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09화 (303/350)

제309화

3.

세상일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공을 들여도 사전조사를 해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변수가 튀어나와 계획이 틀어지곤 한다. 그러한 사실을 ‘페이진 펑’ 국안부장은 잘 알고 있었다.

“……롄 웨이가 작전 중에 죽은 것 같다?”

“예.”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휴일을 맞아 가족들과 오봇한 시간을 보내다가 ‘긴급 호출’로 사무실로 끌려 나온 그는 보고를 듣곤 가슴팍을 붙잡았다. 명치끝을 쥐어 비트는 듯한 통증, 스트레스성 위경련의 신호에 페이진 펑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위장약을 꺼내 한 모금 마시면서 잠시 숨을 골랐다.

롄 웨이의 죽음

확실히, 이건 당직을 세워둔 하급자들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주석에게도 보고될 만한 큰일이다. 어쨌든 숨을 가다듬은 페이진 펑은 보고를 올린 비서에게 입을 열었다.

“죽었다고? 왜? 설마, ‘광염자’가 나타났나? 아니면 국정원의 ‘미친년’이 움직인 건가?”

“한새벽입니다.”

“……뭐?”

“한새벽에 의해 죽은 것 같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페이진 펑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가운데, 비서는 요약된 문서가 담긴 태블릿PC를 내밀면서 굳은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롄 웨이 공작관이 한새벽의 포섭을 위한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놈의 행동이 예상보다 매우 난폭해서 계획을 수정해서 ‘유인-납치’의 형태로 빼돌리려고 했답니다. 혹시 모르기에 평양 인근에 머무르고 있던 암부 요원들까지 호출했다 하고요.”

“…….”

“하지만, 보고를 올린 칭융이 대원에 따르면……. 난입한 한새벽이 뿜어내는 위압감이 롄 웨이 못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허, 허허허…….”

그에 페이진 펑은 허탈하게 웃었다.

인간으로 의타한 ‘타락체’를 구분하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인재, 그 모습은 분명 계집애를 연상케 하는 소년이었지.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뒀는데……. 태블릿PC를 보니 보고서의 첫 장부터 아주 가관이다.

“보통 요원은 상대하기 힘든 ‘강력한 악령’ 수십 마리를 사역, <흑회 돌풍>을 구사 중인 잉시아 요원을 마법으로 일격에 즉살(卽殺), 근접한 탕자페이 요원은 창으로 일격에 정수리부터 항문까지 꿰뚫어 죽임. 롄 웨이에 못지않은 지독한 살기를 방사함. 롄 웨이의 지시에 따라 정보자산을 데리고 후퇴.”

문서엔 보고를 올린 요원의 영상 통화 사진도 첨부되어있는데, 그 꼴이 참혹했다. 꼭 방사능에 노출된 희생양을 보는 듯한 모습, 눈에선 피고름을 줄줄 흘리고 있고 얼굴 피부는 부풀어 오른 낭포와 물집으로 뒤덮였다. 전부 악령을 상대하다가 스며든 독(毒) 때문이란다.

“끄으으응…….”

문서를 다 읽은 뒤, 페이진 펑은 태블릿PC를 비서에겐 넘기곤 다시 쓰려오는 가슴팍을 붙잡았다.

사람이 넘쳐나는 중화, 하지만 롄 웨이 같은 인재는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그 막대한 15억 인구 중에서 150명 안에 들어가는 최고급 인력,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수백 살 먹은 미궁의 괴물’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초인이자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뛰어난 공작원이었다. 냉정히 말해 대체 가능한 그보다 더 귀중한 인재였다.

“……도망쳤을 가능성이 크지 않나? 위험하면 바로 빠졌을 텐데?”

“확실히, 롄 웨이는 ‘최속의 남자’긴 합니다만…….”

빛나는 ‘다섯 별’을 뽑기 위해 모인 ‘적색’,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남자가 롄 웨이다. 그가 순간적이지만 400km/h까지 가속하면서 고속철을 앞지르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았던가? 첩보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잡히지 않는 것임을 생각하면 도주에 성공했을 법도 하지만…….

“벌써 5시간이나 지났습니다.”

“X발.”

비서는 고갤 저으며 페이진 펑의 행복 회로를 박살 냈다.

페이진 펑도 알고 있었다. 이미 도망쳤다면 연락을 해왔을 거란 걸.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 사무실 의자에 주저앉으며 그는 고갤 숙인 채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일회용 <공간 이동> 스크롤이라도 첩보원들에게 하나씩 줬어야 했는데, 안전한 곳에 있는 망할 자라 새끼들에게 왜…….”

