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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돌아온 뒤,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었다. 매일같이 광고 혹은 잡지 촬영에 끌려 다녔다.
태양처럼 떠오르는 신인이다 보니 찾는 이들이 너무 많은 거였다.
부우웅!
민경이 광고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와중에 재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바로 민철의 전화다.
“어, 무슨 일이야?”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십니까?)
재석은 잠시 수첩을 꺼내 스케줄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오후 스케줄 없으니까. 된다.”
(그럼, 저 좀 도와주세요. 제가 연기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 진우 형한테 도움이 별로 안 돼요.)
재석은 민철의 말에 살짝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매니저가 연기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건 무척이나 정상적인 거야. 연기자가 아닌데 연기를 어떻게 알겠냐. 일단, 저녁에 보자.”
(예, 선배님 그럼 집에서 뵙겠습니다.)
요즘 들어 재석은 최민철과 전화하면 할수록 거의 충실한 심복과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이거 나중에 권진우보다 날 더 따르는 거 아냐?”
마음 한편으로 좋기도 했지만, 엉뚱한 결과물이 될까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
재석은 민경을 집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최민철의 집으로 향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그래, 근데 무슨 일로 날 불렀어?”
“그게, 내일 오디션인데 걱정돼서요.”
“한번 보자.”
방으로 들어가자, 권진우가 연구를 많이 했는지 혼자 고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아직 오디션 보기 전인데, 몰입하면 감정 소모를 할 텐데요.”
연기도 감정 노동이 심한 직업군이다. 그러니 이것도 적당히 해야 한다.
“아닙니다. 지금 이 느낌을 제대로 살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럼, 느낌만 살리죠. 그렇게 했다가 무리하게 감정 소모하면, 생각은 있지만 표정이 안 돼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재석의 말에 그의 표정이 곧바로 깨졌다.
“지, 진짭니까?”
“경험한 바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뭐든지 적당히 하는 게 최고죠. 그 정도면 느낌 잡은 걸로 충분합니다.”
“후우.”
곧바로 표정이 풀리는 권진우를 보면서, 재석은 그가 살짝 긴장을 했다는 걸 알았다.
“최대한 편안하게 심호흡하면서 긴장을 푸세요. 단, 그 감정만 기억하는 겁니다.”
권진우의 긴장감이 풀리면서 재석은 입을 열었다.
“이제 쉬세요. 지금 이 순간은 릴랙스하는 법이 더 중요합니다.”
최대한 긴장을 푼 상태에서 기억만 간직하게 만들었다.
“긴장이 좀 풀린 것 같은데 그 상태에서 연기해 보세요.”
다시 연기를 하라는 재석의 지시에 권진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자세도 꼿꼿하게 했고 말이다.
“훨씬 자연스럽네요.”
“이야······.”
민철도 지금 권진우의 연기에 뭔가 변화가 찾아왔음을 알고 놀랐다.
“민철아, 거울 있지?”
“네, 선배님.”
“가져와서 보여 드려라.”
“네.”
민철은 방 한쪽에 있는 큰 거울을 가지고 와서 권진우를 비췄다.
“거울을 보세요. 어떻습니까?”
“아주 편해 보입니다.”
“이 모습을 기억하세요.”
권진우는 재석을 향해 감사를 전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저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일 스케줄이 있어서요.”
“예, 그럼 들어가세요.”
재석이 차를 타고 가자 권진우는 집 천장을 바라보았다.
“민철아, 재석이란 사람 대단하다. 나이는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연기에 대한 생각은 나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어.”
“확실히 그래 보여요. 아까 형이 마지막에 한 연기는 제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웠어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놀랐다. 왠지 모르게 재석 씨가 하라는 대로 하면 뭔가 잘될 것 같다.”
“저도 그 생각 들어요. 뭔가 콕 하고 잡아내는 느낌이 강하거든요. 다른 선배들 이야기 들어 보니 지금 담당 맡고 있는 연기자한테도 핵심만 잡아 준대요.”
“그래?”
권진우처럼 빨리 연기자로서 자리 잡고 싶은 사람에게 그 핵심을 잡아 주는 건 무척 중요했다.
“형, 그래도 감정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죠?”
“당연히 기억하지, 그거 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면서도 권진우는 다시 그 감정과 얼굴을 기억하면서 표정을 한번 지어 주고는 자리에 누웠다.
