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15화 (309/350)

제315화

2.

개학하고 ‘5학년’이 됐지만 내 생활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아가씨와 서예린과는 이전처럼 같은 반, 수업 또한 ‘당신의 수업, 싸장님의 공밀레 노예로 대체되었다. 특별 체험학습으로 때워줄 테니, 오후 시간은 대한민국의 수출 역군이 되어 개같이 일하십시오.’라고 미르에서 친절히 안내해주더라.

뭐, 덕분에 공부는 빡세게 할 수 있었다.

“흐으으음…….”

‘우그 타람’에 마련된 내 사무실, 책상에 앉아 난 과제 노트를 뒤적이며 미간을 찡그렸다. 공책 열댓 장에 걸쳐 아주 빽빽하게 적힌 수학 공식, 다름 아니라 이번에 싸장님이 내준 과제(<독숨결 구체>에 사용되는 룬문자의 형상을 수학적 좌표 언어로 표현하라.)의 채점 결과였다.

일주일 동안 끙끙대서 간신히 풀었는데……. 채점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곳곳에 빨간펜으로 쫙쫙 그어져 있는 상황, 분명 배운 대로 그 형상을 표현한 것 같은데 틀린 곳이 태반이다. 틀린 곳 아래엔 싸장님이 왜 틀렸는지 친절하게 주석까지 달아 주셨지만……. 솔직히 모르겠어.

“에휴.”

몇 시간 동안 뚫어져라 수식을 바라보며 고찰하다가 결국 공책을 덮었다.

룬문자의 수학적 표현을 위해 공부한 지 수개월, 이제야 1위계-룬문자 하나만 사용되는 형상을 정리하는 수준이다. 그것도 이렇게 곳곳이 틀리기 일쑤고. 그냥 <눈>으로 느끼면서 마력을 유동하면 되는 것을 이렇게 X빠지게 수학 공식으로 풀어내야 하다니…….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힐 겸 옆의 미니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병을 꺼내려는데-.

-덜컥!

“도비야, 공부 열심히 하고 있냐?”

싸장님이 문을 열고 나타나셨다.

흰 가운에 업무용 노트북을 옆구리에 낀 모습, 내가 썩어 들어가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씨익 웃으신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주 엿 같은 것 같은데?”

“……말도 마세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오늘치 수업은 다 끝났는데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면서 말하자 싸장님은 테이블에 노트북을 올려놓으신다.

“저번에 말했지? 우리랑 ‘협업’할 만한 연구소가 있나 찾아본다고.”

“어, 설마?”

“그래, 우리의 ‘연구 성과’ 일부를 보여주니 관심을 보인 곳이 있어.”

작년 여름방학 이후로 시작된 ‘영체·영혼에 관한 연구’, 내 <눈>의 성능을 바탕으로 나름의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냉정히 말해 우린 ‘이쪽 분야’에 대해서 초보였다. 그래서 싸장님은 ‘좀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협업을 제안하셨고.

노트북을 펼치면서 싸장님은 말을 이어가셨다.

“일단, 네가 요청한 대로 중국 쪽은 다 뺐다. 중국 쪽 영향력이 강한 곳도 뺐고. 그러니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더라.”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병을 따서 마시면서 난 싸장님 옆에 서서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영어로 쓰인 이메일 답장, 손을 까닥이며 싸장님은 입을 열었다.

“첫째로 ‘영혼·생명 연구소’, 대단히 복잡한 발음이 있는데 우리끼린 그냥 그렇게 불러. 이집트 쪽에 존재하지.”

“그렇……. 아니, 잠시만요. 이집트에 있다고요?”

“그래, 이집트.”

“거기, ‘아프리카 타락체 준동’ 사건으로 망한 곳 아니었어요? 인터넷에 검색했을 땐 그렇게 나오던데, 그 이후엔 언데드가 창궐해서 뒤덮였고.”

이 세상은 ‘내가 있었던 세계’와 비슷하면서도 많은 곳이 망가졌다.

