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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진이 이리저리 확인한 결과 윤정호가 투자할 외주사와 다른 투자 업체도 찾아냈고, 투자도 일부 받은 걸로 확인되었다.
“이건 뭐, 드라마가 성공해도 손에 떨어지는 돈이 별로 없을 정도인데.”
“그래도 회사는 운영할 수 있겠죠.”
윤정호는 성공한다. 처음에 찍은 이 눈꽃연가는 대다수 투자자에게 돈이 돌아간다. 그리고 윤정호의 회사는 미래까지 잘 운영되는 회사가 된다.
“그러겠지, 어차피 우리야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주명진은 철저하게 비즈니스적인 사고방식으로 윤정호의 드라마에 출연시킬 기회만 얻길 기대했다.
“그럼, 나갔다 오겠습니다.”
“갑자기 오늘은 어디 가?”
“민경이 드라마 준비 잘하고 있는지 확인해야죠.”
“알았다. 어차피 윤정호 감독이 들어갈 작품은 내년 1월에 방영이니 시간 충분하지.”
재석은 그렇게 민경에게 가면서 최민철에게 연락했다.
“민철아, 그쪽 상황 어떠냐?”
(아, 선배님, 순조롭습니다. 진우 형도 일이 제대로 풀리고 있어서 그런지 아주 좋습니다.)
“그래, 일정은 다 나왔어?”
(네, 곧 촬영 일정 잡혀서, 들어가는 데 문제없습니다.)
“그래, 그 영화 승패와 관계없이 연기를 잘하라고 해. 그래야 다음 기회도 생기니까.”
(네, 선배님. 진우 형에게도 잘 말하겠습니다.)
이쪽은 영화 촬영에 돌입하면서 재석이 할 일이 없다. 영화 끝나면 다음 작품이나 할 수 있게 일거리 찾아 주는 게 전부다.
전화가 끊어지고, 재석이 그에게 해 줘야 할 일은 하나였다.
“다음 작품이 ‘동갑내기’지.”
‘무림고’의 학생 이미지가 이어지는 작품 중 하나다.
***
민경의 차기작인 ‘선미진미’가 대본 리딩 하는 날이 되었다. 그간 남배우 캐스팅에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어떻게 리딩하는 날에 등장했다.
리딩할 때 주목적은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거고, 작게는 캐릭터의 감정 흐름을 더 확실히 잡는 거다.
민경은 그래도 두 번째 드라마라 어느 정도 리딩에 익숙해졌는지 생각보다 쉽게 감정을 잡아 갔다. 다들 민경의 능숙한 감정 흐름에 꽤나 만족을 했다.
문제는 여배우 쪽이 아니라 남배우 쪽이다. 이쪽은 급하게 캐스팅돼서 캐릭터 연구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감독이 나서서 그 흐름을 일일이 잡아 줘야 했다.
“윤정민 씨, 이때는 아직 감정이 시작되기 전이니까 좀 더 남을 대하듯이 하세요.”
그래도 민경보다 연기 경력이 더 됐는지, 감독의 지시에 더 빨리 적응하면서 일을 진행했다.
촬영은 리딩 이틀 뒤에 시작되었다. 정말 빡빡한 일정이 아닐 수 없지만, 캐스팅 지연으로 촬영장은 모든 게 미친 듯이 돌아갔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NG를 내면 그야말로 죽일 놈이 된다. 일정 빡빡한데 NG까지 가세하면 거의 쉬는 날 따위는 없는 거였다.
“아, 오빠 나 정말 힘들어.”
드라마 촬영을 하고 나면, 민경이 하는 말은 앓는 소리 말고는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어쩔 수 없다. 캐스팅이 늦어서 일정이 꼬인 걸 탓해라. 그것도 감독 말이다.”
“감독한테 어떻게 그런 말 해. 그러다 나 끝장이야.”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서로 힘든 걸 이야기하며, 일에 고단함을 풀었다.
“그리고 너 내년 초에 시작할 작품 선별 중이야.”
“내년이면, 촬영이에요? 아니면 드라마 시작이에요?”
“시작이지. 예정대로 진행되면 촬영은 12월에 할 거야.”
“윽, 그럼 별로 못 쉬는 거 아니에요?”
“아니, 11월에는 무척 한가할 거야. 특별한 광고 일정도 없으니까.”
일정이야, 잡히면 하겠지만, 스케줄 없으면 노는 거다.
“그럼, 휴가는 받겠죠?”
“당연히 이번 드라마 끝나면 휴가는 받지. 회사 차원에서 주는 휴가도 있을 거고, 방송사에서 주는 휴가도 있을 거야. 뭐, 드라마가 잘되면 둘 다 받는 거고 안 되면 적당히 눈치 봐야지.”
“에휴, 힘드네요.”
“스타가 되면 상황이 바뀌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거야. 실력도 더 키우고 말이지.”
“에휴, 이럴 때 남들도 다 있는 팬들이 있어서 절 응원했으면 싶네요.”
