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민경은 재석이 대본에 대해 본 느낌과 나름대로 연구한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빠 말은 이 여자의 초기 캐릭터는 오지랖 넓은 발랄한 소녀란 소리죠?”
“그렇지, 그렇다고 내가 알아낸 걸 그대로 따라 할 필요는 없어. 뭐 참고 사항 정도 수준이지.”
“흐음, 근데 오빠가 연구해 온 수준은 그냥 참고 수준으로 하기는 거의 정답이라서······.”
재석이 알아 온 건 대본에서의 캐릭터고, 민경이 해야 할 일은 ‘그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할 거냐.’였다.
“흐음.”
이 부분은 초기 부분이라 몇 화 지나면 변화된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이번 드라마에서 연기 변화폭은 굉장히 컸다.
어린 연기를 보여 줘야 하면서, 얼마 안 가 다른 성숙한 연기도 보여야 했다.
“혹시 어려워?”
“어렵긴 한데. 막, 막 도전 욕구가 불타오르네요.”
민경은 대본에 나온 연기의 난이도가 전보다 훨씬 높다는 걸 깨달았다.
“좋아, 내일 윤정호 감독과 만나기로 했으니 그때 보자.”
“네.”
“그럼, 대본 더 보고. 내일 보자.”
“오빠, 그냥 가요? 점심시간 다 됐는데.”
“그럼, 밥도 주려고?”
“먹고 가요. 혼자 밥 먹는 거 싫단 말이에요.”
어지간히 혼자 먹기 싫었나 보다. 일할 때도 항상 민경이랑 같이 먹어서 이제 혼자 먹는 게 어색할 정도다.
“알았다. 김치와 밥만 줘라.”
민경은 정말 김치와 밥만 내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 집에 심심하게 먹는 것보다 좋은지 밥을 잘 먹었다.
그렇게 민경과 함께 점심을 먹고 나서 회사로 돌아왔다.
“선배님.”
회사로 돌아오기 무섭게 최민철이 다가왔다.
“요즘 권진우는 어때?”
“진우 형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사도 계획 중이고요.”
“이제 둘이 떨어져 사는 거야?”
“네.”
원래 권진우와 최민철이 함께 살던 집에서 권진우가 떨어져 나오는 거다.
“흐음, 둘이 떨어질 정도의 금전적 여유가 생긴 거야?”
“뭐, 진우 형이 영화 찍고 받은 돈이 있어서요.”
“다음 작품은 정했어? 떨어질 정도로 돈이 생겼지만, 생계를 생각하면 부족할 텐데.”
“그러지 않아도 진우 형이 선배에게 다음 차기작 추천 좀 해 달라고 해서요.”
“특별히 대단한 작품은 없어. 이미 다른 배우들이 자리를 꿰차 버려서 남은 건 어중간한 것들뿐이야.”
“그럼, 다음은 힘든가요?”
“아니, 힘들진 않아. 작품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권진우가 따로 산다면 잔고가 안정적이지 않을 테니 여기 한번 도전해 봐.”
재석이 내민 건 일일 드라마 대본이었다.
“드라마요?”
“그래, 권진우의 인지도를 조금이라도 올리려면 일일 드라마처럼 좋은 것도 없지 거기에 안정적이고.”
“알겠습니다. 선배님.”
민철은 재석을 믿고 대본을 받아 들었다.
***
재석은 며칠 뒤 윤정호 감독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물론 혼자 자리하지도 않았고, 윤정호 역시 홀로 나오지 않았다.
윤정호 감독 옆으로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다들 20대 후반의 여인들이다.
“안녕하십니까.”
재석이 곧바로 그 여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들도 재석에게 인사했다.
“호호호, 안녕하세요.”
“와아, 연예인이다.”
“예쁘네요······.”
인사를 하면서도 셋 다 시선이 재석을 보는 게 아니라 재석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갔다. 바로 민경에게 말이다.
“어쩜 이렇게 예뻐요. 역시 연예인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세 사람 모두 이번 눈꽃연가의 작가들이다. 두 사람은 보완을 맡은 신인, 한 사람은 스토리텔링을 맡은 신인으로 앞의 두 작가가 써 온 스토리의 큰 맥락을 잡는 사람이다.
신인들이 능력은 있지만, 장황하게 할 수 있기에 그 흐름을 잡는 스토리 작가 이현지. 입봉 작가 둘, 조민영, 장지연. 이렇게 셋이었다.
“다들 그만.”
짹짹거리는 참새 작가들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건 바로 윤정호 감독이었다.
“후우, 이거 죄송합니다. 아직 작가들이 연기자를 처음 봐서요.”
윤정호가 민경에게 사과하자 민경이 오히려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감독님. 거기에 이렇게 활발한 작가 분들이라면 아주 힘찬,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을 쓰시겠는데요.”
활기차다는 말에 이 작가들의 입이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머, 마음도 착하셔라.”
“우리, 저쪽에 가서 따로 이야기할까요?”
“작품 이야기해요. 연기자가 어떻게 저희 캐릭터를 이해하고 있는지도 궁금해요. 이번이 첫 작품이라 너무 너무 궁금하거든요.”
