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16화 (16/152)

16

며칠 뒤 재석은 윤정호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물론 전에 이야기가 아닌 드라마 관련 이야기였다.

“감독님, 갑자기 절 부르시다니 또 무슨 일 있습니까?”

“드라마 관련해서 도움 좀 얻으려고.”

“네? 제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전에 주용진 추천하지 않았나. 덕분에 캐스팅했거든.”

“빠르십니다.”

이야기 꺼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일의 속도가 달랐다.

“얼마 있지 않아서 오디션을 볼 거야. 필요한 사람들 뽑아야 하니까.”

“하긴, 지금 준비해야 하죠.”

주인공이 뽑혔으니, 나머지는 정말 순조롭게 일이 진행될 거다.

“그럼, 대본 리딩 날이 모두 모이는 날입니까?”

“맞아.”

“그럼, 그때 다시 뵙도록 하죠.”

“벌써 가려고? 몇 마디 해 주고 가.”

“무슨 말을 하라는 겁니까?”

“오디션장에 한번 나오지 않을래?”

“네?”

갑자기 하는 말에 재석은 놀랐다.

“전에 돈 나올 구멍 알려 준 것도 있고, 자네 연기자 실력 봐서는 안목이 상당한 것 같아서. 오디션 볼 때 쓸 만한 사람 있는지 찍어 줘.”

“아니, 그거야, 감독님이 할 일이지 제가 할 일입니까.”

“뭐, 전에 내 드라마 잘되라고 해 준 말은 뭔가? 이왕 도와준 김에 한 번 더 도와줘.”

“스케줄 바쁩니다. 제가 관리하는 연예인 숫자도 있고.”

“한 명 관리하는 거 아니야?”

“두 명 관리합니다. 다른 하나는 로드 붙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신경 써야죠.”

“이야, 젊은 친구가 벌써 밑에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탐나는데, 그만큼 능력 있다는 말이니까.”

“저, 타 회사 사람입니다. 여기 직원 아니고요. 그리고 쉬는 날 정말 꼭 쉴 겁니다. 저 불러낼 생각 꿈도 꾸지 마세요.”

재석은 엄포를 놓으며 오디션장에 불려가 심사 위원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아쉽네, 아쉬워. 있으면 더 확실하게 좋은 배우를 뽑을 것 같은데.”

“감독님이 더 대단하십니다. 그러니 그날 저 찾지 마세요.”

“그럼, 다른 거라도 뭐 하나 알려 줘.”

“일본에 저작권 등록 정도나 해 주세요. 그거 말고는 할 말 없네요.”

“그거야 당연히 진행할 일이지.”

윤정호는 확실히 사람 보는 감각이 있는 감독이었다. 재석이 말하지 않았지만, 그 촉과 판단력이 좋아서 눈꽃연가를 찍었다.

‘윤정호의 연출력은 지금이 정점을 찍는다. 그 뒤에 세상이 바뀌지.’

윤정호의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지만, 문제는 좋은 대본이 없고, 시대의 흐름이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

‘한류라는 격변에 드라마 판이 변해 버렸으니까.’

그가 만든 작품으로 일어난 격변이 그를 집어삼킨다.

‘그때가 되면 윤정호가 날 붙잡고 늘어지겠군.’

재석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윤정호는 감당해야 할 거다. 지금의 재석이 그때의 재석과 다름을 말이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그러지, 조심해서 들어가게.”

“예.”

재석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회사로 돌아왔는데 주명진이 답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끄응.”

“팀장님, 얼굴 표정 안 좋습니다.”

“답답하게 됐다. 연기자는 오디션 봐서 들어오는데 그걸 감당할 매니저 숫자가 부족하다.”

아하!

재석은 순간 떠올렸다. GU에서 무리수라고 할 순 없지만, 일의 용량 초과 사태가 하나 생기는 일이 벌어진다.

‘매니저 인력 따윈 생각하지 않고 연기자 오디션 봐서 받아들인 거!’

현 사장의 아들이 추진한 무리수다. 회사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하지만, 매니저는 충원 안 되고 관리할 연예인만 잔뜩 늘어났다.

이때 대다수 매니저들이 그 일 맡기 싫어서 담당 연예인의 일거리를 늘려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나도 회귀 전에 도망 다녔지.’

회귀 전에 그때 재석이 맡은 연기자가 둘이었다. 이것도 둘 다 활동은 하는데 연기 실력이 안 좋아서 그들도 답답해했던 시기다.

‘흐음, 혹시나 해서 팀에서 받은 사람들 목록이나 볼까.’

“팀장님, 누구 들어왔는지 프로필 볼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지. 봐라.”

팀장은 선선히 이번에 들어온 연기자들을 봤다.

‘!’

재석은 그 목록을 보자 가장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시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둘은······. 아니, 그것보다 이 둘이 여기에 있었나?’

