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27화 (2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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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은 곧 회사가 끝나는 마당에 팀장이란 자리로 승진을 했다.

“어이가 없네. 이 뒤로 회사 사람들 줄줄이 사직서 제출할 텐데 말이야.”

주명진은 시작이다. 다른 팀장들은 눈치 싸움을 하다가 주명진이 먼저 나간 걸 보고 아차 싶어 했다.

“일주일 안에 또 한 명 그만두겠네.”

재석이 한 명 그만둔다 했지만,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두 사람이 타 회사에 스카우트 명분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밑에 있는 사람이 팀장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그러나저러나 회사에서 데뷔시킨 가수팀엔 일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망한 거였다.

가수팀이 하루 이틀 멍하게 된 상황에서 다음 타자는 빚쟁이들의 진격이었다.

“야, 사장 나와!”

가수 만든다고 끌어다 쓴 어음을 막지 못해서 빚쟁이들이 들이닥친 거였다.

“어이구, 일찍 오셨네.”

빚쟁이 중에서 돈 급한 놈이 가장 먼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장은 곧바로 빚쟁이들을 만나 대화로 사태를 푸는 게 아니라 그냥 도망쳐 버렸다.

사업한다는 인간이 빚쟁이들 들이닥치자 무섭게 튄 거였다.

직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회사가 끝났음을 알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사직서 제출하는 사태가 이어졌고, 재석도 그 행렬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오빠, 이제 어떻게 해?”

“너도 사장한테 전화하든 뭘 하든 계약 해지해 달라고 해야지.”

“계약 해지 못 하면?”

“걱정 마, 사장은 곧 너에게 연락을 할 거야.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상태를 들먹이면서 계약 해지를 요구해. 법적 문제로 가겠지만, 무조건 민경이 네가 이겨. 물론 내가 옆에서 도와줄 거야.”

“알았어.”

다음 날, 재석의 말대로 사장이 민경에게 연락해 드라마 돈 문제를 언급했지만, 민경은 단호하게 계약 해지를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사장이 소리치며 그녀를 몰아세웠지만, 민경은 법적으로까지 끌고 갈 것이라며 당당히 따졌다. 물론 재석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사장은 다시 윤정호와 직접 통화를 했지만, 재석과 이미 이야기가 끝난 윤정호는 ‘지급 의무 이행.’이란 계약서 조항을 들먹였다.

해당 소속사가 직접 돈을 지급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방송사 외주 제작사가 직접 지급하는 조항이다. 즉, 회사가 망해도 배우가 돈을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을 막기 위함이었다.

돈줄이 막힌 사장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파산으로 가는 수순은 이미 정해졌다.

민경의 법적 대응은 순조로웠고, 사장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달이 넘어가기 전에 재석과 연관된 이들이 모두 회사와 계약 해지를 했다.

“자, 그럼 이제 나랑 계약해야지.”

재석은 자연스럽게 민경과 계약서를 작성했다.

“근데, 조건이 다르네요.”

“물론이지. 네가 많이 벌어야 하니까 조건을 달리했지.”

재석이 내건 조건은 7 대 3이었다. 그것도 3년 한정이고, 그 뒤에는 8 대 2로 바꾼다는 내용에, 총 계약 기간은 7년.

데뷔 1년 차 연예인에게 이런 조건을 제시하는 회사는 없다. 아무리 인기 좋아도 회사의 이익 구조를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이렇게 하면 오빠 월급은 받아요?”

“아마 몇 개월은 월급이 아니라 겨우 먹고사는 정도 일 거야.”

“너무 손해 보는 거 아니에요?”

“손해는 아니야. 네가 많이 벌면 되니까.”

“윽.”

그 말에 민경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내용인즉슨 그만큼 일을 가져다줄 테니 열심히 뛰라는 거였다.

“설마 쉬는 날이 없는 건 아니죠?”

“당연히 있지. 난 그렇게 몰염치한 놈이 아니야.”

그렇게 민경을 시작으로 다른 배우들과의 계약도 쉽게 진행되었고 작은 사무실도 얻었다.

***

직원들이 사무실에 들어오자 얼굴 표정이 안 좋았다.

“여기 거의······ 사무실이 별로다.”

“지금 수중에 있는 돈에 맞춰서 사무실을 구했습니다.”

“회사 나오기 전에는 돈 많은 척을 하더니······.”

“돈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죠.”

재석은 주명진을 보며 이야기 했다.

“하아, 진짜 당했네.”

이미 재석은 주명진과 근로 계약서를 작성한 뒤였다. 그리고 주명진 역시 뒤로 발을 뺄 생각은 없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정식으로 인사하네요.”

