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본 리딩 이후 재석은 바빴다. 갑작스레 신지경의 일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매니저 숫자를 고려하지 않은 문제가 이거였다.
재석은 민경도 신경 써야 하는데 이런 아역까지 신경 써야 했다. 문제는 이 아역이 미래에 잘나가는 배우라서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거였다.
‘후우, 얼마 안 있으면 민경이 드라마 들어가는데. 나 뭐 하는 거냐.’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 이번 일은 여기서 끝이라는 거다.
‘후우,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건데.’
다른 건 몰라도 민경과 일정이 겹치는 사태만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매니저 삼촌.”
“어?”
“여기에요?”
“그래, 여기다. 오늘 광고 촬영은 아동복이다.”
신지경은 아동복 촬영이라는 말에 조금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도 익숙한 일이네요.”
“전에 해 봤어?”
“예, 어머니가 이리저리 일을 알아보셔가지고 한 번 했는데, 그때가 좀 어릴 때라.”
“그럼, 좀 다를 거야. 같은 아동복이지만, 작을 때는 좀 다르거든. 근데 오늘은 어머니가 안 보이네?”
“오늘부터는 혼자 한번 가 보라고 하셔서.”
매니저가 생겼다고 하니 그녀의 어머니가 직접 나서지 않은 거였다.
‘매니저 나타났다고 끝이네.’
“안으로 들어가자.”
재석이 안으로 가자는 말에 신지경이 졸졸 따라왔다.
촬영장 안에 가자, 수많은 옷과 포토그래퍼, 그 밑에 있는 여러 스태프가 있는 걸 확인한 신지경은 조금 주눅이 들었다.
재석은 그녀의 어깨가 조금 위축된 걸 보았다.
“음?”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몸 안 좋아?”
“아니요. 그건 아닌데 살짝 겁이 나서요.”
“겁이나?”
그 말에 살짝 의아해했다.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제가 그때 촬영했을 때와는 너무 달라서요.”
“아, 그랬어?”
그 이유를 알자 재석은 신지경과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촬영장은 네가 그때 봤던 곳도 있고 다른 곳도 있어. 다양한 장소가 있기 때문에 모든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전부 다를 거야. 어떤 걸 계획하냐에 따라 분위기도 다르기 때문에 조금 놀란 것 같은데 조금만 둘러보면 익숙해질 거야. 이 삼촌이 손잡아 줄까?”
“네······.”
신지경은 재석의 손을 잡자, 그 따스한 온기에 조금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와우, 실제로 보니 더 예쁘네요. 안녕, 예쁜 아가씨.”
포토그래퍼가 신지경을 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신지경은 웃으면서 살짝 수줍어했다.
“얼굴 붉히네. 친구들한테도 예쁘다는 소리 꽤 듣고 살 텐데.”
“그래도 좋은 걸요.”
“역시, 아직은 소녀 감성 풍부하네.”
포토그래퍼는 한껏 미소를 짓고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찰칵!
순간이었다. 잠시 발그레한 표정을 찍은 그 순간을 말이다.
“음, 좋네.”
전문가답게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잡은 거였다.
“작가님, 촬영 전부터 그렇게 수집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좋은 걸 손에 넣고 싶으시면 계약서 먼저 하십시오.”
“아, 깐깐하기는······.”
그는 재석의 말에 아쉬워하면서도 지금 찍은 사진을 없애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 조금 있다 뵙지요.”
재석이 신지경을 데리고 가자 그녀가 물었다.
“아시는 분이세요?”
“아니, 잘 몰라 하지만, 내가 관리하는 배우의 얼굴을 함부로 찍는 건 용서할 수 없지.”
“왜요?”
“넌, 소중하단다. 물론 내 입장에서다. 아직 너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함부로 너의 사진을 찍거나 혹은 이상한 말로 널 유혹할 수 있지. 난 그걸 막고 싶은 거다.”
재석은 솔직하게 이야기 했고, 신지경은 배시시 웃었다.
“그럼, 저쪽으로 가서 옷부터 갈아입고 준비하자.”
“네.”
촬영은 생각보다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아직 소녀의 체력이 어른보다 뒤떨어지니, 필요한 사진을 최대한 빨리 찍어서 소녀의 활기찬 모습을 사진에 담아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훌쩍 지나고, 소녀는 차에 타기 무섭게 온몸이 추욱 늘어졌다.
“어허, 차 안이 편하더라도 안전벨트는 꼭 매렴.”
