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49화 (349/350)

제349화

3.

“허어…….”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 뒤편, 악마와 대등하게 싸우는 틀라펙스를 보며 한 경찰관이 감탄사를 흘렸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무차별 학살을 하던 악마, 4,000만 달러짜리 특수 RAH-66 헬기로도 막지 못한 괴물이 늙은 리자드맨 하나에 막혔다.

“…….”

그런 경찰의 옆에 있는 윌슨도 말은 없지만 감탄하는 기색으로 틀라펙스를, 정확히 말하면 랩틸리언 전사의 유령을 응시했다.

<강령술>로 만들어진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영체, 코드 108 중 하나인 ‘아클카나’를 신앙하면 생긴다는 ‘선조’라는 특수한 영체였다. 틀라펙스의 보조원으로 배정되면서 그 힘에 대해 보고서를 읽긴 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미궁의 신.

기존 종교와의 충돌 우려 때문에 쉬쉬하고 있지만 ‘그들’이 선사하는 권능은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반사회적인 요구를 하는 코드 108은 배척하고 있지만, 이미 현장에선 몇몇 코드 108에 대한 신앙을 허락하고 있었다.

‘아클카나’ 또한 진지하게 ‘허락된 신앙’의 범주에 포함할지 말지 고려 중인 것 중 하나였다.

미궁에서도 믿는 자들을 찾아보기 힘든 신이라 그 권능과 신앙 조건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바위 비늘 일족’이 밝힌 바에 따르면 조상을 공경하고 그를 기억하며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만으로도 저런 선조를 불러낼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반영구적으로.

……혹여 바위 비늘 일족이 밝힌 것들 말고도 ‘반사회적인 조건’이나 ‘특수한 권능’이 있는지 찾는 게 틀라펙스의 보조역으로 붙은 그의 숨겨진 업무였다.

“흐음.”

이어지는 전투를 보며 윌슨은 턱을 쓰다듬었다.

악마에 비해 밀리지만 그래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영체 전사, 저런 강력한 조상이 없는 지상의 인간에겐 쓸모가 없겠지만 미궁 출신들을 대상으론 허락해도 될 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반사회적인 신앙 조건’도 없었고. 무엇보다 ‘선조’라는 저 영체는 부서져도 몇 시간 만에 부활했다.

그렇게 짧은 전투는 얼마 안 가 틀라펙스의 승리로 마무리되는가 했는데…….

“……저!?”

돌연 악마의 몸뚱이 위로 시커먼 말뚝과 쇠사슬이 나타나더니, 이어서 놈의 육신이 무너지며 그것들이 틀라펙스의 몸 위로 전이된다.

“무, 무슨 짓을……!?”

그 순간, 윌슨은 특수탄이 든 권총을 뽑아서 틀라펙스에게 겨눴다. 옆에 같이 있던 경찰이 경악하지만 윌슨은 거침없이 그 방아쇠를…… 당기질 못했다. 죽인 이에게 달라붙어서 육신을 빼앗는 저주, 동시에 그의 머릿속엔 악마숙주에게 <빙의>됐던 피해자들의 사례가 스쳤다.

차라리 <고문>을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되는 일

대부분 사망, 운 좋게 살아남았어도 끝난 게 아니다. 악마가 육신에 깃들면서 그 의식 세계와 얽혔던 이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점 피폐해지다가 자살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강력한 정신을 가진 이들은 견뎌낸다고 하지만……. 윌슨은 자신의 정신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시이이이잇-!”

윌슨이 망설이는 동안, 틀라펙스가 먼저 움직였다.

붉은 갑주의 리자드맨 영체가 연기의 형태로 틀라펙스의 몸에 깃들고, 함께 말뚝과 사슬에 저항한다. 몸에 절반쯤 박혔던 말뚝이 파고들다가 멈춰선 가운데, 틀라펙스는 ‘희생양’이라고 부르는 고깃덩이 인형을 꺼내곤 다급하게 ‘쉿! 쉬이잇!’ 혓바닥을 날름거리곤 옆에 내던졌다.

-촤르르르륵!

그리고, 틀라펙스의 몸에 박혔던 말뚝과 쇠사슬이 희생양이라고 부르는 고깃덩이 인형에 옮겨진다.

