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29화 (329/350)

제329화

4.

내 예상대로 서예린은 아이스크림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다.

홀린 것처럼 한입 떠서 먹더니, 이어서 걸신들린 것처럼 정신없이 퍼먹기 시작했다. 열흘간 밥도 안 먹었다니까 많이 배고팠겠지. 그렇게 10L짜리 벌크를 2/3 정도 비우고 서서히 그 수저가 느려지기 시작했을 때, 난 입을 열었다.

“좀 정신이 들어요?”

“……크흥, 응.”

내 말에 코를 훌쩍이며 고갤 끄덕이는 서예린. 그렇게 대화를 나눌 정도로 진정한 걸 확인한 후 쓰게 웃었다.

“도대체 얼마나 꼬라박았길래 그렇게 멘탈이 터진 거예요?”

“220억…….”

“허미.”

그 액수를 들으니 입이 절로 벌어진다.

가지고 있던 장비를 담보로 100억을 빌렸던 것은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 또 120억이 추가됐구만……. 하긴, 1차 대폭락 이후에 ‘저점이니 코인을 추매한다!’면서 움직였었지.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에 살짝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난 부드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 어디서 120억을 빌렸어요? 뭘 담보로 잡고요!?”

“골디안 대출…….”

“골디안 대출!? 예린 씨, 골디안 신도였어요?”

미궁의 신 중 하나인 ‘골디안’, ‘골디안 코인’으로 유명한 배금(拜金)의 신. 어떤 대출인지 몰라도 그 이름이 들어간 것부터 심상찮았다. 그런 내 반응에 서예린의 충혈된 두 눈에 맺힌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그렁그렁해진다.

“훌쩍, 그 이름 걸고 하는 곳 있음. 빌린 액수는 100억인데, ‘골디안 계약서’를 사야 해서 추가로 20억 더 빌려서 120억이 됨.”

“허어…….”

“연 이자만 15.9%, 흐흑, 흐으으으윽.”

서예린의 눈과 코에서 나온 물방울이 얼굴선을 타고, 껴안고 있는 아이스크림 벌크 통에 떨어진다. 그렇게 눈물·콧물 섞인 아이스크림을 목에 쑤셔 넣으며 서예린은 흐느꼈다.

“나, 인생 망함……. 돈 갚을 수 없으면 미궁으로 가야 댐……. 난 쓰레기임. 쓰레기……. 흐흑, 흐끄으윽…….”

“눈물 뚝! 왜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해요! 예린 씨 인생 안 망했어요! 그리고 쓰레기도 아니에요!”

“나, 나 찾아온 진아에게 욕하고 싸웠음. 돈 벌어서 좋냐고. 흐흑……. 흐아아아앙!”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위로해줘야 하는데, 뭐라 말하지 못하겠어. 그렇게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서예린은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것도 멈추고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그, 나, 나도 이럴 생각 없었음. 진아가 잘못한 거 없단 거 암. 흐흑, 얼굴 보니 반가웠음. 근데, 근데……! 코인이라는 저주받은 걸 창조한 귀쟁이가 원망스럽고……. 돈을 번 사람들이 밉고……. 그냥 다 싫었음……. 나도 모르게 심한 말이 나왔음.”

“…….”

“흐흑, 흐으으윽……. 미안함, 진아야, 미안해에…….”

“이해해요. 이해해. 나도 그랬어요.”

등을 토닥여주자 흐느끼면서 다시 아이스크림을 와구와구 입에 쑤셔 넣는 서예린,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난 전 재산을 꼬라박았는데, 반대로 크게 성공한 친구가 방문해서 위로해주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배알이 꼴릴 거야. 어쩌면 꼭 자신을 조롱하러 온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고. 서예린처럼 멘탈이 터진 상태였다면 더더욱 그렇게 느꼈겠지.

아니, 그래도 서예린 정도면 양반이네.

친구에게 돈 갚아달라고 하지 않은 시점에서 상위 1% 아니냐? 만약, 내가 서예린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욕하는 대신에 아가씨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구걸했을걸? 어쨌든 서예린의 상황을 다 듣고 난 뒤, 작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좀 골치 아프긴 하다만……. 그래도 아예 대처 못 할 정도는 아니네.

“예린 씨, 제가 훨씬 ‘싼 이자’로 돈을 빌릴 만한 곳을 알아요.”

“…….”

“그러니 그 골디안 대출이란 곳에서 갈아타죠.”

난 이미 ‘엄청난 부자’다.

뉴 송파구의 오크 전쟁 군주들이나 우리 싸장님에게 내가 가진 ‘소프 주식’ 혹은 ‘마력 각성제’를 팔거나 담보로 잡으면 당장이라도 서예린의 빚은 갚아줄 수 있어.