미궁의 출현으로 인해 발생한 혼란, 그로 인한 ‘국가의 붕괴’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집트도 그렇게 망한 국가들 중 하나다. 어떻게 수에즈 운하는 정상으로 운영되는 것 같지만 말이지? 그런 내 말에 싸장님은 쓰게 웃는다.

“일반 대중들에겐 그렇게 알려졌지. 사실, 북아프리카에 창궐했다는 ‘언데드’들은 몇몇 우두머리들의 통제를 받고 있어. 그리고, 우두머리들은 매우 뛰어난 지성을 가졌지.”

“……사실상 ‘언데드들의 국가’가 생긴 거 아닌가요?”

“맞아, ‘납골당 의회’라고 불리는 15인의 강력한 언데드 마법사들이 통치하고 있지. 어디 보자, 검열 안 된 구글 지도가 어디 있더라?”

검색 엔진에 위성 지도를 검색하는 싸장님, 이어서 지도 하나를 찾더니 지중해 쪽을 확대하신다.

“여기, 시커멓게 변한 지역 있지?”

“넵.”

지중해 아래, 해안선에 접한 북아프리카의 땅이 색칠한 것처럼 시커멓게 되어 있다. 길쭉하게 생긴 것이 꼭 칠레의 지도를 보는 것 같구만. 그런 내 대답에 싸장님은 고갤 주억이신다.

“여기가 언데드들이 차지한 곳이야. 보다시피 유럽으로 향하는 북아프리카 전역의 해안선-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까지 경유하는 땅을 모조리 장악했지.”

“와, 엄청 크네요? 근데, 유럽이 가만히 둬요? 이거 나름 심각한 위협 아닌가? 지성을 지녔다면서요? 뭉쳐서 쳐들어오면 심각한 위협일 텐데?”

수많은 국가들이 멸망의 위기를 겪었지만, 대부분 선진국이었던 유럽 국가들은 망하지 않았다. EU로 똘똘 뭉쳐서 자급자족 경제를 구축했지. 언데드라는 심각한 위협이 자기네들 밑에 있는 상황인데도 유럽이 가만히 있다니……. 좀 이상하네?

그런 내 의문에 싸장님은 실소를 흘렸다.

“심각한 위협? 흐, 공식적으론 부인하지만 유럽연합은 언데드들하고 ‘야합’했어.”

“……야합했다고요!?”

“그래. 아프리카에서 무작정 밀려들어오는 난민들, 그 틈에 섞여 있는 수많은 타락체들……. 유럽으로선 무지 골치 아프지. 그걸 얘네가 알아서 대신 차단해주고 있는데?”

“…….”

“일각에선 유럽연합이 언데드들을 조종한다고도 보고 있어. 차지한 땅 좀 봐. 마치, ‘방벽’처럼 이렇게 북아프리카 지중해 해안선만 고스란히 차지한 걸 보면 요상하지 않아? 수에즈 운하도 정상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걸 보면 사실상 100%지.”

싸장님의 말에 나도 고갤 끄덕였다. 확실히, 그 말을 들어 보니 차지한 영토부터 길쭉한 게 차단선 같았다. 허허, 진짜 세상 참 요지경이야.

“세상 참 말세네요.”

“그래, 말세지.”

어깰 으쓱인 싸장님은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가신다.

“어쨌든 우리에게 긍정적 반응을 보인 ‘영혼·생명 연구소’는 납골당 의회 15인의 지도자 중 하나인 ‘멜드라쉬’가 운영하는 곳이야. 과학 분야, 그것도 생명 관련 공학에 심취한 걸로 유명한 놈이지.”

“와, 미궁에서 나온 괴물이 역으로 과학 지식을 탐하다니…….”

“이종족들에겐 과학기술이 오히려 마법처럼 느껴지니까. 어쨌든 영혼·생명 연구소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데드들에게 ‘생명’을 되돌려주는 거야. 영체와 영혼에 관해서도 대단히 심도 있게 연구 중이라고 하고.”

