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잠시 있었지만, 재석은 누가 그 시선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놈일 거야.’
재석은 준현이 매니저를 질투할 정도로 민경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꽤나 못마땅하게 여겨질 거라 예상치 못했다.
‘힘들겠는데.’
매니저와 연예인 관계는 질투 받을 관계가 아니다. 그저 일 때문에 가까이 지내기에 친하긴 하다. 그게 질투로 이어질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다들 촬영장을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재석도 따라 움직여야 했다.
먼저 이동한 장소에 도착해서, 민경은 차 안에 대기한 상태로 대본을 다시 한 번 보고 다른 연기자들이 오면 연기 합을 맞췄다.
‘저 녀석과 또 얼굴을 봐야 하는 게 걱정인데.’
준현이란 배우가 재석을 바라보는 시선과 민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극명한 온도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저 녀석 마음이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고 있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아.’
다행히도 그는 아직 민경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있었다.
‘가장 최고의 기회는 쫑파티인데.’
드라마의 마지막 촬영이 있는 날. 그날이 그에게는 기회였다. 많은 이가 술에 취해 편안하게 이야기 하는 장소. 매니저들은 쉽사리 낄 수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호감도만 쌓으려고 할 텐데 말이야.”
민경이는 재석의 말대로 행동하면서도 살짝 긴가민가하는 부분이 있을 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민경의 마음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재석은 그 가능성이 너무나 싫었다.
‘연애를 해도 지금은 안 돼.’
지금 그녀에게 스캔들은 연기 생활의 끝장이다. 그녀가 미래에도 스캔들 하나 없이 조용히 지내긴 했지만, 그건 재석이 관리하던 시절이 아니다.
‘지금은 내가 관리하니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책임져야 해.’
촬영이 진행되기 전에 준현은 민경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민경은 대본을 봤다.
“준현 오빠, 대본에 집중을 하려고 하는데 도와주세요.”
“아, 알았어.”
덕분에 준현도 대본 보는 데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쫑파티나 이런 거 아니면 사적으로 만날 일이 거의 없겠어.’
정말 민경이 확실한 거리를 뒀다. 거기에 드라마 촬영 일정은 현재 지독할 정도로 타이트해서 따로 만날 엄두를 못 낸다.
‘그래, 이 드라마 끝나고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야.’
한시름 놓았다. 가까이에서 저렇게 말할 정도면 선을 확실히 그은 거다.
준현은 기세가 무척이나 죽어 있었지만, 그걸로 됐다. 문제는 연기에 지장이 있을까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렇진 않았다.
촬영이 끝날 때쯤 민경의 신이 먼저 끝나자, 민경은 인사만 하고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안 남아?”
“아뇨, 준현 오빠 때문에 곤란해졌어요. 오빠가 말한 대로 저한테 관심 많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럼, 너는?”
“확실히 말해서 관심 없어요. 고백하면 거절할 거고요.”
무섭게 말하는 민경이었지만, 재석에게는 오히려 안심이었다.
“이제 오빠 안심되죠?”
“응?”
“제가 누구 만날까 봐 그렇게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던데.”
“내가 언제!”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는데요.”
재석은 그게 얼굴에 티 났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긴, 연예인을 데리고 다니는 매니저 입장에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다. 특히 신인 때 말이다.
“커흠.”
재석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슬슬 촬영이 마지막 회 촬영을 할 때, 준현은 민경에게 고백을 해 버렸다. 그것도 키스 신을 찍고 난 뒤에 말이다.
어차피 모든 촬영이 끝난 뒤라 더 이상 촬영에 지장이 생기진 않았다.
둘은 그리 긴 시간 이야기하지 않았고, 결과는 민경이 고개 흔들며 거절 의사를 표시하는 걸로 끝났다.
“멀리 있으니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네.”
재석은 촬영장에서 민경을 항상 주시하고 있어 그녀가 뭐 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지만, 촬영장 안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뭐, 둘 이야기야 뻔하지.”
이미 사태 파악 끝난 거라 별 걱정 없었다. 그리고 민경은 재석에게 다가왔다.
“에휴.”
“이제 끝났어?”
“네, 정말 고백했더라고요. 그렇게 간접적으로 거절 의사를 표시했는데.”
“뭐, 사람의 감정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잖아.”
“근데, 어떻게 하죠. 곧 쫑파티 가야 하는데.”
“후우, 어쩔 수 없이 내가 참석해야겠군.”
재석은 원래 참석하는 자리가 아니라서 관여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민경이를 위해서 자리해야 했다.