……하지만, 공짜로 갚아줄 생각은 없다.

서예린도 좀 고생하면서 돈 무서운 줄 경험해봐야 한다. 물론, ‘감당할 수 있는 고생’ 정도로 그 크기를 줄여야겠지만.

‘훌쩍!’거리며 날 바라보는 서예린을 향해 빙긋 웃었다.

“솔직히, 예린 씨 220억 정도 돈 갚는 거 쉽잖아요?! 광고 한 번에 500만 달러 받는 사람인데! 그런 광고 4번만 더 찍으면 빚은 싹 다 갚죠!”

“흐흑, 가능함? 나, 그렇게 돈 많이 받은 거 처음이었음…….”

자존감이 떨어진 듯,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며 말하는 서예린.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자신감 없는 모습에 난 살짝 과장되게 웃었다.

“그럼요! 앞으로 더 많아질 거예요! 제가 보장할게요! 스스로를 못 믿겠으면 예린 씨를 믿는 절 믿으세요! 그러니까 눈물 뚝!”

“흐윽, 뚜욱…….”

“더 이상 처박혀 있지 말고 움직이자고요! 몸도 씻고……. 나중에 아가씨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러 가고요.”

아가씨를 언급하자 서예린은 침울한 얼굴로 고갤 떨궜지만-.

“응.”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5.

정신을 차린 걸 확인한 후, 난 곧바로 서예린의 손을 잡아서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열흘 동안 구석에 처박혀서 펑펑 울기만 해서 그런지……. 아주 꼬질꼬질했거든. 꼬랑내도 피어오르고. 다행히, 씻으라는 내 말에 서예린은 순순히 따랐다. 그렇게 서예린이 샤워를 할 동안, 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강 아저씨에게 새 침구를 받아서 박살 난 잠자리를 손본 후-.

샤워를 끝마치고 나온 서예린을 곧바로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줬다.

서예린이 퍼먹은 아이스크림엔 싸장님이 직접 <연금술> 가공해서 쓴맛을 없앤 ‘수면제+진정제’가 대량으로 섞여 있었다. 그 덕분인지 화장실에서 나올 때부터 꾸벅꾸벅거리던 서예린은 침대에 눕자마자 ‘도로롱~’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그 후, 난 방에서 나와 서강 아저씨에게 예린이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서강 아저씨는 ‘딸내미가 코인을 하다가 손해를 봤다.’는 것 정도로 알 뿐, 정확한 상태를 모르고 있었다. 장비 담보로 거액을 빌렸다는 내 말에 이마를 짚었고, 추가로 골디안 대출이란 말엔 땅이 꺼질 것처럼 한숨을 내뱉었다. 그 총액수를 듣자마자 얼굴이 살짝 창백해지시기에 ‘예린이가 빚을 갚을 수 있게 제가 책임지고 도와주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지.

어쨌든 그렇게 서예린 쪽을 케어한 후, 아가씨 쪽을 케어해보려 했는데…….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하아.”

이번엔 우리 아가씨가 말썽이다.

전화가 꺼져있다는 메시지만 나오는 휴대전화, 카톡도 여러 번 보냈지만 읽음 표시도 뜨지 않는다. 아가씨가 있을 만한 곳-‘비트 넥스’와 ‘아가씨네 집’에도 가봤지만 없어. 한마디로 행방불명, 그에 난 내가 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차장님, 부탁드립니다…….”

-X발.

우리 아가씨를 찾아 달라고 부탁드리자 시원하게 쌍욕부터 내뱉으시는 차장님, 높으신 분에게 이런 사적이고 사소한 부탁을 해서 송구하지만……. 그래도 내겐 엄청 중요한걸?

-얌마, 국정원이 무슨 니 전용 흥신소인 줄 아냐?!

“하지만, 차장님은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평소에도 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있단 거 대놓고 티 내셨으면서……. 대신에 나중에 차장님이 해달라는 거 들어드릴게요! 무리가 안 되는 선에서.”

그런 내 대꾸에 스마트폰에선 한숨 소리가 나왔지만, 이내 차장님은 순순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니 여친이 ‘2급 마법사’라서 어떻게 핑계 대면 가능하겠다. 대신에 너 약속했다? 내가 하란 대로 일하기?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라?

“넵넵.”

-기다려 봐.

수화기 너머에서 ‘찬휘야, 그 흰둥이 여친 행적 요청 넣어 봐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장님의 대답이 들려왔다.

