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43화 (343/350)

제343화

막간. 떨어지는 작은? 공?

1.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난 당장 악마를 부르는 의식을 진행하자 제안했다.

서예린은 ‘지금? 여기서?’라는 표정으로 반대했지만, 난 ‘악마가 돌아다니면서 더 피해가 커지기 전에 수습하는 게 좋지 않으냐?’ 설득했다. 결~코, 내 사리사욕을 위해 재촉한 건 아니야. 그럼그럼. 모두 대의를 위해서지! 그런 내 말에 서예린은 결국 받아들였다.

그렇게 인적이 없는 인근 야산 쪽에 가서 의식을 거행했지만-.

“헤엑. 헤에엑……. 더 이상 못 함! 마력 딸림!”

소금과 피로 그려진 지름 4m 남짓한 오망성 마법진, 그 중심에 있던 서예린은 손에 있던 검은 책을 옆에 내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의식을 시작한 지 거진 2시간, 하지만 악마는 찾아오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서예린의 모습에 작게 입맛을 다신 후, 난 바닥에 떨어진 책을 집어 들었다.

지배의 책

인피(人皮)로 만들어진 흑마술 고서, ‘종속의 사슬’과 쌍을 이루는 마법 장비며 사슬 안에 속박된 악마-‘카르 알굴’을 통제하는 컨트롤러에 가깝다. 10가지의 의식과 20가지의 기본적 명령어를 수록하고 있고, 다른 이들도 읽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만, 오직 특별한 의식을 통해 주인으로 등록된 존재만이 책을 가지고 악마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효과 : 종속의 사슬 조종

·현재 등록된 주인 : 서강, 서예린

“흐음, 틀린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서예린이 시행한 의식 부분을 읽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각종 은유와 비유로 해석하기 힘들게 적혀져 있지만……. 그래도 제대로 한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런 내 혼잣말에 서예린은 파리한 입술을 질겅인다.

“놈이 몸을 갈아타서 그런 거임.”

“몸을 갈아타서 그렇다고요?”

내 대꾸에 서예린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고갤 끄덕였다

“몸을 갈아타는 과정에서 ‘속박과 제약’이 일정 부분 약해짐. 그래서 그 부분들을 보충해줘야 함. 하지만, 그런 속박이 보충되기도 전에 연속해서 몸을 갈아타 버린 거임. 내가 본 것만 해도 3번. 지금은 더 많이 몸을 갈아탔을 거임.”

“……그럼 이 책이 쓸모가 없어진 거네요? 지금 당장은.”

“그건, 아님. 아무리 제약과 속박이 약해진다고 해도 ‘일정 수준 이하’로 약해지진 않음. 분명 내가 보내는 신호를 느끼고 있겠지만, 억지로 저항하며 무시하고 있을 거임.”

일부러 오지 않는다는 말. 근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명히 서예린을 끝장낼 좋은 기회란 걸 알 텐데 안 오다니? 그런 내 생각이 읽힌 건지 서예린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어나갔다.

“놈은 바보가 아님.”

“……뭔 소리예요?”

“내가 숨어있어도 부족할 판인데, 갑자기 자기를 부르고 있음. 뭔가 이상함을 느낄 만함. 나 같아도 놈의 입장이면 이상하게 생각하고 경계할 거임.”

“흐음.”

“아빠가 말함. 녀석은 영리하고 지혜롭다고. 인간이 예닐곱 살 어린애라면, 놈은 교활한 어른 살인마. 괜히, 배배 꼬이고 기만이 가득한 조언을 듣는 게 아님! 그만큼 도움이 되기에 듣는 거임! 쉽게 생각해선 안 됨!”

거, 간단히 끝날 줄 알았는데 좀 길어지게 됐구만. ‘전술무기투하’가 불발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서예린은 다시 오망성 중앙에서 서서 내게 손을 벌렸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직접 추적해야 함. 추적에 관련된 의식도 있으니 그걸 진행하면 됨. 책 이리 주셈.”

그 제안에 살짝 망설였지만 난 고갤 저으며 그 책을 <아가리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서예린이 뭔 짓 하냐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가운데, 난 책 대신에 스포츠 음료와 에너지 바를 꺼내 서예린에게 던져 줬다.

“지금 예린 씨 몰골이 말도 아니에요. 피곤할 텐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푹 쉬었다가 내일 하죠.”

“…….”

“일단, 그거 먹고 기력 좀 되찾으시고.”

이전부터 좀 안 좋았지만 이젠 파리하게 보이는 서예린 얼굴, 마력 각성자라서 버티고 있긴 하다만 서예린도 환자다. 더 혹사시킬 순 없지. 그런 내 말에 서예린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낚아챈 에너지 바와 스포츠 음료수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곤-.

