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11화 (1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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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만난 윤정호 감독을 향해 재석과 주명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다가갔다.

“이게 누구십니까. 윤 감독님 아니십니까.”

“아니, 주 팀장.”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는 게 둘이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윤 감독님,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일 있어서 왔지. 내가 최근에 회사를 차렸거든.”

“아니, 그럼 방송국을 나오신 겁니까?”

“그래, 거기 15년 있었지만 이제는 사업을 해야지.”

당당히 사업을 하겠다면서 이야기하자 주명진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자네는 여기에 어쩐 일인가?”

“드라마 계약 때문에 왔습니다.”

“오호, 그래? 누군데.”

윤정호의 관심이 보이자 앞으로 나선 건 재석이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여배우 임민경입니다. 최근 맛있는 첫사랑이란 드라마에서 정진의 상대역으로 나온 배우입니다.”

“아, 그 요리 드라마?”

“네, 맞습니다.”

재석은 최대한의 호의를 가지고 감독을 대했다.

“이야, 아주 좋은 배우를 옆에 두고 있어.”

“감사합니다.”

재석은 윤정호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지금 드라마가 나오기 전이면 윤정호가 모든 인맥을 총동원하고 있는 상태다.

매일같이 아는 사람 쫓아다니며 드라마를 어떻게 해서든 찍으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회사를 차렸다면 눈꽃연가가 시작도 못한 상황. 작가가 구해진 건가?’

한참 작품을 준비해야 편성을 받을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거기에 투자도 받으려면 윤정호 감독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아니, 편성은 지금 받아야 해. 이미 약속되어 있는 방송국 편성표를 생각하면, 대본의 초반부는 완성이 된 상태야.’

재석은 미래에 벌어진 일을 기반으로 지금쯤 어디까지 진행이 완료되어 있는지 파악을 끝냈다.

“감독님, 혹시 새로운 드라마 준비하십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나?”

“그냥 느낌입니다.”

“촉이 좋은 친구인데. 나중에 한번 볼까?”

“저야 좋습니다.”

윤정호는 지금 지나가는 인연도 쉽사리 대할 수 없는 입장이다. 워낙 유명 감독이지만, 회사를 차린 이후 힘든 상황을 겪고 있다.

“일단, 각자 일을 보고 나중에 이야기하지.”

“그러죠.”

앞서간 건 윤정호였다. 주명진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재석을 붙잡았다.

“재석아, 윤정호 감독은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야. 지금은 돈 없는 사업가에 불과해.”

“팀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재석은 주명진의 말이 조금 의아했다.

“다른 게 아니다. 회사를 그만둔 감독 중에서 저렇게 홀로서기로 일어선 감독은 거의 없다. 가까이해서 네 담당을 드라마에 출연시키자고 해도 무슨 이득이 있겠어.”

주명진의 말은 일반적으론 틀리지 않았다. 안전을 꾀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재석은 알고 있는 미래의 성공에 다가가야 했다.

‘주명진이 방해하면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릴 수 있어.’

부정적인 그의 입장에서, 재석이 강하게 나가는 건 스케줄 계약 자체를 못 할 수도 있었다.

“팀장님,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도 윤정호 감독이면 히트작을 몇 개나 성공시킨 감독 아닙니까. 다음에 직접 드라마를 한다면 최소한 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작가도 못 구했을 공산이 크다.”

드라마 제작에 가장 중요한 게 작가다. 주명진은 그 작가를 못 구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작가도 못 구했는데 다른 외주사에 찾아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네 생각이 어떻든, 난 아무리 유명해도 저 사람은 불안해.”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아마 윤 감독님이 알고 있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일을 추진할 겁니다. 아마 좋은 대본도 얻었을 거고 지금처럼 인맥을 이용해 이리저리 뛰어다닐 겁니다. 방송국에 오래 있었으니 그쪽 인맥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재석의 말은 충분히 일리 있었다. 방송사에 있는 인맥도 무시할 수 없고 그들을 통해 뭔가 일을 진행할 수도 있었다.

“넌, 윤 감독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 보는구나.”

“전 그렇게 보입니다.”

주명진은 재석의 말에 뭔가 관심이 생겼다.

“방송사에 연락을 좀 해 봐야겠어.”

그가 방송사 연락을 한다는 건 그쪽에 인맥을 동원해 방송사가 윤정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하자는 뜻이었다.

“확인하시게요?”

“확인이 어려운 작업은 아니니까.”

회사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 촬영을 위한 감독이 직접 모습을 보였다.

