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재석은 휴가 기간에 권진우와 최민철을 만났다. 물론 그들의 일과가 끝나는 늦은 시간에 잠깐 보는 정도였다.
“너무 어른스러워요. 무림고는 선생님 역할이 아니면 다 학생인 데다 도전할 배역이 송학림이라는 학생입니다. 비록 학생들 사이에서 1인자지만, 학생 역이라는 건 변함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좀 더 다시 캐릭터를 고민해 보죠.”
재석의 말에 그는 힘든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럼, 다음에 볼 때는 좀 더 나은 캐릭터 고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슬슬 재석의 휴가도 끝나 가고 민경의 광고 촬영을 위해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
공항 출국장을 빠져나온 민경은 재석의 얼굴을 보기 무섭게 쪼르르 달려왔다.
“오빠!”
“여행은 어땠냐?”
“뭐, 패키지여행이라 특별할 건 없었어요. 나중에는 꼭 자유 여행 하고 싶어요.”
“흐음, 그럼 영어 좀 공부해야 할 건데.”
“으윽!”
영어라는 말에 민경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하려면 좀 배우긴 해야 하는데······.”
“누가 너 데리고 해외여행 가기 무척 힘들겠구나.”
“칫! 그러는 오빠는 영어 잘해요?”
“좀 해.”
“그럼 해 봐요.”
“내가 말한다고 이해는 해?”
“으으으!”
뭔가 분한 느낌이 드는지 민경의 표정이 잔뜩 화나 있었지만, 재석은 그 표정을 보며 웃었다.
“솔직히 나도 못해, 그냥 너 놀려 본 거야.”
“오빠!”
놀려서 조금 삐졌는지 민경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저쪽 가서 조각 케이크라도 먹을래?”
“흥!”
재석은 민경의 등을 밀면서 공항에 있는 빵집로 들어가서 초콜릿 케이크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 먹으면서 화 풀어.”
달달한 것은 화난 마음도 풀리게 만드는 마법의 묘약. 민경은 케이크를 안 먹을 것처럼 굴다가 재석이 억지로 손에 쥐어 주며 먹이자 표정이 금세 바뀌었다.
“칫! 봐줬다.”
“이거 먹고 집에 가서 푹 쉬어. 비행기 타느라 고생했는데.”
“오빠, 선물.”
민경은 해외여행 기념으로 기념품을 사왔다. 물건을 보니 아주 작은 거지만, 재석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이런 선물도 다 받아 보네.”
“그럼, 오빠 챙겨 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민경은 케이크를 다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이제 집에 가자.”
그렇게 민경을 데려다주고 그날 회사에 가보니 주명진이 비행기표를 또 내밀었다.
“웬 비행기표가 또 있나요?”
“뭐긴, 이번 광고 촬영을 위해 해외로 나가는 거지. 이번에는 그리스다. 직항이 아니라 다른 곳을 경유해야 돼. 그리고 너 여권 있냐?”
여권이라는 말에 재석은 조용히 일어났다.
“왜 일어나?”
“여권 사진 찍으러 갑니다.”
“미리 준비 좀 해 놓지는······.”
며칠 뒤, 재석은 회귀하고 처음 발급한 여권을 손에 쥐고서 그리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
“오빠, 비행기 처음 아니에요? 왜 이렇게 침착해요.”
“처음 비행기 탔다고 호들갑 떨 필요 있어?”
“어휴, 뭔 말을 못 해요.”
그러면서 재석은 이번 광고 촬영에 쓰는 콘티를 보면서 의아해했다.
‘분명 민경이 찍은 이 전설의 광고에서 콘티는 요트를 타는 장면이 회귀 전엔 없었는데 왜 이게 여기 있을까?’
콘티는 하나가 아니라, 세 개 있었다. 물론 재석은 다른 두 개를 알았지만 다른 하나는 의문이었다.
‘내 기억에 없는 콘티가 있는데, 이건 왜 이럴까?’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민경이 불쑥 말을 걸었다.
“오빠, 그거 본다고 알아요?”
“어, 알아. 몇 번 봤거든. 어떻게 찍는지, 순서는 그리고 시간은 어떤지. 광고에서 콘티는 건물 지을 때 설계도 같은 거라. 이 안에 다 나와 있어.”