그대로 인형을 꿰뚫는 말뚝들, 그에 윌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권총을 내렸다. 큰일 나는 건가 했는데, 다행히 틀라펙스가 혼자서 잘 해결했다. 옆에 있던 경찰을 향해 고갤 까닥인 후, 그는 건물 뒤편에서 나와 틀라펙스를 향해 다가갔다.

“틀라펙스 님, 괜찮으신…….”

“크륵-!”

멍하니 서 있다가 돌연 가슴팍을 붙잡으며 주저앉는 틀라펙스.

재빨리 다가가서 부축하려 했지만 인형이 돌연 잿더미처럼 바스러지고, 그 사슬과 말뚝이 다시 틀라펙스의 몸 위로 나타나는 광경에 멈칫했다. 틀라펙스의 몸에 빙의된 선조의 영체 또한 꺼지려는 형광등처럼 깜빡이며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어어! 저, 저분 왜 갑자기 파래지는…….”

건물 뒤편에 있던 경찰이 ‘불길한 변화’를 눈치채곤 비명을 질렀다.

로브 사이로 드러난 틀라펙스의 피부, 거친 회색의 비늘이 파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왼쪽 머리에 커다란 뿔이 융기하면서 로브의 후드가 흘러내린 가운데, 이마가 갈라지며 시뻘건 홍채를 가진 제3의 눈이 튀어나온다.

“크르르르륵-! 날, 죽여! 아니면 도망!”

어쩔 줄 몰라 하는 윌슨에게 서투른 영어로 일갈하는 틀라펙스, 그에 윌슨은 멈칫하더니 이내 독한 얼굴로 권총을 꺼냈다.

강력한 위력으로 유명한 데저트 이글(Desert eagle) 시리즈, 권총 주제에 무게는 2킬로그램이나 되고 사람 상대로는 과잉 화력인 면이 부각돼서 유명세에 비해 실용성이 없는 화기였지만 근질(筋質)이 다른 마력 각성자에겐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윌슨이 쥔 건, 마법적 처리로 강화까지 된 물품이었다.

-투-쾅!

흉악한 위력의 특수 탄환이 틀라펙스의 다리를 향해 쏘아졌다.

죽이는 것은 꺼림칙했기에 상처를 입혀 제압하려 했지만, 틀라펙스를 감싼 쇠사슬이 ‘출렁-!’거리면서 절로 움직여 그 탄환을 막아낸다. 불똥이 튀기는 모습에 윌슨은 연거푸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투-쾅!

-콰득!

“Fu……!”

쇠사슬이 독사처럼 날아들어서 실패했다.

황급히 뒤로 피한 덕분에 쇠사슬에 맞지는 않았으나 그 궤적의 끝에 권총이 걸리면서 박살 났다. 쥐고 있던 오른손 손가락이 죄다 부러지고 꺾인 건 덤. 윌슨이 허겁지겁 뒤로 빠지는 가운데, 쇠사슬이 연거푸 움직여 윌슨을 후려치려 했으나-.

“시, 시, 시, 시……!”

틀라펙스가 막아섰다.

파랗게 물들지 않은 왼손으로 품 안에서 희생양을 꺼낸 뒤,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며 제약을 가하는 틀라펙스. 그에 움직이는 사슬이 그 틀라펙스를 칭칭 감싼다. 감정을 읽기 힘든 도마뱀 얼굴, 하지만 윌슨은 그가 말하려는 바를 깨닫고 황급히 뒤로 빠졌다.

-스르르르…….

윌슨이 건물 뒤로 완전히 사라진 순간, 고삐 풀린 것처럼 주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강해지고 강렬한 유황 내 비슷한 악취가 진동한다. 마지막으로 틀라펙스를 가호하던 붉은 전사의 환영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어서 몸이 박제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로 허공에 둥실 떠오르고-.

「크! 캬캬캬캬!」

육신을 차지한 ‘카르 알굴’이 웃었다.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닌 머릿속에 직접 꽂히는 것 같은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 이전에 있었던 악마의 염파도 끔찍했지만 그의 웃음은 더더욱 ‘생생’했다. 그 속의 악의를 아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새롭게 차지한 육신을 느끼며 카르 알굴은 만족했다.