첫 번째 협업 후보부터 참 괴랄하다. 지성을 지닌 언데드들이라니, 꺼림칙함에 내가 턱을 쓰다듬자 싸장님은 두 번째로 넘어가신다.

“두 번째는 ‘퍼브(Fur’ve)’라는 곳이야. 솔직히, 여긴 나도 잘 몰라. 그냥 영체에 관련된 심도 깊은 연구를 하는 곳이 있냐고 연구자들에게 물어보니 추천이 나와서……. 우리가 파악한 영체 관련 연구 자료를 전했더니 꽤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어. 벌써부터 자금 지원을 약속했더라.”

“자금 지원이요?”

“1억 달러, 한화로 1,300억 원대의 투자야. 참고로 ‘순수한 인건비’로 주는 것이고 실험 및 연구에 필요한 자금은 따로 대주겠대.”

“케흑, 켈록! 켈록!”

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다.

아니, 1억 달러를 주겠다고? 그것도 순수하게 연구 인건비로만?? 사짜 냄새가 너무 심한데? 하지만, 싸장님은 보란 듯이 퍼브에서 보낸 이메일과 문서 내용, 그리고 학술지 사이트로 들어가서 퍼브에 관한 소개도 보여주신다.

“영체의 형태변환, 마법으론 <변이술> 관련해서 심도 깊은 고찰을 하는 연구소래. 인류를 더 강력하고 뛰어난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고, 그 첫 번째 도전 과제는 ‘야수와 인간의 장점만을 합친 새로운 존재’로 변하는 거라네.”

“흐음.”

첨부된 문서엔 연구소가 원하는 ‘청사진’이랍시고 그림과 설명을 넣어놨는데, 여러 조건이 붙었지만……. 그냥 설화 속 늑대인간이다. 이거, 퍼리(Furry) 새끼들이네. X발, 어떻게 협업 가능한 곳이 정상이 없냐? 둘 다 꺼림칙해.

하지만, 역시 내 목적을 생각하면…….

“첫 번째 쪽하고 협업하죠. 그쪽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괜찮겠어? 참고로 걔네들 성질 무지 더럽다. 언데드란 게…….”

“생명체에 대해 본능적인 증오를 가진 존재들이죠. 그래도 영체를 다루는 <강령술>만큼은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럼, 그쪽에 메일을 보낸…….”

학술지 사이트에서 나와 이메일을 보내려고 하던 싸장님, 하지만 이내 멈칫하더니 얼굴을 찡그리신다. 뭔가 심상찮아 보이는 모습에 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학술지 사이트가 난리 났는데? 잠시만.”

얼굴을 찌푸리며 이리저리 사이트를 클릭해서 살펴보는 싸장님, 영어로 쓰인 어떤 게시판 글을 하나 읽어 내리더니 이내 허탈하단 듯이 웃으며 날 바라보신다.

“야, 어쩌면 우리 그냥 ‘마력 각성 메커니즘’ 공개해도 될 듯하다?”

“네?”

“미국에서 초대박이 터졌어.”

그러면서 싸장님은 게시판 글에 포함된 동영상을 틀어주신다. 그와 함께 유창한 영어로 떠드는 귀쟁이가 나온다. 대면(對面) 상태가 아닌지라 <게임 시스템>이 작동하진 않았지만, 다행히 내 빈약한 영어 회화 실력으로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15년 전, 이 땅엔 거대한 나무가 자라났습니다! ‘룬 수호자’에 의해 타락한 저주에 찌든 신목이었죠. 대기권을 뚫고 수십 km 높이로 자라난 거대한 나무는 결국엔 무너지면서 미 동부 전역을 저주로 물들였습니다! 특히, 신목이 자라난 뉴욕은 그 타락의 정도가 심했고요!

-그 저주로 물든 땅을 저희 엘프들이 다시 바꿔냈습니다. 저희들의 기술과 마법으로 이 땅은 다시 생기를 얻었죠! 하지만, 저희 ‘테라-리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습니다!

