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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오츠카 홍보부장 조수연의 화려한 등장에 조금 놀랐지만, 민경을 제외하고는 다들 별 감흥이 없었다.
“정말 아쉽네요. 제가 젊은 시절 당신을 만났다면 연예인 한번 해 보자고 캐스팅을 시도했을 텐데.”
주명진이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살짝 던진 말에 조수연은 칼같이 끊어 버렸다.
“관심 있었다면 제가 먼저 했겠죠. 하지만, 전 연예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회사 다니는 게 체질에 맞습니다. 그것보다 임민경 씨, 화면에서 볼 때보다 훨씬 분위기가 좋네요.”
“가, 감사합니다.”
센 언니에게 기세가 눌린 민경이었다.
‘여기서 내가 할 말이 없어서 아쉽네.’
재석이 주명진의 자리였다면 일을 주도했을 텐데 그게 아니라서 조금 아쉬웠다.
“일단, 저희가 원하는 모델 후보를 직접 보니 그래도 괜찮네요.”
모델 후보라는 말에 재석은 살짝 입안이 썼다. 하지만, 민경의 이미지가 워낙 좋아서 지금 이 자리에서 가만히 있어도 거래 성사는 확실히 될 거다.
“흐음.”
조수연은 민경을 뚫어지게 보면서 아주 아름다운 예술품을 대하듯 감상했다.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 확실히 다른 애들과 차원이 다르군.”
이미 다른 이들이 이곳을 거쳐 간 모양이었지만, 그래 봐야 민경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일단, 계약서 조율을 좀 하죠.”
‘일 진행 속도 한번 화끈하네.’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민경이 자리한 가운데서 계약서 조율 내용이 빠르게 정해졌다.
“이번 콘티입니다. 한번 보시죠.”
그녀가 콘티가 들어있는 서류철을 내밀었고 주명진이 가장 먼저 보았다. 오랜 세월 이 바닥에서 일해 그런지 콘티를 보고 어떤 콘셉트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꽤나 괜찮네요.”
재석도 같은 자리에 있어서 콘티를 봤다.
‘내 기억과 조금 다른데.’
그는 회귀 전에 이런저런 걸 많이 겪었고 콘티에 대한 것도 좀 알고 있었다.
‘콘티가 다르면 나중에 바뀌거나 무슨 일이 터졌다는 건데.’
이미 미래를 봤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촬영 일자는 최대한 빨리 했으면 싶은데요.”
조수연은 일을 빨리 처리하고 날씨가 따뜻해지는 시기에 맞춰서 광고를 내보낼 계획이었다.
“드라마 촬영은 3월 초에 끝납니다. 하지만, 무리한 일정 때문에 며칠은 쉬어야 합니다.”
주명진은 배우의 컨디션을 챙겨야 일이 더 잘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충분히 고려할 만한 사항이군요. 그럼 3월 중순경 어떻습니까? 그때쯤이면 충분히 쉬었다고 보는데요.”
“그거 좋겠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저희 쪽에서 잡은 뒤에 알려 드리죠.”
“기다리겠습니다.”
양쪽 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 내고 자리를 끝냈다. 그리고 돌아가는 자리에 민경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후우, 광고 계약이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나요?”
“아니, 이렇게 빨리 안 되고 대부분은 광고주 쪽에서 모델을 미리 선정하고, 연락하고, 회의하고, 계약 조율하고 이런 걸 거쳐서 하다 보면 시간깨나 걸려.”
“그럼, 이건?”
“좀 특수한 경우지.”
“그렇구나.”
“들어가서 내일 촬영 있으니까 연습 열심히 해 놔.”
“혼자는 심심해요. 상대역 좀 해 주세요. 그리고 저녁밥도 같이 먹고요.”
지금 민경은 이곳에 와서 친구도 뭐도 없는 상태다. 일 말고는 할 짓이 없는 그녀라서 재석이 있어 주는 게 그 심심함을 달래는 길이었다.
“알았다.”
결국 재석은 민경의 상대역을 해 주기 위해 그녀 곁에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 남아 있어야 했었다.
“오빠, 정산받으면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어떤 걸 도와줘?”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뭔가 좀 놔야 할 것 같거든요.”
“하긴, 요즘 드라마 모니터링하는 것도 회사까지 찾아와 했지.”
연예인에게 TV는 무척이나 중요한 물건이다. 각종 드라마나 영화에 관련된 연구를 위해서는 미디어 기기가 필수다.
“알았다. 그거야 뭐 어렵겠냐. 혼자 다니기 어색하기도 할 테니까. 거기에 정산은 조만간 될 것 같은데.”
