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32화 (332/350)

제332화

71화. 범죄자 신분으로 시작하는 미국 생활

1.

대충 1년 전, 선도부에 반강제로 끌려가 두들겨 맞았을 당시에 싸장님은 일을 수습해주면서 ‘인맥과 돈’의 중요함을 내게 강조했다.

그 힘을 절실히 느꼈던 때가 북쪽에서 저지른 일을 수습했을 때였다. 싸장님과 국정원 차장님이라는 강력한 ‘인맥’, 그리고 마력 각성제라는 보물-일종의 ‘돈’. 이 2개의 힘으로 북쪽에서 저지른 대형 사고를 덮고 남쪽에서 계속 생활할 수 있게 됐지.

이번에도 돈과 인맥의 힘은 통했다.

싸장님을 통해 교섭한 결과, 제롬 시장님께서는 내가 요구하는 모든 물품들을 자기네들이 준비해주겠다고 하셨다. 대신, 우린 마력 각성제를 하나 드리기로 했고. 덕분에 혼자서 준비했다면 X 빠지게 힘들고 오래 걸릴 일을 간단하게 맡기고 다른 준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잡다한 일을 포함한 준비를 끝마친 후, 우그 타람에 돌아와 수면제를 퍼먹고 잠들었고-.

-삐이이이이이!

“흐으읍!”

알람에 맞춰서 상쾌하게 일어났다.

튀어 오르듯이 침대에서 일어난 후, 가볍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 뒤에 스마트 폰을 확인했다. 화요일 오전 11시 30분, 잠든 시간을 생각하면 평소보다 좀 적게 잤지만 그래도 컨디션은 좋다. 곧바로 샤워를 마친 후, 난 내 방의 금고를 열었다.

“~♬”

그동안 하나씩 모아놨던 내 소중한 장비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나씩 착용했다. 얼굴 가죽 로브를 걸친 뒤, 반지와 목걸이를 착용하고 그다음에 장갑을 꼈다. 해골 모양 투구는 너무 눈에 띄니까 <아가리 주머니>에 넣고 나중에 써야지.

마지막으로 검붉은 가죽 부츠를 꺼냈다.

+1 피바람 (Blood wind)

사악한 비술로 만들어진 마법 장비, 검붉은색의 부츠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새카만 먹구름과 짓이겨진 악마의 살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착용 시, 착용자의 영체와 동화되어 그 살점이 맥동하기 시작하며 마력의 실이 뻗어 나와 주위의 공기를 잠식해 착용자의 통제하에 둔다.

신발에서 뻗어 나온 마력의 실에 잠식된 공기는 ‘피비린내’를 연상케 하는 비릿한 내음을 띠게 되어 착용자의 은밀도를 약간 해친다.

신발, 사악한 장비

기본 AC 1, 방해 수치 0

·신속, 은신-

·<대기 마법>을 신발로 뿜어낼 수 있음.

북쪽에서 죽였던 ‘말총머리’가 신었던 구두를 내 발에 맞게 고친 장비다.

이것 말고 놈의 다른 전리품도 꽤 되는데, 내가 사용할 만한 장비는 이거랑 ‘민첩 +4’를 해주는 반지밖에 없더라. 폭발에 많이 손상되어 있었지만, <눈>으로 그 제작 방법을 보고 뉴 송파구의 이종족 ‘마법 무구 제작자’들에게 수리 의뢰를 넣어서 지금의 부츠 형태로 만들었지.

“흐으음~”

발을 집어넣자 신발 안쪽에서 실뿌리 같은 것이 뻗어 나와 발을 감싸고, 내 생명력을 빨아들여 ‘쿵! 쿵!’ 맥동하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심장을 밟고 있는 듯한 감각, 솔직히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팡! 팡! 팡!

그것과는 별개로 성능은 뛰어나다.

트램펄린 위를 방방 뛰는 것 같은 느낌, 덕분에 달리는 속도도 더 빨라진다. 과격하게 움직일수록 피비린내가 좀 풍기는데, 솔직히 그리 심하진 않다. 어쨌든 내가 구할 수 있었던 최고의 신발…….

은 아니네? 여의도역 지하도에 박혀있는 방치된 마법 장비들이 있으니까.

그것도 언젠가 회수해야 하는데, 몰래 가져갈 방법이 애매하단 말이지? 지하도에서 봤었던 장비들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신 뒤, 난 밖으로 나와 <눈>으로 한번 쭉 훑고 싸장님이 계신 식당으로 향했다.

“싸장님~! 저 왔어요~”

안으로 들어가면서 손을 흔들자 볶음밥을 퍼먹고 있던 싸장님이 고갤 돌려 이쪽을 바라보신다. 배식대에서 초콜릿 셰이크를 받고 다가가 맞은편 좌석에 앉자, 싸장님은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운 안에서 갈색 종이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신다.

“옛다. 받아라.”

“엥? 이건 뭔가요?”