금세 민경을 둘러싸고 이야기꽃을 피우자 윤정호가 손짓했다.
“저쪽 가서 여자들끼리 이야기해.”
“네, 감독님.”
작가들은 거의 민경을 붙잡고 다른 자리로 가 버렸다. 무섭게 그녀를 붙잡고 수다를 떠드는 통에 한쪽이 시끄럽긴 했지만, 윤정호에게는 한숨 돌리는 시간이었다.
“후우, 다행이네. 민경 씨를 데려오지 않았으면, 자네가 작가들을 만날 때 힘들었을 거야.”
“뭐,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오늘 온 목적이야 계약 내용에 관한 거죠. 작가님들과는 인사만으로 충분합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 그럼 좀 더 자세하게 돈 이야기를 나눠 보지.”
돈 이야기가 나오자 재석은 진지한 표정을 했다.
출연료 내용은 신인보다 좀 더 쳐 주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벌써 드라마 두 작품이나 주인공을 맡은 연기자였기에 출연료가 점점 높아졌다.
출연료 협상은 민경이 듣는 자리에서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저쪽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작가들 때문에 민경이 이쪽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출연료 결정이 되고 나서, 감독과 재석은 이제 끝났음을 알았다.
“감독님, 출연자들 지급 보험은 들으셨죠?”
“물론이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출연할 연기자들 지급 보험 안 들어 놨을까 봐. 내가 아무리 돈 없이 회사를 차렸지만, 할 건 다 한다고.”
“그렇다면 걱정 없습니다. 다른 배우는 지금 섭외가 됐습니까?”
지금 한창 진행 중이어야 했다. 특히 민경의 상대역은 더더욱 말이다.
“아주 잘되고 있네.”
잘되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다. 지금 캐스팅에 아주 골머리를 앓고 있을 거다.
그가 방송사에서는 편했던 캐스팅이 회사를 차리면서 너무 어려웠다.
“감독님, 솔직해지시죠. 지금 제 귀에 한 가지 소문이 들립니다.”
“그 소문 믿을 게 못 된다는 거 알면서 그러나.”
방송사는 워낙 유명인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라 작은 이야기도 소문으로 이상하게 변해 버린다.
“뭐, 믿을 건 못 되죠. 하지만, 하나는 확실합니다. 지금 감독님, 캐스팅 제의하신 곳에서 거절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드라마 캐스팅할 시기에는 다들 조금 힘든 게 있지만, 다 잘 풀리네. 그러니 걱정 마. 드라마는 엎어지지 않아.”
“그거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믿고 있던 배우에게 거절당한 건 치명적일 겁니다.”
그 말에 윤정호의 표정에 금이 갔다. 재석의 말은 사실이었다. 분명 윤정호의 작품이라면 반드시 나올 거라 믿음이 있었던 배우에게 거절당했다. 물론 둘만의 비밀이라고 여긴 문제였는데 그게 재석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 녀석이!”
윤정호는 그 배우가 둘만의 이야기를 발설했다는 것에 분노했지만, 재석은 윤정호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흥분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이곳은 방송사가 아닙니다.”
그 말 한마디에 윤정호는 화를 참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가 전화 한번 돌리면······.”
“지금 드라마를 만드느라, 감독님은 여러 사람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아닙니까? 거기서 또 부탁을 하면 그들이 들어주겠습니까?”
“끄응!”
윤정호가 워낙 사람과 잘 지내서 인맥이 좋지만, 그것도 한 번 부탁할 정도 수준이다. 다시 부탁하고 싶으면 일단 드라마부터 성공시키고 봐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저도 나름대로 감독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조금 알아봤습니다.”
“날 돕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이긴요. 감독님 드라마가 잘돼야 저에게도 이득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캐스팅 관련해서 따로 알아볼 필요가 있을 정도인지 의심이 가는데.”
“이유는 많습니다. 드라마가 제때 시작해야. 저나 민경이도 일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네 회사에서 사람을 추천할 텐가?”
“아니요. 그러지 않을 겁니다. 회사에서 감독님 작품에 출연할 만한 남자 배우는 없습니다. 그만큼 인지도를 높인 사람이 없습니다. 연기력도 마찬가지고요.”
“어허, 자네가 다니는 회사인데 말을 그렇게 해도 되나?”
“제가 언제까지 GU에 몸담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재석의 말에 윤정호는 깜짝 놀랐다.
“아니, 회사를 나올 건가? 하지만, 자네가 관리하는 연기자의 계약 기간 때문이라도 쉽지 않을 텐데.”
“그거야 제가 할 일이죠.”
“방법이 있는 모양이군. 자신 있어 하는 걸 보니.”
“그것보다, 주용진이란 배우에게 연락은 해 보셨습니까?”
“남자 배우 스케줄 파악해서 연락 주는 건가?”
“비밀은 아니죠. 이리저리 연락해서 확인만 하면 되니까요. 주용진 정도라면 연기자로서 인기와 실력이 검증된 연기자입니다. 뭐 제가 조사해서 나온 결론입니다.”
“주용진 정도라면 좋지. 믿었던 인간이 출연 못 한다고 고사했으니 말이야.”
