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막간. 코인 사태에 대한 장붕이의 최종 해결책
1.
서예린을 픽업하는 게 어그러진 후, 난 계획을 수정해 아가씨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뉴 송파구에서 나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최대한 빨리 아가씨네 집에 가서 아가씨가 퇴근하기 전까지 서예린과 함께 ‘깜짝 화해 파티’를 준비했겠지만……. 서예린이 탈주한 이상 파티는 물 건너갔어. 그냥 소박하게 집밥이나 준비했다. 쌀을 씻어서 밥솥에 올리고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제육을 볶았지.
“휘유. 역시, 우리 남친. 제육 하나는 엄청 잘 볶아. 불맛이 살아있어.”
“헤헤, 뭘요.”
다행히, 아가씨는 아주 잘 드셨다.
밥 2공기에 제육볶음과 계란찜까지 몽땅 해치운 뒤에 배를 두드리며 따봉을 날리시는 아가씨, 그 칭찬에 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냥 인터넷 레시피대로 따라 하는 평범한 것들인데 항상 저렇게 극찬해주시니 부끄럽구만.
함께 식사 뒷정리까지 한 뒤, 난 아가씨가 드러누운 소파 옆에 앉으면서 조심스레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아가씨, 이거 제 선물이에요.”
“음? 선물?”
“넵, 이거 만드느라고 좀 고생했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노트를 받아 드는 아가씨, 하지만 이내 그 내용을 보곤 표정이 묘해진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비트 넥스를 공격했던 놈들의 뒷조사를 했어요. 아가씨를 공격했던 언론 기자와 방송국 PD, 인력회사의 비리도 함께 조사했죠! 특히, 기자와 PD는 이번 일의 대가로 현찰 뭉치를 받았더라고요? 이거 제대로 찌르기만 하면 놈들을 작살낼 수 있을 거예요.”
“…….”
“그리고, 일을 사주한 배후는 정확히 누구인지 파악 못 했지만……. ‘DK 금속’ 소속의 직원이라는 것은 확인했어요. 제가 직접 보복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가씨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가져왔죠. 마음에 드시나요?”
“후후, 엄청 마음에 들어.”
마빡에 핏줄 하나를 세운 채로 입꼬리를 올리는 아가씨, 다행히 지난 며칠간의 노가다는 헛된 게 아닌 듯하다. 그렇게 아가씨가 노트를 꼼꼼히 한 번 다 훑고 내려놓는 타이밍에 맞춰서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아가씨?”
“응? 왜?”
“제가 사실, 엊그저께 서강 교수님이 예린 씨 좀 진정시켜 달라고 해서 만났거든요? 그리고, 아가씨와 예린이가 싸웠다고 이야기도 들었고요.”
서예린의 이야기를 나온 순간, 굳어지는 아가씨의 표정. 하지만,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예린이가 멘탈이 엄청 깨졌더라고요. 절 보곤 ‘너 때문에 엘븐 코인 팔아치웠다!’면서 칼을 휘두르더라니까요?”
“…….”
“하지만, 나중엔 제정신을 차렸어요. 아가씨에게 미안하다고 펑펑 울고요.”
“하아.”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는 아가씨, 그에 맞춰서 난 가져온 편지를 꺼냈다.
“원래는 오늘 예린이도 함께 데려오려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엘 마르를 죽이겠다면서 가출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하고 아가씨에겐 편지를 남기고요.”
“……그게 그거야?”
“네, 아가씨에게 남긴 편지에요.”
고갤 끄덕이며 밀봉된 편지를 건넸다. 봉투를 뜯고 서예린의 편지를 꺼내 읽는 아가씨, 입을 꾹 다문 채로 편지를 다 읽어 내린 아가씨는 결국 또다시 한숨을 내뱉으셨다.
“걔, 불러올 수 없는 거야? 폰 안 받아?”
“없어요. 가지고 있던 폰은 코인 차트 보다가 서강 교수님이 부숴버렸고, 새 폰은 개통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제기랄.”
내 대답에 작게 욕설을 내뱉은 후, 아가씨는 소파에 등을 젖힌 채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말을 잘못했어.”
“……네?”
“예린이한테 찾아갔을 때,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했거든.”
씁쓸하게 말하는 아가씨, 서예린의 편지지를 곱게 접어서 탁자에 내려놓은 뒤에 아가씨는 신경질적으로 머릴 긁적였다.
“나, 돈 많이 벌었다고. 그러니까 상심하지 말고 제발 좀 나오라고. 너무 폐인 꼴이라고.”
“…….”
“그게 예린이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단 걸 간과했어. 내가 너무 무심했지.”
아가씨의 말에 쓰게 웃었다. 참, 자존심이란 게 뭔지……. 하지만, 아가씨의 입장도 이해된다. 친구가 너무 폐인 꼴이었으니까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겠지. 다만, 그 방법이 좀 거칠었고. 솔직히, 담보 없이 수백억을 빌려줄 정도라면 진짜 대단한 거 아닌가?