“아, 잊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회사에서 팬클럽 하나 생겼다고 하더라. 아마 지금 팬클럽 가입 인원수가 만 명이 넘은 걸로 안다.”
“지, 진짜요?”
“그래, 그 팬클럽에 내가 회원으로 가입해서 팬클럽 회장하고 이야기를 좀 하래. 나중에 전화상으로 이야기 왔다 갔다 하겠지만, 나중에 팬 미팅도 할 거야.”
“거기, 인터넷 사이트 어디 있어요?”
민경은 팬클럽 사이트가 어딘지 궁금해했다.
“근데, 너 집에 컴퓨터 있어?”
“아뇨······.”
그녀는 인터넷으로 특별히 하는 게 없었다. 해 봐야 겨우 간단한 검색 정도라 사지도 않았다.
“뭐, 회사에서 팬들에게 이런저런 소식 알려 주면, 그쪽에서 알아서 할 거야. 회사 주소도 알릴 거야. 그렇게 하면 팬들의 선물이 회사로 오겠지.”
“근데, 선물이 올까요?”
“온다. 많든 적든.”
임민경이다. 그 유명한 임민경. 겨우 선물 안 온다고 걱정할 게 아니다. 나중에 너무 많이 와서 심각할 정도가 된다.
주말도 없이 촬영하면서 정말 많은 이가 지쳐갔다. 그게 드라마를 찍는 동안 알게 모르게 드러났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풋풋하고 생기발랄했는데, 회가 거듭될수록 연기는 좋아지지만, 얼굴은 다들 힘이 없어져 갔다.
드라마에서 민경이 맡은 선미 역의 집안은 초반까지 화목하고 돈 잘 버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몇 화 지나면 절망 가득한 상황이 된다.
근데 이게 민경의 피로도와 고스란히 연결됐다. 처음에는 쌩쌩했었다. 연기의 피로감이 그대로 묻어 나오면서 그냥 현실감 넘쳐 나는 상황이 된 거다.
재석은 회사에서 민경이 나온 드라마를 그녀와 같이 보며 이야기했다.
“이야, 이거 표정이 현실감 넘치네. 지금 여기나, 화면 안에 있는 너나.”
“아, 피곤해. 모니터링하는 거 힘들다.”
“힘들어도 해야 한다. 익숙해져야 해. 아니면 확인이 어려워. 나중에 일정이 바빠서 더 못 볼 수가 있어. 방송생활이 없는 시간 만들어야 해. 그리고 쉴 때 푹 쉬는 거야.”
재석이 매니저 생활하면서 배운 거였다. 언제 쉴지 알 수 없지만, 그 전까지는 열심히 달리는 거였다.
“근데, 전에 말했던 내년에 시작하는 드라마 출연은 어떻게 됐어요?”
“그러지 않아도 너 내일 쉬는 날이지?”
“스케줄 없어서 그냥 집에서 푹 쉬면서 대본이나 보려고 했는데요.”
“그럼, 내일 윤정호 감독님을 만나자.”
“윤정호?”
민경은 그 이름을 처음 듣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단풍동화라고 알아?”
“물론이죠. 얼마나 재밌게 본 드라만데요.”
“그 드라마 연출 감독.”
“네?”
민경은 그 이야기를 듣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깜짝 놀랐다.
“놀랄 거 없어. 그 감독이 차기작을 준비 중이야. 이미 난 대본을 봤다.”
“아니, 대본을 보셨으면 저한테도 보여 주셔야죠.”
“지금은 현재 드라마에 집중하라고 일부러 안 보여 줬어. 지금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가 우선이니까.”
재석의 말에 민경은 살짝 감동받았다. 연기자의 몰입을 깨지 않기 위한 조치인데, 정말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빠, 고마워요.”
“고맙기는 해야 할 일이야, 내가 널 저 높은 곳으로 이끌기 위해서 뭔들 못하겠니.”
“알았어요. 그럼, 내일 예쁘게 하고 갈게요.”
“그래, 집에서 푹 자. 약속은, 내일 저녁이나 하면서 얼굴 볼 거야. 그리고 내일 나올 때 입어야 할 옷은 수수하게, 그러나 연예인 느낌 나게.”
“네!”
***
다음 날 저녁 재석은 민경을 데리고 윤정호 감독을 만났다. 그것도 멋진 레스토랑에서 말이다.
“감독님, 한동안 무탈하셨습니까?”
“무탈했지. 근데 혼자 온 게 아니네.”
“안녕하세요. 감독님.”
민경은 재석의 말대로 수수하지만, 확실히 예쁜 느낌 나는 옷을 입고 나왔다.
“이야, 실제로 보니 더 좋네. 역시 좋은 배우를 옆에 두고 있어.”
윤정호는 임민경을 보면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아직은 부족합니다.”
“아니야, 지금 당장 조금 부족하겠지만, 금방이야. 최근에 하고 있는 드라마를 봤는데 연기가 아주 괜찮았어.”
윤정호가 민경을 앞에 두고 연기가 좋다며 칭찬하자, 민경의 입가에 미소가 만들어졌다.