지하에서 즈므’루의 소환을 유지하고 있던 와중에 도달한 ‘육신의 한계’, 그 멍청한 놈이 실패한 건가 싶었는데……. 이렇게 강력한 육신을 찾아내서 넘겨줬다! 몸을 짓누르는 저주와 제약을 빠르게 떨쳐내며 카르 알굴은 차지한 ‘육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주 독특한 마법’을 구사하는 강력한 마법사.

직접적인 공격 수단은 적지만 적을 약화시키고 아군을 강화시키는 마법이 주를 이뤘다. 이 육신의 주인은 그런 마법의 약점을 ‘아클카나’를 신앙함으로써 메꿨다. 자신이 이 육신을 차지한 지금, 아클카나의 권능은 사라졌지만…….

「필요 없지.」

-콰드드득!

저주와 제약을 풀어낸 오른손을 꽈악 쥐며 카르 알굴은 웃었다.

막판에 자신이 부리던 노예에게 배신당해 이런 꼴이 됐지만, 이 사슬을 만든 목적은 고향-지옥에 끌려가지 않고 영원히 물질계에 머무르기 위해서다. 강자의 육신을 탈취해 갈아타면서 이 즐거운 곳에 머무르는 것! 그런 만큼, 굉장히 공을 들여서 제작했다.

이 사슬은 착용자의 육신을 강화하고 몇 가지 <악마술> 마법까지 쓸 수 있게 해준다.

지금까진 너무 저열한 육신에 <빙의>됐기에 그 능력을 사용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마법들과 이 육신이 가진 독특한 마법-<주술>까지 합쳐지면……. 이전의 자신과 비견될 만하다.

「크, 크크크. 즈므’루, 멍청한 새끼. 나중에 소환이라도 해줘야겠군.」

즈므’루를 소환하면서 체결한 계약, 사슬에서 해방되면 놈의 노예가 되는 조건이지만……. 지금 카르 알굴은 이 사슬에서 해방될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가 사슬의 주인이자 노예가 되어 영원히 이 즐거운 낙원에 머무를 것이다! 이렇게 강력한 육신을 가진 채로!

하지만, 그 전에 ‘주인들’을 죽이고 ‘책’을 회수해야 하는데…….

「운도 좋군.」

이 육신의 기억엔 ‘작은 주인’에 관한 정보도 있었다. 그년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물론이고 현재 상태에 관해서도. 그걸 읽어 보니 왜 갑자기 자신을 불렀는지 납득이 됐다.

현재, 그녀 옆에는 ‘강력한 조력자’가 있었다.

공항이라는 곳을 혼자서 박살 낸 초인, 이 육신의 기억과 감정을 더듬어 보건대 육신의 주인은 혼자 상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역시, 작은 주인이 불렀을 때 바로 갔다면 사로잡혀서 또 비참한 노예로서 살아가야 했겠지.

하지만, 그런 굴욕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

「날 봐라-!」

공중에 높이 치솟은 후, 그는 룬 문자를 형성하면서 감정을 토해냈다. 그의 장기인 ‘정신 마법’, 뇌리에 꽂히는 그 선언에 숨어있던 고깃덩이들의 시선이 반강제적으로 그에게 향하고-.

-탕! 탕! 타탕!

“죽여!!”

곧 충동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총을 가진 이는 총을 쏘고, 아무것도 없는 이들은 그저 분노에 찬 얼굴로 무작정 달려들었다.

「하하하하! 그래, 날 봐라-!」

적의를 드러내는 군중의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은 후, 그는 연거푸 마법의 목소리를 외치며 작은 주인이 기다리고 있는 호텔 쪽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스읍, 하아아. 스읍, 하아아.”

근처 건물 안, 난간에 달라붙은 채 윌슨은 필사적으로 심호흡하며 날뛰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주 본질적이고 거친 <정신 마법>,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놈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요원으로서 받았던 ‘정신 저항 훈련’과 지금 착용한 ‘마법 저항 장비’, 무엇보다 놈의 능력을 미리 알고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100% 휘말렸다.

