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04화 (298/350)

제304화

3.

엉겁결에 싸장님과 통화한 뒤, 난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싸장님의 말대로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날 제압할 만한 실력자-차장님이 온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우리 싸장님이 함께 오고 있었다. 내 ‘유용함’을 아주 잘 아시는 만큼, 날 버릴 리가 없어! 차장님은 반발할지 모르겠다만, 그간의 기색을 보건대 싸장님이 내 편을 들면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진 못할 거다.

그렇게 그냥 기다리기로 결정한 뒤, 난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전리품을 회수했다.

중국 놈들이 착용한 ‘마법 장비들’, 말총머리의 장비는 쉽게 회수했지만 나머지 2명은 건물이 폭발했을 때 신체가 흩어졌는지 그 파편이 강이나 공원 곳곳에 떨어져 있었다. 마법 장비가 평범한 물품에 비해 튼튼하다만 완전히 무적은 아니라서 대부분 망가졌더라.

“흐음.”

어쨌든 20여 분가량 돌아다니면서 모아놓은 장비와 잔해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하나 같이 ‘섬찟한’ 기운을 흘리는 장비들, 좀 긴가민가했는데 모아서 보니까 그 특징이 명확하게 보였다. 거기에 좀 자세하게 <감정>까지 해보니…….

“……이놈들, 진짜 악마하고 손을 잡았나?”

그 제작 과정이 꽤 심상찮았다.

<감정>은 단순히 장비의 성능을 나열하는 게 아니다. 르피너스에 의해 뜯겨진 내 영혼의 일부가 물품의 과거까지 대략적으로 살펴보면서 ‘장비의 숨겨진 기능’은 물론이고 ‘플레이버 텍스트-장비의 간단한 소개와 배경 설정’까지 함께 써주지.

이 장비들은 일종의 양산형 ‘악마의 무구’다.

확실해. 주인공을 죽이러 왔다가 허무하게 5호선 여의나루역 벽 속에서 죽은 데몬 스폰. 걔가 낀 장비를 <감정>하면서 봤었던 핵심 제작 공정과 굉장히 닮았다. 물론, 만든 것 자체는 악마가 아닌 사람이 만들었지만 말이지.

생각해보면 이 장비 말고도 중국 놈들이 구사하는 마법과 신체 개조도…….

“응?”

그렇게 ‘짱깨 놈들이 악마와 손을 잡았나?’하고 생각 중이었는데, <눈>에 저 멀리 뭔가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커지는 형상, 기묘하게 생긴……. 비행기? 헬기? 크기는 헬기인데 날개가 달렸다. 근데, 그 날개 중간이 뻥 뚫려 있고 작은 프로펠러가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어.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이쪽으로 다가온 기묘한 비행체는 고작 200~300m를 남기고 서서히 감속하다가-.

“아, 이런…….”

가시광선 스펙트럼으론 볼 수 없는 <눈>으로만 보이는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코드 108의 빛, 이미 한번 봤던 모습에 난 재빨리 바닥에 늘어놓은 장비들이 날아가지 않게 보자기로 묶었다. 이어서 공중의 비행체에서 그 광채가 작렬하듯이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떨어진다. 그 타오르는 광채 속에서 칼날 의족을 찬 차장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차장님은 순식간에 내가 서 있는 곳에서 50m가량 떨어진 지면을 짓밟듯이 내리꽂혔다.

-콰-ㅇ!!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착지한 곳을 중심으로 굉음의 충격파가 뻗어나간다. 신안 타락체 사태 당시, 차장님이 날 구하러 섬에 난입했을 때 선보였던 기술. 이전엔 그 여파만으로 데굴데굴 굴렀지만 이젠 나도 이 정도는 가뿐하다.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가운데-.

“반갑구나, 흰둥아. 얼굴을 직접 보는 건 거의 일주일만이네?”

신안에서 봤었던 흉흉한 장비를 낀 차장님이 활짝 웃어 주신다. 그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기세에 나도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네, 저도 반가워요.”

“솔직히 말하면 그리 반갑진 않아.”

“…….”

“휴일에 온천에 몸을 담그면서 피로를 풀고 있는데, 누구 때문에 갑자기 끌려 나왔거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재빨리 차장님을 말려줄 사람을 찾았다.

다행히, 기묘하게 생긴 헬기가 근처의 빈 도로에 착지하고 그 안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 우리 싸장님과 전찬휘 경감, 차장님처럼 두 사람도 완전 무장한 상태다. 이거, 나만 빼고 죄다 무장했구만.

……왠지 좀 싸한데?

아니, 왜 싸장님도 무장을 했지? 게다가 찡그린 표정 하며……. 설마, 날 그대로 정부에 넘기려는?! 이대로 그냥 잡혀가는 건가? 그렇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침을 삼키는데-.

“얌마, 너 뭐하고 있냐?”

“네?”

싸장님은 아직도 활활 타오르는 동아명주 건물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인다.

“너 때문에 소방차가 접근 못 해서 불도 못 끄고 있잖아. 그럼 너라도 꺼야지. 능력도 충분한 새끼가.”

