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화
2.
우리 아가씨는 애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다.
물론, 진짜 ‘절친’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나와 서예린밖에 없다. 아, 추가로 이종족 문화교류부의 애들 정도? 이건, 어쩔 수 없어. 미르가 유혈에 잠겼을 당시, 함께 힘을 합쳐서 목숨의 위기를 헤쳐 나간 그 ‘강렬한 경험’은 대체할 수 없으니까.
어쨌든 나름의 인싸력을 뽐내면서 잘 어울리는 우리 아가씨였는데…….
“…….”
“…….”
“…….”
우리가 문을 열고 나타나자 각자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던 반 애들이 우리-정확히는 아가씨를 확인하곤 입을 다문다.
갑자기 내려앉은 정적, 아는 척하기 바빴던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에 아가씨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자기 자리에 가서 책가방을 내려놓고 앉으신다. 다시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하는 아이들, <눈>을 활용해서 엿들어보니…….
-쟤, 왜 왔대?
-이제 더 이상 코인 관련해서 빨아먹을 게 없어서 온 거겠지.
-진짜 뻔뻔하다.
다들, 적개심이 가득했다.
내용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아가씨가 ‘코인 거래소의 CEO’라는 게 감정을 자극한 것 같아. 돈을 꼬라박아서 화난 것도 이해하지만……. 그래도 아가씨가 코인 가지고 장난친 것도 아닌데 말이지. 거래소의 운영도 이전 세계의 수많은 양아치들과는 다르게 아주 깔끔했고.
……불안하네.
나야 반강제적인 아싸·찐따 생활에 익숙하기에 이런 일을 겪어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인싸인 아가씨가 이 조리돌림을 버틸 수 있을까? 속입술을 질겅이다가 난 스마트폰을 켜고 톡을 보냈다.
[나] : 반 분위기도 안 좋은데, 우리 그냥 조퇴할까요? 그냥 곧바로 예린 씨 만나러 가죠?
[여친님] : 됐어, 이런 거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 답장에 머릴 긁적였다. 괜찮다고 하니……. 뭐, 괜찮겠지.
곧 아침 조회와 함께 수업이 시작됐고, 이후로도 은근한 따돌림은 계속됐다. 휴식 시간에도 끼리끼리 모여서 눈을 흘기며 속닥거림에 어지간히 짜증이 나신 듯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스마트폰을 하신다. 그렇게 어찌어찌 오전 수업이 지나가나 싶었는데…….
“퉷.”
점심시간, 한 남자애가 아가씨의 발치에 가래침을 탁 뱉으며 지나친다. 우리 반에 있는 선도부원, 이름이…… ‘정철준’이었던가? 미르 선도부 특유의 험악한 분위기에 반 애들에게 좀 경원시당하는 놈이었다. 저번 주에 손해를 많이 본 듯, 멘탈이 나간 듯한 모습으로 흐느적거렸고.
그에 아가씨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야, 너 지금 시비 거냐?”
고갤 돌리지도 않은 채, 의자에 앉아 나지막이 말하는 아가씨. 그 의지와 감정에 마력이 반응하고 아가씨의 몸에서 ‘빠직-! 빠직-!’거리는 정전기와 함께 사나운 기세가 물씬 흘러나온다. 참으라고 말하기엔……. 방금 전에 보여준 놈의 행동은 많이 선을 넘었지.
그 심상찮은 기세에 아가씨를 지나쳐 걸어가던 놈은 흠칫했지만……. 도망치진 않았다.
“뭐?”
고갤 돌려 대꾸하는 녀석, 싸울 것 같은 분위기에 주위의 애들 시선이 대놓고 확 쏠리는 가운데 아가씨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무표정한, 하지만 동시에 많이 빡친 표정으로 고갤 돌려 놈을 바라보신다.
“지금 지나치면서 내 발치에. 침을 뱉었잖아. 그리고 들으란 듯이 욕도 하고.”
“……너한테 욕한 거 아니야. 혹시 감정 상했다면 사과…….”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녀석의 궁색한 변명을 도중에 끊어버리며 삐딱하게 고갤 꺾는 아가씨, 그러곤 작년 학기 초에 내게 보여줬던 특유의 띠꺼운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여신다.
“그래, 넌 얼마나 꼬라박았냐?”
“뭐?”