“부, 부장님? 그거 좀 위험한 발언인…….”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고갤 들어 비서를 향해 두 눈을 부라리는 페이진 펑, 마법 장비와 소모품에 대해 대부분 자급자족에 성공한 중국이었지만 <공간 마법> 계열은 ‘얼마 없는 예외’였다. 미국의 귀쟁이들에게서 대부분 전량 수입하고 있었고, 수량도 턱없이 부족한 데다가 정신 나갈 정도로 비싸다. 덕분에 고위층들의 수량 맞춰주기에도 부족했고.

살짝 눈이 돌아간 듯한 페이진 펑의 외침에 비서가 입을 다무는 가운데, 생각을 거듭하던 페이진 펑은 남아 있는 위장약을 한 번에 들이켠 후 입술을 뗐다.

“외교부에 연락 넣어라. 링쉐샹에게 ‘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링쉐샹 외교부장에게 말입니까?”

뜬금없다는 듯이 대꾸하는 비서를 향해 폐이진 펑은 무거운 고갤 끄덕였다.

“사건 파일을 살펴보니까 한새벽 이 미친놈이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테러를 일으킨 건데……. 거기에 ‘우리 국민’이 휘말려서 죽었으니 외교적으로 항의할 수 있지. 우리가 개입할 명분을 만드는 거다.”

빈 병을 탁자 아래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페이진 펑은 비서를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유용한 인재라고 한들, 이런 짓을 벌였으니 대놓고 봐줄 수는 없겠지. 설령, 봐주려고 해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빵쯔 놈들 정서상 받아들이기도 힘들겠고.”

“뭐, 그렇긴 합니다만…….”

“그 대통령, 지지율에 미친놈이니까 한새벽을 보호하진 못할 거야. 설령, 보호한다고 결정해도 우리가 대중들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면 손해라고 판단하고 포기하겠지. 그렇게 녀석을 고립되게 만든 다음에……. 포획한다.”

페이진 펑의 구상에 비서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바로 들고 있는 태블릿PC를 확인하곤 입을 열었다.

“부장님,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합니다. 안전하게 하려면 최하 ‘적색’급 3인을 파견해야 할 텐데, 타락체 색출 작전과 오크 군세 준동, 티베트 쪽에 파견되어 있…….”

“‘철혈 돌격대’나 ‘중앙 경위국’에 협조를 구해서 적색들을 끌고 올 수 있다. 안 되면 기회를 봐서 나중에라도 하면 돼.”

이를 갈면서 독이 오른 눈으로 대꾸하는 페이진 펑, 그에 비서는 조용히 고갤 숙였다.

4.

눈가를 파고드는 빛에 남궁진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으로 가렸다.

살짝 눈을 뜨니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얼굴 쪽에 내리쬐고 있다. 그에 부스스한 눈가를 비비며 몸을 일으키다가……. 허리 쪽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고갤 돌리자 자신의 등을 껴안고 새근새근 잠든 한새벽이 보였다.

“흐음~”

“그에에에…….”

피식 웃으며 그녀는 장난스럽게 한새벽의 한쪽 뺨을 잡아당겼다.

침을 흘리며 웃긴 소리를 내는 한새벽,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잘 믿겨지지 않는다. 자신보다 여리여리 남자애가 같이 한 이불을 덮을 때는 난폭한 괴물처럼 몰아붙이다니……. 그렇게 잠든 한새벽을 요리조리 만지작거리다가-.

“……?”

문득, 이상함을 눈치챘다.

깨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것은 토요일 아침에 깨어난 한새벽과 같이 침대에서 뒹군 것. 근데, 커튼 사이로 비치는 빛은 아무리 봐도 쨍쨍한 아침햇살이다. 아무래도 어처구니없이 하루가 꼬박 지나간 것 같았다. 좀 ‘과격하게 하면’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루를 꼬박 잘 정도는 아니었는데…….

게다가 한새벽이 옆에서 ‘자고’ 있었다.

사람이 밤에 잠을 자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한새벽에겐 아니다. 커플이 되면서 수십 번을 함께 이불을 덮어봤기에 더더욱 잘 안다. 한새벽은 토·일요일에 한 번에 몰아서 자지 ‘절대로’ 정상인처럼 자질 않는다. 이런 장면은 토요일 아침에나 볼 수 있는 희귀한 장면이었다.

……근데, 어제 일어난 한새벽이 또 잔다?