“민경 씨, 내 대본은 봤어?”
대본을 봤냐는 질문을 받은 건 민경이지만, 재석이 대답했다.
“제가 주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재석에 윤정호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되나?”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 때문입니다. 비록 제가 일거리를 따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민경이는 현재의 드라마에 집중해야 합니다. 혹여 다른 드라마 대본으로 인해 몰입이 깨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흐음.”
재석의 대답에 윤정호의 표정은 꽤나 좋게 변했다.
“좋은 배우를 옆에 두고 있다고, 노력하지 않는 매니저는 아니라는 건가?”
“당연합니다. 매니저가 뭐겠습니까.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매니저의 일입니다.”
“뭐, 좋아.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대본을 봐도 늦진 않지. 하지만, 기억해. 그때가 되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미리 배역을 맡길 수도 있어.”
윤정호의 살벌한 말이 이어졌지만 재석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렇다면 민경의 운이 거기까지인 거죠. 하지만, 전 믿습니다. 민경은 지금의 드라마를 잘 끝내고, 분명 윤 감독님 드라마에서 당당히 주연을 해서 톱스타가 될 거라는 걸.”
“너무 김칫국 마시는 거 아닌가?”
“아니요. 전 확신합니다. 이 드라마 출연을 못 해도 민경이는 스타가 될 겁니다.”
재석은 말하고 있었다. ‘민경이를 잡아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라고 말이다.
“끄응.”
윤정호도 알고 있었다. 민경이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를 보면, 그가 손대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솔직히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음에 내 드라마에 출연 영영 못 할 수도 있고.’
아직 그는 감독으로 지내 온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기회가 있을 때 배우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몇 년 지나면 그는 감독보다 사업가로 변신하고 만다.
재석은 강태공이 된 기분으로 낚시질하고 있었다. 미끼와 떡밥은 신나게 뿌려 댔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리면 되는데 쉽사리 그걸 물지 않았다.
‘더 기다려야 하나?’
재석은 인내심 있게 더 기다릴 생각을 할 무렵, 그 흐름을 깬 건 윤정호였다.
“민경 씨.”
“네, 감독님.”
“혹시, 어떤 남자를 목숨처럼 사랑했고, 그 사람이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또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참고로 만난 지 얼마 안 된 애인이 있고, 돌아온 사람은 몇 년 뒤에 만난다면.”
“하루 종일 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매달리고 싶은데 선뜻 다가가진 못할 것 같아요. 또 그 사람을 생각하겠죠. 만난 지 얼마 안 된 애인이 있으면서 말이죠.”
윤정호는 손뼉을 치며 ‘크!’ 했다. 민경이 감독의 원하는 대답을 한 것이었다.
“혹시, 그 느낌을 잠시 얼굴 표정으로 지어 줄 수 있나요?”
윤정호의 주문은 꽤나 어려웠다. 특별한 대사도 없이 표정만으로 그걸 표현해 내는 건 연기 내공이 많은 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독님, 그건 아무래도······.”
재석이 살짝 감독을 말리려고 하자 윤정호가 손을 먼저 들었다. 그러면서 민경의 표정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민경은 재석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살며시 재석의 얼굴에 손댈 듯 말 듯하며,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좋아, 좋아, 좋아.”
윤정호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가장 중요한 그 순간을 카메라로 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자, 여기 손수건.”
“오빠, 고마워요.”
민경은 눈물을 지우고, 감독은 흥분된 표정이었다.
“민경 씨, 솔직히 말하죠. 마음에 두고 있었던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 배우가 제 드라마에 출연해서 극을 이끌어 가는 주연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이 돼서야 생각을 바꿨습니다. 바로 당신이 제 드라마의 주연을 꼭 맡아서 해 주십시오.”
윤정호는 민경이 마음에 들었는지 절실히 부탁했다.
민경은 감독의 요구에 응했을 뿐이었지만, 그 요구가 어려운 건지 몰랐다. 그냥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것뿐이었다.
오히려 놀란 건 재석이었다.
‘아직 여물지 않았다고 생각했건만······.’
멜로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의 연기가 되려면 멀었다 생각했었다. 물론 연기 실력이 나날이 늘어나는 건 알고 있었다.
‘벌써 이 정도 수준인건가?’
재석이 생각한 수준 그 이상이었다.
‘훨씬 더 놀라운 재능이야.’
재석은 민경을 보는 눈이 더 확실하게 변했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배우이고, 반드시 내 곁에 둬야 하는 사람이다.’
“감독님, 제의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드라마에 집중을 하고 있으니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물론입니다. 드라마는 내년에 방영될 겁니다. 촬영은 12월입니다. 그 전에 대본 리딩이나 여타 캐스팅을 끝낼 거고, 최대한 여유 있게 일을 진행할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님, 감사합니다.”
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민경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곱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근데, 이렇게 감사를 받아서 좋긴 한데, 좀 먹으면서 합시다. 아직 식사 주문도 안 됐어.”
“아!”
재석은 정말 깜빡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식사를 빠트린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