“더 줘.”

아주 당당하게 손바닥을 내밀며 더 요구한다. 그렇게 내가 던져주는 사료를 몇 번을 더 받아먹은 후, 서예린은 가볍게 트림하며 내 로브를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거 진짜 편리해 보임. 계속 나옴.”

“편리하긴 하죠. 물건을 넣으면 마음대로 벗을 수가 없는 게 좀 흠이지만.”

이 정체를 알고 난 이들이 다들 보여 주는 반응이다. 이거 없었으면 진짜 고생했을 거야. 어쨌든 <아가리 주머니>에서 달러 지폐 뭉치를 꺼내 뒤, 난 지폐를 두드리며 웃었다.

“자, 그럼 시내로 가서 쉬죠.”

2.

괴인의 출현 소식에 두 사람은 곧바로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땐, 현장은 증파된 경찰 특공대와 앰뷸런스 등으로 난잡한 상황이었다. 수상한 2인-정확히 말하면 리자드맨의 등장에 경찰들이 소총을 만지작거리며 경계하는 가운데, 흑인 남성-윌슨은 다가온 경찰들에게 미리 꺼내둔 신분증을 보였다.

“미연방수사국 수사관 윌슨 크레이엄입니다. 이쪽은 저희 쪽 협력자인 ‘틀라펙스’ 씨고요. LAX 공항을 습격했던 괴인이 나타났다고 해서 조사차 왔습니다. 협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무전기로 연락하더니 곧 고갤 끄덕이는 경찰. 틀라펙스가 경찰들을 지나쳐 느릿하게 사건 현장 쪽으로 향한 가운데, 윌슨은 경찰 쪽 윗선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괴인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 확인했다.

“……증거품을 가져갔다고요?”

“예, 소동이 벌어지고 난 뒤에 확인하니 사건 현장에서 회수된 증거품-대략 1급 마법기로 추정되는 한손검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담은 바디 백 하나도 사라졌고요.”

괴인은 마법적인 독가스를 광범위하게 흩뿌린 뒤,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품-마법 장비를 탈취해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경찰들이 독가스에 휘말려 중상을 입었지만……. 공항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담당자를 향해 조심스레 추가적인 용건을 꺼냈다.

“혹시, 괜찮다면 사건 파일을 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놈이 이유 없이 이곳에 나타난 것 같지 않아서.”

“정리가 되지 않아 난잡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물함에서 자료들을 꺼내서 건네주는 경찰 측 담당자, 그 사건 파일들을 차분히 읽다가 윌슨은 한 부분에서 멈췄다.

“주택 안에서 카메라를 비롯한 ‘감시 장비들’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혹시 감시 장비에서 촬영된 영상 같은 게 있습니까?”

“음, 그게 오늘 아침에 집안 내부를 본격적으로 감식하다가 발견된 건데……. 아직 어디에서 전파를 주고받고 있는지 역추적하지 못했습니다. 전자 장비팀을 불렀는데, 전부 괴인이 흩뿌린 독가스에 휘말려 병원에 실려 갔고요.”

어쨌든, 당장은 확인할 수 없다는 말. 그에 윌슨은 머릴 긁적이며 다른 내용들을 훑었다. 하지만, 딱히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다. 그렇게 별 성과 없이 파일을 덮고, ‘나중에 혹시라도 더 사건에 대해 밝혀지면 연락을 해달라.’고 요청하던 도중…….

“과장님(Lieutenant), 그리고 수사관님?”

경찰관 하나가 차량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쏠리자 그는 살짝 밖을 향해 눈짓했다.

“그 랩틸리언이 시신의 머리통을 따서 뇌를 파먹고 있습니다만.”

“…….”

“일단, 나가서 확인해보도록 하죠.”

최대한 당황한 티를 숨기며 대꾸한 후, 두 사람은 들어온 경찰의 뒤를 따라서 임시로 유류품을 보관하고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그 안에 들어가자마자 틀라펙스가 보였다. 그리고 그는-.

-시이이잇……! 츄르릅.

이마 윗부분을 깔끔하게 잘라낸 머리통을 들고 그 속의 뇌를 손가락으로 파먹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경찰들이 구역질 난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윌슨은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틀라펙스에게 다가갔다.

“틀레펙스 씨,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살짝 노기가 섞인 윌슨의 음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눈을 감은 채 음미하듯이 뇌를 파먹는 틀라펙스. 그에 경찰들이 자연스럽게 소총에 손을 올리는 가운데, 뇌를 다 퍼먹은 틀라펙스는-.