“보아하니까 코인으로 돈 잃은 것 때문에 시비 거는 것 같은데, 얼마나 꼬라박았냐고.”
아주 대놓고 날리는 직구, 설마 이렇게 코인에 대한 말을 꺼낼 줄이야? 시비를 건 남자애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듯,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아가씨는 녀석을 향해 이죽였다.
“어처구니가 없네. 말해 보라니까?”
이어진 추궁에 남자애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더니 대꾸했다.
“1억, 그리고 내 고향 친구 아버지가 자살했다.”
“…….”
“일요일에 그 녀석이 울면서 전화하더라.”
자살했다는 말에 표정이 굳어지는 아가씨, 나야 사람 담근 게 한두 명이 아니라서 ‘어쩔 티비?’하고 대꾸해줄 수 있지만……. 보통은 뭐라 대꾸하기 뭣하지. 그 언급에 교실에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아가씨는 무거운 입술을 뗐다.
“그래서, 그게 나한테 시비 거는 이유냐? 내가 코인 거래소를 만들어서 네 친구 부모님을 죽였다?? 그리고, 네 돈도 날리게 만들었고?”
말이 없는 선도부원,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보일 수 있는 그 모습에 아가씨가 오른 주먹을 들어 올려 책상을 후려친다.
-콰-앙!
주먹이 책상에 닿는 순간, 살벌한 푸른 번개의 스파크와 함께 천둥소리가 울리고 책상은 완전히 찌그러져 박살 났다. <눈>의 플레이버 텍스트를 보니 일종의 ‘신체 강화 마법’을 부분적으로 적용한 것, 그렇게 번개와 함께 책상을 박살 내버린 퍼포먼스에 애들이 압도된 가운데-.
“지랄하지 마.”
아가씨는 싸늘한 표정으로 녀석을 응시했다.
“그런 구질구질한 사연 끌어들이지 말고 솔직히 말해. 넌, 그냥 누군가에게 화풀이하고 싶을 뿐이잖아. 네 돈을 꼬라박은 울분을.”
“…….”
“내가 만만하게 보였나 봐? 순순히 네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해줬을 정도로?”
“그래서 넌 아무런 잘못이 없다?”
지지 않고 아가씨에게 대꾸하는 선도부원에 아가씨는 피식 웃었다.
“그럼 좀 말해줄 수 있어?? 내가 뭔 잘못을 했는지?”
“…….”
“그렇게 화가 났으니 아주 잘 알 거 아니야?”
아가씨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아무런 대꾸를 못 하는 남자애, 돈을 꼬라박았으니 화가 잔뜩 난 것은 좀 이해한다만……. 확실히, 아가씨를 비난하기엔 뭔가 부족하지. 그렇게 말을 못 하는 놈을 향해 아가씨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뱉는다.
“하아, 너도 들었지? 내가 여기 있을 때, 계속 코인에 대해 경고한 거.”
“…….”
“이거, 처음 보는 자산이라서 나도 모른다고. 자본이 쏠리기에 ‘판만 벌이는 것’이라고. 도박에 가까우니 한다면 용돈벌이 수준으로만 하라고. 근데, 경고해줘도 꼬라박는데 내가 도대체 뭔 말을 해줘야 했을까?”
“……그래서 그 ‘도박장’ 차려서 잘 해 처먹었냐?! 개년아?”
대놓고 으르렁거리며 욕하는 선도부원, 그에 아가씨도 입을 다문 채로 이빨을 악문다. 어찌나 세게 이를 물었는지 목과 턱 주위에 딱딱하게 근육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일 정도. 마빡엔 핏줄을 하나 띄운 채, 아가씨는 이를 악물어서 살짝 뭉개진 발음으로 이죽인다.
“말 똑바로 해라, 도박장이 아니라 거래소야.”
“하, 말 바꾸는 거냐?? 도박에 가깝다면서? 이…….”
“그건 네가 도박처럼 했으니까 그렇지.”
놈의 말을 끊어버리며 녀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가씨, 그와 함께 아가씨의 밝은 갈색 머리칼이 정전기가 파직거리며 거꾸로 곤두선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고파는데 그게 ‘도박’이지. 최소한 ‘엘븐 코인’을 샀던 애들은 이해라도 좀 된다! 가치를 보장하는 주체, 화폐 거래의 대상인 ‘엘릭서’가 있었으니까. 그것도 결국엔 사기였지만 말이야. 근데, 다른 코인은 뭐냐? 보증하는 게 뭐가 있었냐?”