“네에.”
벨트를 매자, 재석이 차를 몰고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신지경을 데려다주고 회사에 오자, 주명진 팀장이 밝게 웃으면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이고, 물론이죠. 예, 준비 철저히 해서 보내겠습니다.”
주명진이 저리 밝게 전화를 받는 경우는 몇 가지 없었다.
“팀장님, 무슨 일로 그렇게 밝게 웃으십니까?”
“야, 재석아. 방송국에서 시상식에 참여하란다.”
시상식이란 말에 재석은 가볍게 대답만 했다.
“예.”
“넌, 반응이 왜 그러니 뭐가 좀 안 신나? 네가 담당하는 연예인이 시상식에 나간다고.”
“뭐, 좋은 일은 맞지만, 딱히 놀랄 일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어 보이는데요.”
“어찌 보면 너 참 감정 메말랐어.”
메마르진 않았지만, 정신적인 감성이 조금 시들시들한 건 사실이다.
“네 담당한테 이야기 전해.”
“예, 내용 전달하고 일 진행하겠습니다.”
다음 날 민경은 정말 들뜬 표정으로 회사에 찾아왔다.
“오빠, 드레스 준비됐어요?”
“그래, 이쪽에 와라 코디가 준비했단다.”
코디라는 말에 민경은 의상 준비실로 달려갔다.
“우와!”
예쁜 드레스 몇 벌이 민경의 눈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정말 몇 벌였다.
“아쉽다. 몇 벌 없어.”
“저, 그게 민경 씨가 좀 유명해지긴 했는데, 의상 협찬 받는 톱스타가 아니라서······.”
민경은 그 말에 살짝 시무룩해졌지만, 재석이 민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 아직 1년도 안 됐어. 그걸로 스타 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분명 인지도는 생겼지만, 그 정도 가지고 정상급 인물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아니죠.”
“그럼, 여기가 시작이야. 시작은 몇 벌이지만, 다음 시상식 때는 수십 벌이 있게 될 거야.”
재석의 말에 민경의 눈빛이 바뀌었다.
“알았어요. 오빠, 힘낼게요.”
시무룩한 얼굴은 순식간에 열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좋아, 그럼 신인에 걸맞은 자세에 임하자고.”
아직 민경의 의지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만이 지금 할 일이다.
“그래도 가장 예쁜 옷은 입어 봐야 알지.”
재석은 가장 왼쪽에 있는 옷을 내밀었다.
“시간 없어, 빨리.”
“네!”
민경은 그 옷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나온 민경의 모습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물론 그걸 티 안 내는 재석이지만 입이 벌어지는 걸 막진 못했다.
***
사락사락.
민경은 달려가는 차 안에서 대본을 보고 있었다. 드레스를 본 다음 날이 눈꽃연가의 첫 촬영을 하는 날이었다.
“으흐흐흐.”
차를 타고 가는데, 재석은 혼자 실실 웃고 있었다.
“뭘, 그리 웃어요.”
대본을 봐야 할 사람의 집중이 깨질 정도로 재석의 웃음은 기이했다.
“크흠, 미안. 기분이 좋아서 말이야. 시끄럽게 했다면 미안해.”
“요즘 오빠 얼굴 활짝 폈어.”
“뭐, 평소대로인 것 같은데.”
“아니, 전하고 달라. 얼굴이 전보다 활짝 폈어. 아역 연기자들 맡고 난 뒤야. 그쪽 일이 별로 없지만 그때부터야.”
재석은 전혀 아니라고는 말 못했다. 회사에서 일거리를 따와서 일을 시키려는 게 있지만, 아역 연기자 둘은 미래의 희망이었다.
“그리고 윤 감독님 작품 촬영 시작한다니까 아주 그냥 좋아 죽는 표정을 지어요.”
“좋지, 그 유명한 윤 감독의 작품이잖아.”
“뭐, 유명한 감독님의 작품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좋아할 정도는 아닌데······.”
다들 윤정호 감독의 작품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성공은 할 거라 예상을 했다. 이전에 찍은 작품도 그렇고 지금까지 몇 개의 히트작을 선보인 걸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절대 이번 작품은 그냥 작품이 아니야. 한류의 시작을 알리는 드라마야.’
남들은 재석의 이 속마음을 절대 알 수가 없다. 다른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이기에 그저 웃는 거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시상식 언제에요?”
