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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은 민경의 담당이 되면서 연기 연습을 돕기 위해 매일같이 대본을 들고 상대했다.
“오늘 이거 해 봅시다.”
“네.”
재석이 상대역을 하면서 느낀 건 멜로의 여왕이라도 신인 때 연기력은 아직 미숙하다는 거다.
‘지금 모습은 내가 아는 멜로의 여왕이 아니야.’
가만 생각해 보면, 멜로의 여왕이란 이름이 붙은 건 자기 개발을 멈추지 않은 미래의 결과물이다.
“매니저님, 근데 계속 매니저님이라고 부르니까 조금 거리감 느껴져요.”
그녀는 사회생활이 아직 익숙지 않아 호칭에 어색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래도 며칠 봤다고 낯가림은 좀 사라진 모양이네. 좋아, 서로 친해지는 것도 좋으니까. 내가 먼저 이름으로 불러도 돼?”
“네, 좋아요. 저도 오빠라고 부를게요.”
서로 간단한 호칭 정리가 되자 재석은 바로 입을 열었다.
“민경아, 네가 노리는 자리는 어디냐?”
“음, 늙어서도 연기자로서 살고 싶어요.”
“참 어려운 일이네. 근데 넌 할 수 있을 거야.”
아주 훌륭히 잘 해낸다. 재석이 차린 회사는 망해서 원양 어선을 탔을 때, 민경은 여전히 연기자로서 나이는 들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된다.
“오빠,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배시시 웃으며 재석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지금은 네가 원하는 꿈을 이루기에는 멀었어. 연습해야 해.”
“물론이죠.”
민경은 재석의 말에 연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럼, 시작하자.”
“네!”
재석이 대본을 펼쳐 들고 민경의 상대역을 해 나갔다.
***
민경이 첫 번째 오디션을 보는 날이 되었고, 재석은 이 오디션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여기에 실수로라도 합격하면 안 되는데.’
남들은 합격하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데 재석 혼자만 민경이 합격이 아닌 불합격하길 기도하고 있었다.
‘제발, 이번 기회도 떨어지고 다음 오디션도 떨어트려 주세요. 그래서 꼭 맛있는 첫사랑 주인공 역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민경의 연기 재능을 며칠 같이 있어 보면서 느꼈지만, 그녀는 확실히 멜로의 여왕이란 타이틀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다.
‘재능이 너무 좋아.
“오빠, 저 너무 떨려요.”
“민경아, 이번 오디션에 붙는다고 생각하지 마.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해.”
“이왕이면 붙으면 좋잖아요.”
“그만큼 마음 편히 가지라는 거지. 어서 들어가, 결과는 나중에 나한테 연락이 올 거야.”
재석은 민경을 달래는 척하면서 얼른 오디션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후우.”
재석은 걱정이 한 가득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민경의 표정이 별로 안 좋은 상태로 나왔다.
“민경아, 표정이 안 좋네.”
“아무래도 저 오디션 떨어진 것 같아요.”
뭔가 직감이란 게 온 모양이다.
“그래? 어차피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경험이다. 다음을 위해 좀 더 노력하는 거다. 어차피 오디션은 남아 있으니까.”
‘근데 막상 떨어지니까, 기분 안 좋네.’
재석은 오디션 들어가기 전까지는 떨어지라고 기도해 놓고 막상 불합격하니 기분이 안 좋았다.
“오빠, 저 괜찮아요. 다음 오디션 또 보면 되죠.”
민경은 재석의 표정이 안 좋으니까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위로해 줬다.
“그럼, 가자 연습해야지. 내가 오늘도 상대역 해 줄게.”
“좋아요!”
분위기는 바뀌었고, 첫 오디션에 관한 건 금방 잊혀졌다.
며칠 뒤 재석은 MB방송국에 일이 있어 찾아가게 되었다.
찾아간 이유도 간단했다. 주명진 팀장의 약속 장소에 따라가는 거였다.
이것도 방송국 사람과 만나기 위함이었다.
“아이고, 박 피디님, 어디 식사는 하셨습니까?”
“주 팀장이 빨리 오셨네요.”
“뭘요. 그저 드라마국에 안녕을 위해 불철주야 피디님을 만나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주신 대본 잘 받았습니다.”
주명진이 여기 온 이유는 간단하다. 방송사에서 사람들과 만나면서 날아들어 온 대본이 있다면, 그걸 받기 위해서다.
