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8화
막간. 사냥은…… 셀프가 아닌데요?
1.
지상으로 나온 후, 즈므'루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해진 형체가 없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고향이나 형상을 갖췄지만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미궁과는 전혀 다른 곳, 그가 가진 감각으로 느끼건대 이곳은 신기할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그 인과가 또렷하고 그로 인한 변화는 거의 반영구적으로 지속될 정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후후…….」
건물 안에 느껴지는 기척에 그는 빙긋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금속과 바위로 지어진 건물, 하지만 그의 몸은 환영처럼 그 벽을 뚫고 나아간다. 어느새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다가간 그는 안에 숨어있던 ‘수십 개의 고깃덩이’들 앞에 나타났다.
“……!!”
“꺄아아악!”
이어서 경악하는 고깃덩이들을 향해 손에 쥔 꼬챙이를 내질렀다.
환영처럼 벽을 뚫고 움직이던 그의 육신과는 달리, 황금빛 단창은 또렷한 실체를 가지고 도망치는 고깃덩이들을 꿰어낸다. 손쉽게 도망치려는 고깃덩이들을 제압한 후, 악마는 꼬챙이를 들어 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하아아…….」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꿰뚫린 어린 지성체들, 죽지도 못하고 창이 가하는 <고통>에 버둥거리는 그것을 보며 악마는 기다란 혓바닥으로 피눈물을 훑었다. 그렇게 흠뻑 ‘고통의 정수’를 흡수한 뒤, 이어서 어미들로 보이는 고깃덩이 앞에서 보란 듯이 그 아가리에 넣었다.
-콰드드득!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뾰족한 이빨에 찢겨지는 작은 고깃덩이들, 그와 함께 쓰러진 어미 고깃덩이들에게서 ‘독특한 향취’가 풍기기 시작한다. 단순한 고통과 절망의 정수뿐만 아니라 분노와 증오까지 자연스레 뒤섞이며 ‘숙성되는’ 정수.
역시, 이건 못 참겠다.
「흐으으……!」
낚아챈 후, 숙성된 그것을 깊이 빨아들이며 악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몇 번 미궁으로 나갈 기회를 얻어서 나가 봤지만……. 이번에 올라가게 된 지상은 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그의 감각 안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지성체들.
이런 ‘끝도 없이 펼쳐진 진수성찬’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번 지상으로 나간 족속들이 왜 그렇게 다시 나가려고 하는지 이해됐다! 이런 낙원이라니!? 맛보기도 힘든 이런 진미들이 널부러져 있다! 투영체의 힘이 다 소진되기 전에 이곳을 흠뻑 즐…….
「아.」
그 순간, 그는 지상의 풍요로움에 현혹돼서 잠시 잊고 있던 ‘목적’을 떠올렸다.
그래, 자신은 ‘카르 알굴’의 족쇄를 풀어주기로 약조했다. 그 대가로 ‘군주’의 위계를 얻을 때까지 놈은 자신에게 봉사할 노예가 되기로 했고. 잠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카르 알굴을 노예로 부리는 일은 더 중요했다.
-으적! 으적! 우적! 쩝쩝…….
허겁지겁 진미들을 입에 쑤셔 넣은 뒤, 그는 다시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곤 카르 알굴의 정수가 느껴졌던 곳을 향해 직선으로 내달렸다. 건물을 뚫고 도로를 내달리면서 종종 마주치는 고깃덩이를 수확했다. 일을 하면서 ‘약간의 유흥’은 필요한 법이니까.
그렇게 질주하던 와중에 그의 감각기관에 또 다른 것이 포착됐다.
「오?」
회전하는 기묘한 날개를 가진 쇳덩이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마력의 향취는 조금 느껴지긴 하다만, 그래도 무거운 쇳덩이가 하늘을 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날아다니다니? 지상을 내달리는 쇳덩이를 봤을 때도 신기했는데, 저건 더 신기…….
-투두두두두-!
「끄으얽?!」
그 순간, 쇳덩이에서 굉음과 함께 뻗어 나온 푸른 빛줄기가 그를 강타한다.
투영체가 순식간에 찢겨지는 감각, 흉악한 위력에 악마는 재빨리 건물 안에 숨어들었다. 지성체의 반응이 있는 곳으로 피하자 함부로 빛줄기를 쏘지 못하는 쇳덩이. 터져나간 몸에서 흘러내리는 정수를 보며 그는 분노와 동시에 놀라움을 느꼈다.
강력한 존재는 그것이 품고 있는 마력으로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다.
이건 그들에게 있어서 ‘상식’이었다. 근데, 방금 전에 쇳덩이가 쏘아낸 푸른 빛줄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상식을 깨버릴 정도로.