윤정호는 머릿속에 있는 여러 후보군에 주용진이 기억되었다.
“그럼, 할 말은 그거뿐인가?”
“아니요.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 더?”
“해외 판권 문제입니다. 혹시 계약서에 해외 판권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까?”
“없네. 한국에서 만든 드라마가 무슨 해외인가. 거기에 판권을 사 달라고 해도 사 줄 곳이 없는데.”
과거에는 충분히 그랬다. 하지만, 해외로 드라마가 완벽하게 안 나가는 건 아니다.
“옆 나라 일본에 물량이 꽤 나갑니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푼돈이라 할 수 있지만, 윤 감독님한테는 큰돈이 될 겁니다.”
“일본이면 비디오를 내자는 건가?”
“이미, 일본에는 한국에서 방영한 드라마를 판권을 가지고 팔고 있습니다. 방송사에서 말이죠.”
“그런 내용 전혀 없던데.”
윤정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계약서를 봤지만, 그 내용이 없었다.
“당연하죠. 방송사에서 다 먹으니까요. 연출만 하신 감독님이 이 사실을 알 리 없죠.”
“이거 중요한 거군.”
“오래전부터 한 일입니다. 지금은 그쪽 일본에 유통망도 다 깔려 있고. 방송사에 일하는 지인을 통해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게. 전화 좀 하지.”
재석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윤정호는 인상을 팍 쓰면서 재석과 마주했다.
“이런 염병, 내가 연출만 해서 몰랐던 거라. 해외 관련된 내용을 쏙 뺐어.”
“아셨으면, 추가하시면 되죠. 수익도 확실히 나누고요.”
“내가 몰랐던 걸 알려 줘서 정말 고맙네. 그리고 또 해 줄 말 있나?”
“있다면, 계약 내용.”
“거기까지 해야 하나?”
“하셔야 합니다. 일본에 비디오만 나간다고 다른 나라에 안 나간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마치, 내가 만든 드라마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모양이지?”
‘당연한 소리를 하네.’
재석은 이 자리에 말 할 수 없지만, 눈꽃연가는 아시아를 넘어 남미까지 진출한 드라마다. 그렇게 수십 개 나라에 넘어가면서 벌어들인 수익이 천문학적이다.
“사람 일은 모릅니다. 감독님.”
재석의 진지한 눈빛에 윤정호는 생각을 달리하게 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드라마 이외에도 수익이 들어올 구멍 있으면 확실히 하는 것도 좋고, 이익 분배도 확실히 해야지.”
“될 수 있으면 해외 판권에 대한 이익을 더 크게 잡을 수 있게 하십시오.”
“일단, 이야기는 하겠지만, 방송사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
“일단, 제가 알고 있는 건 이 정도입니다. 한번 방송사와 잘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러지.”
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뒤 윤정호의 연락이 왔다. 한번 다시 얼굴을 보자는 거였다.
윤정호의 바람대로 재석은 그날 저녁에 바로 만났다.
“후우,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만나자고 했나?”
“괜찮습니다. 감독님.”
“일단, 자네가 말한 걸 다 확인했네. 방송사에 내 친한 선후배들에게 다 물어봤지. 결과는 자네 말대로, 일본에 교민들 대상으로 비디오 장사를 좀 한다는 걸 알았네. 방송사에서는 계륵 같은 수입원이라 일단은 돈을 얻고 있지만, 다른 외주사에 수익을 나눠 주긴 한다더군.”
“그래서 방송사에서 해외 판권 관련 이익을 어떻게 하겠답니까?”
“일단, 계약서 내용에 추가 사항을 넣긴 했고 비율은 5대 5로 나누기로 했지.”
“아쉽네요. 더 얻지 못해서.”
저 비율에 숫자가 1 바뀌는 것이 실제 받는 돈의 액수에 어마어마한 격차를 만들어 낸다.
‘나였다면 아마 6대 4 정도로 했을 거다.’
아직 한류가 불기 전이니 방송사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될 거다.
“나도 아쉬워. 그래도 방송사에서 이 정도 이익 배분 해 준 게 다행이야. 나 같은 신생 외주사에게는 이런 배분도 어렵다 하더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범위였다. 물론 재석이 윤 감독이었다면 국내 수익을 일부 포기하고 해외 판권을 독점했을 거다. 그걸로 더 막대한 이익을 뽑아내니까.
윤 감독은 재석처럼 미래를 보는 게 아니었으니 재석이 이 이상 국내 이익까지 포기하라고 한다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 거다.
“근데 나중에도, 혹시나 해서 묻지만, 정보를 얻는다면 나에게 알려 주게.”
“왜요. 정보가 더 필요하십니까?”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도 그냥 흘려보내기 어려울 정도야.”
“제가 해 줄 말은 그냥 해외 판권 비율을 조금이라도 더 따라는 거 말고는 없습니다.”
“신기하네. 자꾸 해외 판권을 들먹이는 게 뭔가 알고 있는데 속 시원히 이야기 안 하네.”
윤 감독은 재석의 이야기 속에 뭔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조만간 방송국 사람 한 번 더 만나고 다시 이야기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