주기적으로 찾아가 인사를 하고 피디들과 식사하고 대본과 오디션 일자를 받아 연기자들을 밀어 넣는 일종의 로비다.
‘박 피디?’
가슴에 달려 있는 명찰에는 박성수라 적혀 있었다.
‘맛있는 첫사랑 연출자!’
민경이 첫 드라마 주연을 하는 드라마의 연출자라면,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
재석은 박성수를 바라보며 아주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이쿠, 주명진 팀장님, 누구입니까? 인사가 아주 싹싹한데요.”
“아이고, 이제 담당 연예인 생긴 매니저입니다.”
“전재석이라고 합니다.”
재석은 차분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대답했다.
“하하하, 사람 참 밝기도 하네요.”
“혹시 식사하셨습니까?”
시간은 아직 점심 전이었다. 지금 이렇게 식사하는 자리에 따라온 것도 일이다.
“아, 슬슬 점심시간이니 나가죠.”
“가시죠.”
주명진과 박 피디가 가자 재석은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기회다, 민경이 오디션에 나갈 타이밍을 잴 수 있는 기회!’
식당에 자리하게 되자 재석은 재빨리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했다. 피디와 팀장은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박 피디님, 드라마는 언제 시작합니까?”
“왜요? 그 전에 신인 배우라도 밀어 넣게요?”
“어허, 그냥 밀어 넣으면 큰일 나는 거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다른 게 아니고 오디션 날짜 때문에 그럽니다.”
“아, 그게 날짜가 조금 미뤄지게 생겼어요.”
“왜, 그러십니까?”
“남자 한 명 바꿨거든요.”
한 명 바꿨다는 말에 재석과 주명진의 귀가 쫑긋 거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작가님이 주인공 연기 실력이 좀 미진하다고 해서, 바꾸자고 해서 바꿨습니다.”
“아, 그랬습니까?”
주명진은 바꿨다는 말에 살짝 아쉬웠다. 오디션을 본다면 남자 연기자 오디션을 볼 수 있는데 말이다.
반대로 재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주인공이 바뀌어서 도미노처럼 무너질 거다.’
단순한 도미노가 아니다.
드라마 촬영에 차질을 빚을 만큼 크나큰 일로 번지게 된다. 동시에 주인공 오디션을 봐야 하는 사태까지 이어지는 사건이다.
재석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있었다. 여기서 입을 열어 봐야 좋을 게 하나 없으니 말이다.
식사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재석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왜?”
“이번 바뀐 맛있는 첫사랑 주인공 말입니다.”
“그 사람이 왜?”
“지금 캐스팅 된 여주인공과 예전에 사귀다가 헤어졌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소문 못 들어 봤는데.”
“담당되기 전에 이리저리 땜빵 다닐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진짜야? 출처는 어딘데.”
“출처까지는 아직 확실히 모릅니다.”
“찌라시는 아니지?”
“거긴 아닌 걸로 들었습니다. 그쪽, 관계자 쪽에서 흘러나온 소문이라는 것 말고는······.”
출처에 대해서도 진짜 믿을 수 있는 건지, 그것도 무척이나 중요했다.
“알았어, 내가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재석보다 발이 넓은 주명진 팀장이 아는 사람들 전화 한 번씩 돌리면 어느 정도 진실이 드러날 거다.
사무실로 돌아오고 난 뒤. 퇴근 시간이 됐을 때 주명진은 재석을 조용히 불렀다.
“재석아, 그 소문 확인해 봤는데 놀랍더구나. 지금 바뀐 주인공 정진이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박선희와 헤어진 상황이고 박선희는 다른 남자 주인공인 지명준과 사귀고 있는 상태다.”
“팀장님, 어떻게 그것까지······.”
재석이야,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으니 정보를 쥐고 있지만, 주명진은 그게 아닌데 전화 좀 돌렸다고 거기까지 파악한 거다.
“뭐, 나중에 술 사 주기로 하고 얻은 거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드라마 캐스팅이 완전히 엎어지는데.”
캐스팅된 주인공들이 쓰나미처럼 쓸려 나가면 드라마에 망조가 들었다는 오명을 씌기 쉽다.
“이거, 나중에 주인공 캐스팅하겠다고 오디션 열려도 문제인데.”
시작부터 분위기가 어수선한 드라마에 쉽게 그걸 하겠다고 덤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아닙니다. 해야 합니다. 맛있는 첫사랑 대본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재미있습니다.”