혼란스런 와중에 문득 고향에서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힘겹게 균열을 뚫고 지상에 나간 군주급 악마가 인간 무리에게, 그것도 마력조차 다루지 못하는 존재에게 순식간에 패퇴해서 돌아왔다는 소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했는데…….
「진짜였군.」
이제 보니 좀 이해가 가능하다.
현실을 일그러트리는 질료가 부족하더라도 ‘충분한 물리력’이 있으면 적을 뭉개버릴 수 있다. 새로운 상식에 그는 피식 웃으며 터져나간 상처를 메꿨다. 카르 알굴이 말해줬던 충고-‘되도록 반영체 상태를 유지해라’를 듣지 않았다면 정말 심각한 타격을 입었겠지.
「흡!」
그 뒤 그는 건물을 뚫고 밖으로 나오며 손에 쥔 단창을 던졌다.
황금빛 광채가 하늘에 떠 있는 쇳덩이의 회전하는 날개를 꿰뚫었다. 날개를 잃고 휘청거리는 쇳덩이, 마법적인 효과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연거푸 단창을 던지자 근처의 건물에 박히고 불길과 함께 터진다. 그 광경을 보며 악마는 고갤 끄덕였다.
강력하긴 하지만 대응하기도 쉽다.
오직 강력한 물리력이 전부, 물리력에 대항할 만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면 꽤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좀 재미있긴 해도 그다지 ‘재미있는 사냥감’은 아니다. 내던진 단창을 다시 손아귀 안에 소환한 후,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그때-.
「으으륵?!」
질척하게 달라붙는 불쾌한 압박이 등짝에 작렬했다.
적대적인 마력의 흐름, 고갤 돌리며 감각을 집중하자 주황색 로브를 걸친 형체가 보인다. 거친 잿빛의 비늘을 가진 늙은 도마뱀, 놈이 한 손에 쥔 작은 가죽 넝마에서 나오는 묘한 마력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놈에게서 뿜어내는 기세는…….
고깃덩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다.
「크, 키키킥!」
지금의 자신과 비견될 만한 강자의 등장에 즈므'루는 웃었다. 실로 가치 있는 사냥감, 그래 저 정도면 괜찮겠지. 손가락을 놀리며 쥐고 있는 단창들을 가볍게 휘저은 그는…….
투창하며 곧바로 사냥감을 향해 달려들었다.
2.
연락을 받은 후, 윌슨은 곧바로 현장을 향해 질주했다.
LA 도심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 도망치려는 차량으로 가득 찬 도로를 오토바이로 역주행하며 질주한 끝에 두 사람은 간신히 사건 현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도로 한복판에 서서 불타오르는 헬기를 응시하고 있는 악마.
체격은 15피트(4.5m)가량, 늘씬한 인간 여인을 연상케 하는 하얀 뒤태를 가졌지만, 오른쪽의 어깨 위에 팔이 하나 더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3개의 손에는 각각 길쭉한 황금빛 단창이 들려 있었다.
“틀라펙스 님, 괜찮…….”
“떨어져라.”
윌슨을 향해 짧게 대꾸한 뒤, 틀라펙스는 오토바이에서 내리며 지팡이를 옆에 내던지곤 품 안에서 의식용 단검과 고깃덩어리 인형-희생양을 꺼내 들었다. 이어서 바닥에 흩뿌려진 푸른색의 점액질을 인형에 묻혔다.
악마의 피.
투영체에서 흘러나온 가짜, 서려 있는 정수도 증발했지만 충분히 의식의 재료로 쓸 수는 있었다. 이어서 악마를 응시하며 <동기화>를 사용하자, 놈이 묘한 감각을 느낀 듯 「으으륵?!」하는 기묘한 신음이라고 불릴 만한 염파를 내뱉으며 고갤 돌린다.
「크, 키키킥!」
굵은 두 쌍의 뿔이 솟구친 머리, 얼굴은 눈과 코가 없고 길게 찢어진 입밖에 없다. 그 입이 갈라지며 새빨간 혓바닥이 날름거리며 기괴한 웃음의 염파(念波)가 들려오고-.
-투쾅!
이내 놈은 어깨 위에 돋아난 세 번째 손에 쥔 황금빛 단창을 내던지며 돌진했다.
찰나의 순간, 틀라펙스는 자신이 모시는 ‘신과 선조’에게 기도했다. 그와 함께 틀라펙스의 몸 위에 붉은 갑주를 걸친 리자드맨의 환영이 겹쳐지면서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지면을 박차며 날아오는 투창을 피한 후, 그는 코앞까지 다가온 악마를 향해 선언했다.
“[선조시여! 아클카나의 가호 아래! 우리 혈족의 적을 물리치소서!]”
