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민경은 두 번째 콘티 촬영을 하면서 몇 번을 찍고 또 찍고 했는지 모를 정도로 뛰어다녔다.
감독이 ‘컷!’을 외치면 바로 자리에 앉아서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 다리가 아파 왔다.
재석은 준비된 얼음 팩을 가져와 민경의 다리에 대면서 찜질해 주거나 급하게 마사지하는 등 근육을 풀어 주기 위해 움직였다.
“으으, 힘들다.”
“조금만 참아. 감독 표정을 봐서는 지금 촬영 신이 마음에 든 모양이야.”
“진짜?”
“그래, 이후에 혹시 몰라서 한두 신 더 찍을 순 있어도 거기까지일 거야.”
민경은 재석의 말에 이제 오늘 일이 끝날 수 있다고 희망을 품게 되었다.
“제발,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어.”
민경은 이미 정신적, 체력적 피로도가 꽤나 높은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다리 어때?”
“이제 좀 괜찮아요.”
“좋아, 그럼 촬영하러 가. 이제 곧 끝날 거야.”
재석의 말에 민경은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여기고 모든 걸 쏟아부었다.
“OK!”
감독이 좋다는 사인을 하자 오후 촬영이자 두 번째 콘티 촬영이 끝났다.
“아, 이제 집에 갈 수 있어.”
민경은 바닥에 주저앉아 힘없이 만세를 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빠, 도와줘.”
“알았다. 업혀라.”
재석이 그녀를 업자, 그녀는 정말 힘이 없는지 그의 등에 기댄 채 축 늘어지다시피 했다.
“민경 씨, 괜찮아?”
감독의 말에 민경은 힘없이 손만 흔들 뿐이었다.
다들 차에 장비를 싣기 바빴지만, 실제로 촬영장과 숙소와의 거리는 걸어서 충분히 갈 만한 거리였다.
“오빠, 미안해.”
“아니야, 어차피 매니저가 연예인 챙기는 거야 해야 할 일이고, 신인은 더더욱 신경 써 줘야지.”
“근데, 일로만 날 챙겨 주는 거야?”
“단순히 일만은 아니지. 넌 내 첫 번째 배우잖아. 더 각별해. 일이 아닐 만큼.”
재석의 말에 민경이 혼자 웃으며 좋아했다. 왠지 모를 특별대우를 받는 느낌에 좋은 거였다.
이날 저녁에 민경은 재석의 방문을 두드렸다. 꽤나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재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피곤해?”
“잠도 충분히 잤어요. 그리고 오빠가 다리 마사지 해 줘서 이제 아프지 않아요.”
“다행이네.”
“근데, 저녁은요.”
재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밤이 찾아왔지만, 아직 식전이었다.
“그럼, 나가서 같이 먹어요.”
“알았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자 밤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겨우 같이 저녁 먹고 밤바다 살짝 보는 것이 전부였다.
촬영 이틀째가 되는 날, 뜻대로 촬영이 진행되질 못했다.
“뭐?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했다고!”
“예, 한국에 있는 회사에 통보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상속 문제로 요트를 처분해서 돈을 나눈다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아니, 그게 왜 오늘······.”
감독은 조연출에게 이야기를 듣기 무섭게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여기서 화를 낼 상황은 아니었다.
“젠장, 그쪽 연락처 받았어? 이쪽에서 직접 연락해서 단 하루만이라도 어떻게 안 되냐고 했냐고.”
“그게, 이미 배를 팔아서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답니다.”
배가 사라졌다면 골치 아프다.
“그럼 다른 요트 섭외는?”
“본사에서도 직접 연락을 취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 알릴 뿐입니다. 나머지는 저희 쪽에서 해결하라고 합니다.”
“아니,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일을 해결하라니.”
재석은 이 이야기를 듣자 왜 요트 콘티가 있었는지, 왜 실제 광고와 다른지 알아차렸다.
“이런 사건이 터진 거였어.”
현장이 아니었다면 절대 몰랐을 이야기다.
“오빠, 오늘 촬영 어떻게 되는 거야?”
그녀의 입장 역시 혼란스러웠다. 계획된 일이 어그러졌으니 혼자 붕 뜬 기분일 거다.
“하아.”
멀리서 감독의 한숨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
“자자, 다들 여기서 모여 봅시다.”
감독이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바로 사람들을 모이게 한 뒤 아이디어를 물었다.
“지금 이 마을에서 촬영할 수 있는 걸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혹시 좋은 아이디어 있습니까? 지금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콘티를 직접 하고, 촬영도 그때그때 수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감독은 상황을 타개하려고 사람들의 머리를 모으게 했다. 물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쓰레기 같은 아이디어도 받아서 고민하고 바꾸고 해서 촬영을 속행해야 했다.