재석은 분위기와 대본이 다름을 주장했지만, 주명진은 고민에 빠졌다.
“흐음, 하지만 다른 연기자들이 덤벼들면 어차피 도루묵이야.”
“못 할 겁니다. 대본은 재미있지만, 이름 있는 연기자들은 쉽게 못 덤빌 겁니다. 촬영장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여길 거니까요.”
주명진은 재석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이 드라마 여주인공 역할을 신인에게 주고 싶은 거냐?”
“물론입니다. 제가 아직 로드 생활하지만, 담당 연예인 주인공 만들고 싶은 건 팀장님이나 저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하아, 네가 그렇게 원하니 한번 준비만 해라. 아직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절대적으로 추측이다. 결과는 모른다. 연기자들이 물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전 물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습니다.”
“너무 섣부른 확신 같은데.”
주명진은 재석이 도박을 한다고 느꼈지만, 재석은 도박이 아니라 확실하기에 강력하게 주장하는 거다.
“어차피 준비만 하는 거니까······.”
“그럼, 전 가서 연습부터 철저하게 시키겠습니다.”
“알았다. 나중에 그쪽 결과 나오면, 가장 먼저 알려 주마.”
“예.”
재석은 늦은 시간에 민경에게 찾아가 급하게 말했다.
“민경아, 맛있는 첫사랑 대본 아직도 있지.”
“예, 집에 놔두고 있죠. 그걸로 몇 번 연습도 해서요.”
“그 드라마 주인공 배역 오디션 볼 것 같다.”
“지, 진짜요?”
“그래, 너도 이 대본 봐서 알지만, 꽤나 재미있는 거 알잖아.”
“물론이죠.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 그리고 주인공 오디션을 못 보니까 정말 아쉬웠던 작품인데.”
도전조차 못 한다는 게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부분이다.
“이제 기회가 생겼어. 지금 당장 오디션은 안 보지만 오디션 일정이 바뀔 거야.”
재석은 일정이 바뀐다는 말에 민경은 눈빛이 바뀌었다.
“진짜요? 그럼 해 볼 수 있는 거네요.”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너무 늦어서 어렵겠네.”
“아니요. 안 늦었어요.”
민경의 말은 재석을 당황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괜찮아요. 오늘부터 연습해요. 상대역 해 주세요.”
열정이 타오르는 눈빛을 보니 재석은 내일부터 할 일을 오늘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좋아, 하자.”
둘은 이제까지 연습을 위해서만 했던 대본을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는 금방 정해졌다.
“장희진 역에 도전할래요. 이 역만큼 사랑스러운 역할이 없으니까.”
“네가 가장 자신 있으니까 그렇겠지.”
“예.”
며칠 뒤에 맛있는 첫사랑에 캐스팅되었던, 박선희가 정진과 과거 영화를 찍었을 때 스캔들을 들먹이면서 하차했다.
거기에 다시 며칠이 또 지나자 기존에 캐스팅된 남주인공이 또 하차했고, 정진을 제외하고 두 사람이 남았는데 다른 한 사람도 사정상 하차를 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주인공 한 명 바꿨을 뿐인데 줄줄이 하차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일이 터졌다.
“재석아, 예상대로 다 하차했다.”
“드라마는 계속 간다고 합니까?”
“이미 편성까지 확정받은 드라마야. 다른 땜빵을 넣을 수도 없어.”
“그럼, 다른 배우들은요?”
“그쪽도 알아봤는데, 유명 배우들이 다른 스케줄 때문에 다들 고사하고 있어. 박 피디는 지금 똥줄 타고 있을 거야.”
연기자들이 줄줄이 빠져나간 상황에 피디라고 별수 있겠는가. 그냥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뭔가 발버둥칠 거다.
“아주 좋은데요.”
캐스팅된 이들은 빠져나가고, 기성 연기자들은 고사한 상황에서 선택은 하나다. 신인 연기자들을 뽑아 그걸 끌고 나가는 것 말곤 없다.
“네가 들은 소문 때문에 확인한 거지만, 일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갈 줄은 전혀 몰랐다.”
“오디션 날짜만 알려 주십시오. 당장 달려가 주인공 역 따내겠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연습을 시켰기에 재석은 자신 있었다.
“이런 상황이면 길어야 사흘 안에 오디션 날짜가 잡힐 거야.”
주명진의 말대로 이틀 만에 오디션 날짜가 잡혔고 할 수 있는 오디션 홍보는 다 했다.
재석은 그 날짜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준비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