사람들이 다들 쫑파티 참석을 위해 움직였고 재석도 마찬가지였다.
장소는 외주사에서 준비한 술집이었다. 오늘 하루 전세 내는 걸로 그곳의 매상을 확실하게 처리했다.
정말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었고, 각자 자리에 앉았다.
“어, 민경 씨, 거기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요. 근데, 실장님도 같이 왔어요?”
“예, 저도 감독님에게 축하 인사드리려고 남았습니다.”
“이야, 매번 에너지 드링크 가져다주시고, 덕분에 아주 촬영하는 내내 호강 좀 했습니다.”
“하하하, 그게 얼마나 한다고 이러겠습니까. 다 여러분들 힘내라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드린 거죠.”
정말 민경이 잘 봐 달라고 준 거 다 알지만, 그래도 받는 사람 입장에서 고마운 건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 오셨으니 이쪽으로 앉으시죠.”
“이거 그래도 외부인인데······.”
“외부인이라니 무슨 말씀을,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관계자 아닙니까.”
감독이 관계자라면서 재석을 얼른 자리에 앉게 했다.
“감사합니다.”
재석은 덕분에 감독과 마주하는 자리에 앉았고 민경 역시 재석의 옆에 앉으면서 함께했다.
“근데 민경 씨는 이번에 드라마 찍었는데, 다음 계획 있습니까?”
“예, 생각보다 빠르게 일정이 잡혀서요.”
“흐음, 아쉽네. 다음에도 같이 일해 보자고 하려 했는데.”
“어유, 감독님. 그다음에 좋은 작품으로 같이하면 되죠.”
“어허, 전 실장님이 좋은 작품으로 같이하자는 말에 뭔가 걸리는데······.”
“설마, 자신 없으신 겁니까. 좋은 작품 안 만드실 겁니까?”
오히려 재석이 묻자 감독이 자신 있게 말했다.
“거, 그걸 말이라고. 자신 있죠. 좋은 작품 꼭 준비해서 드리죠.”
“그렇다면, 민경이가 출연 안 할 이유가 없죠.”
“이야, 그럼 계약서?”
“작품 먼접니다.”
“깐깐하게 굴기는······.”
언제 다시 할지 모르지만, 민경은 이 감독과 더 이상 볼 일이 없다.
“아, 우리 주인공, 이리 와서 옆에 앉아요.”
“가, 감독님.”
주인공이라며 추켜세웠지만, 이 드라마는 민경이가 다 끌고 가는 드라마였고 그 외는 같은 주연이라도 비중이 떨어졌다.
민경과 준현은 서로 마주 봤지만,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어허, 이거 두 사람 오늘 달달하게 촬영하더니 끝나고 나서는 서먹서먹하구먼.”
감독은 두 사람의 속도 모르고 술을 권했고, 재석도 함께 술을 했다.
그렇게 술을 하면서, 배우들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며 서로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민경과 준현이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가 준현이 재석의 자리에 오게 되었다.
“후우.”
준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재석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왜 한숨을 쉬는 겁니까?”
재석은 그가 왜 한숨을 쉬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물었다.
“알면서 왜 물어보십니까.”
“뭘 말입니까?”
“에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속 시원히 이야기나 한번 들어 보죠.”
재석은 깍지를 끼고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준현은 재석의 행동에 살짝 놀랐다. 정말 민경이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은 건지 의심될 정도로 호기심 가득한 모습을 보여 준 거다
“진짜 아무것도 모릅니까?”
“알면 이러겠습니까?”
준현은 민경을 한번 쓰윽 보더니 입을 열었다.
“하아, 잠시 밖으로 나가죠.”
“예, 뭐······.”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준현은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같이 하실래요?”
“죄송하지만, 비흡연입니다.”
“아, 이런 실례를······.”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본론을 먼저 꺼내시죠.”
재석의 재촉에 그는 얕은 담배 연기를 한쪽으로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민경 씨에게 고백했다가 차였습니다. 쫑파티 때 불편한 관계가 됐고요.”
“뭐, 그럴 수 있죠. 젊은 남녀의 문제니까.”
“그것보다 거절 내용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지만 애인이 있다 하더군요. 알고 있었습니까?”
‘민경이 이 남자를 떼어 내려고 거짓말을 했어. 그냥 거절하면 될 걸.’
재석은 상대를 생각한 거절의 형식이 좀 그랬다. 동시에 약점이라는 걸 민경은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매니저가 그걸 모를 순 없죠.”