기억에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회귀 전에는 그때 그 사람이 스타가 되는지 어떤지 전혀 모르고 지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래의 스타가 있었다.

‘정말 내가 그때 눈이 있어도 이 둘을 몰랐구나. 신지경, 문자영! 홍련전, 어린 아내, 댄서의 순수, 지붕 뚫는 킥! 나열하기도 벅찬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던 이 둘!’

둘 다 아역으로 출발했지만, 한 사람은 좀 빨리 주목받고, 다른 하나는 좀 늦지만 성인이 돼서 뜬 배우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젊은 나이에 연기와 인기를 동시에 거머쥔 배우다.

재석은 손이 떨려 왔다. 그 손을 다른 손으로 꼭 잡으면서 진정을 시켰다.

“후우.”

깊게 심호흡하면서 이들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래, 잡는 거다. 꽉, 아주 이때부터 말이야.’

아직 아역이라 찾는 곳도 많지 않고 그녀들이 실질적으로 성공이란 단어를 붙이려면 몇 년 더 남았다.

‘내가 회사 차린 뒤에 뜰 인재들이야. 지금부터 공들여야 해.’

재석은 프로필을 들고 주명진에게 다가갔다.

“표정이 심상치 않다. 재석아.”

“뭘요.”

“근데, 손은 왜 떨어.”

재석은 손을 다시 붙잡았다. 진정시켰는데 미래의 스타를 잡는다는 생각에 흥분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병원에 좀 가 봐야 하나.”

“너 병원 가라. 몸 관리해야지.”

“그것보다 회사에서 이 사람들 다 받은 겁니까?”

“그래, 다 받았다. 미치겠다. 우리한테 떨어진 숫자가 그거야.”

“그럼, 이 미성년자 둘 저에게 주십시오.”

“아니, 네가 관리하는 사람도 있고, 민철이 있다지만 권진우도 신경 쓰고 있잖아. 근데 둘을 또?”

“이 둘 아직 성인 안 되서 아역이라 일이 바쁠 것 같지 않거든요.”

“흐음, 하긴 어린애 둘 관리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여기 문자영은 우리 회사에 이직해서 들어왔어.”

“네?”

“이전에 있던 회사랑 문자영 할머니랑 대판 싸운 모양이야. 거기서도 할머니가 난리를 치는 바람에 놓아준 모양이더라고.”

문자영이 어느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 물었을 때 할머니라 답한 적이 있었다.

워낙 강단이 센 분이라 들었다. 거기에 문자경의 서울 뒷바라지 다 한 걸로 알고 있다.

‘손녀를 위해 노구를 이끌고 움직인 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거꾸로 생각하면 꼬장꼬장한 할머니가 수틀리면 다 뒤집어엎는다는 소리다.

“그럼 이전에 있는 회사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건데요.”

“그게, 사정 알아보니 그쪽 사장이 할머니를 폭행했다고 하더라고.”

“그런······.”

아무리 화가 나도 어르신 폭행은 위험한 일이다.

“사건을 덮자는 걸로 계약 풀고 치료비 물었다고 하더라고, 거기에 문자영도 독기를 품고 그 회사에서 다시는 일 못한다고 죽자고 달려들기도 했대.”

“그쪽 회사 곤란하게 됐군요.”

“소문나면 다른 연예인들이 얼씬도 안 할까 봐 조용히 덮었지. 거기에 정산도 최근에 깔끔하게 끝내 줬다는군.”

“그 정도라면 이쪽에서 더 잘해 줘야겠네요.”

“뭐, 정신적인 피해가 좀 있을 거니 신경 써 줘야지.”

“저한테 맡기시면 제가 다 잘 해결하겠습니다.”

“진짜?”

“저 못 믿으십니까?”

지금까지 재석이 해온 행보를 보면 일 처리는 확실히 할 것 같았다. 다만 걱정되는 게 있다면······.

“네 몸은 챙기면서 연예인 챙기냐?”

주명진이 봐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수준이 몸 신경을 쓰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다.

“쉬는 날에는 잘 쉬고 있습니다. 잠도 많이 자고, 먹는 것도 최대한 잘 먹고요.”

“그래라, 부실하게 먹어 봤자 너만 힘들다. 뭐 그나마 신경 덜 쓰이는 아역 너한테 주마. 그래도 문자영은 집중 관리 좀 해라.”

“감사합니다.”

재석은 필요한 사람을 얻어서 좋았고 주명진은 배정받은 연예인은 소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근데, 아직도 넷이나 남았네.”

용량 초과 일을 소화시켜야 했기에 주명진은 누구에게 일을 사람을 떠맡길지 고민이었다.

재석은 그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

‘아니 그 인원을 어떻게 다 소화해?’

