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화
5.
악마.
사전적 의미는 ‘사악한 초자연적인 존재’를 일컫는 말. 미궁이 세상에 나타난 뒤, 그 명칭은 미궁에서 튀어나온 한 종류의 ‘특별한 정령종’을 가리키게 되는 용도로 더 많이 쓰이게 됐다. 그 원래 의미가 퇴색될 법도 하지만 사람들이 괜히 그것들을 악마라고 명명한 게 아니다.
‘사악한 에너지’가 물리적인 실체를 얻어 형상화된 존재들.
특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같은 형태를 찾는 게 힘들 정도로 가지각색이며, 그것이 원하는 것은 오직 ‘지성체의 고통과 파멸’뿐이다. 그들의 행동거지는 지상의 인간이 상상하던 악마의 이미지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그리고, 그 능력 또한 ‘상상 속 악마’와 비슷했다.
「■■ ■■■■…….」
산부인과의 지하, 의료 폐기물 저장소. 말라비틀어진 피로 새겨진 마법진 안에서 ‘그’는 인간의 성대로는 불가능한 음역의 언어를 내뱉으며 룬문자의 형상을 조심스럽게 짜 올렸다. 지금 가진 육신의 수준으론 불가능한 수준의 마법이지만…….
-우우우우웅……!
그에겐 ‘충분한 제물’이 있었다.
그 기묘한 음률이 지속될수록 그의 주위에 있는 초자연적 현상이 더 강해지기 시작한다. 가만히 있어도 귀가 울리는 공명음이 들리고, 조잡하게 합성된 합성사진처럼 희미한 형광등 속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형태와 색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으. 으으…….
-……애.
-…….
<악마술>의 제물 공양 절차대로 으깨진 살점들,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 채 스러진 것들의 순수한 절망과 공포가 담긴 정수가 넘실거렸다. 그 숫자만 수십, 그가 만들어 낸 룬 문자들의 공명에 따라서 물결치는 정수들이 소용돌이치며 마법진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제, 내 부름에 응답하라.」
마지막 절차, 그는 발밑에 있는 산모의 시신과 그 뱃속에 아직 살아 있는 태아를 향해 가공해 낸 세례를 쏟아 냈다. 타르처럼 질척한 물질로 변한 정수들이 산모의 시신 위에 쏟아져 내리고-.
“꺾! 꺼꺼꺼꺼!!!”
죽은 산모가 부풀어 오르며 불쾌한 유황 가스가 시신의 눈과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 죽은 자가 내지르는 비명, 동시에 시신 안에 있는 아직 살아 있는 생명 또한 스러지고 그 순수한 생명의 단말마가 세상의 저편 너머로 울려 퍼진다. 그 뒤에-.
-드드드드……!
마법진 전체가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사산아들의 정수들이 지름 4m가 넘어가는 원진 내부를 완전히 뒤덮고, 구정물과 같은 색의 스멀거리는 어둠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사방으로 뻗쳐 나간다. 그렇게 폐기물 보관소의 모든 것들이 그림자에 뒤덮여 버렸다.
짙은 촛불에 일렁이는 ‘그림자 같은 것’.
뭉그러지며 시시각각 형상을 바꾸는 그 모습은 마치 불쾌한 생명력으로 맥동하는 생명체의 내장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맥동하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마법진을 뒤덮은 물질, 그것이 꿈틀거릴 때마다 원초적인 감정이 공기에 퍼져나간다. 이윽고 다른 세계와 이어진 얇은 막 너머에서 ‘불청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이름을 부르다니……. 넌 누구냐?
공기의 떨림이 아닌 마력의 떨림, 정신의 가장자리를 긁어 대는 것 같은 익숙한 염파에 ‘그’는 나지막이 대꾸했다.
「나다. 즈므'루.」
-이 의지, 그리고 목소리……. 설마?
「카르 알굴.」
-HA! HAhaha!
그 대꾸에 막 너머에 있는 다른 세계의 불청객은 소리 높여 웃는다. 두개골을 열어젖히고 뇌를 흔드는 것 같은 불쾌한 웃음소리가 잠시 동안 이어진 뒤, 검은 막이 쭈욱 늘어지며 기괴한 형상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어서 즐거움이 역력한 기색의 염파가 울려 퍼진다.
-아~ 카르 알굴! 그래, ‘제자에게 선물 받은 물건’으로 계획대로 지상을 활보하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이 지긋지긋한 곳에 처박혀 있지 않고 지상을 자유로이 활보하다니……. 너무 부럽군!
장막 속에서 물결치듯이 일렁이는 저주받은 동포의 모습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계약을 하자.」
-계약, 흐음? 나랑? 의외인걸.
그런 불청객의 말에 그는 나지막이 이를 갈았다.