“섬 반대쪽에 산이 보이는 곳이 어떻습니까?”
“저기 등대가 있던데 그곳은 어떻습니까? 좀 멀리 보이는 등대라고 하던데.”
“이 마을에서 벗어나면 색이 다르겠네?”
“예, 뭐······.”
산토리니 섬에 있는 모든 곳이 청색과 흰색만을 하고 있진 않다.
촬영지인 피라 마을만 이렇고, 이곳을 벗어나면 다양한 색이 존재한다.
“다른 의견은?”
사람들은 저마다 이곳을 지나면서 봤던 것들을 이야기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재석이 입을 열었다.
“어제 낮에 염색 가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길이 아니라, 촬영할 때 커다란 파란 천이 걸려 있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파란 천?”
감독은 그 이야기를 듣자 흥미가 생겼다. 이곳의 상징은 청백색이다. 그 상징과도 같은 큰 천이 걸려 있다면 관심이 갈 만했다.
“거기가 어디였습니까?”
“바다에서 보면 보이지만, 반대쪽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번 보죠.”
재석의 말에 감독은 직접 몸을 움직이며 마을의 전경이 잘 보이는 바다로 나와 직접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염색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천은 청색이 아니지만, 정말 큰 천이 걸려서 말려지고 있었다.
“감독님, 저쪽으로 가죠.”
“그럽시다.”
재석의 말에 감독이 움직였지만, 재석은 어제 이 집을 보지도 못했다. 그냥 미래의 예정된 수순을 더 확실하게 했을 뿐이지만, 감독의 반응은 달랐다.
“매니저님 아주 안목이 좋으십니다. 이런 걸 보시다니.”
“뭘요, 그냥 예뻐서 봤을 뿐입니다.”
그 가게가 있는 곳을 찾아가자 입구는 그저 그런 상태였다.
“입구가 이러니 관심이 없지.”
가게 안에 들어가자 가게 주인이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인이 그리스어로 이야기하자 감독이 약간 우물쭈물했다.
“안녕하세요.”
재석이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서면서 입을 먼저 열자 가게 주인은 시선이 자연스레 재석에게 향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염색하는 곳을 좀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저 멀리에서 이곳으로 광고 촬영을 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생각보다 유창한 영어 실력에 감독이 깜짝 놀랐지만, 지금 주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방해는 하지 않았다.
“오호, 한국이라, 좀 멀리 있는 나라인가 보지?”
“예, 아주 멀리 있습니다. 비행기 타고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니까요.”
“정말 멀리 있군.”
아직 한류의 바람이 불기 전이니 많은 이가 한국에 대해 그리 자세히 알지 못할 때다.
“예, 그래서 말인데 이곳을 촬영할 수 있는지 한번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뭐, 어려울 것 없지.”
가게 주인의 안내가 이뤄지자, 감독이 물었다.
“영어 잘하는데.”
“생각보다 감독님 영어가······.”
“크흠, 어차피 나보다 영어 더 잘하는 자네가 있지 않은가.”
감독을 보조하는 조연출이 항상 감독 옆에서 영어까지 쓰면서 일을 처리했기에 감독이 직접 나서는 일이 없었다.
“곧 영어 쓰실 일이 엄청 많을 겁니다.”
얼마 안 남았다, 한류의 바람이 부는 날이. 그럼 외국으로 많은 연예인이 진출하게 된다. 회사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한류와 연관된 회사 중 인재가 충만한 곳은 바로 외국으로 뻗어 나간다.
‘수많은 배우들 중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은 그대로 해외 진출이고······.’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분명한 건 시류를 탈 수 있을 때 타야 한다는 거였다.
“여깁니다.”
가게 뒤편으로 보이는 염색장은 정말 작았다. 몇 가지의 색을 염색할 수 있는 수준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산토리니의 상징답게 이곳저곳이 흰색으로 깔끔하게 칠되어 있었다.
“흐음.”
감독은 이곳을 보고, 약간 지저분한 거 말고는 괜찮다고 여겼다.
“근데, 장소는 있지만, 촬영 콘티가······.”
아직 확실한 콘티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감독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재석이 말했다.
“저쪽에서 민경이가 바구니를 들고, 저 염색하는 큰 통에 파란색 꽃잎을 안에 뿌리는 건 어떨까요?”
재석이 직접 가서 그 시늉을 하자, 감독은 당장 그 앞으로 달려가 손으로 카메라 각도를 잡았다.
“오, 그래, 좋아요. 매니저님, 다음 거 있어요?”
“그다음에는 이 안에서 치마를 살짝 들고 천을 발로 밟으면서 이렇게, 이렇게.”
