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10화 (304/350)

제310화

5.

언덕을 올라가는 차량 안에서 ‘제롬’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며 복장을 점검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칼과 수염, 새로 맞춘 깔끔한 군청색 양복까지. 뉴 송파구를 떠나기 전에 점검했던 대로 완벽하다. 심호흡을 한 후, 제롬은 고갤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하게 됐지만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래, 아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

“다 왔습니다. 제롬 님.”

“……음.”

한 박자 늦게 도착한 걸 인지한 제롬은 청와대 운전기사에게 가볍게 고갤 까닥이고 차량에서 내렸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산 중턱에 지어진 멋들어진 한옥 주택, 대문 앞에서 서 있던 경호원들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자-

“허허, 어서 오시지요. 밖이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개량 한복 복장의 안경 낀 장년인이 허허롭게 웃으며 반겨줬다. 마력 각성도 못 한 나약한 인간, 미궁에서였다면 오크 잡졸보다 못한 하찮은 쓰레기였겠지만…….

“아닙니다. 급작스런 요청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통령님.”

제롬은 깍듯하게 허릴 숙였다.

개인의 나약함과는 별개로 저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오크의 보금자리-뉴 송파구를 지워버릴 수 있는 권력자-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특히나, 무르굴의 정치 참모들이 말하는 대통령의 평은 ‘웃으며 정적을 제거하는 인물’인 만큼 그 행동에 조심해야 했다.

그런 정중한 태도에 다가온 대통령은 고갤 저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뭘요, 안 그래도 오무혁 씨의 후임이니 한번 개인적으로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앞장서서 안내하는 대통령, 그 뒤를 따라서 제롬은 청와대 관저 내부의 접견실에 도착했다. 경호원 하나 없는 방, 미리 준비된 따뜻한 차를 제롬 앞에 놓은 잔에 따라주면서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면담을 하고 싶다고 연락하니 좀 놀랐습니다. 게다가 뭘 말할지도 제대로 설명도 없고…….”

“좀 복합적인 일이라서 그랬습니다.”

대통령과의 만남, 하지만 이건 정식적인 회담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휴일에 사적으로 만나는 것, ‘강수영의 인맥’과 ‘제롬이 가진 직책’ 덕분에 억지에 가깝게 성사된 일이었다. 틈틈이 연습한, 하지만 아직도 어색한 ‘정치인의 미소’를 지으며 제롬은 신중히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일종의 ‘청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허허, 저도 공무원입니다. 함부로 그런 말 들으면 청탁금지법에 걸려요.”

사람 좋게 웃으며 자기 몫의 차를 마시는 대통령, 오무혁은 어떻게 이런 기괴한 인간들을 잘 다뤘는지……. 어쨌든 제롬은 대통령이 따라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곤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가져온 선물을 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선물 말인가요?”

“예. 작년, 미르의 유혈 사태가 있었을 당시에 확보한 귀물(貴物)이지요.”

제롬은 곧바로 양복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목제 상자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대통령을 향해 보란 듯이 그 뚜껑을 조심스레 열었다. 고급스런 완충제 안에 담겨 있는 3개의 단환, 딱 봐도 비범한 아우라를 풍기는 그것에 대통령의 눈에 흥미가 서리자 제롬은 목함을 대통령 쪽으로 밀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마력 각성제입니다.”

“…….”

그 순간, 항상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대통령의 얼굴에 살짝 변화가 생긴다.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나’ 하면서 기대하는 것 같은……. 기묘한 표정. 제롬도 충분히 그러한 표정을 짓는 대통령을 이해했다. 어젯밤, 급작스럽게 찾아온 강수영의 ‘강요에 가까운 요청’과 그에 대한 보상을 들었을 때, 거울 속 자신의 표정이 딱 저런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통령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찻잔을 들어 차를 홀짝였다.

“마력 각성제라……. 이거, 정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군요.”