살짝 어깨가 내려간 아가씨의 등을 토닥이며 난 고갤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나중에 돌아오면 대출 갈아타게 할 거니까. 연 2%로 돈을 빌려준다는 곳이 있거든요. 원래, 오늘 가서 대출 갈아타려 했는데 서예린이 탈주한 덕분에 못 했죠.”
“……그래, 그냥 몸 성히 돌아왔으면 좋겠어.”
“당연히, 몸 성히 돌아오겠죠. 걔가 얼마나 몸이 튼튼한데요. 그럼…….”
소파에서 일어난 후, 난 곧바로 살짝 침울해진 아가씨에게 손을 뻗어 재빨리 보쌈하듯 들어 올렸다.
“그럼 밥도 먹었으니 운동하러 가죠!”
2.
살짝 우울해진 아가씨를 난 밤새도록 있는 힘껏 달래드렸다.
서서히 아침햇살이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난 전자 담배를 뻐금거리며 서예린에 대해 생각했다. 준비한 ‘선물’도 만족스러워하시는 게 잘 끝나긴 했다만……. 원래대로라면 서예린과의 화해로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했는데 말이지. 아쉬워.
그나저나, 그 빡대가리 년이 도대체 뭔 생각인지 모르겠다.
잠적한 엘 마르를 잡아 족치겠다고? 솔직히, 그게 말이 되나? 지금 전 미국, 전 세계가 가장 절실하게 찾으려고 해도 행적도 파악 못 하고 있는 사기꾼인데? CIA나 인터폴 같은 단체가 찾아내겠지 개인이 나선…….
“……어?”
생각해보니 나도 놈을 추적할 수 있네?
아무리 행적을 숨겼어도 <과거시>로 본다면 다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놈을 잡아서 족칠 수 있을 만한 실력도 있다. 저번에 북쪽에서 죽였던 말총머리 녀석의 <과거>를 훑어본바, 내 실력은 이제 세계에서도 먹힐 수준이니까.
놈이 ‘골디안의 신도’고 또 대량의 ‘골디안 코인’을 가졌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만만찮겠지만……. 서예린과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것 같다??
이거, 생각해 볼수록 괜찮다. 뭣하면 놈이 어디에 있다고 제보만 해도 돼! 그럼 놈에게 이를 박박 갈고 있는 ‘실력자들’이 알아서 놈을 조지기 위해 몰려들 테니까! 그렇게 엘 마르를 찾아서 족친다면……. 한발 더 나아가 ‘우리 아가씨’가 놈의 추적을 도왔다고 홍보까지 한다면…….
“그래……!”
나도 모르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가씨는 평판을 회복할 테고, 서예린은 놈에게 걸린 현상금으로 빚을 갚을 거다! 그 과정에서 아가씨와 서예린의 관계도 회복될 것이고! 놀랍게도 엘 마르를 찾아내는 게 ‘모든 것의 해답’이었다!
그리고 난, 놈을 찾아낼 방법이 있고!
지금까지 너무 소시민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사기를 친 인간을 내가 어떻게 잡아?’ 하는 상식에 얽매여 있었어! 이젠 나도 상식 밖의 초인인데 말이지! 그래, 내 손으로 그 새끼를 잡아넣고……. 그 전리품을 노려 볼 만하다!
“좋아!”
피우고 있던 전자 담배를 끈 후, 난 잠든 아가씨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한 뒤에 곧바로 방 밖을 나섰다.
3.
‘미국으로 가서 엘 마르 찾아 족치기.’가 의외로 할 만하다는 결론을 내린 후, 난 곧바로 미국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 여권은 이미 있었다. 북쪽을 오고 가는 데 여권이 필요해서 만들어놨거든. 인터넷으로 미국 비자를 신청한 뒤, 우그 타람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준비물을 주섬주섬 챙기면서 미국으로 잠시 출장 갈 것 같다고 싸장님에게 털어놨는데…….
“너, 못 갈걸?”
“네?”
“미국이 개나 소나 다 받는 줄 아냐? 한때, 세계 최강대국. 그리고 지금도 준패권 국가다. 사람 깐깐하게 받아. 아마, 입국 허가 뜬다고 해도 몇 개월은 걸릴 거야.”
전자 담배 연무를 내뱉으며 어깰 으쓱이시는 싸장님, 생각지도 못한 그 대답에 잠시 굳었다가 서예린을 떠올렸다.
“아니, 서예린은 금방 비자가 떴는데요?”
여름 방학 때, 미국으로 가서 광고를 찍은 서예린. 그때, 비자가 금방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내 말에 싸장님은 피식 웃으신다.
“평양에서의 일이 터진 뒤에 세영 언니가 말했잖아, 묻어두긴 하겠지만 네 ‘위험 등급’을 정식으로 올리겠다고.”
“그랬……었죠?”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생화학 무기를 가진 인간이 입국하려고 해. 공격성-오렌지로 수틀리면 그 무기를 터트릴 수 있는 놈이고. 과연, 평범한 마력 각성자와 똑같이 취급해줄까?”