「……다른 이들도 불렀지만 응답하지 않더군.」
적절한 대가를 주고 힘을 빌릴 만한 존재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에 절박한 마음으로 알고 있는 이름을 닥치는 대로 부르다가 이놈이 응답했고. 그런 그의 말에 검은 막 너머의 불청객은 실소를 흘렸다.
-후후, 그럴 만도 하지. 네가 이곳에 빠져나간 동안, 반신이 나타났거든.
「……반신?」
-그래,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 네쉬라께서 심연의 아가리에 우리들을 떨어트렸다. 게헨나의 지배자, 위대한 브레칼과 함께 말이다. 아마 네가 부른 놈들도 거기에 섞여 들어갔을 거다.
브레칼, 초열지옥-게헨나를 지배하는 악마군주. 다른 수많은 악마군주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함을 지닌 존재였다. 무엇보다 ‘룬 수호자’이기도 하고. 반신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가 나온 이상…….
-대부분의 악마가 죽었다고 한다. 브레칼도 쓰러졌고.
「허, 무지막지하군.」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켜 온 강자. 물질세계로 튀어나온 게 아닌 만큼, 진정한 실력을 다 발휘했을 텐데 4대 지옥의 주인 중 하나가 쓰러지다니?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잠시 혀를 내두른 그는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
「진짜 파멸의 시간이 도래한 것 같군. 이 즐거운 지상에서의 시간도 어쩌면 얼마 안 남았겠어.」
-그럴지도. 참 아쉬운 일이지.
짙은 아쉬움의 감정을 내보이는 막 너머의 불청객, 어쨌든 그 존재를 설득하기 위해 그는 입을 열었다.
「됐고, 계약을 할 건가 말건가 말해라. 즈므‘루. 이 얼마 없을 '지상에서의 시간'을 즐길지, 아니면 버릴지 말이야.」
-계약? 후후흐흐흐.
실소를 흘리는 막 너머의 불청객, 그 조롱기 섞인 의지에 그가 얼굴을 찌푸리는 가운데 불청객의 웃음이 잦아들고 이어서 그 불쾌한 염파가 흘러나왔다.
-널 둘러싸고 있는 그 마법의 사슬에 있는 흐름이 보인다. 넌, 너 스스로의 주인도 아니군.
「…….」
-노예가 스스로의 운명을 정하고 타인과 계약한다? 말이 안 되는 소리야.
비웃는 그 속삭임에 그의 얼굴이 굳어지는 가운데, 불청객의 말은 이어졌다.
-뭐, 즐거운 걸 봤으니 별다른 대가는 안 받도록 하지. 희미한 그림자로서, 고깃덩어리들의 노예로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
「대가로 내 미래를 걸겠다. 즈므'루.」
불청객의 말을 끊으며 그는 담담히 자신의 조건을 나열했다.
중의적이지 않은 아주 확실한 용어와 조건들로 이뤄진 제안, 굉장히 가혹한 조건과 영혼의 진명까지 걸어야 하는 계약이었다. 보통 계약서를 내미는 쪽이 갑이지만 여기선 내미는 쪽이 을이었다. 노예가 또 다른 주인을 섬기겠다는 선언과 같은 짓이지만…….
-흠…….
그저 조롱하려고만 했던 불청객도 살짝 혹할 정도로 조건이 좋았다. 그 뒤, 잠시 침묵하던 불청객은 이내 느릿하게 의지를 내뱉었다.
-정말 급하긴 급한가 보군. 한때, 서로 죽이려고 안달했던 내 호적수가 이렇게 비참하게 몰락하다니……. 너무 안쓰러워.
「할 건가 말 건가만 대답해라. 난 지금 너 말고도 다른 이들과 똑같은 계약을 할 수 있으니까.」
불청객의 고민하는 듯한 기색에 그는 간악하게 속삭였다.
「비록 투영체라고 하더라도 잠시나마 현세를 활보할 얼마 없는 기회다. 거기에 한때 경쟁하던 자를 손끝으로 부릴 수 있는 기회고. 난, 네가 군주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도울 것이다.」
-뭐, 확실히 좋은 조건이긴 하군. 속임수도 없는 깔끔하고 비참한.
「그렇지?」
-근데…… 그렇게 싫은가? 한 때, 죽이려고 했던 경쟁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생사여탈권까지 줄 정도로?
의외라는 듯이 물어보는 불청객의 의지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너는…… 고깃덩이들에게 부림받는 굴욕을 모른다.」
그들 같은 고위 악마들이 육신에 갇혀 부림당할 일은 극히 드물다. 아무리 악마숙주를 만들려고 한들, 고위 악마가 가진 파괴적인 힘에 의해 숙주가 죽어 버리기 일쑤니까. 그만큼 강력한 숙주를 써야 하는데, 그런 일이 흔할 리 없다.
으르렁거리면서 그는 순수한 증오와 굴욕이 섞인 감정을 토해 냈다.