안에 든 건……. 스마트 폰과 지도? 내 질문에 싸장님은 어깰 으쓱였다.

“미국 가서 쓸 스마트 폰, 그리고 인천 공항에 주위에 있는 군 진지·병력 배치도.”

“와, 제롬 시장님이 이런 것까지 준비해주셨어요?”

“내가 했지. 미국 가서 스마트 폰은 그거 써라. 지도는 외운 뒤에 없애고. 보니까 지뢰가 깔린 지역이 있어서 좀 주의해야 하더라. LA 공항은 어떤지 모르겠다. 내 영향력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서 구할 수 없더라고. 괜히 더 시도했다가 들킬 것 같아서 포기했고.”

“어휴, 이 정도면 충분해요.”

반색하면서 봉투를 받자 싸장님은 볶음밥을 입에 퍼먹으며 말을 이어 나가신다.

“그리고, <투명화> 물품이 있으니 혼자 빠져나갈 수 있지?”

“그것도 못 빠져나가면 미국행 포기해야죠. 이종족 지구 쪽의 톨게이트를 경유해서 가면 쉬워요.”

미궁의 존재가 몰래 지상으로 나가는 걸 막기 위해 뉴 송파구의 톨게이트는 철저하게 검사한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검문·검색이 이뤄지는지는 <눈>으로 파악이 끝났지. 충분히 몰래 통과할 만해. 그런 내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싸장님은 고갤 주억인다.

“그래, 7번 창고 쪽에 네가 요청했던 물품들이 전부 들어왔으니 확인해서 챙기고……. 그나저나 너 미국 가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그냥 무작정 몇 날 며칠 엘 마르를 추적할 거야?”

“음, 아뇨.”

“그럼?”

“일단, 예린이부터 찾으려고요. 그리고, 미국에 그리 오래 있진 않을 거예요. 길어 봤자 한 달? 대충 2주 이내로 돌아올 거에요. 정 뭣하면 예린이만 끌고 복귀할 거고.”

물품 준비를 오크들에게 맡긴 후, 난 서강 아저씨에게 내 미국행을 말하고 ‘밀수 루트’를 비롯한 여러 정보들을 얻었다. 추가로 서예린의 방에서 <과거시>를 사용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확인했고. 다행히, 서예린의 행적을 유추할 만한 단서들을 얻을 수 있었지.

그런 내 대답에 싸장님은 날 향해 수저를 까닥였다.

“다 좋은데, 들키지 마라. 만약, 들키면 난 그냥 네가 다 했다고 불어버릴 거니까.”

“걱정 마세요. 전 프로니까.”

으름장 놓는 싸장님을 향해 난 초콜릿 셰이크를 쪼옥 빨면서 자신감 넘치게 웃었다.

2.

내 미국행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만만찮았다.

첫 번째로 ‘뉴 송파구 톨게이트’를 뚫어야 한다. 미궁에서 올라온 위협을 지상에 풀어놓지 않기 위한 각종 전자 장비+마법적 탐지 장비에 걸리지 않고 몰래 밖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두 번째로 공항까지 가서 비행기에 숨어들어 가야 한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공항의 경계도 만만찮았다. 공항을 감싸듯이 외부엔 군병력이 포진해 있었고, 공항 안에는 마력 각성자 전투부대가 상주했다. 활주로 부지엔 곳곳에 CCTV가 있었고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지뢰까지 깔려 있더라.

하지만, 두 장애물 모두 날 가로막진 못했다.

어두운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행기 뜨는 시간에 맞춰서 모든 감시망을 뚫고 공항 활주로에 잠입, 성공적으로 LA행 비행기의 화물칸에 몰래 기어들어 갈 수 있었지. 그 뒤, 비행기 짐칸의 문이 닫히고 그 동체가 떠오른 가운데…….

“으, 으으으으…….”

난 화물칸 짐칸 한구석에 처박혀서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었다.

비행기 짐칸에 몰래 탄다는 건, 일반인에겐 자살행위에 가깝다. 1/10로 낮아진 기압에 저산소증이 오고, 영하 50의 극한의 추위는 생명체를 얼려버린다. 마력 각성자라고 해도 괴롭기 그지없는 극한 환경, 이런 곳에서 13~14시간을 버텨야 한다.

당연히, 준비는 했다.

<아가리 주머니>에서 가져온 전신 패딩을 꺼내 입고, 휴대용 산소통으로 계속 산소를 들이켰다. 가끔씩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화주(火酒) 포션도 들이켜고. 그럼에도 괴롭기 그지없어.

“서, 서예린……. 이, 씨, 씨씨…….”

정식으로 갔으면 편안하게 비행기 좌석을, 그것도 럭셔리하게 일등석을 타고 갔을 텐데 말이지. 진짜, 서예린 이 개 같은 년 때문에 별의별 고생을 다 겪는구만. 그렇게 짐칸에 처박혀 오들오들 떨면서 13시간을 보낸 끝에-.