“GU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제가 이번 감독을 맡게 된 이종훈입니다. 이쪽은 프로덕션 최중덕 이사님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자리를 이동했다. 서로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누는 자리지만, 대부분 계약의 형태는 다 정해져 있다.

한국에 방송사가 생긴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난 후라 약간의 계약금 조율 정도만 하는 수준이다.

“그럼, 금액은 그 정도로 정하도록 하죠. 그럼 나중에 작성된 계약서를 따로 보내 드리도록 하죠.”

“예, 그러죠.”

계약 정리는 간단하게 끝났지만, 재석의 머릿속에는 딴 생각이 들었다.

‘윤정호 감독은 뭘 하고 있을까?’

지금쯤 이 안에서도 뭔가 사업적인 이야기를 하는 중일 거다.

그렇게 식사를 위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자, 때마침 윤정호 역시 누군가와 같이 나왔다.

“그럼 계약서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내용 확인하고 다시 보내 드리죠.”

이야기가 잘됐는지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윤정호, 그의 인맥이 죽지 않았어.’

몇 개의 히트작을 내놓았던 드라마 연출자로 쌓아 놓은 인맥이 빛을 발하고 있는 거였다.

눈꽃연가는 그 윤정호의 모든 걸 갈아 넣어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정말 올인했었구나.’

사업하는 사람에게 도박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시도했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어차피 그에게 뒤는 없었다. 이게 인생의 전부를 걸고 도박을 벌인 셈이었다.

이날, 점심 식사는 같이하지 못했지만, 저녁에 그의 연락이 왔다.

“아, 감독님, 여기 근처라고요. 알겠습니다. 바로 그쪽으로 가도록 하죠.”

재석은 윤정호 감독이 저녁에 연락이 왔어도 바로 달려갔다.

“감독님!”

“오, 전 매니저.”

식당에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모습에 윤정호 감독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 절로 느껴질 정도다.

‘얼굴에서 아주 사업적인 미소가 철철 넘치네.’

물론 지금은 절박함이 넘쳐 나서 그 누굴 만나도 미소가 자연스러웠지만, 재석은 한눈에 파악했다.

‘뭐라도 하나 잡아야 하는 상황이겠지.’

반대로 재석은 이 절박함을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걸 얻어야 했다.

“이야, 전 매니저.”

“예, 감독님.”

“내가 이런 말하기 미안한데 말이야. 내가 최근에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하나 있어. 눈꽃연가라고 그 작품에 출연을 좀 시키고 싶어서 말이야.”

“출연이요?”

“그렇지, 바로 본론을 꺼내 들어서 미안한데 말이야. 자네, 그 정도 권한은 있지?”

“물론 있습니다. 다만 어떤 역을 주실지가 걱정되네요.”

“당연하지, 그래서 말인데 내가 대본을 들고 왔네.”

윤정호 감독이 대본을 내밀자 재석은 바로 대본을 보며 읽었다.

‘역시, 내용은 그대로야.’

그가 알고 있는 미래의 드라마 내용과 일치하는 대본이었다.

대본을 다 읽고 나서 윤정호 감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주 멋진 대본입니다. 내용도 훌륭합니다. 어디서 이런 대본을 구하셨습니까? 혹시 유명 작가님의 작품입니까?”

“아니, 내가 새로 발굴한 신인 작품이야.”

“누구입니까?”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신인 작가한테 가서 허파에 바람이라도 잔뜩 집어넣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나중을 위해 인맥 관리 정도?”

“됐네, 어차피 작가가 한 명은 아니니까.”

“그럼, 두 명?”

“크흠.”

“그 소리 하시는 걸 보니 셋이군요. 신인이라고 셋이나 동원하시다니.”

“기본 스토리는 셋 중 한 명이 내놨고 내가 그걸 선택했네. 보완이 필요해서 내 인맥을 동원해 둘을 더 붙였지.”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작품을 직접 쓸 재주는 없지만, 눈은 정확했다. 뭐가 더 시청률이 잘 나오는지 말이다.

재석은 한껏 아부를 떨었다. 그의 작품에 주연으로만 출연하기 위해선 아부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만 하면 돼. 이것만!’

이 고비만 넘기면 더 이상 민경은 끝난다. 그녀가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면 그걸 만든 재석의 입지도 달라진다.

“뭐, 그래서 말인데 내 드라마에 민경을 출연시키고 싶어서 말이야. 역은 주연이고.”

정확히 어떤 역인지 말하진 않았다. 허나, 지금 민경의 위치를 생각하면 약간 애매모호한 주연이 될 수도 있다.

“유진 역이 필요합니다.”