“음.”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백태가 껴서 허옇게 변한 푸른 눈동자에 일렁이는 묘한 아지랑이, 아지랑이가 사라진 뒤에 틀라펙스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보았다.”

“봤다고요?”

“죽기 전의 기억, 악마숙주, 하얀 여자, 살인.”

옆에 놔뒀던 지팡이를 짚고 따라오라는 듯이 까닥이는 틀라펙스, 그에 윌슨과 경찰 측 인원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뒤를 따랐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사건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별장, 정원 문을 지팡이로 부수며 들어간 틀라펙스는 곧바로 차고 안에 있는 검은색 트럭으로 가서 그 뒷문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그와 함께 그 안의 내용물이 밖에 드러났다.

“……확실히, 일반인이 가지고 있을 만한 것들은 아니군요.”

카메라, 드론, 폭약, 특수탄……. 전투에서 쓰일 법한 각종 전자 장비들이 널려있는 차량 내부, 정황상 누가 이걸 운용했을지는 뻔하다. 경찰 측 담당자가 아직 켜져 있는 컴퓨터를 보며 작게 중얼거리는 가운데, 틀라펙스는 몸을 돌려 정원으로 나와 한 정원수 밑을 가리켰다.

“경쟁자를 살해. 총 8명, 시신은 저쪽 땅 밑에.”

그 말을 끝으로 자기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정원에 있는 벤치에 털썩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틀라펙스.

어쨌든 경찰들은 곧바로 별장의 주인의 인적 사항을 조회해서 연락하고, 정원수 아래를 파헤쳤으며, 그 차량 안에 있는 전자 장비의 내용들을 확인했다. 그러다 트럭 안쪽, 켜져 있던 컴퓨터에서 계속 녹화되고 있던 CCTV 영상을 확인하면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이 개새끼들…….”

영상을 확인한 후, 윌슨은 욕설을 내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건몽거는 ‘엘 마르의 안전 가옥’으로 추정되는 별장에 매복한 채 대기했다. 하지만, 마냥 대기만 한 건 아니었다. 대기하면서 발생하는 손해를 메꾸기 위해 종종 찾아오는 ‘경쟁자-현상금 사냥꾼’들을 죽인 후, 그 장비를 빼앗고 시체는 별장의 정원에 파묻었다.

그 과정에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고 말았다.

“진짜, 악마숙주(Demonhost)군요.”

윌슨과 함께 녹화된 영상을 확인하던 경찰 측 인원도 막막함에 한숨을 내뱉었다.

17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경찰과 FBI 수사관들은 ‘위험한 존재’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틀라펙스가 그 믿기 힘든 능력을 보여줬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악마숙주’가 그 영상에서 나왔다.

살아있는 지성체에 강제로 악마를 빙의시킨 흉물.

특별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이상,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사라지는 <악마 소환> 마법과는 달리 악마숙주는 거의 무제한으로 그 몸뚱이에 악마가 빙의해 있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악마가 직접 나타난 것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사건과 관련된 영상들을 다 확인한 후, 윌슨은 영상을 되돌려 이 끔찍한 골칫덩이를 가지고 온 사람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백발에 검은 피부, 얼굴에 나 있는 커다란 두 줄기의 흉터, 황금빛 눈동자……. 야성적인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미녀. 근데,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런 인상적인 사람을 봤다면 잊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옆에 있던 경찰 또한 그와 비슷한 듯, 고갤 살짝 갸웃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래! 스포츠 브랜드 광고에 나왔던 여자!”

“……예?”

경찰이 ‘생각났다!’는 듯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뭔 말인지 몰라서 윌슨이 두 눈을 끔뻑이는 가운데, 경찰은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한 내용을 보란 듯이 내밀었다. 그 광고를 본 순간, 윌슨도 기억해냈다. 머리칼이 하얗고 체형이 더 슬림해져서 눈치를 못 챘지만……. 분명 작년에 광고에 나왔던 여자가 맞았다.

“검색해보니 이름은 ‘서예린’, 한국으로 귀화한 미궁 출신이군요. 미르 유혈 사태 당시에 활약한 여자로 유명하고.”

“한국이라고요……?”

“예. 이거, 출입국 사무국에 연락해봐야겠습니다.”

경찰관이 공식 라인으로 전문을 보내기 위해 전화를 찾는 가운데, 윌슨은 서예린의 인적 사항을 보곤 눈을 빛냈다.

아직 대중들에겐 알려지지 않았지만, LAX에서 벌어진 테러는 한국에서 비행기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어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고를 벌인 여자는 공교롭게도 한국 출신이고. 이걸 과연 우연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럴 리가 없지.”

가볍게 고갤 저으며 그는 파악한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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