그에 몸 위에 겹쳐졌던 붉은 갑주의 환영이 튀어나와 악마를 향해 돌진한다.
반투명한 리자드맨, 악마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체격이 3m가량 될 정도로 커다랬고 날렵한 곡도와 대방패를 쥐고 있었다. <강령술>로 만들어진 유령 몬스터와 비슷해 보였지만 그 기색은 명백히 달랐다. 그 환영을 악마는 날렵하게 피하려 했지만-.
-쾅!
환영 전사 또한 날렵하게 궤도를 수정해서 실드 차지를 가한다.
최대한 흘려내듯이 받아내며 방패 너머의 리자드맨을 노리는 악마,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황금빛 단창은 반투명한 리자드맨이 막아내지만 왼쪽에서 방패를 타고 넘어온 단창은 그대로 환영의 옆구리를 꿰뚫는다.
-푹!
생명체라면 운신이 힘들 정도의 중상, 피격당한 부분이 연기가 흩어지는 것처럼 흩날리지만 환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챙! 챙! 챙!
-푸욱! 콰직! 푹!
대방패로 거칠게 단창을 걷어내며 오른손에 쥔 곡도를 휘두른다.
그에 악마는 춤추듯이 우아하게 3개의 길고 섬세한 손을 움직여서 황금빛 섬광을 연거푸 쏟아낸다. 전사로서의 기량은 악마 쪽이 훨씬 뛰어난 듯, 붉은 갑주의 환영의 칼과 꼬리치기를 막아내고 방패의 방어를 뚫어내고 그 몸 곳곳에 구멍을 숭숭 뚫어버리지만-.
“시아아아-앗!”
애초에 1:1 싸움이 아니었다.
그사이에 멀찍이 뒤로 빠진 틀라펙스가 새로운 고깃덩이 인형을 꺼내 들며 선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함께 기묘한 파장이 나와 붉은 갑주의 영체를 휘감고 이어서 희생물이 ‘퍽! 퍽!’ 자기 스스로 터져나간다. 반면에 투명한 영체 리자드맨의 상처는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한다.
「흐음, 시간이 오래 끌리겠군. 난 이만 바빠서.」
그 광경에 악마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뒤로 빠졌다.
붉은 환영의 전사가 달라붙었지만 악마의 육신은 물에 잠기듯이 등 뒤에 닿는 건물 벽을 파고든다. 강맹하게 휘두른 환영 전사의 곡도가 악마가 파고든 건물의 철근 콘크리트를 베어 내지만 그 안에 베이는 건 없었다.
-틀라펙스! 놈이 후퇴합니다!
전장에 떠 있는 드론의 확성기에서 울리는 소리, 하지만 그 다급한 목소리에도 틀라펙스는 물론이고 환영 리자드맨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환영 리자드맨이 허릴 숙이곤 뭔가를 줍더니 받으라는 듯이 틀라펙스에게 던진다.
곡도에 베인 악마의 살점과 깨진 뿔의 파편.
쓸데없는 잡동사니였지만 틀라펙스에겐 달랐다. 신체 조각들을 낚아챈 후, 이전에 악마의 피를 묻혔던 고기 인형-희생양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그 정수가 휘발되기 전에 고기 인형의 뱃속에 뿔 조각과 살점을 쑤셔 넣으며-.
“시이이…….”
불쾌한 진언을 외웠다.
그의 몸 주위에서 심상찮은 마력의 파동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목적지로 향하던 악마의 몸이 멈칫한다. 동시에 틀라펙스가 쥐고 있던 인형의 형태가 변화한다. 칙칙한 회색 가죽이 우윳빛으로 변하고, 바비 인형처럼 형태가 매끈해지는 것과 함께 또 하나의 팔이 돋아났다.
마치, 악마를 흉내 낸 것처럼.
-푸욱!
그렇게 완성된 ‘희생양’에 틀라펙스는 거침없이 단검을 박아 넣고 선언했다.
“네 몸이 느려질 것이다.”
뭔가에 꿰뚫린 것처럼 휘청이는 악마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이탈을 멈추고 다시 틀라펙스를 향해 돌진한다. 여전히 빠른 움직임, 허나 이전에 비해 명백하게 느려졌다. 반투명한 리자드맨 전사가 악마를 막기 위해 경계하는 가운데, 틀라펙스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고-.
-푸욱!
“네 피부는 나약해질 것이며.”
두 번째 저주를 쏟아냈다. 동시에 진주처럼 빛나던 악마의 백색 육신이 살짝 빛이 바랜다.
-투콱! 쾅! 퉁!
