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문자영은 재석을 한번 봤고, 그 뒤에 있는 민경을 보게 되었다.
“어, 어.”
문자영은 혼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안녕.”
“그, 그, 아, 아.”
자영은 답답한지 민경을 보고 곧바로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혼자 가슴을 치고 답답해하면서도 그래도 TV에서 봤던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민경 언니!”
“그래, 맞아.”
“여기에는 어쩐 일로.”
“뭐 하긴, 매니저 오빠가 새로 관리하는 아역 연기자 생겼다고 해서 누군지 보려고 따라왔지.”
아역 연기자라는 말에 문자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TV에서 봤던 연예인이 눈앞에 나타나자 방금 전까지 우울했던 기분이 날아간 거다.
“매니저님이 저 언니 매니저에요?”
“그렇지.”
재석은 민경을 한번 보고 데려오길 잘했다고 여겼다.
‘나 혼자 왔으면 문자영에게 누구인지 한참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민경이 새로운 아역 연기자의 호기심 때문에 따라온 게 득이 되었다.
“혹시, 집에 어른 계시니?”
“할머니가 계시긴 한데 지금 누워 계세요.”
“그럼, 이야기를 나누기가 조금 힘들겠네.”
재석은 주명진에게 이야기를 들어서 지금 상황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오도록 해야겠네.”
재석은 어차피 오늘 문자영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자영아, 그냥 들어오라고 해.”
문자영 뒤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재석은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민경도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 왜 나오셨어요. 그냥 누워 계시지.”
“됐다. 이제 괜찮아. 손님이 오셨는데 어떻게 누워 있어.”
재석은 더 이상 밖에 서 있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자 할머니 모습을 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을 당하신 분치고는 멀쩡했었다. 흔히 보이는 상처도 없었고 말이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안 좋은 일을 당하셨다고······.”
“어찌 아셨나요?”
“이 바닥 생각보다 좁습니다. 안 좋은 일이 신문에 안 나온다고 저희까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 다 알고 있으니 숨길 게 없겠네요. 이제는 괜찮아요. 벌써 석 달 됐네요.”
‘석 달? 그럼, 그때 상처도 눈에 안 보일 만한데.’
재석은 주명진에게 이야기를 들은 시점과 실제 벌어진 시점이 차이가 좀 있는 걸 알았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네요. 그쪽이랑 계약은 이제 일주일 지난 걸로 아는데.”
할머니가 손녀 뒷바라지하면서 이것저것 다 겪어 보신 모양이다. 이야기 좀 나눠 보니 손녀 따라다니며 매니저처럼 활동하신 듯싶다.
“말씀하시는 게, 저희 쪽 일을 많이 겪어 보신 것 같습니다.”
“손녀를 위해서 뭘 못 하겠습니까.”
‘이러니 문자영이 할머니를 제일 존경한다고 하지.’
문자영의 할머니가 더 이상 자영을 돌봐 주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몇 년이 걸리지만, 그 전까지는 아주 쌩쌩하게 자영의 매니저를 자처할 정도였다.
“그런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구인가요?”
할머니가 처음으로 민경에게 시선을 두자 민경이 입을 열었다.
“임민경이라고 합니다. 오빠가 담당하고 있는 연예인 중 한 명입니다.”
“할머니, 민경 언니 정말 유명한 분이에요. 드라마 주인공도 벌써 두 번이나 했고, CF도 벌써 촬영했고, 정말 인기 있는 스타에요. 스타.”
문자영이 스타라고 표현하자, 할머니가 민경을 달리 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드라마를 좀 봤습니다. 실물로 보니 정말 예쁘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떻게 오셨는지요.”
“저랑 항상 같이 일했던 오빠라서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저 말고 또 관리해야 할 연예인이 아역 연기자라는 말에 더 궁금했고요. 실제로 보니 이렇게 귀엽고 예쁜 소녀일 줄은 몰랐어요.”
이미 프로필로 다 봐 놓고 할머니 앞이라서 립 서비스 날리고 있었다.
“오호호호!”
할머니는 기쁨의 웃음을 터트리셨고, 누군가는 쑥스러워했고 누군가는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해했다.
“오늘은······.”
재석이 입을 열자 다들 재석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제가 누구인지 알려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하지만, 안 좋은 사건이 있었으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기 위함도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이런 분을 스타로 만드셨으니 제 손녀도 곧 스타가 되겠네요.”