「신의 사슬에 굴복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위대한 신의 영광이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야.」
-하긴, 고깃덩어리들에게 명령을 듣는다니 좀 소름이 끼치긴 하는군.
납득하는 기색의 불청객, 그리고 마침내 그가 원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좋아, 위대한 ‘모르본 마기’ 님의 이름을 걸고 계약을 하지. 대신 영혼의 십일조는 그쪽이 전부 부담하는 걸로.
「……좋다.」
한없이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계약, 하지만 그는 순순히 응했다. 그에 현실의 장막 너머에 있는 불청객의 의지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네가 속박에서 풀려난 순간 뒤, 거두어 낸 모든 영혼들, 전장에서 약탈한 모든 전리품들, 그 모든 것들은 나-즈므'루의 것이며 이는 내가 악마군주의 위(位)를 얻을 때까지 이어진다.
꿈틀거리며 흔들리는 마법진, 그와 함께 그의 정수에 스며들어 구속하는 다른 존재의 의지. 그 끔찍한 제약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그는 화답했다.
「판데모니엄의 위대한 악마군주, 룬 수호자 ‘모르본 마기’의 이름을 걸고 이 계약을 지킬 것을 맹세하니 어기는 자는 그분의 냉엄한 시선 아래 불타오를 것이다.」
선언하는 순간, 푸른 눈알이 하나 떠오르고 냉엄하게 느껴지는 시선이 그들을 주시한다. 그 짧은 선언이 끝난 뒤, 박제된 듯이 허공에 떠 있던 그의 육신이 아래로 떨어진다. 빠르게 빨려 들어가는 정수, 몸에 갇힌 희생양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조차도 괴롭기 그지없었다.
「끄으으으…….」
그렇게 그는 마법진의 정중앙에 섰다.
이전에 차지했던 죽기 직전 마약 중독자의 육신과 비슷한 상태, 자연스럽게 몸을 떠오르게 하던 초자연적인 힘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로 소진됐다. 그 대신에 그의 정수와 희생양의 정수를 빨아들여서 만들어진 의식의 칼날이 그의 손안에 솟구쳤다.
-촤학!
손에 들린 단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와 함께 검은 막 위로 비명을 지르는 태아들의 얼굴들이 울룩불룩 솟아오르며 피눈물을 쏟아 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삐걱거리는 육신을 움직여서 바닥에 박힌 칼을 서서히 움직였다. 점점 크게 갈라지는 막, 이윽고-
-찌이이익!
그 안에서 뻗어 나온 손아귀가 갈라진 막을 붙잡고 옆으로 찢어 갈랐다. 그리고 커다란 형체가 그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 마침내 현실로 튀어나온 내키지 않는 ‘조력자’의 모습에 그가 탈진한 표정으로 빙긋 웃는 가운데-.
-■■ ■■■!
조력자 또한 환희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6.
윌슨과 틀라펙스는 계속해서 LAPD 상황실의 지도에 따라 의심되는 사건 현장을 이동했다.
할리우드 힐스에서부터 이어지는 행적은 결국 유명한 우범지역인 콤프턴(Compton)까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악마숙주의 목적을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악마숙주는 점점 몸을 갈아타면서 약해졌다. 그것뿐이라면 호재겠다만…….
“제길.”
콤프턴 지역, CCTV에서 마지막으로 촬영된 악마숙주의 모습에 윌슨은 얼굴을 구겼다.
항상 초자연적인 현상을 불러일으키며 움직이던 악마숙주, 덕분에 놈이 포착된 CCTV를 구분하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마지막에 촬영된 CCTV의 모습은 그냥 사슬을 걸친 채로 이동하고 있는 일반인과 거의 다를 바 없다. 놈이 보였던 기묘한 행적의 목적은 사람들로부터 이목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LAPD 쪽에 연락하려 했지만…….
-♪♬
스마트폰을 꺼내기가 무섭게 전화가 걸려 왔다. 번호를 보니 LAPD의 상황실. 윌슨이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들립니까? 윌슨?
“예, 어떤 일로 전화하신 겁니까?”
-악마가 등장했습니다! 최소 2급! 그리고, 그 근처에서 사건이 접수됐는데 몸에 사슬을 걸친 한 남자가 차량을 이끌고 개인 병원에 그대로 들이박았다고 합니다!
그 말에 윌슨은 얼굴을 구겼다. 역시, 악마가 괜히 돌아다닌 게 아니었다.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악마숙주가 연관된 건 확실하다.
-요룬가린이 나서야 하겠지만 현재 LAX에서 공항 보수 중입니다. 제일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게 그쪽입니다! 위치를 보내드릴 테니 지원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가겠습니다.”
고갤 끄덕인 후, 윌슨은 옆에 서 있는 틀라펙스를 향해 고갤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