재석이 먼저 선수 쳤다. 아직 배역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주연 중에서도 극을 이끌어 가는 역을 먼저 선점하는 게 우선이다.

“그 역이 필요한가?”

“좋은 작품입니다. 거기에 이 유진 역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이 역을 탐내지 않는다면 이상하죠.”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내가 그 역에 어떤 사람이 할지 정해 놨다면?”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는 모릅니다. 원하는 역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

“허허허! 욕심이 대단해. 그리고 그 욕심을 채워 줄 만한 보석도 옆에 있으니······ 한데 그 보석이 언제까지 자네 옆에 있을 것 같나?”

“옆에 있게 만들어야죠. 원하는 걸 채워 주면 되는 겁니다. 전 매니저로서 배우들이 원하는 좋은 작품을 줄 겁니다. 그걸로 만족시켜 주면 저와 함께 일하는 거죠.”

재석은 미래를 알고 있는 만큼 그럴 생각이다. 충분히 이용해서 이 바닥 최고의 자리에 오를 거다.

“내가 거부하면?”

“거부하는 건 자유입니다.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죠.”

순응하는 대답을 내놓는 재석이지만, 눈빛은 절대 아니었다.

‘쉽사리 포기할 눈빛이 아니야.’

윤정호는 재석의 입과 눈이 따로 노는 걸 본 거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그 유진 역을 내가 생각해 둔 사람이 고사를 한다면 자네가 관리하는 배우에게 주도록 하지.”

재석은 그 말을 듣자 입가를 씰룩거렸다. 윤정호 감독이 생각하는 여배우는 김주희다.

“저도 좋습니다. 캐스팅 권한은 감독님의 것이니까요.”

재석은 그렇게 윤정호를 치켜세워 주면서 그 역이 민경이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김주희는 더 이상 드라마를 하지 않고 영화에만 몰두할 거야.’

드라마를 정복한 여왕이 다른 곳에 눈을 안 돌릴 이유가 없다.

‘혼자 허공에 삽질하겠어.’

그걸 알 리 없는 윤정호였다.

“그럼, 저녁도 먹었는데 간단하게 술 한잔 하지.”

“물론입니다. 다만, 과음은 할 수 없습니다. 내일도 열심히 일을 해야 해서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재석과 윤정호는 첫 만남에 많은 이야기를 했고 비즈니스도 해결했다.

그다음 날 재석이 회사에 출근하자, 주명진은 방송사에서 건너온 편성표를 보고 있었다.

“재석아, 어제 만났던 윤정호 감독 말이야.”

“네.”

오늘 아침에 방송사에서 일찍 편성표를 보내 줬다.

“거기에 윤정호 감독 작품이 있나요?”

“그래, 확정 받았더구나. 무서운 인간이야. 내가 직접 확인하지 않았으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겠어. 거기에 방송사에 오래 있었던 만큼, 알았던 사람들에게 밥 사고 술 사고 하면서 편성을 따냈다더라. 대본도 이미 완성해서 받았고.”

“대본은 신인 작가의 작품이랍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세 명을 동원해서요.”

“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소리를 못 들었는데.”

“어제 윤정호 감독이 저에게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해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나한테 직접 전화 안 하고 너한테 했단 말이야?”

“네, 저녁도 먹고 가볍게 술도 한잔 했습니다. 목적은 민경을 드라마에 출연시키고 싶다는 거고요.”

“이야, 이렇게 나 몰래 뒤에서 작업을 했다는 거네. 그래서 넌 어떻게 하기로 했어? 대본은 봤고?”

“대본 봤고, 내용 아주 좋습니다. 시청률 잘 나올 놈이고요.”

“그렇게 느낌이 좋단 말이야?”

“네, 딴 놈이 채 가기 전에 저희가 작업을 좀 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명진은 윤정호의 능력을 다시 봤다. 방송사 나와서 무너진 감독들 수도 없이 봤는데, 이렇게 사람들을 구워삶아서 대본도 편성도 따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다.

“재석아, 한 번 더 만나라. 내가 윤정호 감독의 수완이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드라마는 무조건 역 따라, 주인공으로.”

“물론이죠. 근데 제가 지금 민경이 차기작에 따라다녀야 해서 시간이 많이 안 나는데.”

“괜찮아, 나 빼고 널 직접 봤다는 건 네가 관리하는 배우에 관심 많다는 거잖아. 그럼 그걸 최대한 이용해야지. 직접 얼굴도 보여 주고.”

“기회 한번 만들어서 술자리를 가져야겠네요.”

“그렇게 하면 더 좋고.”

방송사에 내용을 확인하고 난 뒤 주명진의 행동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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