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9화
72화. 금쪽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1.
‘의도치 않은 소동’을 벌인 다음 날 새벽, 난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공항에서 빠져나갔다.
몸이 좀 회복될 때까지 숨어서 휴식을 취하려 했지만, 새벽쯤에 근처에서 화물차 몇 대가 움직이는 게 보이고 마침 <투명화>를 감지하는 이들도 없었다. 도망칠 절호의 기회여서 투명화 오일을 쓰고 트럭 밑바닥에 달라붙었지. 다행히, 들키지 않고 잘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게 투구도 벗을 수 있게 됐다.
“흐으, 흐으, 흐으으……. 켈록!”
희미한 시내 가로등 아래에 주저앉아, 난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하며 숨을 골랐다.
입고 있는 오토바이 슈트 안쪽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적시는 붉은 피, 몸에 박힌 총탄의 꼬라지를 확인하니 두 발은 등판에, 한 발은 오른 팔뚝에, 그리고 나머지 한 발은 왼발 대퇴부에 맞았다. 등판에 맞은 두 발 중 하나가 오른쪽 폐에 꽂혀서 그런지 호흡이 힘드네.
“흐읍!”
반사적으로 기침이 나오는 것을 참은 후, 난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총을 갈긴 놈들을 바라보았다.
근처 가로등에 처박힌 구닥다리 머슬카 안, <독침> 마법이 눈을 관통당해 가늘게 경련하는 3명의 오크들. 흑인 갱스터 비슷한 후줄근한 복장에 아직 다 성장하지도 않은 청소년기의 아새끼들이다. 딱, 우그 타람에서 공부하던 애들 나이대야. 마력 각성자도 아니네.
하지만, 처음으로 내 몸에 ‘총알구멍’을 내준 놈들 되시겠다.
인적이 없는 시내를 지나칠 때 트럭에서 내린 뒤, 후드 로브를 꺼내 뒤집어쓰고 어디에 숨어있을까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옆을 지나쳤던 차량에서 돌연 창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권총을 쥔 손이 튀어나와 내 등판을 쏴댔다.
그에 무방비로 당했다.
치안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강도’ 같은 걸 생각했지 달리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다짜고짜 총부터 쏠 줄은 몰랐거든. 전혀 대응하지 못했어. 뒤통수에도 한 발 맞았는데, 투구를 뚫지 못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허무하게 머리통이 터져서 뒤질 뻔했다.
“케흑, 진짜……. 미국 개X 같아요. X바아알…….”
죽은 걸 확인하려는 듯, 놈들이 차량을 후진시킬 때 <독침>으로 역관광시켜줄 수 있었지만……. 진짜 기습 공격을 막을 만한 수단을 하나 정돈 마련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처구니없이 뒤질 뻔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서늘해.
어쨌든 차량으로 걸어가서 문을 연 후, 난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오크들의 멱을 따고 하나씩 투구의 아가리에 쑤셔 넣었다.
그와 함께 심장에서부터 솟구치는 ‘생명의 힘’, 뜨뜻한 물에 푹 잠기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방금 입은 총상은 물론이고 공항에서 입었던 부상들까지 급속도로 호전되기 시작한다. 꾸물거리며 살이 올라오는 게 보일 정도. 몸속에 박힌 총탄의 파편들을 마저 제거한 뒤-.
“후우우…….”
천천히 투구를 벗고 빈 운전석에 앉아 숨을 골랐다.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이 지랄 맞은 해골 투구를 벗었으니 낮에도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어. 추가로 스마트폰도 얻었으니 인터넷이나 내비게이션도 쓸 수 있고. 공항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 추적이 들어오겠다만……. 그전에 엘 마르를 찾아서 조지면 되겠지. 그래, 사고가 있었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좋아요.”
고갤 주억이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은 후, 난 오크들에게서 기부받은 스마트폰을 켜곤 운전대를 붙잡았다.
2.
미국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생각해놨던 건 ‘서예린 찾기’다.
‘엘 마르를 잡아서 조진다.’는 목표를 세운 이유 자체가 서예린과 아가씨의 멘탈 케어 때문이다. 근데, 나 혼자 날아가서 놈을 조진다? 그럼 서예린이 실망하지. 최소한 자길 물 먹인 인간을 직접 두들겨 팰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어?
