아오는 <진공 칼날>을 연거푸 피하며 나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그런 경험을 하지 않으려고 여기에 오면서 많은 준비를 했어요. 무기고에서 장비도 꺼냈고 죽인 놈들을 돌아다니면서 장비도 탈취했죠. 혹시, 아직도 이 건물을 감싸고 있는 게 뭔지 아시나요?”

“독무(毒霧)지. 살짝 닿았는데 아주 지독해. 바람을 일으켜도 잘 날아가지 않고……. 아마 다른 녀석이 여기 있었다면 많이 힘들었을 거야. 시야도 차단되고, 숨쉬기도 힘드니 말이지.”

대화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말총머리, 독무는 ‘검은 독기의 망령’ 재료들이다. 지금 이 홀 내부에도 진입한 망령들이 터지면서 꽤 자욱하게 깔렸지. 웬만한 마력 각성자도 버티기 힘든 맹독이지만, 녀석의 몸을 휘감은 바람이 방호복처럼 독무를 차단했다.

날아온 <진공 칼날>을 피하며 나도 빙긋 웃었다.

“그렇긴 해요. 확실히, 그쪽이랑은 상성이 안 맞더군요.”

“너로선 불행이지. 아, 근데 설마 도망치려는 것은 아니겠지?”

“왜요?”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어처구니없어서.”

이를 드러내며 비릿하게 웃는 녀석, 작정하면 지하철의 7~8배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괴물이다. 저걸 떨쳐내는 건 힘들지…….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야. 미리 봐뒀던 자리에 선 후, 난 놈을 향해 빙긋 웃었다.

“잠시 이야기가 딴 데로 샜는데, 아무튼 타인이 생사여탈권을 가졌다는 게 정말 기분 더러웠어요. 그래서 그런 경험을 하지 않기 위해 좀 ‘준비’를 해놨답니다.”

“준비?”

“네. 사실, 이 건물을 휘감은 독무 자체가 준비죠.”

내 앞을 분신이 가로막는 가운데, 난 혀 밑에 넣어뒀던 용숨결 물약을 이빨 사이에 껴 넣고 단숨에 씹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부실한 장비 상태, 도저히 승리를 확신할 수 없을 만큼 강해 보이는 적. 당연히 진입하면 패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고……. 곱게 잡혀서 실험쥐가 될 바엔 ‘자폭’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기에 이런 독무를 잔뜩 뱉어뒀다.

여기에 오기 전에 죽인 55명의 시신에서 살뜰하게 긁어모은 영혼의 잔재들, 그중 24명은 망령으로 토해냈고, 1명은 내 앞의 분신으로, 나머지 30명분의 연무는 이 건물을 휘감은 독무가 되었다.

“쓰으으읍!”

폭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약물의 증기를 흡입하는 것과 함께 룬 문자의 형상을 만들었다. 내 분신 또한 룬 문자의 형상을 만들면서 자세를 다잡는다. 알약을 씹는 순간, 녀석은 심상찮은 걸 파악한 듯 뒤로 빠지면서 이전처럼 폭발적으로 움직이며 <진공 칼날>을 난사한다.

안정적인 영체의 형상을 바탕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분신

자신을 이루는 구성 물질을 뽑아내 <독침>과 <독숨결>을 모방하는 이전 열화판 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분신이 쓰지 못하는 마법들 또한 있다.

그중 하나가 <독의 연소>다.

자신의 마력으로 구성된 물질을 불태워 버리는 마법, 이걸 쓰면 분신은 스스로의 구성 물질이 타오르며 ‘폭발’한다. 한마디로 자폭이 되어버리지.

-타닥!

“GAR-LO-JAR!”

분신이 달려드는 순간, 타이밍에 맞춰서 입에서 <녹색용의 포효>를 내질렀다.

지독한 맹독과 함께 뻗어나는 공기의 충격파, 목에 건 스카프로 체중을 극단적으로 낮춘 나는 누군가에게 얼굴을 후려 맞은 것처럼 머리부터 그대로 뒤로 튕겨져 나가 깨진 유리벽 너머 강변 쪽으로 날아갔다. 반면에 등짝에 포효를 맞은 분신은 반쯤 부서졌지만 추진력을 얻어 더 맹렬하게 돌진한다.

하지만, 말총머리는 더 빠르다.

<녹색용의 포효>가 닿기 전에 대비하고 있던 녀석, 광범위하게 뱉어낸 충격파 덕분에 날 곧바로 쫓아오진 못했지만 방어 마법을 구사하면서 뒤로 빠져 충격을 최소화한다. 녀석의 몸에 걸진 방어구도 그 피해 경감에 한몫했다.

이어서 자세를 잡고 날아오는 분신을 무시하며 날아가는 내 쪽으로 따라붙으려고 하지만-

-끼기기기긱!

