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화
68화. 데드 엘프 바운스
1.
눈가를 간질이는 아침햇살에 난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키며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가씨네 집 안방, 아무래도 잠든 사이에 아가씨가 옮겨주신 듯하다. 아가씬 또 출근한 것 같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보고 샤워를 했다.
“-♬”
몸을 다 씻은 뒤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아침 식사용으로 베이글과 잼을 꺼냈다. 이어서 커피 머신에서 향긋한 블랙커피를 내리며 오늘 뭘 해야 할지 생각했다.
거래소 앱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코인을 할 때 중요한 건 ‘여유’, 조그만 변동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다. 초 단위로 변동하는 차트를 계속 뚫어져라 보고 있어 봤자 피폐할 뿐이야. ‘코인의 망령’이었을 적엔 알아도 지키기 힘들었지만……. 히어로가 된 지금엔 다른 이야기지.
그렇게 우아하게 아침 식사를 끝내고 블랙커피를 홀짝이며 스마트폰 앱을 켜니…….
“푸흡?! 케흑, 켈록! 켈록!”
반사적으로 마시던 커피를 뿜었다.
뭐, 뭐지? 내 자산이……. 520,012원이라고 뜨는데? 설마, 해킹을 당했나?! 혹시나 해서 <눈> 대신 육안(肉眼)을 부릅뜨고 봤지만 바뀌는 건 없다. 자산 내역을 띄워보니 해킹은 아닌 것 같다. 코인 자체는 있는 걸로 표현되니까.
다만, 값이 똥값일 뿐.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마시고 있던 뜨거운 커피를 살짝 손등에 쏟아보자 화끈함이 올라온다. 아무리 봐도 꿈이라기엔 너무 리얼해! 아니, 내 자산 대부분이 잡코인이라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일단, 자기 전에 ‘숏’ 걸어놓은 건 청산당했다.
짜증 나지만 이건 어찌 이해할 수 있다. 천만 원으로 레버리지 10배 숏을 쳤으니까 100만 원만 올라도 청산당하겠지. 증거금을 납입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가진 코인들의 가격이 ‘소수점’대로 진입한 건 이해 못 하겠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
곧바로 거래소의 주요 코인 가격을 확인하는 순간…….
“오, 오……올 블루!”
새파랗게 펼쳐진 푸른빛, 혹시나 해서 다른 국내외 거래소도 확인하니 마찬가지다! 무, 무슨 일이지? 아니, 이전 세계에서도 이런 일은…… 있었나? 하지만, 맹세코 코인판 초기에 이런 일은 없었어! 이 개 같은 억까에 곧바로 휴일 사이에 뭔 일이 터졌나 검색해 보니…….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중국 정부의 ‘코인 규제’ 통보, 이건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그래서 숏 포지션을 잡으려 했었고. 근데, 이 짱깨 새끼들. 민주주의 흉내도 안 내고 그냥 곧바로 휴일 중에 규제를 때려버렸다. 토·일요일엔 걔들도 쉬어서 좀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것만으로 초대형 ‘악재’인데, 그 발표 뒤에 2시간도 안 돼서 미국에서 또 터졌다.
사실상, 엘븐 코인의 값을 보장하는 회사인 ‘테라-리프’의 사기 가능성. 심지어 FBI 국장이 긴급 기자회견으로 나와서 말한 것이었다. 공장 내부의 사진까지 공개하면서 그 사기 가능성을 어필했다. 그에 엘 마르는 SNS로 ‘무고다. 설비는 좀 더 은밀한 곳에 있다.’고 반박했지만……. 당연히, 엘븐 코인의 값이 폭락했다.
대장주가 떨어지는데 잡코인이 무사할 리 없다.
백악기 공룡들을 끝장내버린 운석처럼 ‘2연타 초대형 악재’에 모조리 폭락, 전통을 가진 대형 코인들도 60~70% 이상 깎였다. 폰지 사기에 가까운 잡코인들이 그 여파에 버틸 수 있을 리가. 순식간에 하루도 안 돼서 폭사당했다.