재석은 새로 들어온 코디와 악수를 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반갑습니다. 뭐, 사장님 소리가 아직 익숙하진 않네요. 이혜정 씨.”

코디 이혜정 나름 괜찮은 실력을 가진 코디였다.

“사장님, 그런데 월급은 제때 주시는 거죠?”

“예, 제 돈 못 받아도 혜정 씨 월급은 확실히 챙겨 드리겠습니다.”

코디들 월급은 많지 않지만, 회사 사정이 어려우면 가장 먼저 타격받는 게 코디들이다.

안 그래도 적은 월급이 한 달이라도 끊기는 즉시 생활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장님, 믿겠습니다.”

재석은 혜정과 대화를 끝내고 최민철을 향해 갔다.

“민철아, 날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맙다.”

“선배님의 능력을 믿고 온 겁니다. 진우 형도 선배를 믿고 있고요.”

“그래, 그 믿음에 보답을 해야지.”

지금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이것도 잠시다.

“그런데 회사 상호가 뭐냐.”

작은 사무실이라서 상호를 걸어 놓을 자리도 없었다.

“회사 상호는 ‘J. EVE’ 입니다.”

“제이 이브?”

“J는 제 이니셜이고, EVE는 성경의 두 번째 인간. 지금 저희들이 두 번째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정한 겁니다.”

“흐음, 뜻은 좋네. 회사 주인 이름도 들어가고.”

“뭐, 나름 작명하는 데 재주는 있습니다.”

“그럼, 일을 시작하죠. 가장 먼저 할 일은 팀장님도 아실 겁니다.”

“당연하지. 방송국과 각지의 외주사에 명함부터 돌리는 일이지.”

일부 유명 연예인을 데리고 있다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 그리고 직책. 팀장님은 이번에도 팀장직을 맡아 주세요. 하지만 회사 첫 시작이니 일단 아역 배우 신지경 한 명만 맡아 주세요. 당장 일거리가 가장 적은 사람이니까요.”

“뭐, 그러지. 오랜만에 다시 차를 몰고 움직일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네.”

“혜정 씨는 미안하지만, 회사 연예인 모든 코디를 맡아 주세요. 일이 좀 바쁘지만요.”

“뭐, 이전 회사에 있을 때도 저 혼자 세 명 관리했어요.”

“그렇다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네요.”

“그럼, 움직이죠.”

다들 사무실 확인하기 무섭게 곧바로 흩어지며 일하러 움직여야 했다.

“이야, 이거 차량······.”

정말 신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차량 두 대가 있었다. 물론 지금 사정에서 이 정도면 꽤나 좋은 차를 골랐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거, 가다 서는 거 아니야?”

“어허, 무슨 말씀입니까. 팀장님, 나름 확인 다 하고 제가 구입한 겁니다.”

주명진은 차 안을 확인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새 차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민경이를 태우고 왔다 갔다 할 거면 좀 비싼 차를 사야 했다.

“하, 이거 참. 그래도 차는 쓸 만한 거 골랐네. 그래도 주행 거리는 10만이네.”

주명진은 그 숫자를 보자 재석을 한 번 돌아봤다.

“재석아, 근데 이거 좀만 타면 50만 훌쩍 넘을 건데. 몇 년 못 가는데······.”

연예인들 매일같이 현장 혹은 광고 촬영 뛰어다니면 20만이 우습다 여길 정도가 된다.

“이 차 쓰러지면 그때 바꾸면 됩니다. 그 전까지는 멀쩡히 쓸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짠돌이 없구나.”

“짜기는요. 사업하는 데 지금 당장 필요한 거 갖추고 천천히 구색을 맞춰 가면 되죠. 물론 지금은 돈 아끼지만, 이것도 얼마 안 갈 겁니다.”

재석이 내민 건 무슨 이상한 천 주머니에 담긴 갈색 가루였다.

“민철아, 이거 차에다가 넣어 놔.”

“선배님, 이거 뭔가요?”

“카페에서 쓰다 버리는 커피 가루야. 방향제로 최고지.”

졸지에 차 안에서 커피 냄새만 한없이 날 것 같았다.

“재석아, 몸에서 소금 나오겠다.”

“돈 생기면 소금 안 나옵니다.”

재석은 그리 말하고 움직이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네.”

-전 매니저, 슬슬 돈 입금해 줘?

드라마 촬영이 거의 다 끝나가서 혹시나 하고 윤정호 감독이 연락이 온 거였다.

“아이고, 주시면 저야 고맙죠.”