“정체도 알 수 없는 ‘잡스러운 약물’이 아닙니다. 이미, 검증이 끝난 물품이죠.”

이어지는 제롬의 말에 대통령의 얼굴에 씌워진 ‘정치인의 가면’이 완전히 박살 났다. 확연히 동요하는 그 모습을 보며 제롬은 강수영이 말해준 스토리를 천천히 입 밖에 내뱉었다.

“물품의 출처가 출처인지라……. 원래는 질이 안 좋은 물품이었습니다. 먹으면 <마력 각성>이 이뤄지긴 하지만, 이성을 상실하고 식인 괴물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러면 쓸모없……! 큼큼.”

식인 괴물이 된다는 말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언성을 높이려다가……. 대통령은 이내 자신의 실책-밖에서 대기 중인 경호원들이 올지 모른다는 걸 깨닫고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목소리를 낮춘다. 그에 제롬도 고갤 끄덕였다.

“예, 그래서 저희도 처음엔 전리품이 아닌 쓰레기 취급했죠. 하지만, 강수영 연금술사가 그 성분을 어찌어찌 분리·정제해내서 <마력 각성>만 이뤄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총 3단계로 이뤄지는데…….”

목함 안에 있는 3개의 단환을 가리키며 제롬은 그 효능에 대해 차례차례 설명했고, 대통령은 살짝 핏발 선 눈으로 경청했다. 그렇게 설명을 다 끝마치고 난 뒤, 제롬은 찻물로 목을 축이곤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말씀드렸다시피 ‘테스트’도 한 번 끝냈습니다. 재료가 한정되어 있어서 대규모로 하지 못했지만, 이 약물을 완성한 뒤에 시험한 5명 모두 성공적으로 <마력 각성>을 완료했죠. 1명은 1단계만으로 각성했고, 3명은 2단계, 마지막 한 명은 3단계 과정을 거쳤습니다.”

“놀랍군요. 정말 놀라워요. 이런 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질 줄은…….”

“강수영 연금술사의 말로는 더 이상 만드는 건 힘들다고 합니다. 재료가 재료인지라…….”

쓰게 웃는 제롬에 대통령은 목함을 조심스레 닫곤 입을 열었다.

“그럼 이런 게 얼마나 남아 있는 겁니까?”

“정제가 끝나지 않은 약물의 상태로 있습니다. 강수영 연금술사의 말로는 9개 정도 더 만들 수 있다더군요. 그중 2개는 강수영 연금술사의 몫이니, 저희 쪽에서 더 사용할 수 있는 건 앞으로 7개가 끝이지요.”

“흐음. 여기에 있는 것까지 총 10개……. 적긴 하군요.”

강수영이 오크 측에 제시한 보상이었다.

마력 각성제를 여러 개 주는 대신에 대통령에게 청탁해줄 것과 그 출처를 오크로 해줄 것, 어찌 됐든 오크로선 손해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말 없이 목함을 뚫어져라 보며 쓰다듬던 대통령은 이내 고갤 들어 제롬을 바라보았다.

“……근데, 이거 진짜로 먹어도 되는 것이 맞습니까?”

“목함 속에 테스트 영상 자료가 든 USB가 있습니다. 사람과 최대한 비슷하도록 ‘하프 오크’를 대상으로 진행한…….”

“아니, 제롬 시장을 못 믿는 건 아닙니다.”

고갤 저으면서 대통령은 정치인의 표정-‘좀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프 오크가 인간의 혼혈이긴 하지만, 그래도 신체 특성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하프 엘프들 같은 경우, 인간이 소화하지 못하는 종류의 풀도 소화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어쩌면 이 약은 인간에겐 치명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잘 아시겠지만 ‘가짜 영약’을 먹고 죽거나 불구가 된 사례가 한국에서만 한두 건이 아니잖습니까?”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는 대통령,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매년 수십만 명이 먹으면 <마력 각성>을 할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미궁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쓰레기’를 먹고 병신이 되거나 죽고 있다. 제롬이 반박하지 못하자 대통령은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미궁에서 나온 식품들의 공통적인 문제긴 하지요. 규격화·균일화되지 못해서 정말 먹어도 되는지 확신을 가지기 힘들다는 것. 제가 죽기라도 한다면 국가에 커다란 혼란이 벌어질 것이기에……. 이건 제가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뭐, 눈앞에서 테스트를 해보면 좀 믿음이 가겠지만 말이지요.”