허탈한 마음에 인터넷 커뮤니티를 들어가 보니 아침 7시인데도 그 꼴이 가관이다.
[할머니 애호가] : X발 새끼들아!! 다 뒤져버려!! (어떤 사진)
[익명 221] : Fuck! What the hell?
[aerga] : Plz, don't do that!
[ㅇㅇ] : 아니, 좀 자제하자. 게시판에 외국인도 있는데.
[ㅁㄴㅇ] : 완장 새끼들아! 게시판 관리 안 하냐!
평소라면 느려도 1분 컷 당할 혐짤 테러범들이 잘리지 않고 계속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고-.
[ㅇㅇ-운영자] : X까, X발. 내 인생이 망했는데 관리할 틈이 있냐?
[ㅇㅇ-운영자] : 생각해 보니 이 새끼들 노비 취급하는 거 X 같네? 안 되겠다, 오늘 게시판 대문은 이 ‘사진’으로 한다.
[반인반룡어셈블] : 아니, 미친 새끼야! 통매음으로 끌려간다고!
[ㅇㅇ-운영자] : 응~ 어차피 인생 망해서 상관없어~
분탕들을 잡아야 할 완장도 미쳐 날뛰고 있었으며-.
[불꽃효도액션] : 엄마미안해엄마미안해엄마미안해엄마미안해엄마미안해
[도지 1000원 기원] : 전세금 3억 끌어다 박았는데 싹 다 날렸다. 죽고 싶다…….
[일 왜함] : 화가 나서 세면대 후려쳤더니 부서졌다.
[퓌순이] : 짜증 나서 모니터 후려쳤더니 깨졌어…….
[살렺] : 엄마에게 돈 다 꼬라박았다고 고백했더니 김치통 던지심;
-30%, -70%, -99%……. 개같이 꼬라박은 인증글과 함께 가구를 부순 사진과 김치통을 엎은 사진들이 개념글에 박혀 있었다. 말 그대로 세기말……. 대공황의 광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사실, 이런 풍경 또한 이전 세계에서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나름 준비를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성공적으로 탈출해서 ‘100억 잘 먹고 갑니다, 꺼-억!’ 인증 글을 올려야 하는데…….
“……흑.”
이런 대폭락이 올 때, 인성질하려고 ‘야호하는 삐에로’ 사진과 함께 ‘XX하면 그만이야~’라고 올리려고 정성스레 준비했는데…….
“흐아아아악!”
히어로가 되겠다는 내 꿈은 불타오른 채, 결국 이번 세계에서도 ‘코인의 망령’이 돼버렸다.
2.
참혹한 현실에 1시간가량 울부짖은 후, 난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미르에 등교했다.
평소보다 한참 늦은 등교, 대부분 애들이 앉아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교실엔 절반밖에 없었다. 등교한 애들의 분위기도 심상찮았다. 활발하게 코인 가지고 이야기하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반쯤 혼이 나간 표정.
하나같이 눈이 벌겋게 충혈됐고 밑에 다크서클이 진 걸 보면 밤을 새운 몰골들이었다. 그리고, 서예린은…….
-따닥따닥따닥…….
의자에 앉은 채, 떨리는 이빨로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거래소 앱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와 서예린에게 괜찮냐고 톡을 안 보냈구만. <눈>을 이동해 그 액정을 보니…….
“에휴.”
서예린의 자산은 300억으로 줄어있었다.
코인 그래프를 보니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전에 잠깐 불장이어서 혹시 1,000억 찍고 매도했나 했더니……. 똑같은 꼴이구만. 아니, 그래도 다른 코인들과는 달리 저 정도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디냐?
어쨌든 난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내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획 고갤 돌려본 서예린은 이어서 적개심 어린 목소리로 뾰족하게 소리친다.
“나 놀리러 옴!?”