재석은 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광고에 대해 거의 무지한 민경에게는 재석의 이런 모습이 조금 달라보였다.
“그럼, 어떻게 보는지 알려 주세요.”
“무척 쉽지.”
재석은 콘티의 내용을 비행기 안에서 차분히 설명해 줬고 이야기를 다 들은 민경은 콘티에 대해 좀 알게 되었다.
“이제 좀 알겠어?”
“네, 아주 확실히 알겠어요.”
민경이 이 뒤에 찍을 광고는 아주 많다. 거기에 벌어들이는 수익도 해마다 증가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
재석과 민경은 촬영장인 산토리니 섬에 도착하자 얼굴 표정이 죽을상이었다.
“으, 비행기만 열일곱 시간을 타다니.”
처음 몇 시간은 참을 만했지만, 경유지 공항에 잠시 기다렸다. 아테네에 도착해서 다시 산토리니 섬에 들어갈 때도 공항을 이용해서 들어갔다.
“아이고, 드디어 숙소네.”
방에 들어가기 무섭게 재석은 쓰러져서 아침이 될 때까지 눈을 뜨기 어려웠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날 때도 민경보다 먼저 일어나 방문을 두드려야 했다.
똑똑!
“아, 잠시만요.”
민경은 가벼운 준비를 끝마치고 나왔다.
“오빠, 일찍 일어났네요.”
“그래도 좀 피곤해. 너무 긴 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 있어서 허리가 다 아프다.”
“그건 저도 그래요.”
“그럼, 나가자 촬영 시간 늦겠다.”
밖으로 나가자, 촬영 팀은 이미 짐을 다 준비하고 차에 올라타 있는 상태였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이번 CF촬영을 지휘할 김민수 감독. 아마 이번 광고를 통해 광고계에서 좀 인정받는 감독이 될 거다.
“어서 차에 타세요.”
“네.”
그렇게 차에 올라탔지만, 차가 작아서 둘 다 몸을 한껏 움츠려야 했다.
“감독님, 첫 촬영은 어떤 것부터 합니까?”
“콘티는 자전거부터 할까 합니다.”
기초 체력을 요구한 장면은 아니었다.
“그럼, 장소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합니까?”
재석의 물음에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최대한 빨리 찍어서 일을 끝낼 겁니다. 오후가 되기 전에 끝내고 해가 떨어지기 전에 두 번째 촬영을 끝낼 생각입니다.”
두 개의 콘티를 하루에 끝내자는 거다.
‘빡빡하네.’
머나먼 땅에서 하루라도 빨리 찍어 돈 나가는 걸 최대한 줄이려는 목적이었다.
“하아.”
민경은 재석에게 들릴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촬영이 힘들겠다는 걸 알린 거였다.
“민경 씨, 어디 속이 안 좋으세요?”
“네?”
순간 민경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고만 있었다.
“아, 어제 긴장돼서 잠을 좀 못 잤다고 합니다.”
재석이 대신 말하자, 감독은 조금 걱정했다.
“몸 관리 잘하셔야지요.”
“네, 네.”
민경은 대답 잘하면서 대화했지만, 그것도 잠시, 촬영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사람들이 촬영 세팅을 했다. 거기에 민경은 커튼이 쳐진 차 안에서 메이크업과 옷을 갈아입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서 민경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무척 긴 치마를 입은 민경이 촬영장에 나오자 다들 민경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반대로 재석은 한껏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화답하는 건 민경이었다.
“입 찢어져요.”
“내가 키우는 배우가 아름다울수록 난 좋지.”
솔직한 심정이었다.
“좋아, 좋아. 그럼 저쪽으로 가서 자전거에 올라타세요.”
긴치마를 입어서 자전거를 타라는 말에 민경은 살짝 긴장을 했다.
치마 입고 자전거를 타는 게 조금 걱정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조금만 심하면 치마가 들썩거리기 때문이다.
“후우, 알고 있지만······.”
“민경아, 걱정 마. 바람 상태보고 감독이 결정할 거야. 속바지 착실히 입었지?”
“네.”
그래도 치마가 바람에 들춰진다면, 속바지가 있어도 긴장되는 게 여자다.
“심호흡 한번 하고.”