할머니는 손녀가 곧 스타가 될 거라 했지만, 재석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아역 스타는 정말 안 좋습니다. 지금 스타가 되는 건 더더욱이요.”
“네? 갑자기 무슨 말을······.”
“아역은 시청자들에게 어린 시절의 이미지를 아주 강하게 남깁니다. 그게 잘 날수록 그 이미지가 더 심합니다. 성인이 되면 그 아역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성인 역이 잘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그럼, 연기 연습만 하라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방송에는 나가야 하지만, 비중 있는 역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끈은 만들어 놓되,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준이면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고등학생이 되면 아역과 성인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에, 그땐 성인과 비슷하다 보시면 됩니다. 아역이지만 성인과 다름없는 시기, 그때까지만 꾸준히 관리하면 됩니다.”
“이미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셨군요.”
“해야 할 일입니다. 저런 소녀가 연기에 꿈을 가졌다면, 매니저로서 미래까지 생각해서 계획을 짜는 게 우선입니다.”
재석의 말에 자영의 할머니는 무척이나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 자영이가 고등학생만 되도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겠네요.”
“물론입니다. 그 기간 동안 연기력을 더 키운다면 20대 초반에 빛을 볼 겁니다.”
젊은 나이에 빛을 본다는 말에 문자영도 할머니도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믿겠습니다.”
“손녀분을 열심히 돕겠습니다.”
재석은 그렇게 문자영을 만나고 곧바로 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갔다.
“음, 집에 안가요?”
“아니, 다른 한 명을 더 만나야 해. 그래야 끝이야.”
“아.”
“따라올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죠. 그리고 이 얘 사진만 봐서는 모르겠는데, 정말 미래가 기대되요.”
“앞서 봤던 문자영보다?”
“네, 인상이 조금 독특한데, 이런 얘가 커서 더 예뻐지거든요.”
“그래, 네 말이 맞긴 하지.”
신지경 미래의 스타이고 어린 나이에 잘나가는 연기자가 된다. 문자영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나이도 세 살이나 더 어리고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스무 살이 됐을 때 연기력은 절 뛰어넘겠어요.”
“흐음, 그건 장담하기 어려워.”
“음? 왜죠.”
“연기란 어쩔 땐 삶의 경험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 그때가 돼서야 이해가 되는 게 있거든. 그렇다고 해도 연기를 어릴 적부터 하면 확실히 능숙하긴 하지.”
“뭐, 그렇긴 하겠네요. 부족한 것도 있지만, 장점도 있고······.”
재석은 피식 웃으면서 차를 운전했다. 가는 동안 민경은 옆에서 대본을 보며 연기했다.
“야, 어디가?”
“야, 어디가?”
같은 대사를 여러 버전의 톤으로 말하며 가장 좋은 걸 찾고 있었다.
‘문자영을 만나고 자극을 받았군.’
어릴 적부터 연기해서 능력 있는 젊은 연기자라면, 민경이 설 자리가 부족하니 말이다.
‘민경아, 너무 걱정 마라. 어차피 네가 나갈 영화나 드라마가 너무 다르다.’
민경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확실하게 차이를 보인다. 거기에 외적 이미지의 차이가 확연해서 같은 미인이라도 정말 느낌 다르다.
민경이 부드럽다면, 문자영은 귀엽고, 신지경은 신비하다.
‘걱정도 팔자이긴 한데, 대본 연습하는 건 좋은 자극이다.’
재석에게는 뭐가 되었든 아주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신지경과 만남은 그녀의 부모님과 먼저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전재석이라고 합니다.”
“아, 전화로 연락 주신 분.”
“그렇습니다. 이번에 따님분의 매니저가 된 사람입니다.”
“어머, 어서 들어오세요.”
그녀의 어머니 장현주는 재석이 들어오자 밝은 얼굴로 맞이했다. 그 뒤에 민경을 보고 순간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누구신지?”
“아, 모르시구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임민경이라고 합니다.”
임민경이라는 말에 그녀의 어머니가 손뼉을 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최근에 드라마 선미진미······.”
“알고 계시는군요.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쯤 되니 밤에 하는 드라마가 뭔지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어머, 이런 스타가 누추한 저희 집에 다 오시고······.”