“아니, 매니저가 어떻게 그런······.”
“어떻게 그런이라뇨. 사람에게 끌리는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저도 그걸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매니저와 연예인은 서로 믿는 관계입니다. 제가 민경이를 믿지 못하면 누굴 믿으며 일을 하겠습니까?”
재석의 말에 준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매니저와 연예인 관계는 철저한 신뢰다.
“큭.”
“뭐, 그걸로 민경이를 공격하실 생각이라면 별로 의미가 없을 겁니다. 신문, 뉴스에 스캔들이 난무하는 상황인데 겨우 고백 가지고 스캔들 기사를 만들면 딱히 이슈화되지 않겠죠.”
재석은 팩트를 날렸고 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럼, 할 말 다 하신 것 같으니 전 그만 들어가죠.”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민경과 눈이 마주쳤다.
“오빠, 무슨 이야기 했어요?”
“차인 남자의 불쌍한 신세 한탄 들어 주고 왔어.”
그 말 한마디에 민경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알아듣게 말했는데, 오빠한테 결국 피해를 끼쳤네요.”
“아니, 내가 여기에 온 건 너도 알다시피 문제가 될 것 같아 온 거야. 오히려 잘됐어. 방금 그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아서 말이지.”
재석은 밖에 있는 사람을 한번 봤다. 연거푸 담배 연기만 거칠게 내뱉고 있었다.
‘화는 나지만 너도 고백했다 차인 거 때문에 스캔들 내고 싶지 않겠지.’
어떻게 보면 연예인 이미지에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이 갈 이야기라서 말도 못 할 거다.
“제가 나가서 한마디 하고 와야겠어요. 괜한 사람 끌어들이지 말라고.”
“아니, 됐어. 네가 나서면 저 사람 화만 돋우는 일이야. 이럴 때는 그냥 입 다무는 게 최고야.”
민경은 재석의 말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자리에 앉아서 술이나 마시며 속을 풀었다.
준현은 안으로 들어오더니 사정상 먼저 가야 한다고 하면서 가 버렸다.
“불필요한 충돌은 이제 더 이상 없겠네.”
“정말 오빠 없으면, 저 이 생활 어떻게 할지 감도 안 잡혀요.”
“나중에는 나 없이도 잘 살 거야. 지금이야, 몰라서 그런 거고, 좀 더 지나면 적절한 대처법도 생기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게 돼. 세월과 함께 배우면 세상이 다 답을 알려 주지.”
“아우, 오빠,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무슨 영감 같은 소리를 해요.”
“큼.”
말대로 재석은 영감 같을 수 있다. 살아온 세월로 세상을 배웠다. 물론 그 인생이 지독히 고통스러웠을 뿐이다.
“가끔 오빠 말하는 거 보면 할아버지보다 더 심해. 어릴 적에 할아버지들 손에 컸어요? 매일 양로원에서 놀았죠?”
“아니야.”
클 때는 정말 평범하게 컸다. 특별한 거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로.
“아, 그것보다 대본 줘요. 차기작 된 거.”
“그거야, 항상 가지고 있지, 차에 있다.”
“그럼, 내일 집에 와요. 상대역도 해 주시고, 대본 캐릭터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하게요.”
“알았다.”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남아 있다가 쫑파티가 끝나자 각자 집으로 갔다.
원래 내일부터는 회사에서 쉬는 날이지만, 민경은 휴식을 포기하고 대본부터 열심히 봤다.
민경의 집에 찾아온 재석은 조금 두리번거렸다.
“여기 처음인데.”
“어서 들어와요.”
“다 큰 처자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도 될지······.”
“괜찮아요. 오빠, 제 집에 온 거 가지고 이상한 딴 생각 하는 거 아니죠?”
“무슨!”
재석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는 철저한 비즈니스다.
“그럼, 뭐가 겁나세요.”
민경은 재석을 안으로 들였고, 집 안에는 이미 손님맞이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커피? 차?”
“커피 줘.”
“잠깐만 기다려요.”
민경은 언제 뜨거운 물을 준비했는지 금세 믹스커피를 내놨다.
“오빠, 대본을 먼저 봤으니 다 읽어 봤죠?”
“그래.”
“캐릭터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참고 사항이 될 정도는 충분히.”
역시 재석은 단순히 대본만 주지 않고 이미 대본에 대한 내용을 기억하고, 캐릭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연구를 했다.
연기자를 데리고 다니는 매니저로서 상당히 도움되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