“아. 그, 그렇네요. 헤헤.”

그러고 보니 건물에 붙은 불을 끌 생각을 안 했네.

근데, 좀 따뜻해서 좋았는데 말이지. 1월 평양의 밤 기온이 더럽게 춥긴 하거든. 어쨌든 내가 머릴 긁적이며 대꾸하자 싸장님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왼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금속 재질의 여행 가방을 내던졌다.

“옛다, 받아라.”

-휙!

묵직하게 날아오는 가방을 난 허겁지겁 낚아챘다. 그 안에 든 것은…….

“예에쓰!! 싸장님! 믿고 있었다구요!”

“지랄을 해요. 지랄을.”

내 장비들이다.

내 환호에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불타오르는 건물 쪽으로 다가가는 싸장님, 난 재빨리 가방을 열어젖히고 가장 먼저 해골 투구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아, 이 서늘한 감각……. X나 좋군?

“아니, 잠……!?”

기겁하며 하는 전찬휘 경감을 무시하며 재빠르게 나머지 장비들도 착용했다.

뼈 장갑을 끼고 다음엔 반지와 목걸이, 이어서 갑옷을 꺼냈다. 각종 지성체의 얼굴 가죽이 덕지덕지 달린 끔찍한 형상의 케이프 로브, 이전에 ‘킬가레스를 퇴치한 감사 표시’로 오크들에게서 받아낸 마법 장비다.

+2 비명을 지르는 얼굴 가죽 (Screaming Face skin)

미궁의 한 고블린 부족의 주술사들에게서 대대로 전해져오던 회색의 가죽 로브, 희생양들에게서 산 채로 뜯어낸 얼굴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조잡한 <주술>로 만들어진 물품이었지만, 그 안에 깃든 절망과 원념을 흡족해한 어떤 악마가 전리품으로 챙기면서 각종 유용한 마법을 걸었다.

착용 시, 각각의 얼굴 가죽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천천히 꿈틀거리고 일그러진다!

로브, 사악한 장비

기본 AC 2, GDR 0%, 방해수치 0

·화염 저항+, 냉기 저항+, 독 저항+, *굶주림, *조건부 저주

·특수 능력-착용 시, <아가리 주머니> 사용 가능.

·발동 기술 : <공포의 비명>-Mp 3 소모.

안내받은 보물 창고에서 이걸 고르자 오크들이 좀 미친 새끼를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지. 걔네들은 세세한 특수 능력도 모르고 ‘그냥 창고에 보관된 마법 전리품 A’ 정도로만 알고 있었거든. 싸장님도 처음엔 내가 받아온 물품의 외형을 보곤 기겁하셨고.

하지만, 내가 괜히 이 ‘끔찍한 외형의 로브’를 보상으로 받아온 게 아니다.

“흐으음~”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짧은 로브를 걸치자 소름 끼치게 차가운 감각이 몸에 착 달라붙는다. 동시에 내 몸과 연결되어 그 생기를 일부 소모한다. 하지만, 이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로브를 걸치자마자 가슴팍의 얼굴 가죽 하나를 붙잡은 후-.

-어거거거…….

“……?!”

그 아가리를 억지로 늘려서 이번에 얻은 전리품이 든 보자기를 통째로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전찬휘 경감은 물론이고 차장님까지 살짝 흠칫하며 놀란다. 이게, 로브의 진면목인 <아가리 주머니>다. 착용자는 이 로브 얼굴 가죽의 아가리에서 물품을 넣거나 꺼낼 수 있지. 크기는 대충…… 작은 방 정도? 게다가 넣으면 무게도 안 느껴져! 사실상, 게임의 ‘인벤토리’다. 이 편의성이 진짜 사기야.

“읏차!”

마지막으로 우리 싸장님이 만들어낸 액체 금속인 ‘순수한 물’을 붙잡고 <연금술>을 사용해 그 형태를 바꿨다.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내 오른손에 잡힌 3m 남짓한 길이의 황금빛 창, 1m가 넘는 얇은 칼날 부분은 언월도처럼 부드럽게 휘어졌고 반대편 창대 끝은 바늘처럼 뾰족하다. 계속 창을 써보면서 쓰기 좋게 형태를 가다듬다 보니 이런 형상이 되더라.

-휘리리리릭!

가볍게 창을 돌려봤다.

역시, 방금 전에 쓰던 금속창과는 그립감부터 다르다. 가벼워서 훨씬 다루기 쉽고. 그렇게 내가 순식간에 장비 착용을 끝내자 전찬휘 경감은 이를 악물고-.

“아니, 뭐하시는 겁니까!?”

고갤 돌려 싸장님을 향해 소리친다.

싸장님을 만났을 때마다 항상 저자세였단 걸 생각하면 믿기 힘든 대응, 그에 싸장님은 불타는 건물을 향해 계속 걸어가면서 이쪽을 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대꾸하신다.

“뭐긴, 한국을 뜰 것 같으니 맡고 있던 물품들을 돌려줬지. 그거 전부 쟤 거야.”