“후우우…….”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뒤, 윌슨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떠올렸다. 한국에서 전해준 정보가 맞다면 악마숙주는 이제 틀라펙스가 가진 마법을 사용할 것이다. LAPD 쪽에 알리지 않았지만, 틀라펙스가 구사하는 마법들 중에선…….

“제기랄……!”

최악의 상황, 빨리 보고하기 위해 윌슨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4.

내 꿈은 특별하다.

미르가 유혈에 잠겼을 때도, 타락체가 섬을 장악했을 때도, 뉴 송파구에서 트롤 새끼들이 뒤통수치려고 했을 때도. 그 위험을 사전에 경고했다. 음, 생각해보니 100%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네. 제롬 시장과 우리 싸장님이 사귀게 됐다고 말한 개꿈이 섞여 있었으니까. 그래도 75% 정도면 나름 준수하지.

어쨌든 난 지금 또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지랄이 난 것 같다.

불타오르는 LA 시내, 눈과 입에서 불길을 뿜어내는 사람들이 날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어차피 꿈속이기에 거침없이 베어냈는데, 죽는 순간 놈들이 폭탄마냥 폭발한다. 그 흉악한 위력에 허겁지겁 뒤로 빠지며 다가오지 못하게 독을 뿌려대는데-.

심상찮은 괴물이 나타났다.

거대한 도마뱀, 말뚝과 쇠사슬로 이뤄진 고삐가 있었고 그 위에 악마로 보이는 형체가 올라타 있었다. 시잇~X, 꿈이라서 그런지 형태가 추상적이지만 저게 뭘 뜻하는지는 알겠다. 서예린이 내버려 둔 ‘악마숙주’구만?

어찌 됐든 악마가 손짓하자 타오르는 ‘인간 폭탄’들이 달려든다.

엄청난 숫자, 하지만 내 독 마법은 약한 다수를 상대할 때 빛을 발한다. <맹독성 휘광>과 <시체 부패> 등 범위 마법을 갈겼는데……. 한 놈만 죽여도 그놈이 폭발하면서 주위에 있는 놈까지 같이 폭발한다. 꿈이라서 그런지 이런 간단한 인과관계도 생각 못 했어.

……꼭 융단폭격에 휩쓸린 것 같은 경험이었다.

날카로운 사람의 뼛조각이 날아다니는 폭발에 이리저리 치이고 있는데, 도마뱀을 탄 악마 놈이 어딘가에서 내 머리칼을 구해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는……. 으윽! 숨, 숨이……!

“으헤? 어푸푸푸! 케흑! 케에엑!”

-짜악!

“일어나셈!”

손을 휘저으며 일어나니 서예린이 내 얼굴 위에서 캔 콜라를 들이붓고 있다.

뺨따구도 얼얼한 걸 보니 아주 열심히 뺨을 후려치다가 콜라를 부어버린 듯하네. 근데, 생수도 있는데 꼭 콜라여야 했나……. 하지만 따지진 못했다. 불길한 꿈을 꾼 것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서예린의 표정이 심상찮았으니까.

내가 깨어나자 서예린이 자기 침대에 너부러진 장비를 착용하며 소리친다.

“빨리! 너도 준비하셈!”

“뭔 일이에요?”

“악마임! 악마가 오고 있다고 함! 1급임! 비상 대피 방송 나옴!”

얼굴에 묻은 콜라를 침대보로 닦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3시, 한 16시간 정도 잤네. 어쨌든 나도 장비를 갈아입으며 밖에 <눈>을 띄워 주위를 둘러보니…….

“예린씨, 우리 조진 듯요.”

“머 솔(뭔 솔)?”

장비를 착용하는 와중에도 피자 한 조각을 입에 무는 서예린. 거추장스럽게 설명하는 대신에 난 발코니 쪽을 가리켰다. 그 밖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툭.

서예린은 입에 물고 있던 피자를 떨어트렸다. 쇠사슬을 걸친 낡은 주황빛 로브의 형체가 도로 위를 날아서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 뒤로…….

“악마가 아니라 악마숙주예요. 예린 씨가 놓쳐버린.”

“…….”

“그리고, 놈이 사람들을 조종하네요.”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닌 군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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