뭔가 ‘싸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자 이상한 점이 더 보인다.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무구들’이 한새벽이 누워 있는 침대 바닥 쪽에 차곡차곡 개켜져 있다. 그에 남궁진아는 곧바로 바닥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을 주워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만한 사람에게 톡을 보냈다.

[나] : 어제 뭔 일 있었냐?

[예린] : ??

[나] : 어제 아침에 잠들었다가 지금 일어났어. 근데, 새벽이는 내 옆에서 자고 있고 방 안엔 웬 장비들이 너부러져 있네. 뭔가 싸함.

[예린] : 아. 걔, 자기가 당한 거 되갚아주겠다고 쳐들어갔었음. TV에도 크게 나옴.

[예린] : 아침 식사나 하러 오셈. 그럼 설명해줌.

TV에도 나왔다는 서예린의 톡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녀는 인터넷을 검색했고-.

“X이바알…….”

검색엔진 포털 기사에 뜬 ‘평양 정부 청사 습격’이라는 헤드라인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기사를 내용을 보니 더 가관이다. ‘마법을 익힌 테러리스트’가 벌인 테러로 사망자만 60여 명, 마법에 휩쓸린 부상자는 수백 명에 달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장이라도 한새벽을 깨워서 그 모가지를 틀어쥔 채 ‘도대체 뭔 생각으로 이런 대형 사고를 쳤냐!’ 흔들고 싶었지만…….

“……하아, 나도 정상은 아니구나.”

한새벽이 끌려가서 당했던 걸 떠올리니 시원하게 잘 저질렀단 생각도 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남궁진아는 뉴스 몇 개를 더 찾아 읽었다. 보아하니 아직 테러리스트에 대한 정체는 ‘한새벽’으로 밝혀진 게 아니다. ‘북두혈통 숭배자’, ‘반통일 주의자’ 등 중구난방, 그걸 보며 잠깐 고민하던 남궁진아는 스마트폰 연락처를 뒤져서-.

-네, 전화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강수영 선생님, 저 ‘남궁진아’라고……. 기억하시죠? 저번에 새벽이를 찾으러 공방에 방문했었는데.”

강수영에게 전화했다.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새벽의 스승, 현 상황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면 도와줄 것은 확실했다. 한새벽이 무려 ‘마력 각성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니까. 다행히, 강수영도 아는 척을 했다.

-어, 그래. 우리 도비 여친? 니가 왜 전화했냐?

“저, 새벽이가 어제 저에게 수면제 먹이고……. 북쪽에서 사고를 친 것 같아요.”

-말도 마라, 진짜 어제 뒤집어졌지. 어휴, X발. 수습하는데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어? 이미 아시는 건가요?”

살짝 당황하며 말을 더듬는 남궁진아, 그에 스마트폰에서 강수영의 한숨 소리가 한 번 들리곤 곧 말이 이어졌다.

-대충 왜 전화했는지 알겠네. 이미,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해놨단다. 제롬 시장이 ‘선물’을 가지고 오늘 대통령을 만나러 갔어.

“아, 다행이네요. 휴.”

그 대답에 남궁진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기존 권력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준비했으니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거다. 최소한 한새벽의 목숨은 건질 수 있겠지. 그냥 뇌물로 바치는 것을 넘어서 마력 각성제를 ‘만들 수 있는 것’까지 밝힌다면……. 100% 안전하다.

-그리고, 곁에 있으면 니 남친 좀 관리해라? 아니, 이렇게 갑자기 급발진해서 날뛰면 어떡해?

“죄, 죄송합니다.”

-아무리 짱깨 새끼들이 수작을 부렸다고 해도 이번엔 너무 나갔어. 평범하게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잖아. 그나마 선물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주, 중국이요?!”

-그래, 도비를 고문하라고 말했던 새끼가 짱깨들에게 포섭된 놈이었거든.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도비에게 듣도록 하렴. 난, 이만 자야 하니까.

“아. 죄, 죄송합니다.”

전화가 끊어진 후, 남궁진아는 옆에서 곤하게 자고 있는 한새벽을 보며 이마에 솟구친 핏대를 꾹꾹 눌렀다. 진짜 따져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미쳐 날뛰는 남친에게 코가 꿰어서 이게 무슨 마음고생인지…….

“……깨어나면 따져야지. 깨어나면.”

곤하게 자고 있는 한새벽의 등짝에 손바닥을 내리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남궁진아는 바닥에 너부러진 옷을 주섬주섬 입고 서예린이 있을 식당을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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