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1화 (1/152)

프롤로그

드넓은 바다에서 원양 어선 한 척이 거친 파도를 뚫고 움직이고 있었다.

“어서 움직여, 이대로 가면 배가 침몰한다!”

“젠장!”

선원들은 바삐 움직이며 일했지만 다들 걱정 한가득 품고 있었다.

“어이, 전 씨, 어서 움직여!”

바닷사람이라 생각되지 않는 한 선원 머리에는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아, 젠장, 꼭 나이 든 초짜를 받아야 해?”

“어쩔 수 없잖아. 일하는 사람이 없는데.”

다른 선원들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늙은 초짜 선원을 마땅치 않아 했다.

“어휴.”

“어이쿠.”

험한 바다를 처음 겪어서 그런지 전 씨의 몸은 이리저리 배가 흔들리는 대로 휘둘리고 있었다.

“야! 큰 파도 온다. 다들 꽉 잡아!”

갑작스럽게 큰 파도가 몰아치며 갑판을 덮쳤다.

촤아!

바다 경험이 많은 선원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버텼지만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전 씨 어디 갔어?”

한 사람이 나이든 초짜 선원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큰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사라졌다.

‘아, 이렇게 떠나는 구나······.’

바다에 빠진 그 나이 든 남자가 물속에서 눈을 감는 순간, 지금까지 겪어 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쉽구나, 인생의 작은 성공도 제대로 한 적 없는 내 인생이 아쉬워. 젊은 날에는 고생만 했고, 늙어서는 빚만 가득하구나.’

인생에 작은 성공 하나 제대로 겪지 못 했고 고생만 죽도록 하다 떠나는 인생이었다.

‘그래도 이제 곧 죽음이 올 테니 더 이상 고생 안 해도 되겠지.’

그는 그렇게 바다 깊은 곳으로 점점 끌려들어 갔다.

1

자취방에서 홀로 화장실 거울을 보며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탈모가 진행되어 빠진 머리는 풍성하게 되어 있었고, 얼굴 가득한 주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분명 내 젊은 시절의 얼굴······.”

분명 큰 파도에 휩쓸려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지금 눈 떠 보니 화장실에 있었다.

“왜? 난 분명 거액의 빚 때문에 원양 어선을 타고 있었는데.”

이유는 모르지만, 아주 젊어진 상태로 눈을 뜬 거다. 20억을 빚지고, 도망치듯 원양 어선을 탔던 50대는 없었다.

“귀,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화장실을 나오자 뭔가 무척이나 익숙했고 가만히 앉아서 방을 보자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여긴, 내가 서울에서 처음으로 나와 살던 그 집이구나······.”

처음 자취방을 얻었던 그 집.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집이라 가장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보니 2000년 10월 22일 일요일이었다.

“날짜가 왜······.”

누군가의 장난이라 생각할 정도로 현실을 믿기 어려웠지만, 그는 이미 화장실에서 젊어진 얼굴을 봤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 무슨······.”

주변을 보고 혹시 몰라 TV를 켜도 흘러나오는 건 그때 그 시절의 방송이었다.

“정말,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거야?”

믿기 어렵지만 주변 상황들이 ‘너 과거 돌아온 거 맞아.’라고 외치고 있었다.

거기에 머릿속에서는 그동안 기억했던 모든 것이 떠올라 두통이 찾아왔지만, 그건 잠시. 점점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 나에게 빚은 없다!”

미래에 소속사 차렸다가 실패해 빚 한가득 짊어진 사람은 없고 이제 세상을 새롭게 시작하는 인간만 남은 것이다.

***

월요일 아침 일찍 그가 다니던 소속사에 출근했다. 정해진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고,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그가 일하는 소속사 GU, 대한민국에서 대형 소속사는 아니다. 많은 소속사 중에서 중간정도에 위치했다.

그것도 로드매니저 1년 딱 지난 시점이다.

“어, 재석아 오늘 일찍 왔네?”

“아······ 안녕하세요.”

살짝 얼떨떨하게 말하자, 인사받은 사람이 이상함을 느꼈다.

“왜, 날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봐. 오늘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너 여기서 1년이나 일했잖아.”

재석은 2팀에 소속된 팀장 주명진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얼굴을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 저 잔소리 대마왕.’

지금 생각해 보면 잘되라고 하는 말이었지만, 이때는 정말 그 잔소리 어떻게 피해 보려고 꼼수를 부린 적도 많았다.

“오늘은 일찍 왔네. 그러지 않아도 너한테 할 말이 있다. 너 지금까지 로드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맡았지.”

“예, 뭐.”

재석은 이제까지 GU에 소속된 모든 연예인들의 땜빵 로드였다.

누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이런 거였다.

“오늘부터 땜빵 그만두고 담당 맡아라.”

“담당이요?”

그렇게 바라던 담당 연예인이 생긴다는 말에 입가가 씰룩거리지도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이전에는 그렇게 좋았는데, 그걸 다시 한다니까 뭐랄까······ 기분이 그저 그런데.’