재석은 민경이 찍어야 할 장면들을 보여 주면서 보여 주었다.
감독은 다시 뒤로 멀어지더니 카메라 각도를 잡았다.
“오, 좋네요. 다음은요?”
감독은 뭔가 머릿속에서 팽팽 돌아가는지 재석이 하는 행동마다 멀리 혹은 가까이 하면서 어떤 장면이 좋을까 확인했다.
“당장 여기서 합시다. 통역 좀 해 줘요. 장소 대여료 같은 것도 있다고 말하면서 협상 좀 해 주세요. 전 당장 팀을 이끌고 이쪽으로 올 테니.”
“하지만, 가격의 상한선을 알아야 협상을 하죠.”
“여기 오후에 평균적으로 얼마나 물건 파냐고 물어봐요. 그 가격을 준다고 하세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면요?”
“아무리 그래도 요트 빌리는 가격보다 싸겠죠.”
요트 빌리는 가격이라는 말에 재석은 할 말이 없었다.
“뭐, 이야기하죠.”
감독은 그렇게 가게를 빠져나가 촬영 팀이 있는 곳으로 갔고, 재석은 주인과 협상을 시작했다.
대충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감독이 촬영 팀과 민경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오빠!”
“빨리 왔네.”
민경의 목소리에 재석과 주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주인은 민경을 보자 깜짝 놀랐다. 동양에 저런 미인이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저씨.”
“어, 어, 그래요.”
아저씨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집중을 했다.
“300달러로 하시는 겁니다.”
“물론이지, 그 정도면 충분해요.”
마저 돈 이야기를 끝냈다. 재석이 감독에게 300달러로 협상을 봤다는 이야기를 하자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요트 빌리는 데 얼마나 들어갔나요?”
“촬영 세 시간에 1,000달러?”
“요트가 확실히 비싸네요.”
상황은 달라졌지만, 촬영 준비는 정말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간단한 청소는 스태프들이 확실히 했고 그사이 민경은 메이크업을 끝마치고 있었다.
“매니저님!”
감독의 부름에 재석은 황급히 달려갔다.
“우리 진지하게 이야기 좀 나눕시다. 아까 이야기 듣고 구상을 하긴 했지만, 어설프더라도 콘티 형태로 남겨 둬야 할 것 같아서요.”
“어렵지 않죠. 그럼 그때 했던 동작을 다시 할까요?”
“그래 주시면 고맙죠. 저야, 그때 봤던 걸 다시 상기하면서 더 확실히 할 수 있으니까요.”
재석은 정말 기억나는 대로 행동했고, 감독은 그가 생각하는 카메라 각도를 고려하며 그림을 그렸다.
몇 개의 신이 나왔다. 염색 가게에서 염색을 위한 것들을 만드는 신들이 다분히 많이 있지만, 어쨌거나 목적은 음료수 광고다. 힘들게 일하고 시원하게 음료수 마시는 느낌이다.
‘근데, 이 콘티를 내가 미래에서 봤다지만 막상 보니 이거 뭐 별거 없는데······.’
콘티보다 압도적인 민경의 비주얼로 다 씹어 먹는 상황이었다.
“이야, 잘 나온다.”
감독도 콘티 다 작성하고 민경한테 내용 설명했다. 막상 촬영 돌입하니, 이거 민경이 어떤 신이 되었든 혼자 싹 캐리하고 있었다.
‘처음 촬영했을 때랑 너무 다른데.’
처음에는 초짜 느낌이 물씬 풍겼다면, 지금은 연기 잘하는 여배우 느낌이 물씬 풍겨져 왔다.
재석은 가만히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표정을 보았다.
특히 남자들은 민경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질투하면서도 너무 부러워했다.
‘씹어 먹기 시작하네.’
처음은 이러지 않았는데, 그녀는 괴물처럼 모든 상황을 다 물리친 뒤 혼자 독보하고 있었다.
점점 많은 사람이 이 CF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광고가 완성이 되었다.
“후우! 수고들 하셨습니다.”
다들 박수를 치면서 촬영이 종료되고, 재석은 이제 일정이 다 끝났음을 알았다.
촬영이 끝난 뒤에 사람들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쉬는 사람도 있었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 민경은 밖으로 나가자는 쪽에 속해 있었다.
“오빠, 나가요.”
“이제 촬영 끝나니까 기분이 좋아?”
“물론이죠. 그리고 여기 구경하고 싶어요.”
아직 해가 떠 있어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래, 나도 여기 한번 쭉 둘러보자. 다음에 언제 이곳으로 다시 올지 모르니까.”
둘은 그 말을 하고 결국 같이 주변을 보며 산토리니를 한 바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