***
아침 일찍 출근한 재석은 회사 스케줄 관리에 붙어 있던 민경의 스케줄이 사라진 걸 보았다.
“팀장님, 민경이 스케줄이 왜 사라졌나요?”
“하나는 취소, 하나는 딜레이. 아침에 급하게 나한테 연락이 왔다. 그래서 스케줄 지운 거야. 오늘 네 담당 연예인 일이 없다.”
상황에 따라 이런 일이 간혹가다 터지긴 하지만, 그 대상이 민경일 경우 이유를 물어야 했다.
“취소는 왜죠?”
“그쪽 광고주 오너가 직접 모델을 지목했단다. 그래서 취소, 딜레이된 거는 거기 제품이 뉴스에 오늘 보도될 거래.”
보도된다니, 무슨 문제가 터진 모양이었다.
“다행히 민경이 문제가 아니군요.”
“설마, 일 잘하고 있는 얘가 이상한 짓을 하려고. 거기에 네가 주간 보고서로도 민경이 특별한 스캔들이나 다른 일이 없다고 했잖아.”
“그렇죠.”
그녀가 항상 바쁘게 보내 와서 남자 만날 시간이 없었다.
“뭐, 특별한 일 없으면 오늘은 그냥 들어가. 그리고 내일 스케줄은 아예 없으니 이틀 그냥 쉬는 건가?”
“권진우 쪽에 한번 가 보겠습니다.”
“그쪽은 오늘 오디션 보잖아.”
일정이야, 회사에서 다 잡아 줬기에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오디션을 불안해해서요.”
“어이구, 그쪽도 큰일이다. 갔다 와.”
재석은 곧바로 민철에게 전화를 걸어 오디션을 봤는지 안 봤는지 물어봤다.
(아직 아니에요. 앞에 사람들 많이 남았어요.)
“그럼, 내가 갈게.”
(예?)
갑자기 온다는 말에 민철은 조금 당황했다. 동시에 그 말이 민철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오디션이 걱정되나 보네요.)
“조금은. 그리고 나도 관여를 좀 해서······.”
(얼른 오세요.)
그 말에 재석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재석 선배, 여깁니다.”
오디션장에 도착하자 민철이 손을 흔들면서 재석을 반겼다.
“오디션은?”
“이미 들어갔습니다.”
“앞에 사람 많다고 했잖아.”
“그게, 숫자만 많았지 다들 오래 못 버티고 금방 나오더라고요.”
오디션을 진행하는 심사 위원들이 빠르게 퇴장시킨 모양이다.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다른 누구도 아닌 심사 위원들이다. 그들이라고 해 봐야 감독을 비롯한 영화 관계자들이다.
그들은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만 한다. 말이 좋아 수고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넌 아웃 이란 말이다.
권진우가 들어간 지 대략 5분 정도가 흘렀고, 권진우가 밖으로 나왔다.
“끄응.”
권진우는 혼자서 끙끙 앓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재석의 얼굴을 보고 급하게 다가왔다.
“재석 씨, 오셨군요.”
“예, 근데 오디션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말이죠.”
권진우는 조금 뜸 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무슨 특별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게, 내일 다시 오라고 했는데,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내일 다시 오라고요?”
재석은 그 이야기를 듣자 순간 멍해졌다. 이런 상황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다가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재석의 웃음에 권진우와 최민철이 재석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아, 미안, 미안합니다.”
재석은 왜 권진우가 이 영화에 캐스팅이 됐는지 이해가 되었다.
‘결과는 캐스팅이지만, 그 과정은 전혀 몰랐는데 이제 알았어.’
재석의 정보는 대부분 결과만을 알고 있다. 과정은 조금 부족한데 지금 이 부분은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했다.
“재석 씨, 왜 웃는 거죠?”
“아주 좋은 일이니까요.”
권진우의 질문에 좋은 일이라 말했다.
“네?”
“보통 오디션을 보고 나면 결과가 며칠 걸리죠?”
“뭐, 일주일 안 넘은 것 같은데요.”
“그럴 겁니다. 대부분 현장에서 떨어지고, 좀 괜찮다 싶은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은 영상으로 마지막 확인을 하는 거죠. 근데 나중도 아닌데 현장에서 내일 오라는 건 뭐겠습니까?”
“다시 확인 아닐까요?”
“반만 맞죠. 정확히는 감독이 생각하는 캐릭터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을 경우입니다.”