게다가 잠적한 엘 마르는 민간인이 아니다.
미궁의 신-‘골디안’의 신도, 코드 108의 신도가 가졌던 위험성을 생각하면 난이도는 분명 심상찮을 거다. 수조 원대의 골디안 코인을 가지고 있는 골디안 신도라면 더더욱. 그러니 든든한 서예린과 함께하는 게 좋지.
날이 밝자마자 ‘적당한 분장’을 마치고 서예린이 방문을 계획했던 곳을 찾았는데…….
“……뭐, 뭐임?”
눈앞에 펼쳐진 도심 풍경에 잠시 눈을 깜빡였다.
깨진 유리 파편과 벽돌 등 쓰레기가 널려있는 거리, 대로에 있는 건물들은 성한 게 하나도 없었다. 문짝이 떨어져 나갔거나 창문이 깨진 건 양반, 불에 한번 타오른 듯 새카만 그을음이 있는 건물과 무너진 건물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잘못 찾아온 건가 싶어서 스마트 폰 내비게이션을 다시 확인했다.
로데오 드라이브.
할리우드 톱스타와 부호들이 모여서는 곳으로 유명한 ‘베버리힐스’의 그곳이 맞았다. 도대체 왜 이런 꼴인지 뉴스를 검색해보니……. 며칠 전에 2차 코인 대폭락 이후에 할렘가 오크들의 폭동으로 단체로 쓸려나갔다는 기사가 있다. 덤으로 웹서핑을 해보니 왜 이곳을 오크들이 습격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의 베버리힐스는 엘프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17년 전, 세상에 미궁이 나타나고 송파구처럼 LA 다운타운이 지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1년 뒤, 뉴욕 쪽 미궁 입구에서 ‘룬수호자’라는 상식을 초월한 괴물들이 튀어나와 미국을 초토화시키면서 기존에 살고 있던 이들은 너도 나도 ‘위험한 미궁 입구’ 근처에 있는 베버리힐즈를 떠났고.
그 뒤, 아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기로 결정되면서 그 호화로운 거리를 ‘엘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아인종들이 차지했다.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 빼어난 외모를 가진 종족인 만큼, 사람들의 호의를 얻어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거지. 덕분에 근래엔 베버리힐즈란 이름보단 ‘엘프 힐즈’라고도 불리면서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지로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근데, 코인 때문에 눈 돌아간 오크 폭도들에 의해 박살 난 거고.
“쯧쯧.”
블로그 글을 살펴보니 꽤나 재미있는 관광지였던 것 같은데, 사기꾼 귀쟁이 하나에 완전히 망가졌구만. 가볍게 혀를 찬 후, 난 후드를 푹 눌러쓰고 서둘러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아직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거리.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무장한 경찰들이 날 제지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거리에 얼마 없는 인파-엘프들도 차도르를 쓴 무슬림 여자마냥 얼굴과 귀를 가리고 황급히 이동하고 있어서 별 제지 당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한번 불타오른 흔적이 있는 3층 대리석 건물.
깨진 유리창과 망가진 정문 등 다른 곳처럼 약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았다. 하지만, 그래도 한때 대단히 세련됐을 것 같은 정육면체 건물이다. 서예린이 인터넷으로 위치를 검색했던 ‘패션 회사’인-‘리프 아르지아’ 되시겠다.
그리고, 처음 ‘엘븐 코인’을 얻었던 곳이기도 하지.
지나가듯이 들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미국에서 스포츠 웨어 광고 찍었을 당시, 부수적으로 찍었다고 했던 ‘사진 광고’. 거기서 보수로 5,000달러와 엘븐 코인으로 5,000달러어치를 받았다고 했었지. 검색해보니 여기의 인터넷 홍보 사이트 화보에 서예린의 사진도 있더라. 굳이 엘븐 코인을 보수로 줬다는 걸 생각하면……. 좀 수상해 보이는 곳이지.
“스으읍. 하아아……!”
두 눈을 감고 <과거>를 바라보았다.