“지금 한새벽은……!”

“국정원의 삽질에 폭발한 희생양이지. 그리고, 삽질을 한 머저리는 중국 쪽과 열심히 붙어먹던 새끼고.”

“…….”

“아니냐? 날 끌어들이면서 말해준 것하고, 헬기 안에서 들은 것으로 대충 이렇게 요약되는데?”

신랄하게 쏘아붙이는 싸장님. 그에 전찬휘 경감이 아가리를 닥치는 가운데, 싸장님은 불길에 휩싸여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동아명주 건물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와 함께 주위의 공기가 빨려 들어가며 그 손바닥에서 거대한 녹색의 안개가 뻗어 나온다.

-치이이이익…….

그 녹색 구름에 닿자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불길, 새카만 겨울의 공원을 밝혀주던 화재가 순식간에 꺼진 가운데 싸장님은 손을 ‘탁! 탁!’ 털고 고갤 돌려 나와 전찬휘 경감을 바라보신다.

“난, 국정원과 저 녀석을 ‘중재’해주려고 온 거야. 괜히 더 싸움이 격화됐다간 둘 다 피를 볼 게 뻔하니까.”

“……중재라고요?”

“그래, 중재.”

고갤 끄덕이며 싸장님은 날 향해 턱짓했다.

“지금 우리 도비가 낀 장비들 보면서 눈치챘을 수 있겠지만……. 몇 달 전에 지하 송파구에 나타난 킬가레스를 격퇴한 애가 쟤야. 마법사 주제에 근접전도 무지막지하게 잘하지. 근데, 진짜 특기는 독을 이용한 ‘대량 살상’이야.”

“그러니 일단…….”

“제압하겠다고? 쟤가 순순히 제압당할 것 같냐? 세영 언니가 나서도 100% 장담은 못 할걸?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정하고 쟤가 발악하듯이 독을 살포하면 어떻게 될까?”

전찬휘 경감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리는 싸장님. 그 질문에 전찬휘 경감이 다시 침묵하는 가운데 싸장님은 어깨를 으쓱인다.

“장담하건대, 최소 ‘만 단위’의 사상자가 나올 거야. 우리 도비가 독성 물질 하나는 X나 끝내주게 잘 만들거든. 나보다 훨씬 더.”

대놓고 날 띄워주시는 싸장님, 그 칭찬에 나도 힘껏 흉곽을 부풀리며 고갤 끄덕였다. 그럼그럼, 이젠 나도 좀 치지! 우리 싸장님보다 더 강한걸? 그렇게 전찬휘 경감을 논리로 압살해버린 싸장님은 이어서 차장님을 바라보았다.

“언니, 진짜 얘랑 싸우는 건 추천드리지 않아요. 쟤, 무지 세. 언니도 세단 거 알지만……. 그래도 자칫하면 둘 중 하나는 죽을 거야.”

“…….”

“그냥 쫓아내는 방식으로 해요.”

“후우.”

싸장님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는 차장님. 사실, 내가 장비를 바꿔 낄 동안에도 아무런 터치도 안 하신 걸 보면 차장님도 그다지 날 억지로 연행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 오직 전찬휘-저 괘씸한 인간만 날 체포할 생각이 그득했지.

“크흠.”

살짝 째려보자 그 시선을 느낀 듯이 전찬휘가 차장님 곁에 붙는 가운데, 싸장님은 품 안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도비야, 정체도 숨기지 않고 ‘아주 화끈하게’ 저질렀구나.”

“……솔직히 빡치잖아요. X새끼가. 그리고 처벌도 느슨하게 한다고 하고.”

“흐,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싸장님의 질문에 왼손으로 투구의 턱 쪽을 긁적였다. 글쎄? 뒷일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큰일인 건 알아도 일단 저질렀지. 잘 모르겠다는 내 반응에 싸장님은 한숨과 함께 전자 담배 연무를 뱉는다.

“아무리 중요한 마력 물품 생산자라고 해도, 그리고 이전에 신안에서 맹활약했다고 해도, 정부와 국정원의 체면상 덮고 넘어가긴 힘들걸? 이미, TV에도 나왔어. 정확한 인적 사항은 안 떴지만 말이지.”

“흐음.”

“해외로 도피할 거라면 괜찮은 연구소 소개시켜 줄게. 지금 외부에 밝혀진 네 능력이면 절하면서 모셔갈 곳 많다. 가까운 일본도 가능해.”

담담하게 말하는 싸장님. 확실히, 지금 이 상태라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은 해외 도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겐 ‘또 다른 협상 카드’가 있지. 시선을 돌려 내가 죽인 말총머리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난 입을 열었다.

“일단은 김완호부터 조지고 싶어요.”

“……뭐?”

“아직 김완호를 못 조졌거든요. 저 말총머리가 방해해서.”

“하, 우리 도비. 진짜 뒤끝 끝내주네.”

내 대꾸에 너털웃음을 흘리는 싸장님, 이어서 난 경감과 차장님을 향해 고갤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직은 한국을 떠날 생각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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