“어? 그럼 오디션에 붙은 건가요.”
“아니요.”
재석은 오디션 합격이 아니라는 말에 민철이 물었다.
“선배, 그럼 뭔가요?”
“이미지는 딱인데, 연기가 애매모호할 경우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혹시 오늘 긴장 많이 했나요?”
“어떻게 오디션 보는데 긴장을 안 합니까······.”
아마, 연습할 때와 다르게 오디션장에서 긴장을 많이 해서 연기가 어색했던 모양이다.
“아마, 연습했을 때만큼의 연기 실력이 안 나왔다면 충분히 감독의 눈에도 그게 보였을 겁니다. 영화감독이란 직함이 절대 쉽게 따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죠.”
“그러니 기회를 주는 겁니다. 이미지도 딱 맞겠다. 기회를 줘서 정말 연기가 엉망인지, 아니면 그날 긴장돼서 못한 건지 확인하는 거죠.”
“그럼, 반쯤 합격?”
“반쯤 합격이 아니라, 반쯤 확인하는 거죠. 합격은 합격이지 반쯤이란 말은 없습니다.”
재석의 단호한 말에 권진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래도 맥없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좋네요.”
“당연하죠. 남들은 이런 기회도 못 잡았으니 말이죠.”
권진우에게 특혜라고 할 만한 일이다.
‘정말 권진우가 왜 캐스팅됐는지 속사정을 알았으니 더 확실히 할 수 있지.’
“최대한 긴장을 푸는 연습을 하세요. 그리고 연기 연습도 더 하시고요. 분명 내일 다시 왔을 때 더 나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바로 떨어질 겁니다. 감독은 잠시 착각했다 여기겠죠.”
“알겠습니다. 더 확실히 준비해서, 내일 꼭 오디션에 합격하겠습니다.”
재석은 더 이상 오디션 때문에 권진우와 얼굴 볼 일이 없을 거다.
만약 본다면 영화 촬영 중일 거다.
“그럼, 나중에 좋은 결과 나오길 기다리죠.”
재석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이야, 이야기만 듣고 한 번에 파악하네.”
민철은 재석이 놀라웠다. 어제 분명 권진우의 연기를 단번에 파악하더니 이번에는 감독의 마음을 한순간에 알아차렸다.
“형, 저 선배, 우리 꼭 잡자. 아무래도 재석 선배 뒤만 졸졸 따라다녀도 월급 잘 받고 다닐 것 같은 느낌이야.”
“나도, 돈 많이 벌 것 같은 느낌이다.”
확실히 두 사람이 재석의 진가를 알아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권진우는 오디션에서 감독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좋아, 내일 다시 와라.”
감독이 다시 오라는 말에 권진우는 또 혼란이 찾아와 재석에게 전화를 걸었고 왜 다시 오라는지 물었다.
(그거, 감독 욕심입니다. 원래 연기 더 잘했으면 하니까요.)
“재석 씨, 감사합니다.”
(뭘요, 그냥 해 줄 수 있는 거 해 주는 건데요. 이번에는 거의 확정이니까 좀 더 연습하세요.)
“예.”
그렇게 권진우가 전화를 끊자, 민철이 다가왔다.
“형, 뭐래요?”
“감독 욕심이래. 연기 더 좋게 하라고.”
“그럼, 감독이 원하는 대로 해야죠. 그렇게 해야 캐스팅 확정이잖아요.”
“이야, 정말 속 시원하게 해 주니까 정말 살맛난다.”
재석이 회귀하기 전, 권진우는 이 상황을 무척이나 답답해했다. 감독이 뭘 원하는지 몰라서 말이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연기자는 그냥 연기 열심히 하면 끝이라는 거다.
반대로 재석은 집에서 놀고 있는 게 아니라 민경의 다음 차기작을 고민하고 있었다.
“올해 후반기에 출연할 드라마 중에서 쓸 만한 게 없는데······.”
올해 정말 크게 대박을 친 작품들은 이미 쏟아졌고 방영 중이다.
“하아, 전에 했던 대로 해야 하나······.”
하지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야, 드라마보다 어차피 내년에 대작들이 있으니 거기나 들쑤셔야겠지.”
재석은 내년 초에 시작할 것들을 생각해서 후반부터 열심히 준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연말에 쉬는 날 거의 없겠네.”
고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재석의 입가에는 슬쩍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