거꾸로 돌아가는 비디오테이프를 재생시킨 것처럼 되돌아가는 풍경, 얼마 지나지 않아 대용량 백팩을 등에 메고 있는 서예린의 모습이 보였다.
* * *
약탈에 폐허가 된 건물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보는 서예린.
입술을 질겅이며 잠시 고민하던 듯한 그녀는 곧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며 불타오른 종이 쪼가리를 훑던 도중에 숨어 있었던 꾀죄죄한 정장 차림의 ‘귀쟁이’와 마주친다.
샷건을 겨누며 서예린을 위협하는 귀쟁이.
서예린은 잽싸게 몸을 움직이고 한발 늦게 샷건의 총성이 울린다. 귀쟁이가 연거푸 샷건을 쏘기 전에 서예린은 <유령의 무기>를 날려 샷건을 박살 냈다. 그 충격에 엎어진 귀쟁이, 서예린은 바짝 따라붙어서 삐죽삐죽한 보랏빛 톱날 칼을 놈의 관자놀이 옆에 내리찍는다.
그 과정에서 귀쟁이의 길쭉한 한쪽 귀는 잘려 나갔다.
그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 하지만, 귀를 자른 칼날이 목덜미로 움직이자 입을 다문다. 그렇게 창백하게 굳어버린 귀쟁이의 면상을 향해 서예린은 얼굴을 들이밀면서 ‘사장(President)님’이라고 으르렁거렸다.
이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놈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귀쟁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순순히 서예린의 질문들에 대꾸한다. 대충 내용을 요약하면 ‘몇 달간 엘 마르에게서 코인을 공짜로 받았고, 그걸 유명인들에게 보수로 지급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뿐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폭도와 현상금 사냥꾼을 피해 숨어있던 거다.’라면서 항변했다.
……하지만, 서예린은 믿지 않았다.
톱날 같은 칼날을 목덜미에 대고 느릿하게 긁으며 ‘네가 친분을 과시하면서 사진도 찍은 걸 알고 있다. 신체 반응을 보니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 역시, 귀쟁이는 믿을 수 없다.’고 속삭인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옛날에 ‘유령의 반지’를 <감정>했을 때 봤었던 ‘미궁에서의 모습’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와 아가씨에겐 보여주지 않았던 ‘냉정한 살인마’의 모습.
그 눈빛의 의미를 읽곤 발악하듯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려는 귀쟁이. 날카로운 은빛 칼날을 꺼내 놈의 오른손을 꿰뚫어 버린 후, 서예린은 메고 있던 백팩을 그대로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커다란 목제 상자’를 꺼내고 그 상자를 여는…….
* * *
“X발!?”
상자 안에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체에 순간 식겁했다.
엉겁결에 비명을 지를 정도, 서예린이 저 ‘커다란 목제 상자’를 하나 가져오는 걸 이미 확인하긴 했다. 마력의 흐름을 보고 ‘심상찮은 물건이구나!’ 짐작은 했지만, 굳이 시점을 옮겨서 내용물을 보진 않았다. 근데, 저런 거일 줄은 몰랐다.
어쨌든 그 도구를 ‘사용’해서 서예린은 심문을 시작했다.
* * *
꺼낸 ‘도구’를 보자마자 겁에 질렸던 귀쟁이, 필사적으로 자신은 무고하다 말하며 밖에 있는 이들이나 경찰을 향해 들으라는 듯이 고함과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서예린은 냉정하게 심문을 시작한다.
비명도 못 지르고 덜덜 떠는 귀쟁이 입에서 말이 더 나온다.
엘 마르가 돌연 잠적하기 직전에 그를 포함한 몇몇 엘프 지인들을 자신의 주택 별장에 불렀다는 것. 거기서 엘 마르의 남겨진 선물-‘폭로 비디오’를 봤다는 것. ‘마지막 선물이며 그걸 공개하고, 그 전에 공매도를 쳐서 돈을 벌라.’는 쪽지를 보고 일행과 작당해서 움직였다는 것…….
한마디로 2차 대폭락을 일으킨 ‘실행범’ 중 하나였다!