“시상식 일정은 이틀 뒤야.”
“그럼 촬영 일정이 마구 꼬이지 않아요?”
“그러지 않아도 마구 꼬인다. 다른 드라마 출연한 연기자들 일정 때문이라도 너랑 찍는 신, 다른 사람 찍는 신이 꼬여 있지.”
연말 시상식 일정 때문에 드라마 촬영이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거기에 신년 일정도 만만치 않았다.
“오빠, 드라마 끝나면 다음 작품은 뭐 할 거예요. 또 드라마는 아니죠?”
드라마라는 말에 재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그렇지만, 벌써 드라마만 3개째야. 너무 드라마에 올인하는 게 아닌 이상 영화도 한 번 해 봐야지. 방송에 나간 인지도가 있으니 좋은 영화 시나리오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다른 걸 한다는 말에 민경은 솔직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드라마 일정 때문에 정말 말하기 힘들 정도였다.
“영화 쪽은 생각보다 더 새로운 도전이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드라마에서 아무리 유명해도 영화는 또 다르거든 그리고 영화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영화는 또 다른 세상이야.”
민경은 그 말에 잠시 침묵했지만, 재석의 말에 눈빛이 달라졌다.
“민경아, 욕심나지 않냐?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인정받는 연기자가 된다는 거.”
“욕심나요.”
“그럴 거다. 어느 한쪽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았는데, 다른 한쪽, 그것도 가까운 쪽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면 이상하지.”
재석은 슬쩍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영화에 대해서는 좀 더 확실하게 가닥이 잡히면 이야기하자. 지금은 출연 확정된 드라마에 집중하고.”
“네!”
민경은 의지를 활활 불태우면서 대본에 시선을 돌렸다.
촬영장에 도착하자 민경은 활짝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하며 등장한 민경 덕분인지 다들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재석은 등장하기 무섭게 양손에 에너지 드링크를 들고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은 감독님부터.”
“전 매니저, 이거 매일 가져다주는 거 아니지?”
“필요할 때라면 매일이라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니, 소문 들어 보니까, 다른 드라마 촬영장에도 자주 가져왔다던데.”
재석에게 일종에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린 에너지 드링크였다.
“그게 여기까지 소문이 났습니까?”
“툭하면 사다가 주는데, 그게 소문이 안 날까.”
“뭐, 필요하시면 하루에 두 번이라도 사다 드리죠.”
“됐네. 일주일에 한 번만 사다 줘도 난 좋아.”
윤정호는 에너지 드링크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것도 중독되면 쉽사리 끊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게.”
“예, 감독님.”
재석은 몸을 돌려 여러 사람들에게 에너지 드링크를 나눠 줬다.
‘근데 민경이가 출연한 드라마와 윤 감독이 있었던 방송사가 다른데 다른 곳에도 소문이 났어?’
서로 다른 방송사 드라마에 나갔는데 재석이 한 일이 알려질 정도면 꽤나 인상 깊게 봤다는 거였다.
‘좋아, 인상이 남았다면 일하는 데 더 편하지.’
어차피 에너지 드링크 돌리면서 좋은 이미지 심는 건 확실히 남는 장사다.
촬영 준비를 하는 동안 재석은 감독에게 다가와 물었다.
“감독님, 오늘 날씨 아주 좋습니다.”
“좋지, 더할 나위 없이 말이야. 카메라에 아주 좋은 장면만 남을 거야.”
한쪽에 대기하고 있는 엑스트라들도 대기하면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좋은 인물 어디 없나······.’
엑스트라 출신 중에서 연기의 꿈을 꾸는 사람들도 많다. 동시에 아르바이트로 엑스트라를 하는 사람도 많다.
정말 재석은 있는 듯 없는 듯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봤지만, 그가 기억하는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은 없네.’
살짝 아쉬웠지만, 미래의 스타들이 이런 곳에서 쉽게 발견되진 않는다.
‘어떤 누군가가 혹시나 하면서 오길 바랐지만, 내 꿈이 너무 컸군.’
회사가 점점 망해 가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해서 그런지, 재석은 어서 자신만의 회사를 차리길 원했다.
재석이 다시 원래 자리로 조용히 돌아오자 조연출이 외쳤다.
“촬영 진행하겠습니다!”
그 소리와 함께 연기자들이 다들 각자의 자리로 들어가면서 이제 준비가 완벽히 끝나게 되었다.
“신 1, 테이크 1!”
“액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