-통신 기록 자료 보니까, 누군가 인터넷에 니 여친 스마트폰 번호를 뿌린 것 같다. 문자하고 통화가 수천 통이 쏟아졌네. 문자 내용은……. 그냥 욕설투성이고. 그래서 전화를 꺼둔 것 같구만.

“……혹시 누가 인터넷에 번호 흩뿌렸는지 알 수 있나요!?”

이 개 같은 새끼들. 아무리 아가씨가 돈을 벌어서 배알 꼴리고 밉다고 해도 그렇게 무작정 전화해서 욕설을 갈겨야 했냐!? 살짝 이를 갈며 말하자 수화기 너머의 차장님은 이죽거리신다.

-얌마, 너 내가 알려주면 그놈 찾아갈 거지?

“…….”

-사람을 죽……. 아니, 죽이지 말란 말은 안 하마. 최소한 남쪽에선 죽이지 마라! 진짜 저번 주 토·일요일에 니가 잠 안 자고 여친을 비방한 사람들 찾아 돌아다닐 때, 5분 대기조 애들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아냐? 빡치는 건 이해하는데, 사회에선 제발 ‘사회의 룰’을 따라라. 응?

“아니, 차장님. 그 정돈 저도 알아요! 사람 찢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복’하려고 물어본 거였어요.”

-…….

“괜찮잖아요?? 상대방이 먼저 위법적으로 선빵 쳤는데 비슷하게 엿 먹여줄 수 있죠.”

그런 내 답변에 한숨과 함께 ‘그래도 알려주는 건 안 된다.’라고 대꾸한 차장님은 곧바로 아가씨의 행적에 대해 말해주셨다.

-신호가 잡히는 곳은 강남 쪽에 있는 DK그룹 소유의 회원제 프라이빗 짐(Private gym)이야.

“프라이빗 짐? 그러니까 헬스장이요?”

-그래, 검색해보니까 ‘마력 각성자를 위한 초고중량 헬스 장비’가 있는 곳이라고 하네. 스마트폰 위치 기록을 보니 오늘 새벽 5시부터 계속 있었는데…….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다. 너하고 니 여친의 스마트폰은 위치 추적은 돼도 도청·카메라 촬영이 모두 막혀있어서. 아무튼, 전화 끝나고 곧바로 위치 정보 쏴주마.

“네, 알겠어요. 바로…….”

-근데, 흰둥아. 너 지금 여친 찾아가려고 하는 거냐?

“당연히 찾아가야죠. 그러려고 차장님에게 물어봤는데.”

당연한 걸 묻고 계시네. 어쨌든 바로 감사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차장님의 말이 이어졌다.

-남의 연애 사업에 참견하는 것 같아서 그렇긴 한데……. 그냥 안 찾아가는 게 나을걸?

“뭔 소리예요?! 아가씨에겐 지금 제가 필요해요! 우리 아가씨, 겉으로 티는 안 냈어도 쏟아지는 비방에 이미 많이 멘탈이 나갔다고요! 게다가 하루 전엔 서예린과도 싸웠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거란다.

살짝 발끈해서 언성을 좀 높이자 차장님은 한숨을 내쉬곤 타이르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을 해봐. 쏟아지는 비방에 멘탈이 터져서 잠적했어. 심지어 네게도 알리지 않은 걸 보면 그 누구도 만나기 싫다는 거야. 근데, 그렇게 끝까지 잠적한 위치까지 알아내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그걸, 과연 좋아할까?

“……!?”

-나 같으면 스토커 같아서 좀 소름 끼칠 것 같은데? 어차피 도심 속에 있잖아? 그리 위험한 상황도 아닐 텐데 굳이 찾아가 봐야겠어?

반박할 수 없었다.

아가씨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진짜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굳이 찾아서 만나 봤자 딱히 아가씨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없고……. 하지만, 너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에 속입술을 질겅이며 고민하다가 난 힘겹게 결단을 내렸다.

“잘 있나 몰래 보기만 하고 돌아올게요. 그래도 좀 걱정돼서.”

-그래, 나도 응원한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그 당부를 끝으로 차장님의 전화가 끊어지고 난 잠시 서서 심호흡했다.

심신이 지친 아가씨를 위로를 해주겠다고 찾아가려 했지만……. ‘위로해주는 것’만으로는 이 상황을 개선시키진 못한다. 그래, 아가씨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지! 내가 지금 아가씨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서예린과의 관계 회복’하고 ‘DK그룹 내 경쟁자들에게 보복’밖에 없네.

“……얼굴만 보고 열심히 해야지.”

고갤 끄덕이며 굳게 다짐한 후, 난 차장님에게 온 위치 정보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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