이어지는 대통령의 말에 제롬은 차를 마시는 척하면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정말 탐욕스럽기 그지없다. ‘어떤 청탁’을 할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마력 각성제를 더 탐내다니……. 이런 반응 또한 예상 범위 내의 일이었기에 제롬은 곧바로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럼 다른 사람이 눈앞에서 직접 <마력 각성>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되겠지요?”

“부족하긴 하다만……. 그러면 좀 믿을 수 있겠지요. 나중에 혹시 부작용이 있는지도 볼 수 있겠고. 허허.”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은근슬쩍 목함을 완전히 끌어안는 대통령, 그에 제롬은 살짝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갤 끄덕였다.

“좋습니다. 테스트를 해볼 수 있으시도록 ‘하나’를 더 드리지요. 대신에 몇 가지 ‘자잘한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자잘한 부탁이라……. 뭘 원하는 겁니까?”

“별것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사업들이죠. 다만, 저희가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터라 편견이 있어서…….”

‘석유 재생 사업’과 ‘오크의 북쪽 진출’에 대해 조심스럽게 요구사항을 말하는 제롬, 그에 대통령은 차를 홀짝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비밀스럽게 청탁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제롬이 하는 요구는 따지고 보면 국익에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여론엔 좋지 않은 일이었다.

국민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미궁에서 올라온 이웃을 싫어한다. 자칫 함부로 진행했다간 야당 쪽에서 좋다구나 반(反)이종족 정서를 부추기며 표를 끌어모을 게 뻔한 사안들, 국익에 나쁘지 않다고 하는 얼마 안 되는 당내 의원들도 ‘총선 뒤까진 미뤄야 한다.’고 말하는 것들이다.

그렇게 대통령이 제롬의 요구에 고민에 빠진 가운데, 제롬은 은근슬쩍 마지막에 강수영이 요구한 사항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이건 청탁이 아닌 좀 개인적인 요청사항입니다만……. 강수영 연금술사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조수가 좀 곤란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평양에서 크게 사고를 쳤다고 하는데…….”

“평양에서 사고라고요? 아, 설마 그…….”

천천히 고갤 끄덕이는 제롬에 대통령은 팔짱을 끼며 미간을 찡그렸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평양 청사 테러’, 오늘 아침 정무 보고를 통해 국정원에서 올라온 자료를 살펴봤기에 대통령은 그 속사정까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국정원에 심어진 ‘중국의 끄나풀’에 의해 고문당한 마력 각성자의 폭주…….

“그러고 보니, 그 피의자가 ‘강수영 연금술사’의 제자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어제 급하게 면담 신청을 한 걸 보면……. 혹시, 강수영 연금술사가 재촉한 건가요?”

“예, 가장 먼저 정제한 걸 줄 테니 좀 말해 보라고 했었지요. 참고로 하나 더 드리는 각성제는 강수영 연금술사의 몫입니다.”

“허허, 제자 사랑이 대단하군요.”

이것도 ‘아주 골치 아프게 꼬인 일’이었다.

아침 정무 회의에서 국정원은 ‘국익을 위해 무리해서라도 사건을 조작하고 그냥 넘어가자.’고 했지만, 중국 쪽 외교 채널로 정중한 수사로 치장된 ‘그 사건, 그냥 넘어가면 어떻게든 어깃장 놓겠다.’는 내용의 협박이 들어왔다.

자기들이 자극해놓고 협박하는 꼴.