드라마 관련된 정산이 곧 될 거다. 아직 신인이라 받는 돈이 크진 않지만 분명 많은 도움이 된다.
재석은 그렇게 저녁까지 함께하고 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맛있는 첫사랑은 마지막 편이 되어 갈수록 시청률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촬영은 벌써 마지막 장면을 찍고 있었다.
“좋아, 민경아, 마지막 신 뭔지 알지?”
“키스 신이죠.”
“그래, 내가 상대랑 키스하기 어려우면 뭘 생각하라고 했지?”
“작은 강아지요.”
사람이 아닌 대상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서 상대와 키스신의 어색함을 없애라는 거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첫 키스 신이니만큼 중요하기도 해서 깔끔하게 처리하자는 거였다.
“심호흡하고 트레이닝 해.”
“예.”
재석은 그러면서도 날씨를 봤다.
‘아주 미치도록 바람이 부는 구나.’
촬영 설정은 겨울을 넘어 봄이 온 것처럼 꾸미는 일인데, 이놈의 날씨는 아직 봄이 오지도 않았다.
다들 두꺼운 옷을 입고 준비 중이었고 민경 역시 정신만 무장한 상태로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민경은 입고 있던 두꺼운 코트를 벗자 순간적으로 온몸에 스며드는 찬 바람과 맞서 싸워야 했다.
“으으으.”
“민경아, 정신 집중.”
민경은 고개를 돌려 비장한 각오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대 배우인 정진을 바라보았다.
“후우, 후우.”
정진 역시 찬 바람 몰아치는 이 순간이 죽도록 싫었지만, 그래도 연기 경력이 좀 되다 보니 어느새 정신을 집중했다.
“춥다. 길게 가지 말자.”
“네, 선배님.”
둘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서 얼굴 표정을 풀기 시작하더니 지금이 마치 따뜻한 봄인 것 마냥. 얼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자, 액션!”
둘의 키스 신이 시작되자, 재석은 그걸 보고 드디어 이 드라마가 끝난다는 걸 실감했다.
“컷!”
감독이 외치는 소리에 재석은 들고 있던 코트를 가지고 민경에게 달려가 덮어 주었다.
“민경 씨, 떨리는 게 카메라에 잡혔어. 한 번만 더 가자.”
“죄송합니다.”
이 찬 바람이 몰아치는 날에 감정 고조가 필요한 신을 찍는 건 연기자들에게는 정말 안 좋은 조건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촬영이 힘들었고 민경과 정진이 추위를 극한으로 참으며 결국 어떻게든 키스 신을 찍었는데, 끝나자마자 민경의 코에서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에취!”
바로 콧물이 지익하고 흘러나오는데. 그걸 본 재석이 순간 웃어 버렸다.
큭!
콧물 때문에 민망한 민경이지만 매니저가 웃었다는 것에 순간 째려봤다.
“아, 미안, 너무 귀여워서.”
“흥, 귀엽다고 해 줘서 한 번 봐줬다.”
“자, 여기 휴지.”
가볍게 코를 닦아 내자 조연출이 크게 외쳤다.
“오늘 있는 쫑파티에 늦지 말고 참석해 주세요.”
드라마가 끝나면 다들 수고했다며 행해지는 쫑파티. 거기서 연예인 차 태워 보내는 거 그게 끝이다.
다음 날 민경은 아주 푹 쉬었고, 재석도 마찬가지였다.
공식적으로 그간 고생해서 며칠 쉬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 날이었다.
그다음 날에 출근하자, 재석의 책상 위에 비행기표가 떡하니 있었다.
“이게 뭡니까?”
“방송사에서 드라마 성공적으로 끝나서 보내 주는 해외여행.”
재석은 그 이야기를 듣자 순간 떠올랐다. 드라마가 성공하면 방송사에서 보내 주는 여행을 떠올렸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밖에 다녀오겠습니다.”
“왜? 네 담당 여권 없어?”
“확실히 없을 겁니다. 외국 여행을 안 가 봤으니까요.”
이맘때 그녀는 해외로 나간 적이 없었으니 이번이 처음이다.
재석은 나가면서 전화를 걸었고, 역시나 여권이 없었다.
곧바로 차를 타고 그녀를 태워 급하게 사진 찍고 여권 신청까지 하고 며칠 뒤에 공항에 민경을 데려다주면서 한마디 했다.
“조심해. 길 잃어버리지 말고, 이상한 놈이 접근하면 차단하고, 같이 지내던 연기자들 동료 이상으로 보지 말고.”
“오빠, 무슨 잔소리가 이리도 많아. 누가 보면 남편인 줄 알겠다.”