어머니는 재빨리 민경이를 집 안으로 받아들였다.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어머니는 재빨리 부엌으로 가더니 물을 끓이고 약간의 다과를 준비했다.
“어머님, 그렇게 준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중요하신 분이 왔는데요.”
신지경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다.
차와 다과를 가져와서, 가장 묻는 첫마디는 딸의 연기 데뷔였다.
“저희 딸이 부족하긴 한데······ 어릴 적부터 모델 활동을 좀 했고요. 광고 찍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적응 훈련도 끝마친 애라서 데뷔는 언제쯤······.”
“아역 배우 역할은 일 년에 한두 개 정도라서, 그리 쉽게 데뷔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럼, 지금 작품은 있나요?”
“회사에 아역과 관련된 대본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있다면 알려 드리겠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작품이 나오면 저희 딸이······.”
“오디션 보셔야 합니다. 감독님들의 입맛에 충족시키려면 검증이 필요합니다.”
“거, 검증이요?”
어머니는 검증이라는 말에 순간 표정이 안 좋아졌다.
“어떤 검증을 말하는 거죠?”
“간단합니다. 연기를 지망하셨으니 연기 검증이죠. 감독들은 검증되지 않은 연기자를 싫어합니다. 그게 여러 드라마에 출연한 연기자이든 오디션을 보는 신인이든.”
어머니는 감독의 이야기가 나오자, 소속사 권한 밖의 일을 이야기하는 걸 알아차렸다.
“소속사라고 해서 많은 걸 해 줄 수 있지 않습니다. 연기 못하는 인간이 드라마에 주인공을 맡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 그 검증은 어떻게 하죠?”
“간단합니다. 어머님이 알고 계시는 오디션입니다. 일단, 따님이 회사와 계약을 맺었으니 저희는 대본을 줄 것이며 연기 관련된 지원을 아까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 딸 연기 잘합니다.”
“그건 따님이 집에 온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죠. 다행히 오늘 호기심 많은 연기자 덕분에 그 검증을 쉽게 끝낼 수 있으니까요.”
호기심 많은 연기자라는 말에 어머니의 시선이 민경에게 향했다.
“에? 저요.”
민경은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 검증을 해 줄 사람이 되었다.
물론, 재석도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매니저가 진행한 연기 검증은 신뢰도가 없다. 민경이야 재석이 연기를 보는 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걸 어머니에게 말해 봐야 그걸 믿을 상황이 아니다.
“제 딸이 오면 확인해 주세요.”
어머니가 민경의 옆으로 와서 손을 붙잡으며 말하자 민경이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럴 만한 위치는 아닌데······.”
“그래도 드라마 두 개나 주인공 맡으신 분인데, 아직 성인도 안 된 제 딸 연기 좀 봐주세요.”
민경이 재석을 바라봤지만, 재석의 표정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오빠가 더 잘 보면서 나한테 오다니.’
그래도 재석이 옆에서 몰래 도와줄 거라는 걸 알았기에 연기를 봐주겠다고 허락했다.
“정말 고마워요.”
“뭘요.”
민경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집 현관문이 열리면서 신지경이 들어왔다.
“엄마, 저 왔어요.”
“지경아, 손님 오셨다.”
“손님?”
어머니는 신지경에게 다가가 회사에서 찾아온 손님이라는 걸 알렸지만, 민경의 얼굴을 보자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헉, 이, 임민경!”
“안녕.”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민경이 인사를 해 주자. 신지경이 너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꺄아아!”
정말 조용한 것도 잠시였다. 소녀라면 연예인을 봤을 때 반드시라고 할 만큼의 소리 지르며 환호하는 리액션을 보여 줬다.
“언니!”
달려와 안기는 건 물론이요. 한 번 보고 정신을 못 차렸고, 두 번 봐도 똑같았다.
‘문자영과는 반응이 전혀 다르네.’
문자영은 그나마 불미스러운 사고가 있었지만 여러 연기자를 봤기 때문에 반응이 좀 없었는데, 신지경은 확실히 다른 연예인 안 본 티가 좀 났다.
“어머니, 따님이 모델 일을 좀 했다고 아는데, 반응은······.”
“그건,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하고 찍은 촬영이고, 민경 씨는 좀 많이 유명하잖아요.”
“흐음, 이해합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 일을 했지만, 확실히 아마추어의 한계가 눈에 보였다.
‘여기서는 전문가가 어떤지만 보여 주면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