살기와 짜증 섞인 기세를 내뿜어내는 서예린, 다른 반 애들과는 달리 서예린은 멘탈이 박살 나 넋이 나간 수준은 아닌 것 같다. 하긴, 지금 팔아도 200억 순이득이니까. 크게 한숨을 내쉰 후, 난 고갤 저었다.
“전 망했어요. 자는 동안에 알거지가 됐죠.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여지 없어요.”
“…….”
“놀리러 온 거 아니에요. 그냥, 어떻게 됐나 물어볼 거예요. 엘븐 코인은 아직 살아있…….”
말하다 보니 맨 처음 ‘엘븐 코인’이라는 것으로 엘릭서 값을 받겠다고 했을 때 생각했던 의심들이 다시 떠올랐다. 굳이 비트 코인이라는 걸로 값을 받는 걸 보면서 수상하다고 생각했었지. 이번에 터진 엘릭서 공급 관련 발표까지 합쳐지면……!
-덥석!
“……!?”
양손을 뻗어 책상에 앉아 있는 서예린의 두 어깨를 붙잡았다. 내 돌발행동에 서예린이 움찔하는 가운데, 난 그런 그녀를 향해 한없이 진지하게 충고했다.
“던지고 나와요.”
“……뭔 솔!?”
“코인 던지고 빠져나오라고요! 지금이라도 탈출해야 해요!”
아직 엘븐 코인이 건재하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이건 100% 사기야! 그 귀쟁이 새끼, 코인으로 대형 사기를 치려고 작정한 거다! 그런 내 주장에 서예린이 멈칫하며 망설이다가 이내 핏발 선 두 눈을 부라리며 고갤 젓는다.
“아님, 안 됨!”
“뭔 소리예요! 아니, X발 이미 사기라고요! 굳이 엘븐 코인으로 값을 받겠다고 했을 때부터 좀 싸했…….”
“엘릭서는 진짜임! 이미 증명됨! 그리고 엘븐 코인으로 샀던 것도 진짜임!!”
어깰 붙잡은 내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서예린, 넋이 나간 애들의 멍한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가운데 서예린은 핏발 선 눈으로 선언한다.
“22명, 진짜 젊어진 거 잊어먹음?? 그들 절반은 엘븐 코인으로 삼!”
“그래야 코인 가격이 뻠핑되니까요! 그러니까 던지고 나와요! 더 떨어질 거야!”
“코인은 미래임. 미래의 가치 투자……. 지금 떠드는 건, 숏충이 새끼들의 음해임! 롱임! 가치 투자를 하는 거임!”
이미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듯하다. 아니, 상식적으로 FBI의 국장이라는 사람이 루머를 말하겠냐고!? 그렇게 ‘모두 숏충이들의 음해다!’라고 포효한 서예린은 헐떡이며 숨을 헐떡이더니…….
“아직, 괜찮음. 괜찮음. 괜찮……. 아니, 남들이 던지는 지금이 ‘기회’임.”
“……!?”
“루머가 가짜로 밝혀지면 반등할 테니……. 싼값에 더 매입할 수 있는 기회!”
상상을 초월하는 말과 함께 그 황금빛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들거린다. 무친련, 무친련……. 원래부터 좀 사고방식이 야성적이라고 생각했다만 진짜 ‘야수의 심장’을 가졌네?!
“아니, 그러…….”
내가 어떻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서예린은 책상 옆에 걸어둔 가방을 메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장비를 걸치지 않은 몸으론 따라잡기 힘든 속도, 따라잡는 건 포기하고 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 신호가 가더니 ‘방해 금지 모드여서 통화가 제한됩니다.’라는 안내 음성만 나온다.
“하아…….”
서예린이 뛰쳐나간 방향을 보며 난 기도했다. 만약, 코인의 신이 있다면……. 부디 내 예측이 틀리고 서예린이 맞기를.
3.
서예린이 뛰쳐나간 뒤, 나도 가방을 챙겨서 교실 밖으로 나왔다.