“후우!”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제 웃어라. 민경아.”
“네.”
재석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고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액션!”
민경이 자전거를 타고 길을 지나가는 장면을 찍는데 첫 장면은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바로 ‘컷.’을 외쳤다.
“민경 씨, 좀 더 느낌을 살려봐, 정말 신나는 모습으로.”
“네, 감독님.”
하지만, 민경의 촬영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이런 광고는 처음이었고, 감정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의 NG가 나자 감독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느낌이 안 나오는데.”
재석은 감독의 뒤에 서 있어서 그 말을 다 들었다.
“민경 씨, 딱 5분만 쉬었다 갑시다.”
“네.”
민경도 몇 번의 NG가 나면서 조금 시무룩해졌다.
‘내가 나서야 하나?’
촬영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재석이 움직이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민경아, 괜찮아?”
그녀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고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은지 재석에게 물었다.
“오빠,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죠?”
아직 온전히 감정을 이끌어 내기에는 훈련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민경아, 네가 부모님이랑 가장 즐겁게 놀았을 때가 혹시 기억나? 여행을 가서 기억난 거 말이야.”
“어릴 적에 아빠랑 즐겁게 논 적이 있어요. 바다는 아니지만······.”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어. 지금 필요한 건 그때 그 감정이야. 즐거웠던 감정, 그걸 떠올려. 굉장히 어린 아이 같은 웃음이 필요할 때야. 동심을 되살리면 더 좋겠지만, 그건 어려울 테니 그때 즐거운 기억만 살려.”
민경은 뭔가 실마리를 잡았는지 혼자 눈을 감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재석은 민경이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느낀 재석은 곧바로 감독에게 갔다.
“감독님, 5분만 시간을 더 주십시오.”
“왜요?”
“감정을 다시 잡고 있는 중입니다. 딱 5분만 더 주십시오.”
“안 되는데······.”
하지만, 감독도 더 좋은 장면을 찍고 싶은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딱 5분 더 드리죠.”
겨우 10분이란 시간을 벌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재석은 꾸벅 인사하면서 곧바로 민경에게 갔다. 아직 감정을 잡고 있는 중인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얼굴 표정은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역시, 멜로의 여왕. 금방 감정 잡는구나.’
남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거다. 물론 그녀의 노력이 부족하진 않았다. 재석이 그녀를 옆에서 지켜본 결과였다.
민경이 눈을 뜨자 재석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됐구나.”
“네!”
한껏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좋아, 자리로 가서 준비해. 내가 감독에게 이야기할게.”
“알았어요.”
민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그녀의 움직임에 다시 촬영이 시작되는 걸 직감했다.
“감독님, 됐습니다.”
“카메라!”
감독의 외침에 카메라가 준비되었고 다른 스태프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준비됐습니까?”
민경은 대답 대신에 손을 흔들었다.
“액션!”
그녀가 자전거를 타면서 내려오는 장면을 찍었고 그 장면을 찍는데 얼굴 표정이 너무나 확연하게 달라지는 걸 본 감독은 절로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좋은데.”
목표 장소까지 쭉 가는데 감독은 ‘컷!’을 외치며 이번에는 약간의 콘티를 변경시키고자 했다.
민경을 보고 있으니 새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민경 씨, 이렇게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감독은 약간의 내용을 바꾸면서 이야기하자 민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좋아요. 그럼 해 봅시다.”
그렇게 촬영은 다시 시작했고 곧바로 큰 틀은 그대로고 약간의 변화를 가해 새로운 촬영분도 찍게 되었다.
오후가 되자 곧바로 촬영이 접었다. 거기에 감독의 표정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오후 촬영도 열심히 해 봅시다.”
***
간단한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오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어느 한 골목에서 찍게 되었다.
“오빠, 이거 두 번째 콘티 맞지?”
“응, 콘티대로 한다면 저쪽에서 신나게 웃으면서 저쪽으로 뛰어 내려가는 거지.”
“멀다.”
민경은 첫 번째 촬영을 하면서 같은 장면을 수도 없이 찍는다는 걸 깨달아서, 거리 얼마 안 되는데 엄청 멀게 느껴졌다.
“한 번에 끝내고 싶으면 첫 촬영 할 때 감정 유지해.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재석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