이미 한 번 해 봤고, 지금 상황만 처음에 불과한 거다.

“표정이 왜 그래. 담당 싫어?”

“아, 아닙니다. 조금 놀라서요······.”

말만 놀랐다고 할 뿐 변화는 별로 없었다. 몸은 젊어졌지만, 마음이 늙어 있는 상태다.

“너 놀라는 것도 변화가 없어서 큰일이다. 매니저 일하면서 연예인이랑 쿵짝이 맞아야지. 그렇게 반응이 시큰둥하면 같이 일하는 사람도 피곤해해.”

“예, 조심하겠습니다.”

가벼운 잔소리를 한 주명진이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이것도 그리웠다.

“그리고 여기 파일이다. 네가 가장 먼저 왔으니까 선택해라.”

재석은 그 파일을 받아 들고 첫 번째 프로필을 보자 곧바로 인상을 찡그렸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절망······.’

매니저로 살았고 경험을 쌓아 회사까지 차렸지만,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몇 개 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이 프로필의 여자를 맡았던 때다.

‘성질머리 더러운 인간. 다시는 안 봤으면 싶다.’

재석은 바로 패스하고 다음 프로필을 봤는데 기억에도 없는 남자가 있었다.

‘패스, 다음.’

마지막 프로필을 보자 재석은 눈이 커질 대로 커졌다.

‘임민경!’

재석과 같이 일하는 동기 준석이 선택한 그녀였다. 동시에 멜로의 여왕이자 청순의 아이콘!

시작부터 대박 치고, 그녀가 선택한 영화나 드라마는 아무리 못해도 손해 안 본다는 그 여인이다.

‘그래, 이건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 여자다!’

재석은 마지막 프로필을 들어 올렸다.

“이 사람으로 하고 싶습니다.”

“그럼, 이 신인 연기자는 네 담당이다. 나머지는 오는 대로 선택하라고 할 거다.”

재석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이때 내가 출근을 일찍 했나?’

기억을 끄집어내니 출근이 빠르지 않았다. 준석이보다 항상 늦게 도착했다. 물론 차이는 5분 혹은 10분 정도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정말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준석이 회사에 출근했다.

“준석아, 이리 와라. 이번에 너도 담당 생겼으니까 한 명 골라라. 재석이는 이미 골랐다.”

“예, 팀장님.”

준석이 프로필을 보고 한 사람을 선택했다.

“팀장님, 이 신인 여배우로 하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재석은 준석의 선택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겨우 이 차이에 선택이 달라진 건가?’

오늘 하루 과거로 돌아온 게 기분이 좋아서 일찍 왔는데 그 차이에 이런 기회가 돌아올 줄은 전혀 몰랐다.

‘그래, 인생 실패하고 원양 어선 탔는데, 그걸 또 타면 안 되지. 제대로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살아야지.’

두 번 다시 인생 실패는 없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 달릴 거다.

“이제 신인 담당하게 됐으니까. 오늘처럼 출근도 일찍 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예!”

재석은 활기차게 소리쳤다. 방금처럼 반응이 무미건조하지 않았다.

‘아, 새로운 기분 ,새 출발!’

담당 연예인이 생기자 재석은 눈빛도 달라졌다.

“재석아, 그럼 새로운 일이다. 여기 있는 대본 가져가라 그리고 오디션 일정이 나와 있으니 거기에 맞춰서 연습시켜서 오디션 봐.”

아직 담당 얼굴도 안 봤는데 일거리가 날아온 거다.

“아, 그래도 서로 안면도 안 텄는데요.”

“그러니까 대본 주면서 안면 트라고.”

재석은 그 말에 하는 수 없이 대본을 받아 들었다.

받아 든 대본은 다섯 개, 근시일 내에 오디션을 보는 작품이다.

재석은 몸을 돌리면서 대본을 하나 펼쳐 들자 몇몇 작품은 이미 일부 배역에 X표시가 되어 있었다.

“팀장님, 대본의 이 표시, 배역 끝난 건가요?”

“어, 그래. 끝났어.”

이름 있는 연기자에게 대본을 미리 보내서 주연을 확정 짓는 건 오래된 관례다.

신인을 쓰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안정된 연기력을 선보여야 하니 잘 훈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정말 어렵다.

“흐음.”

첫 대본부터 배역을 따낼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다면 치열해진다.

재석은 다른 대본을 더 보다가 한 대본을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민경이 주인공을 맡은 첫 드라마.’

신인이 시작부터 드라마 주인공을 꿰차는 건 정말 하늘이 내린 기회를 잡은 경우다.

‘맛있는 첫사랑!’

재석은 곧바로 대본을 보자 그 안에는 벌써 여러 개의 X표시가 있었다.

‘주인공 4명 몽땅 X?’

분명 이 맛있는 첫사랑은 민경의 첫 드라마이며 동시에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다.

그런 상황에 이미 주인공 역할들이 되어 있다면 단 하나밖에 없다.

‘같이 연기하면 불편한 인간이 끼어 있다는 것!’