분신이 소름 끼치는 기성을 토해내며 <독의 연소> 주문을 완성시킨다.

이전에 내가 했던 광선빔(beam) 형태가 아닌 소리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형태,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당연히 분신 스스로다. 내부의 물질들이 폭발적으로 붕괴하고-.

-!!!

이어서 가청 영역을 넘어선 진동과 함께 건물 전체가 폭발했다.

8.

몸을 웅크린 채, 난 충격파에 휘말려 날아갔다.

박살 난 건물의 잔해와 유리 파편이 총탄처럼 몸 곳곳에 박히는 가운데, 난 얼어붙은 강 위에 착지하자마자 곧바로 ‘유령의 반지’의 <투명화>를 사용해 몸을 숨겼다. 그러곤 철골만 남고 산산조각 난 건물 쪽을 바라보며-.

“쯧쯧.”

가볍게 혀를 차줬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방식의 이탈’도 생각해 두긴 했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빠질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나보다 훨씬 빠른 말총머리 짱깨, 아무리 내 분신이 대신 폭사(爆死)해준다고 한들 놈을 떼어내고 혼자 건물 밖으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힘들어 보였으니까.

근데, 녀석이 알아서 거리를 벌려줬다.

처음처럼 계속 놈과 지근거리에서 치고받았으면 빠지는 타이밍을 잡는 건 엄청 힘들었을 거다. 덕분에 나도 여유가 생겼고 이렇게 수월하게 탈출했다. ……하긴, 저런 형태의 폭발을 생각이나 했겠어?

“휘유.”

조끼 안쪽 힙플라스크에 넣어둔 포션을 들이켜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총머리는 아직 살아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철골을 꿰뚫어 보기 위해 ‘생명력’, ‘영체’ 등을 보는 필터로 바꿔서 정확한 판단을 하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커다란 타격을 입은 건 확실하다. 이 기회에 확실하게 조져놔야지. 그리고 전리품도 챙기고.

“후우.”

남아 있는 것들을 확인했다.

용숨결 물약은 없고, 포션도 더 이상 없다. 장창도 날아가면서 놓쳐버렸다. 혹시나 해서 허리춤에 매단 권총집은……. 총알도 모두 열기에 터졌구만. 전리품으로 챙긴 전격 단검밖에 없네.

입맛을 다신 뒤, 난 단검을 손에 쥔 채 조용히 박살 난 건물 쪽을 향해 움직였다.

9.

한새벽의 분신이 돌연 주황빛으로 붉게 달아오르는 순간, 롄 웨이는 뭔가 대단히 ‘싸한’ 감각을 느꼈다.

방금 전, 피했던 마법 화살이 돌연 폭발하면서 놈들의 합공에 찔렸을 때 느꼈던 싸함. ‘목숨을 위협받았을 때 느껴지던 감각’이었다. 곧바로 전신의 마력을 끌어올려 자신의 몸을 보호하듯이 바람을 휘감았고-.

-!!!

그 바람은 섬광과 함께 모조리 박살 나며 흩어졌다.

거대한 바윗덩이에 전신이 짓눌리는 듯한 감각, 폐는 쥐어짠 듯 숨이 쉬어지질 않았고 귀도 먹먹했으며 눈앞은…… 그저 새카맣다. 으스러진 것 같은 육신에서 올라오는 타오르는 듯한 통증. 단언컨대,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곧바로 <음파 감각>을 되살렸다.

반쯤 체화(體化)된 마법이 펼쳐지고 그의 머릿속에 반사음(反射音)으로 만들어지는 풍광이 그려진다. 뜨겁게 일렁이는 공기, 사방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힘겹게 출구를 찾은 후, 롄 웨이는 불타오르는 건물 밖으로 내달렸다.

“허어, 허어어어…….”

그리고,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충격에 짜부라진 폐, 제대로 숨이 쉬어지질 않기에 억지로 주위의 바람을 통제해 폐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얼마가량 뇌에 산소를 공급한 롄 웨이는 이를 악물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한새벽이 살아있었다.

폭발에 정통으로 휘말린 자신과는 달리 놈은 얍삽하게 빠져나갔다. 설마, 독무 자체가 준비였다는 말이 이런 걸 줄은……. 그냥, 거대한 폭탄 더미 위에서 놈과 싸우고 있던 꼴이었다. 분하지만 당장 빠져나가야만-.

“!?”

그 순간, <음파 감각>이 작동하며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린다.

20m 밖, 섬뜩한 속도로 날아오는 투사체. 곧바로 허겁지겁 몸을 뒤틀어서 팔뚝을 교차해 투사체의 진로를 막았지만 강렬한 충격이 몸을 때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말뚝이 그의 머리통을 노린다. 차라리 동시에 왔으면 양손의 가드를 나눴을 텐데-.

“他…….”

첫음절을 다 내뱉기도 전에 날아온 투사체는 그의 의식을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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