싸장님의 비유에 입을 닫았다. 확실히……. 국가 입장에선 깐깐하게 관리할 만하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내가 멈칫한 가운데, 싸장님은 전자 담배를 빨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갑자기 미국은 왜 가려고?”
“그, 어제 가출한 애 잡아 오려고요. 덤으로 엘 마르, 그 새끼도 찾아서 조지려고요.”
내 대답에 전자 담배를 빨다가 멈칫하는 싸장님, 그러곤 얼굴을 찡그리신다.
“인터폴하고 CIA, FBI가 작정하고 찾고 있는데도 못 잡고 있는 사기꾼을 네가 조지겠다고?”
“그 녀석이 사라진 현장을 보면 분명 흔적이 있을 테니 추적할 수 있겠죠.”
“그게 가능하냐?”
“네, 가능할 것 같아요.”
그나저나 어떻게 미국으로 갈까? 그냥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아니, 서강 아저씨에게 한번 물어보면 답을 알지도? 그렇게 속입술을 질겅이고 있는데, 내 대답에 헛웃음을 흘리던 싸장님이 입을 열었다.
“미국으로 향하는 밀수 루트 하나 가르쳐주랴?”
“네?”
“밀수 루트가 있단다. 1~2달 정도 걸리겠지만 미국엔 도착할 듯?”
생각지도 못한 싸장님의 제안에 잠시 눈을 깜빡였다. 밀수 루트?
“아니, 싸장님도 밀수 같은 거 해요?”
우리 싸장님이 밀수를 할 줄이야. 그 말에 싸장님의 얼굴이 구겨진다.
“야, 너에게 선물 온 그 ‘궤짝’. 정부에서 순순히 우리에게 넘겨줬을 것 같냐?”
“……솔직히, 좀 그렇죠?”
멜드라쉬가 보낸 ‘영혼 결속의 골궤’, 연구용으로 줬다지만……. 따지고 보면 극악한 ‘고문 기구’다. 그것도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붙잡아서 괴롭히는 고문 기구, 인권과 관리 감독 같은 게 필요하겠지. 내 대답에 싸장님도 고갤 끄덕인다.
“저런 거 들여오면 자기네들이 위험하다고+검사해 보겠다고 빼앗아 가요. 심지어 몇 개는 은근슬쩍 자기네들 소유로 돌리기까지 하고. 당연히, 저것도 밀수 루트로 들여온 거란다.”
“……그래도 싸장님이 밀수 같은 거에 관여하실 줄은 몰랐네요.”
“진정한 연구자는 하나같이 불법에 걸쳐 있을 수밖에 없어요. 다들 알면서 쉬쉬하지.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그래. 원래부터 그랬지만 미궁이 부상한 뒤엔 더더욱 그렇지.”
싸장님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어쨌든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고민하고 있는데,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싸장님이 입을 열었다.
“야, 너 기척 죽일 줄 알지?”
“어느 정도는요?”
기척을 숨기는 테크닉은 뉴 송파구 잠입하면서 많이 연습했다. 기척을 숨긴 채로 빠르게 움직이진 못하지만, 천천히 웬만한 이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일 순 있지. 내 대답에 싸장님은 뭘 고민하냐는 듯한 얼굴로 전자 담배 연무를 훅 뱉는다.
“야, 생각해 보니 쉬울 것 같은데? 그, 신기한 로브가 있으니 몸만 숨기면 되잖아?”
“그렇긴 하죠……?”
“<투명화> 같은 걸로 몸을 숨기고 몰래 비행기 바퀴에 붙는 거야. 화물칸에 잠입하는 것도 괜찮겠고. 영하 50도, 매우 낮은 기압에서 16시간 동안 버티는 게 좀 괴롭긴 할 텐데 못 버틸 정도는 아니지. 마력 각성자인데.”
싸장님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졌다. <투명화>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듯한데? 근데, <투명화> 능력이 없는 게 문제구만. 서예린이 가진 반지는 담보로 잡혔을 테고…….
“싸장님, <투명화> 가능한 물품 있어요?”
“난 없다. 그 비스무리한 효과를 내는 약물이 있다고 하긴 하는데……. 내 전공은 아니라서 만드는 법은 모르겠구만. 신기하단 말이지. 몸은 물론이고 장비까지 투명하게 해주다니.”
어깰 으쓱이는 싸장님. 확실히, 우리 싸장님의 <연금술> 분야와는 다른 분야지. 하지만…….
“오크들은 있겠죠? 물약이건, 장비건.”
“……설마, 빌리려고?”
“네, 정 뭣하면 마력 각성제 하나 더 주겠다고 하면 되겠죠.”
뉴 송파구라는 거대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자들, ‘오크 전쟁 군주들’은 있을 확률이 높다. 그들에게 장비를 빌려달라고 하면……. 가능성 있어!
“헤, 헤헤. 싸장님, 제롬 시장님께 연락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각성제 여유분 몇 개 더 만들어 놓고 가라.”
내 요청에 시크하게 대답하며 싸장님은 품 안에서 스마트 폰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