그에 서예린은 대단히 분노한 얼굴로 ‘도구’를 사용하고 귀쟁이가 두서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엘 마르에 대한 모든 것을 실토한다. 하지만, 엘 마르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렇게 가혹하게 심문을 계속하고 있던 도중-.
한밤중에 울린 비명과 총성을 듣고 경찰들이 근처에 나타났다.
마력 각성자를 염두에 둔 듯, 단단히 무장한 상태. 그 낌새를 눈치챈 서예린은 허겁지겁 ‘도구’를 가방에 쑤셔 넣고 귀쟁이의 머리통을 작살낸 뒤에 도망친다. ‘유령의 반지’도 빼앗겼는지 <투명화>를 사용하진 못했지만 웬만한 이들은 포착하지 못할 정도로 날렵했다.
난, <눈>의 시점을 상공 30m까지 높여서 도망치는 서예린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주시했다.
* * *
“후우우…….”
<과거시>를 사용한 여파로 지끈거리는 머리, 잠시 자리에 주저앉은 뒤 심호흡을 하면서 얻어낸 정보들을 정리했다. 일단, 내가 본 건 이틀 전의 일이고……. 경찰을 피해 도망치면서 서예린은 호주머니에서 구형 ‘스마트 폰’을 꺼내서 뭔가를 검색했다.
그래, 서예린은 스마트 폰을 새롭게 장만했다!
역시, 생필품이나 다름없는 스마트 폰을 안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이거 잘하면 서예린에게 전화해서 만날 수도 있겠구만. 혹시나 해서 오크 갱들에게서 전리품으로 빼앗은 스마트 폰을 꺼내 서예린의 전화번호를 꺼내 찍어서 전화를 걸자…….
-전화기가 꺼져 있어…….
꺼져 있다는 소리만 들린다.
아무래도 번호가 다른 새 폰인 것 같구만. 하지만, 그 번호를 찾는 것도 다 가능하지! 여전히 폭동의 흔적과 흥건한 핏자국이 남은 사무실, <눈>을 쪼개서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의 바닥을 샅샅이 훑었고…….
“찾았다.”
하얗게 센 서예린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집어 들며 웃었다.
역시, 격렬하게 움직이는데 털 한 가닥 정도는 빠질 만하지! 희희낙락 웃으며 곧바로 그 짧은 머리칼을 붙잡고 <과거시>를 사용했다. 빠르게 흘러가는 과거의 장면들, 보니까 PMC 전용으로 운행하는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구만? 스마트 폰은 남미에서 구했고.
“휴우…….”
스마트 폰을 받는 과정을 확인한 후, 곧바로 <과거시>를 종료하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그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된다.
-……Hello?
“거, 영어가 아주 원어민…….”
자신만만하게 말하다가……. 곧 싸함을 느끼고 아가리를 다물었다. 이거 서예린의 목소리가 아닌데? 목소리를 위장했다고 보기엔 성별부터가 다르다. 연거푸 <과거시>를 사용하고 약간 정신적인 탈진 상태인지라 눈치를 채는 게 늦어졌다.
“음, 그, 누구신가요? 스마트 폰 주인은 아닌 것 같은데?”
-LAPD 소속, 크라츠 경사입니다. 혹시 스마트 폰의 주인과 아는 사이입니까?
“어, 어……. 네. 근데, 왜 전화를 경찰이 가지고 있나요??”
-사건 현장에 있던 스마트 폰이 울려서 받았습니다. 혹시 자기소개와 스마트 폰의 주인에 대해 말해 주실 수 있으실…….
반사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찰이 전화를 받는 걸 보니 뭔가 일이 터진 게 확실하다. 솔직히, 나무 상자 안의 ‘그것’만 봐도 사건이 안 터지는 게 이상하긴 해. 그 전화번호로 다시 통화가 걸려 오기에 전원을 끄고 <연금술>로 스마트 폰을 녹여버렸다. 그 뒤, 이번에 얻은 단서들을 고찰해봤다.
귀쟁이를 심문해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서예린이 찾아갈 만한 곳은…….
“엘 마르의 별장밖에 없죠.”
새로운 스마트 폰을 꺼내 켠 후, 난 귀쟁이가 말했던 주택의 주소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