아무리 강대국이라 한들, 미국이 건재했을 시절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이젠 당연한 일이다. 당장 선택하지 않고 좀 고민해 보겠다고 국정원장에게 말해두긴 했다만……. 대통령은 이미 중국 쪽 의견에 따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공작을 했다가 밝혀지면 정부와 여당에 큰 약점이 되니까. 아무리 국익을 위해서였다고 한들, 밝혀지는 순간 야당이 온갖 도덕적인 말을 붙여서 공격할 게 뻔했다. 추가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초인에게 아부하는 쓰레기’라고 지랄하겠고. 중국이 개입해서 진상이 밝혀질 확률이 더 높은 이상, 안타깝지만 손절하는 게 정치적으로 옳았다.

그런데, 그런 위험부담을 무릅써 달라니…….

제롬의 요구에 따뜻한 찻잔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고민을 거듭하던 대통령은 결국 한숨을 내뱉었다.

“하나같이 정말 힘든 요청들입니다.”

“…….”

“차라리, 수조 원대의 공사를 수주해달라고 했으면 금방 결정해줬을 겁니다. 저 혼자만 무리해서 뒤집어쓰면 되니까요.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고갤 절레절레 저으며 대통령은 제롬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나같이 ‘여론과 지지율’에 민감한 사안들, 아시겠지만 민주주의란 것이 결국 사람들에게 표를 사는 행위입니다. 대통령이라고 한들, 이런 건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없어요. 했다간 다음 총선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잃어버릴 당내 국회의원이 벌 떼처럼 달려들겠죠. 제 당내 권력 기반이 산산조각 날 겁니다.”

“흐음.”

“하지만, 들어드리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식은 차를 완전히 비운 후, 대통령은 손깍지를 낀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5개.”

“5개요……?”

“예, 5개를 주시면 가능합니다. 참고로 제가 전부 가지는 게 아니라 사람을 포섭하는 데 들어가는 겁니다. 국회를 양분하는 원내정당이 막대한 손해를 감내해야 하는데 이 정도는 필요하지요.”

“흐으음……!”

어차피 이번에 들어갈 마력 각성제는 전부 강수영이 지불하기로 했고, 뭘 하든 간에 오크에겐 손해는 없지만……. 대통령의 제안에 나름 고민하는 척하다가 제롬은 한숨을 내뱉었다.

“4개, 어떻습니까.”

“4개라…….”

못마땅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는 대통령을 향해 제롬은 재빨리 변명을 내뱉었다.

“사실, ‘오크의 몫’이라고 뭉뚱그려 말했지만 8개 중에서 4개는 모르칸쉬의 몫입니다. 물론, 공통의 자산인 만큼 사적으로 쓰지 말고 뉴 송파구의 목적을 위해 쓰기로 협의하긴 했지만……. 모르칸쉬가 뭐라고 태클을 걸지 모릅니다.”

“흐음.”

“대신에 하나는 대통령님이 원하시는 인물에게 판매하겠습니다. 물론, ‘적절한 가격’을 지불해야겠지만요. 그럼 모르칸쉬도 만족할 겁니다. 어떻습니까?”

“허허, 절 판매사원으로 써먹으려 하시다니 너무하시는군요.”

판매 권리, 이것조차도 엄청난 권력이다. 진짜 마력 각성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몇천억을 태울 부호는 많으니까. 사람의 욕망을 다루는 그에겐 이것마저도 무기로 쓸 수 있는 능력이 넘쳐난다. 그에 대통령은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좋습니다. 4개, 그리고 추가로 하나는 ‘판매 권리’를 받기로.”

“알겠습니다. 그 나머지는 뉴 송파구의 ‘공장 시공식’에 오시면 드리겠습니다. 또 방문하기엔 시선이 그렇지요?”

“그렇긴 하지요. 허허.”

훈훈하게 웃는 대통령, 그에 제롬도 부드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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