“남편도 이렇게 안 해.”
둘은 가볍게 아옹다옹했다. 그녀를 보내고 난 뒤에, 재석은 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휴가를 받았다. 좀 쉬라고 말이다.
“아우,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 하나.”
며칠 동안 느긋하게 쉴 수 있다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부웅!
핸드폰이 울리자 살짝 귀찮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안 받을 수 없는 전화였다.
“네.”
(선배님.)
전화를 건 대상은 바로 최민철이었다. 이제 일 시작한 신입이지만, 정말 바쁘게 회사 일을 하는 직원으로 바뀐 인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다른 게 아니라, 대본을 좀 봐 주셨으면 해서요.)
“대본?”
대본을 봐 달라는 건 어떤 게 좋은지 알려 달라는 뜻이다.
‘아직 둘 다 대본이나 시나리오 보는 눈이 없을 때야.’
어차피 지금은 잘나가건 못 나가건 상관없다. 망한 영화라도 주연을 맡아 사람들 눈에 노출되는 게 중요했다.
“알았어, 그쪽으로 갈게.”
재석은 민경이 비행기를 탄 시점에서 휴가가 시작됐지만, 아무래도 그 휴가를 온전히 즐기지는 못할 것 같았다.
재석은 최철민의 연락을 받고 그 장소에 도착하자, 몇 부의 대본과 시나리오가 놓여 있었고, 권진우가 그 자리에 있었다.
“둘 다 같이 삽니까?”
“예······.”
“돈 아끼려고요.”
눈물겨운 상황이다. 둘 다 돈이 없어서 월세라도 아끼려고 함께 돈을 내고 있었다.
“그럼, 둘 다 대본은 다 봤나요?”
“예.”
“그럼, 뭐가 재미있었나요?”
“딱히 이렇다 할 재미를······.”
확실히 이해가 잘 안되니 재미를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배역은 어떤 게 있습니까?”
“드라마는 단역 중심이고,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한번 대본을 보면서 이야기하죠.”
재석은 대본들의 제목을 보면서 뭐가 뭔지 다 기억이 났다.
‘권진우가 해야 할 건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하냐의 차이인가?’
“그럼 한 번씩 보죠.”
재석은 대본을 읽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내용이 썩 마음에 드는 대본이 없군요.”
“하아, 역시.”
두 사람 다 이미 한번 읽어 봐서 알고 있었지만, 재석의 말이 쐐기가 되어 버렸다.
지금 당장 나온 대본이나 시나리오 중에 쓸 만한 게 없다면 답은 하나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건 이거네요.”
재석이 손에 든 건 ‘무림고’의 영화 시나리오였다.
“무림고? 그건, 내용이 너무 웃기기만 하고 현실성이 별로 없어 보이던데.”
최민철의 말에 재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민철, 이 영화가 만약 나온다면 어떻겠어?”
“선배님, 이 영화가 나온다고요? 하지만, 한국에 이런 무협 영화가 성공할까요?”
2001년이면 일반인들이 충분히 최민철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 기술은 미국이나 가지고 있는 최첨단 영화 기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쎄? 그냥 무협 영화일까? 내가 볼 때는 그냥 무협은 아니야.”
물론, ‘무림고’라는 영화의 흥행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권진우에게는 일종의 기회였다.
그가 이 뒤에 찍을 영화 ‘동갑 과외’, ‘말죽거리’에서 맡은 학생 역할의 단초가 이 ‘무림고’에서 시작된다.
‘반드시 따야 하는 역할이다. 실수조차 용납할 수 없지.’
회귀 전 그가 어떻게 이 역을 따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재석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다.
‘최민철에게 일일이 지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배역을 따야 한다.’
“그리고 전부 다 그저 그렇다면, 배역이라도 비중 있어야겠지.”
재석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오디션도 중요하지만 연기 말고 다른 것도 보여 줘야 합니다. 드라마와 달리 액션이라는 상황에서 써먹을 게 필요하니까.”
“몸 쓰는 거라면 자신 있습니다. 그간 운동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그 어떤 액션이라도 소화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시절부터 워낙 몸을 다부지게 다져왔기에 당장 옷을 벗으면 그 꿈틀거리는 근육을 볼 수 있다.
“그럼 이소룡 정도로 쌍절곤 돌릴 줄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보여 드리죠.”
그는 집에 비치되어 있는 쌍절곤을 꺼내 들더니 아주 숙련된 기술자처럼 돌리기 시작했다.
‘말죽거리의 한 장면을 여기서 볼 줄이야.’
그 영화가 만들어지려면 한참 남았지만, 벌써부터 그는 준비되어 있는 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