무단결석, 하지만 대학을 갈 것도 아니고 별 상관없었다. 억지로 수업을 들어 봤자 내용이 들어올 것 같지도 않고. 그렇게 무단으로 땡땡이친 후, 난 비트 넥스의 사옥으로 향했다. 서예린이 뛰쳐나간 뒤에 아가씨에게도 톡을 보내봤지만……. 읽음 표시도 안 뜨는 것이 좀 불길해.
그렇게, 비트 넥스에 도착하니…….
“내 돈! 내 돈 내놔! 이 새끼들아!!”
“열어! 문 열어! 문!!”
여기도 아주 개판이었다.
건물 입구는 방범 셔터가 내려가 있었고 안쪽의 유리문은 깨져있었다. 그렇게 내려간 방범 셔터에 달라붙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셔터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광분하고 있다. 일요일의 충격파에 박살 난 개미들인 것 같은데……. 이렇게 무작정 거래소에 몰려올 줄은 몰랐네.
출근한 거래소의 직원들도, 출동한 경찰들도 눈치를 보며 접근하지 못하는 가운데-
“저, 저저저……! 나온다!”
셔터가 내려간 건물 안쪽 엘리베이터에서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가씨와 직원 몇 명이 나타났다.
비트 넥스를 설립한 재벌가 엄친딸, 코인 광풍이 몰아칠 때 인터뷰도 많이 했던 만큼 사람들은 전부 다 알아봤다. 살짝 충혈된 눈과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피곤함……. 아무래도 밤을 꼬박 새우신 듯하다.
그런 아가씨를 향해 사람들은 좀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방범 셔터에 달라붙어 손을 뻗는다.
“이 개 같은 년아! 도박판 열어서 돈 빨아먹으니 좋냐?! 서민 등골 빨아먹으니 좋아!?”
“돈! 내 돈 내놔! 내 돈!!”
-쾅! 쾅! 철그럭!
아가씨를 향해 원색적인 욕설을 내뱉으며 방범 셔터를 두드리는 사람들. 그 꼬라지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꽈악 쥐었다. 아니, 저 개새끼들이……. 코인으로 꼬라박으면 꼬라박은 거지, 우리 아가씨가 뭔 잘못이 있다고!?
“고객 여러분, 저희들도 최선을 다해서 이번 사태에 대응…….”
자신에게 쏟아지는 욕설에 아가씨는 굳은 얼굴로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곤, 방범 셔터 밖의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지만-.
“닥쳐!! 내 돈! 내 전셋돈!!”
“돈! 돈!! 내 돈!!”
통할 리가 없다.
수십 명이 내뱉는 악다구니에 아가씨의 목소리가 묻히는 가운데, 셔터에 붙은 50대 아줌마 하나가 입구에 깨진 유리문의 커다란 파편을 쥐어서 그 틈 사이로 던졌고-.
-퍼억!
악다구니를 쓰는 폭도들을 진정시켜 보려던 아가씨는 그 손바닥만 한 유리 조각에 눈가를 맞고 휘청이며 뒤로 자빠졌다.
-까드드득…….
그 순간, 난 이를 악물며 뛰쳐나가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가씨가 일반인이었다면 곧바로 저 개새끼들을 향해 마법을 난사했을 거다. 하지만, 아가씨는 마냥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서예린이나 나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도 일가견이 있으신 분. 피곤하더라도 방금 전에 날아온 파편 정도는 가뿐하게 피할 수 있었어.
그래, 저건 ‘일부러’ 맞아준 거다.
“사, 사장님!”
“경찰! 경찰 뭐해! 경찰!”
날카로운 유리 파편에 눈썹 위가 길게 찢어져서 피가 철철 흐르는 아가씨, 그 모습에 우왕좌왕하던 경찰들도 본격적으로 몰려든 이들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쓰러진 아가씨가 직원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다시 건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읏차.”