지금 돌이켜 보면, 사장 아들이 회사 운영을 개판으로 하고 있는 게 여실히 보였다.

‘근데 사장은 뭐 하고 있는 거지?’

신기하게도 사장의 종적이 이때쯤 되면 모호하다. 분명 죽었다면 직원이 다 알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이유는 몰랐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회사는 수순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재석이 몇 년 후 회사를 차리기 위해서는 지금 이대로 일이 진행되는 게 더 좋았다.

“그럼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재석은 두 사람의 프로필을 들고 가장 먼저 찾아간 건 민경이었다.

“오빠, 왔어요.”

“그래, 오늘 스케줄 정리해야지.”

“네.”

민경은 차에 탔다. 그녀가 차 한쪽에 있는 프로필을 봤다.

“이거 뭐예요?”

“회사에서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영입했어. 매니저들에게 그 사람들 분배하고 있는데 내가 미리 받았어.”

“오빠, 괜찮아요? 지금 제 스케줄 하나만 해도 힘드실 텐데.”

“둘 다 아역 배우들이야. 아직 특별한 신경 쓸 건 없어. 한참 연기를 배우는 이들이라서.”

“아역이라······.”

민경은 아역이라는 말에 프로필을 펼치면서 관심을 보였다.

“어머, 이렇게 귀엽고 예뻐?”

민경도 프로필을 보더니 깜짝 놀랄 정도다.

“으으, 조금 질투 나는데.”

“질투 날 것도 많다. 어차피 나한테는 메인은 너다.”

“진짜죠?”

“물론 내가 언제 거짓을 말하더냐. 단, 일 없어서 쉴 때 이 사람들 보는 거 뭐라 하지 마라.”

“그거야, 이해하죠.”

재석은 민경을 달래고 스케줄대로 움직였다. 이날 일정은 간단한 사인회였다.

이미 사인회 행사장에 많은 이가 모여 있었다.

“이거 괜찮은데.”

“사람 많네요.”

한쪽에 줄 서 있는 사람들 숫자를 보고, 민경은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민경아, 사인하는 동안 인기를 즐겨라.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네!”

민경은 다른 이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인회장으로 갔고 거기서 사람들에게 사인해 주며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제까지 민경은 사람들과 직접적인 접촉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일을 하다가, 이제 처음으로 접촉한 것이다.

사인회는 30분간 진행되었고 그동안 민경은 팔이 떨어져라 사인했다. 물론 가볍게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게 전부였지만, 계속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사인회가 진행되는 와중에 재석은 행사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대금 입금 확인했습니다.”

“이야, 그런데 정말 예쁘시네요.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면 또 부르고 싶네요.”

“불러만 주신다면 저희야 환영이죠. 하지만,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이라 적어도 넉 달은 지나야 시간이 생길 듯합니다.”

“이야, 다음 예약이 넉 달 뒤라니······.”

행사 관계자는 다음에 민경을 부를 때, 그 바쁜 일정을 뚫고 이런 사인회를 다시 열려면 꽤나 높은 가격을 불러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거, 다음에 부르기 어렵겠네요.”

“혹시, 돈 문제를 생각하신다면··· 그때 가서 조율하면 됩니다.”

재석은 그리 말하고는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우, 팔 빠지네.”

민경이 재석을 보자 내뱉은 한마디였다.

“고생했다. 차에 타서 편히 쉬어라. 집에 데려다줄게.”

재석이 차에 타자 민경도 올라탔다.

“오빠,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너 데려다주고, 이 아역 배우들을 만나야지.”

“······.”

민경은 뭔가 생각에 빠졌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따라갈래요.”

“너, 대본 연습해야 하잖아.”

“대본 너무 일찍 받아서 연습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가요, 저도 오빠가 새로 관리하는 얘들 궁금하니까.”

민경은 뭔가 호기심이 생겼는지 재석을 따라가겠다는 말을 했다.

“혹시 이상한 말 하면 안 된다.”

“걱정 마요.”

재석은 그렇게 차를 몰고 곧바로 문자영을 먼저 찾아갔다.

“여기에요? 집이 허름하네요.”

“여기는 원래 집이 아니야. 서울로 전학을 와서 그래. 실제 부모님이 살던 집은 광주야.”

“전라도 광주?”

“그래, 멀지.”

“그럼 혼자 살아요?”

“아니, 할머니랑 같이 산다고 하던데. 지금 괜찮을지 모르겠네.”

민경은 재석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됐다.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묻지도 이야기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똑똑.

재석이 문을 두드리자 그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어여쁜 소녀였다.

“안녕? 난 GU에서 나온 사람이란다. 전재석, 너의 매니저가 될 사람이다.”

“······.”

매니저란 말을 하자 그 소녀의 얼굴에서는 약간의 경계하는 기색이 보였다.

“네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