“…….”
“내가 투자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렸지! 설마, 거래소 만든 것에 질투하는 거야? 그럼 나보다 먼저 거래소 만들지 그랬어?!”
아가씨의 팩폭이 이어질수록 점점 얼굴이 벌게지다가 결국엔 먼저 주먹을 내지르는 선도부원, 전투 직종으로 진로를 잡은 놈답게 일반적인 마력 각성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일반인은 그냥 맞는 순간, 머리가 으스러질 수준의 공격.
하지만, 우리 아가씨와는 그런 수준보다 한참 위다.
강뢰 (Lightning bearer)
레벨 4 번개/부여술
시전 소음 : 15
주문 소음 : 5
최대 SP : 100
지속시간 : 18 + 2d(Spell power) 턴
최소 소모 재화 : 마력 4p
<신체 강화 효과>
언암드 대미지 = 6 + 스킬 레벨(번개)
모든 행동 속도 가속(최대 2배)
반사 신경 강화
민첩 +3
효과 : 시전자의 모든 행동 속도를 크게 상승시키는 마법, 신경망을 따라 전기로 변화시킨 마력을 육체에 직접 흘려 넣어 기존의 신체적 한계를 초월한 반응속도를 낼 수 있다. 몸 자체에 상당한 부하를 가하는 마법이며, 자칫 잘못하다간 몸의 신경망을 작살낼 수도 있기에 매우 섬세한 마력 조절이 요구된다.
주문의 지속시간이 끝났을 때, 시전자의 신경과 근육은 과도한 전기 자극에 의해 혹사당해 그 움직임이 굼떠지니 주의할 것.
-콰-지직!
폭음 비슷한 소음과 함께 아가씨의 몸 전체가 전류에 휩싸인다. 거꾸로 곤두선 갈색 머리칼이 푸른 번개가 되어 빠직거리고 아가씨는 그 찰나의 순간에 가뿐히 놈의 주먹을 피하고 동시에 반격했다.
-퍼억!
-파직!
아가씨의 정권이 놈의 뺨을 후려치는 순간, 가죽 북을 후려친 듯한 소음과 함께 전기 충격기로 지진 것처럼 ‘빠직!’ 소리가 난다. 그 아가리에서 이빨이 튀어나오는 건 덤, 아가씨의 움직임을 분석하니 일일이 몸을 움직인다기보다는……. 미리 입력해놨던 커멘드를 따라 몸이 반강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가깝구만.
“크……!”
전투 훈련을 받은 놈답게 그 타격에도 쓰러지지 않고 반격했지만…….
-뻐버버버버벅!
-파지지지직!
오히려 그 버티는 행위가 매를 벌었다.
본격적으로 공격에 들어가는 아가씨, 상대보다 2배 이상 빠르니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어찌나 압도적인지 잘못 썼다간 단숨에 파탄이 나는 큰 발 기술까지 섞어서 때리시네.
“커흑, 케흐흐흑…….”
그렇게 20여 초가량 아가씨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놈은 이빨이 다 박살 나고 한쪽 다리가 부러진 채로 주저앉는다.
그와 함께 아가씨의 몸에서 뿜어지던 푸른 번개가 사라진다. 그 화려하고 살벌한 폭력에 반 애들은 물론이고 밖에서 훔쳐보던 애들까지 압도된 가운데, 아가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목덜미까지 내려온 개암색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쯧, 별것도 아닌 게 시빌 걸고 있어.”
여유로워 보이지만 마법의 부작용에 의해 신경이 혹사당한 상태. <광폭화> 이후, 탈진 상태보다도 더 무력하구만.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연기하며 아가씨는 푸른 스파크가 튀기는 눈동자로 도도하게 놈을 내려다보신다.
“이번은 이 정도로 넘어갈게. 하지만, 한 번만 더 지랄하면…….”
하지만, 그 말에도 놈의 반항적인 눈빛은 꺼지지 않는다.
일반인이라면 겁에 질릴 만한 경험이겠지만 전에 봤던 ‘선도부 자체 훈련’ 때도 저 정도 부상은 일상이었지. 말 그대로 뼈가 부러지는 살벌한 폭력이 이어졌으니까. 그렇게 여전히 독기에 찬 눈빛을 보내자 아가씨는 느릿하게 허릴 숙여 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너하고 니 가족까지 모조리 다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거야.”