난 재빠르게 건물 뒤편으로 이동, 빗물 배관을 타고 올라가 창문을 열어 안쪽으로 침입했다.
내가 창문으로 들어오자 기겁하는 한 직원, 하지만 내 모습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이미 몇 번이나 아가씨 회사에 들락날락해서 내 모습은 잘 알려졌거든. 살짝 양해를 구하며 건물 안에 들어선 뒤, 난 아가씨가 있는 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덜컥!
“아가씨! 괜찮아요?”
찢어진 이마의 상처에 흰 수건을 댄 채 있는 아가씨, 꽤나 피가 많이 흘러서 수건이 붉게 물들었다. 내가 들어오자 아가씨는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곧 쓴웃음을 흘렸다.
“봤어?”
“……어쩌다 보니 보게 됐네요.”
“미르 등교하지 않고 왜 왔어.”
“솔직히, 등교해봤자 지금 공부가 되겠어요?”
내 대꾸에 씁쓸하게 고갤 끄덕이는 아가씨. 마침, 구급상자를 들고 이쪽으로 오는 직원이 있기에 상자를 건네받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지만……. 그래도 화가 나네! 아니, 우리 선량한 아가씨가 뭔 잘못을 했다고!
내가 옆에 앉아 구급상자를 펼치자 아가씨는 수건을 이마에 댄 채 한숨을 내뱉는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삼촌 왔을 때 회사를 팔 걸 그랬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따면 내 실력, 잃으면 세상 탓하는 놈들이니까. 여기 온 것도 그냥 불평불만을 쏟아내려 온 거잖아요.”
“흠.”
“솔직히, 지랄할 거면 엘 마르에게 해야죠. 안 그래요?”
우리 아가씨가 마음이 좀 여리여리한데, 부디 이런 걸로 상처받지 않으면 좋겠어. 그런 내 위로에 아가씨는 피식 웃으며 고갤 끄덕인다.
“알아, 그래서 일부러 맞아줬어. 울분이 좀 풀리면 냉정해지겠지.”
“아뇨, 저~얼대 안 그럴걸요.”
빨간 소독약을 꺼내며 손짓했다. 그에 아가씨는 왼쪽 눈가에서 수건을 떼고, 나는 눈썹 위의 찢어진 상처에 약을 바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가씨. 약자는 착하지 않아요. 괜히 마음 약해져서 보상 같은 말 꺼내면…….”
“알아! 누가 바본 줄 알아?”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아가씨, 약을 바르고 커다란 거즈와 밴드를 붙여 주자 아가씨는 소파에 등을 파묻으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누군가의 원망거리가 됐다는 게 기분이 좋진 않네.”
“항상 제가 옆에 있을 텐데 뭔 걱정이에요? 실컷 원망하라 그래요.”
“히히, 그렇네. 우리 귀여운 새벽이만 내 옆에 있으면 되지!”
내 대답에 빙긋 웃으며 날 품 안에 껴안는 아가씨, 여친보다 체구가 작아서 이런 취급 당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쓰게 웃고 있는데, 날 품 안에 안은 아가씨는 내 귓가에 속삭인다.
“하자, 나 하고 싶어.”
“……여기서요? 다 들리지 않을까요?”
“이 주 동안 못 했잖아? 그리고, 사장실 뒤에 주거 공간 있어. 방음 잘 돼.”
아가씨가 턱짓하는 방향을 향해 <눈>을 보내 확인했다. 진짜 오피스텔 원룸처럼 꾸며진 곳이 있네?! 개인 화장실에 방음 조치도 꽤 잘된 것 같고……. 난 곧바로 몸을 돌려 아가씨를 붙잡고 엎어 치듯이 반대쪽 소파 위에 내동댕이쳤다. 내 돌발행동에 아가씨가 움찔한 가운데-.
“읏차, 가시죠! 공주님!”
난 아가씨를 공주님 안듯이 안아 들고 뒤쪽에 숨겨진 원룸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