“오, 오오오…….”

저 멀리 보이는 공항 활주로, 서서히 비행기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숨을 고르면서 패딩을 벗고 로브의 <아가리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에 다음 준비물을 꺼냈다.

투명화 기름 (Invisibility Oil)

‘유령 나방의 날개 가루’와 ‘오르녹을 섞은 마력 기름’, 그 외에 잡다한 마법적 재료들을 섞어서 만들어진 특수한 <연금술> 기름, 생명체의 마력에 반응해 굳어져서 코팅되며 외부로부터의 빛을 굴절시키는 효과가 있다.

<투명화>를 사용할 수 있는 특제 물품, 몸에 뿌리면 30분 정도 <투명화>가 유지된다. 코앞에서 봐도 모를 정도로 완벽한 수준은 아니고, 자세히 보면 약간 색이 번져 보이지만 그래도 몸을 숨기기엔 충분하지.

가볍게 숨을 고르며 어떻게 공항에서 빠져나갈지 생각하기 위해 <눈>의 필터를 조정하고 그 전경을 훑어보니…….

“뭐……. 뭐죠?”

곳곳에 흩뿌리진 ‘마력 각성자’의 기척이……. 천, 천 명은 넘어 보이는데?? 인천 공항에도 100명이 안 된 걸 생각하면 정신 나간 수준, 잠시 내가 저산소증으로 환각을 보는 건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인간이 아니라 전부 ‘이종족’들이다.

……적극적인 아인(亞人) 포용 정책을 가진 미국답다.

마력 각성자 인력을 저렇게 메꾸다니 신박하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내 은신술은 마력 각성자라고 해도 쉽게 파악하기 힘드니까! 가볍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굳었던 몸을 녹인 후,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에 맞춰서 ‘투명화 기름’을 사용했다.

좋아, 어떤 놈이 오든 간에 멋지게 뚫고 가주마!

……라고 LA 공항에 도착하고 오크 노동자들과 함께 다가오는 ‘생명체’를 보기 전까지 생각했다.

머리에 한 쌍의 길쭉한 뿔이 달린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요정, 엘프의 먼 친척으로 육신을 가진 존재라기보단 정령에 더 가깝다. 이들은 즐겁게 뛰노는 것, 장난기 가득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행히도 그들의 변덕과 장난은 좀 무례하지만 웃어넘길 만한 선에서 끝나는 편이다.

힘이 약하기에 스프리건들은 전사로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지만, 공격을 회피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놀라울 정도로 탁월하다. 그들은 남을 해하는 마법엔 적성이 부족하나 다른 모든 종류의 마법들을 곧잘 다루며,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솜씨가 탁월하다.

몸집이 아주 작은 탓에 이들은 매우 적은 양의 음식만을 필요로 하며 초식성이라서 고기를 먹지 못한다.

한 오크 노동자의 어깨 위에 올라탄 쪼끄만 형체.

아이 같은 3.5등신 체형에 잿빛의 피부, 초록색 머리칼과 눈동자, 이마엔 피부와 구분되지 않는 2개의 잿빛 뿔이 솟은 아인. <게임 시스템>이 보여주는 종족 이름은 스프리건인데……. 그 특성에 ‘SInv(투명 감지)’가 있었다. 쓰읍, 썩어도 준치라고 확실히 한국의 공항보다 훨씬 빡세네. 아무리 잘 숨는다고 해도 저 시야를 피하는 건 힘들다.

……하지만, 걱정 따윈 하지 않는다.

공간이동의 두루마리 (Scroll of teleportation)

<공간이동> 마법이 각인된 두루마리, 사용자를 높이 5m, 반경 500m 이내에 임의의 빈 공간으로 전이시킨다. 이동에는 약간의 딜레이가 있다.

작은 방만 한 크기를 지닌 로브의 <아가리 주머니>, 그 안에 각종 물품을 꽉꽉 채워온 나다. 유용한 마법 스크롤류 또한 넣었지. 그중엔 한 장에 몇억씩이나 하는 비싼 ‘공간이동의 두루마리’ 또한 있다! 좀 아깝지만…….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망설임 없이 꺼낸 ‘순간이동 스크롤’을 마력을 불어넣으며 찢자, 스크롤에서 흘러나온 마법의 힘이 내 몸을 감싸고-.

“……삣?”

“……엑?”

몇 초 뒤에 돌연 주위의 풍광이 바뀌며 비행기 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오크 노동자들 앞쪽에 떨어졌다.

오크들은 눈치를 못 챈 듯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었지만, 선두의 오크의 어깨 위에 앉은 스프리건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똑똑히 내가 있는 방향을 보며 얼빠진 소리를 내뱉는다. 나도 마찬가지.

그렇게 잠시 몇 초간 어색한 시선 교환이 이어지고-.

“삐이이-앗!(괴, 괴물이다아-아!)”

스프리건이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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