“……!”
“언론에 알려도 돼. 그 잘난 언론의 관심이 얼마나 갈지 보자고. 아니, 관심이나 끌 수 있으려나? 작정하고 재벌이 괴롭히는데,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을지 나도 좀 궁금하거든. 아, 북쪽 출신이야? 그럼 그냥 죽이는 게 더 빠르려나?”
무시무시한 사회적 폭력·갑질을 암시하는 아가씨, 거 말만 들으면 무섭긴 하구만. 물론, 진짜 그러진 않을 거다. 근 1년 동안 착 달라붙어 지내본 결과, 우리 아가씨는 ‘사람을 담그는 거’에 좀 거부감이 크시거든. 하지만, 그걸 모르는 저놈에겐 흉악한 협박이겠지.
“그러니 눈 깔아.”
그 살벌한 사회적 위협에 반항적이던 놈이 마침내 꺾인 가운데…….
-선도부다!
복도 쪽에서 들려오는 외침, 문에 몰려있던 애들이 우수수 흩어지고 그 자리에 은빛 3단봉을 쥐고 있는 살벌한 남자애들이 나타난다. 선도부, 학칙 위반 사항이라고 판단되면 남녀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버리는 놈들.
혹시 모르기에 가방 안에 손을 뻗어 사슬 형태로 넣어둔 ‘창’을 붙잡았다.
겨울방학 때 호되게 당한 이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기본적인 장비는 들고 다녔다. 너무 위화감이 드는 투구·장갑·로브는 쓸 수 없지만 반지나 창은 가능하지. 박살 나 쓰러진 동료를 보곤 선도부 녀석들은 흠칫하더니 곧 분노하는 얼굴로 달려들려 했지만-.
“그만!”
복도 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제지한다.
선도부 담당 선생, 그에 선도부원들이 멈칫하는 가운데 그는 천천히 교실 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살핀다. 동시에…… 내 눈치도 슬쩍 본다? 아, 그러고 보니 미르 선도부에 대해 검색했을 때 봤던 게 생각난다. 선도부 선생은 ‘경찰청에서 파견된 공무원’이라 했지?
그럼, 당연히 내 정체도 알겠네.
평양에서 벌인 일이 있는데 안 알려주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위험분자인 만큼 정보를 받았겠지. 눈치를 보는 듯한 선생을 향해 보란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가운데, 아가씨는 한숨을 내쉬며 다리가 부러져서 쓰려져 있는 부원을 턱짓했다.
“이쪽 선도부원이 먼저 시비 걸었어요. 제 발치에 침을 뱉고 욕했죠. 말싸움하다가 놈이 먼저 주먹도 내뻗었고요. 전, 정당방위를 한 것뿐이에요.”
“……그래도 마법을 사용하여 상해를 입히는 건 명백한 ‘과잉대응’이다.”
애들의 시선이 아가씨와 선생에게 쏠린 가운데, 난 선생에게 보란 듯이 가방에서 꺼낸 사슬 끄트머리를 <연금술> 창 형태로 변환시켰다. 국정원에 한 번 무방비로 끌려가서 화끈하게 고문당해보니 도저히 아가씨가 끌려가는 꼴을 못 보겠다. 진짜 일 터지면 한번 싸워줘야지.
다행히, 내가 보낸 ‘처신 잘하라고?’ 하는 신호를 선생은 잘 알아먹었다.
“선도부가 먼저 공격했다고 하니 수갑을 채우거나 하진 않겠다. 하지만, 최소한 가서 조사는 받아야 해.”
“……좋아요. 받도록 하죠.”
한숨을 내쉬며 고갤 끄덕이는 아가씨, 그 온건한 처분에 애들 사이에서 살짝 놀라워하는 기색이 번진다. 선도부가 괜히 생도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게 아니다. 진짜, 사건 터지면 일단 무조건 두들겨 패는 놈들이니까. 한 번씩 보게 되고.
“따라와라.”
선도부원들을 향해 쓰러진 애를 데려가라는 듯이 턱짓한 후, 몸을 돌려 천천히 교실 밖으로 나가는 선생. 아가씨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르는 가운데, 나도 잽싸게 아가씨의 책가방을 챙기고 거릴 둔 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