화면이 전환된다. 하얗게 된 땅의 흙을 포클레인으로 퍼가는 모습, 그걸로 공장에서 어떤 정제과정을 거치는 모습, 이어서 한 방울로 응축된 ‘황금빛의 액체’까지. 다시 화면이 전환되며 연설하던 귀쟁이가 중심에 황금빛이 박혀 있는 ‘붉은 결정체’를 보란 듯이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그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뉴욕, 그 거대한 신목이 자라난 땅에서 우린 그 흩어진 ‘초월적인 힘’을 정제·추출·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엘디쉬 엘릭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저희 엘디쉬 엘릭서는 시중에 떠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영약과 각성 보조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기꾼들이 ‘이걸 먹으면 <마력 각성>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할 때, 저희는 증명합니다! 보십시오! 모든 분들이 알고 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할리우드의 톱스타…….

늙은 노파에게 손에 쥔 약물을 건네는 귀쟁이, 노파가 탁구공만 한 크기의 약물을 먹고 이어서 화면 x100배속이라는 글자가 뜨더니 노파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컴퓨터 CG처럼 자글자글한 노파가 서서히 젊어지기 시작해서 30대 후반의 모습이 됐다.

12시간 뒤, 자신의 변화한 모습을 손거울로 보며 여자 배우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귀쟁이의 소개가 이어진다.

-이 영상은 톱스타 OOO씨가 출연하는 생방송과 맞춰서 공개될 예정입니다. 보셨다시피 ‘엘디쉬 엘릭서’는 그냥 평범하게 <마력 각성>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강렬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영상을 보니까 더 극적이네. 우리가 만든 마력 각성제보다 ‘상위호환’인데?”

“그렇긴 하네요. 먹는 순간, 극적으로 젊어지다니…….”

싸장님이 감탄하고 나도 고갤 끄덕여 동의했다.

마력은 현실의 물리법칙을 일그러트린다. 인간의 육신으로는 버틸 수 없는 충격을 버티게 만들고, 한발 더 나아가 인체 노화도 억제·역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의 법칙을 일그러트리는 것엔 ‘강력한 마력’의 작용이 필요하다.

노화를 역전시킬 정도의 힘이라…….

도대체 뭘까? ‘황금 자두’처럼 가공할 영적·생명력으로 인간을 반귀쟁이화 시키는 방식은 아닐 테고……. 신기하구만. ‘대통령 각하 속이 많이 쓰리시겠어.’하며 싸장님이 킬킬거리며 웃는 가운데, 영상 속의 귀쟁이는 말을 이어나간다.

-엘디쉬 엘릭서의 물량은 최소 1만에서 최대 3만 명 분량까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구매는…….

“우리도 좀 살까?”

“나쁘지 않죠?”

수천억 원대의 가격이 되겠지만, 갑부인 우리 싸장님이 돈을 꼬라박으면 하나 정돈 구하는 게 가능하겠지. 동영상 아래에 적힌 글귀를 보며 싸장님은 턱을 쓰다듬었다.

“구매는 기본적으로 경매로 진행되며 ‘골디안 코인’, ‘엘븐 코인-비트 코인’으로 살 수 있…….”

“푸흡!”

“아이씨! 야!”

물을 마시다가 싸장님의 머리 위에 물을 뿜어냈다. 성질을 내는 싸장님, 근데 이건 그럴 수밖에 없다. 에, 엘븐 코인?!

“머, 뭐?! 엘븐 코인이요?”

“……그래, 설명을 읽어 보니 ‘비트 코인’이라는 거라네. 이런 것도 있구나.”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싸장님. 진짜 비트 코인 중 하나인 ‘엘븐 코인’으로 이걸 살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동영상의 녹화 시간은 3시간 전, 그에 난 재빨리 비트 코인 거래소 사이트에 들어가서 확인했고.

“허미, X발.”

하늘을 뚫고 치솟는 ‘엘븐 코인’의 붉은 그래프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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