연예계도 사람들 관계가 무척이나 복잡하게 엮여 있다. 어떤 사람과는 친하지만, 어떤 사람과는 껄끄러운 관계가 만들어진다.

“팀장님, 이 대본은······.”

재석이 맛있는 첫사랑 대본을 보여 주기 무섭게 주명진이 다가왔다.

“어, 그 드라마 이미 주인공 꽉 찼어. 누가 주인공 됐는지 거기에 적혀 있을 거야.”

재석이 다시 한 번 대본을 보자 그 역할에 누가 됐는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전부 다 아닌 사람들만 있다.’

분명 이 드라마 연기자들이 대거 교체된다. 그 시작은 분명 한 명이다.

‘어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자.’

혼자서 대본을 들고 기억을 더듬어 가고 있을 때 기억이 딱 떠올랐다.

‘맞아, 메인 남자 주인공이 한 명 교체 됐지.’

제작진의 공식적인 교체 이유는 역할에 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으로 바꾼다는 거였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뽑아 놓은 주인공 연기력이 부족했지.’

막상 뽑아 놓고 보니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거였다. 대본 먼저 보내 놓고 연기를 나중에 확인하니 문제가 된 일이었다.

“바뀐 남주인공은 다른 여주인공 역할의 연기자와 사귀었다가 헤어진 경우고, 다른 남주인공은 그 여자와 현재 사귀는 중이고.”

결국 타인의 연애사가 꼬이고 꼬여 전원 물갈이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이거 뉴스나 신문에 안 나와서 아까운 정보였는데······.”

정말 나중에 알았을 때는 어이가 없었고, 그 기회를 잡은 신인들이 자리를 꿰차는 사태가 벌어졌다.

“팀장님, 이 드라마는 연습용으로 써도 되나요?”

“연기 연습용? 뭐 그래도 되고.”

주명진은 어차피 연습용이라면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근데, 언제 네 담당 만나러 갈 거야?”

“아, 이제 가 보겠습니다.”

“오늘 하루 밖에서 담당하고, 연기에 대해 이야기해. 그리고 오디션 일정은 대본에 다 적혀 있으니까. 그대로 움직이고.”

“예.”

재석은 곧바로 사무실을 빠져나와 민경에게 전화를 먼저 걸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담당 매니저인 전재석이라고 합니다.”

(네! 매니저요?)

“예, 임민경 씨와 함께 일할 매니저입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전달해야 할 물건도 있고 서로 얼굴을 보고 친분도 다질 겸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데요.”

(예, 오세요.)

민경은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 줬고, 재석은 곧바로 그곳으로 가서 민경을 만났다.

“아, 안녕하세요.”

민경은 최대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재석을 마주하고 있었다.

“음, 그렇게 얼굴을 숙이시면 제가 눈을 보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운데요.”

“제가, 초면에 낯가림이 심해서요.”

“연기자를 하실 분이 낯가림이 있을망정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여야 합니다. 하물며 매일같이 봐야 하는 매니저 얼굴인데 그렇게 감추면 같이 일하기 곤란해집니다.”

재석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두 뺨이 살짝 발그레 졌다.

“자, 여기 대본입니다. 받으세요.”

“예.”

그녀는 대본을 받아 들고 옆에 놔뒀다.

“아, 그리고 오늘부터 상대역을 할 겁니다. 저도 연기자가 연기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상대역이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제가 아직 미숙해서 상대역이 없어서 무척 곤란했던 적이 많거든요.”

“이럴 때 필요한 게 매니저죠.”

재석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본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대본에 어떤 배역은 이미 캐스팅 완료가 되었다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디션 날짜도 나와 있고요.”

민경은 대본을 한번 다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배역에 표시된 게 너무 많네요.”

“표시된 배역이라도 연습해야 합니다. 막상 오디션을 볼 때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민경을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신인이라 모르시겠지만, 연예계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캐스팅됐다 하더라도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포기 마세요.”

재석은 민경에게 이 핑계를 대면서 맛있는 첫사랑의 대본을 확실히 연습시킬 생각이었다.

‘지금부터 확실히 준비시킨다. 아직 그녀의 연기력은 대단한 수준이 아니다. 분명 미래에는 멜로의 여왕이지만,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재석이 좀 더 확실하게 그녀의 연기 실력을 높이면 더 좋은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시작부터 연기력 괜찮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 출연을 끝낸 뒤에도 민경의 연기력은 ‘괜찮다.’ 이다. 재석이 원하는 건 ‘좋다.’라는 말이다.

‘내가 신경을 쓴 만큼 연기력이 늘겠지.’

그 신경을 써 준 만큼 그녀 역시 재석을 믿고 따를 거다. 회귀 전에 그녀는 준석과 10년을 넘게 같이했었다. 가만히 보면 일에 있어서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처음 보는 오디션은 합격 여부와 관계없이 경험으로 갑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죠.”

민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잘해 봅시다.”

재석이 손을 내밀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맞잡았다.

‘이제 넌 영원히 내가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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