손에 들린 황금빛 단창들을 내던지며 수영장에서 잠영(潛泳)하는 것처럼 지면을 파고드는 악마, 리자드맨 환영은 날아드는 황금빛 단창들을 방패로 막아낸 뒤에 곧바로 틀라펙스를 향해 돌진한다.
그사이, 틀라펙스는 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단검을 찔렀다.
“네 영혼은 쇠약해질……. 크륵! 크으으으!”
보이지 않는 손에 가로막힌 것처럼 인형 바로 앞에 멈춰선 채 바들바들 떨리는 단검, 어느새 첫 번째 상처 또한 수복되려고 하는 모습에 틀라펙스는 이를 악물었다. 총 5개의 저주로 완성되는 의식, 하지만 악마답게 마법 저항력이 대단해서 벌써 풀어버리려고 한다. 이게 한계다.
-폭!
힘겹게 단검을 끝부분만 살짝 찔러 넣어 3번째 저주를 끝낸 후, 틀라펙스는 의식을 마무리했다.
“이제 불살라져라!”
-콰-앙!
틀라펙스의 손에 있던 인형이 불타오르고, 질주하던 환영과 틀라펙스 사이의 아스팔트 지면이 폭약이 터진 것처럼 폭발한다. 산탄처럼 흩날리는 자갈과 먼지를 뚫고 튀어나오는 악마, 틀라펙스를 덮치려는 악마의 등짝을 환영의 곡도가 베어나가는 동시에-.
-샤아아아악!
-시이이잇!
틀라펙스의 로브 아래, 굵은 보랏빛 섬광이 튀어나와 악마를 향해 쏘아진다.
아나콘다와 비슷한 크기의 뱀, 숨겨뒀던 한 쌍의 ‘마력 독사’가 악마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세 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악마는 어느새 다시 손안에 회수된 황금빛 단창을 휘둘렀다.
-챙! 콰득! 툭!
오른쪽 어깨 위에 달린 3번째 팔로 등 뒤에서 날아드는 곡도를 막아내고 양손의 단창으로 한 쌍의 마력 독사의 머리통을 꿰뚫어버린다. 그 순간, 악마의 등 뒤에 있던 전사의 환영이 사라지고 틀라펙스는 전사의 환영과 일체화(一體化)된 채 뒤로 쭈욱 빠졌다.
그런 틀라펙스를 악마는 굳이 쫓지 않고 아가리를 쩍 벌리며 불쾌한 웃음을 토해 냈다.
「대단해! 이런 재주가 있다니……! 빠지는 척하면서 틈을 노려 반격하려 했는데, 오히려 내가 당해버렸군.」
단창에 꿰어낸 마력 독사들을 털어내며 칭찬하는 악마, 맨 처음 진줏빛 광택을 보여줬던 육신은 이제 청동색으로 변해 있었고 체형 또한 남성에 가깝게 근육이 붙어 있었다. 심상찮은 모습에 틀라펙스가 백태가 낀 눈의 눈동자를 가늘게 좁히며 ‘쉿-쉿!’ 위협의 소리를 토해내는 가운데-.
「아쉽지만 여기까지군.」
악마는 손에 쥔 단창들을 내리며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혹시 모르기에 틀라펙스는 앞에 선조를 세우고 그 등 뒤에서 또 다른 주술을 준비하며 입을 열었다.
“왜 공격을 안 하는 거지?”
「계속 싸우고 싶긴 한데……. 약속을 해서 말이야.」
“약속?”
「그래, 카르 알굴의 해방을 돕기로 약조했거든. 되도록 몸에 상처 없이 주는 게 좋겠지.」
악마의 몸 위에 나타난 검은 쇠사슬, 그 몸뚱이에 말뚝이 박히고 이어서 사슬이 휘감는 걸 보며 틀라펙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틀라펙스가 준비한 강화 주술이 선조를 향하고, 이어서 선조는 번개 같은 속도로 악마의 머리통을 향해 곡도를 내리찍었다.
-쩌-엉!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악마, 금속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음과 함께 곡도가 그 쇄골까지 두 동강 냈지만 악마는 태연하게 2등분 된 아가리를 뻐끔거리며 반투명한 환영 너머의 틀라펙스를 보며 속삭였다.
「방금 전 공격에 내 투영체는 이미 한계였다. 워낙 알량한 수준의 ‘소환사’가 내 형상을 유지하고 있어서 말이야……. 어떻게든 날 유지시키려다가 그 육신의 정수를 다 태워버린 거지. 정말 아쉬워. 좀 더 놀고 싶었는데 말이야.」
“……!?”
「사실상, 놈을 죽인 것은 너야.」
완전히 형체를 잃고 무너지는 악마, 그와 함께 그 몸뚱이에 박혔던 말뚝과 사슬이 틀라펙스의 몸 위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