-내가 입금시켜 줄게. 어차피 계약 그쪽이랑 다시 했으니까.

“감사합니다. 감독님.”

윤정호가 사정 봐주면서 먼저 선입금시켜 준다는 말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걸로 이달 나가야 할 돈은 해결됐네.’

아직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려면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필요한 돈이 들어왔다는 거 하나만으로 일이 편하게 돌아갈 터다.

‘대충 월급은 어떻게 해결되고 회사 유지비도 어느 정도 되겠고.’

재석은 회귀 전 소속사를 운영한 경력이 있어서 계산기 두들기지 않아도 돈을 어디어디 써야 하는지 바로 계산이 나왔다.

“후우, 그래도 시작이 좋긴 하네.”

***

드라마 촬영이 없는 날 민경은 털모자를 눌러쓰고, 목도리로 목만 감싸는 게 아니라 입까지 가리며 철저하게 위장했다.

거기에 눈까지 내리고 있어서 시야 확보도 참으로 어려웠다.

“으으, 친구 만나기 힘드네.”

민경이 홀로 서울 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고향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기 무척 어려웠는데 이번에 서울로 찾아온다고 했다.

민경은 미리 예약을 통해 친구들을 만날 장소를 잡아 놨다. 그래도 연예인이라 사람들이 몰려들까 봐 룸으로 자리를 잡았다.

장소를 잡은 룸 창밖으로 눈 오는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사람들 많네.”

혼자서 밖을 바라보니 수많은 이들이 눈 오는 날에도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민경 역시 드라마 촬영한다고 바쁘게만 지내왔다. 드라마가 끝나면 그동안 밀린 광고 스케줄 때문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돈을 벌고 다녔다.

“벌써, 드라마 마지막 촬영이 얼마 안 남았네.”

곧 촬영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회사도 재석이 하고 있는 회사로 옮겨졌다.

처음 사무실을 봤을 때 충격이었지만, 재석이 말하길.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사람 숫자도 많지도 않은데 큰 곳은 너무 불편해.”

재석의 말대로 좁은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일하는 게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았다. 지금 날씨가 추워서 조금 싸늘하긴 하지만, 그건 참을 만했다.

“거의 쉬는 날에도 연락하고 지내다가 오늘 같은 날 재석 오빠 연락이 없으니 심심하네.”

늘 연락을 주고받았던 관계라서 그런지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차라리, 이곳까지 차를 태워다 준다고 했을 때 탈 걸 그랬나?”

하지만, 쏟아지는 눈 때문에 교통 체증이 심각할 것 같아 거부했었다.

막상 이곳에 오는데, 차는 한산했고 눈은 내리지만 도로 상황에 막대한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에이, 이왕 와 버렸는데.”

혼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민경아!”

문 열리기 무섭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가장 친한 친구들의 목소리였다.

“어, 얘들아!”

세 명 정도가 안으로 들어왔고 다들 민경에게 달려들어서 얼싸안았다.

“꺄아아!”

하이 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직원이 와서 조용히 문을 닫자 그 소리가 더 이상 밖으로 퍼지지 않았다.

“너무 보고 싶었어. 딱 1년 만이지?”

“응!”

“근데, 맨 처음에 너 TV에 나올 때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다들 그 이야기 하더라. 집에 계신 엄마도 내가 연기한다고 했을 때 처음부터 주인공 할 줄 몰랐다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데.”

“민경아, 너 그거 알아?”

“뭐?”

“요즘 나오는 드라마에서 네가 하는 목도리 있지.”

“그 목도리가 왜?”

“민경이 목도리라고 하면서 아주 불티나게 팔리고 있어.”

“진짜? 난 전혀 몰랐는데.”

모를 수밖에. 촬영 현장과 대본만 보며 살고 있는 상황이니 누군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면 전혀 모른다.

“목도리 팔리는 건 최근 일이야. 너도 이제 완판 배우야.”

완판 배우. 당시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 주는 지표가 되는 단어였다.

“진짜?”

“어머머, 전혀 몰랐나 보네.”

“야, 너 이제 스타야, 스타.”

친구들의 말에 민경은 자신이 진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말 나온 김에 네 사인 몇 장 받아 가자.”

친구들은 민경의 사인을 위해 준비한 종이를 내밀었다.

“나중에 수다 떨기 시작하면 사인 못 받고 깜빡하니까 지금 어서 해 줘.”

친구들이 내민 종이는 한 사람 당 열 장이 넘었다.

“진짜, 내가 친구들이니까 해 준다.”

민경은 소매를 걷으며 일필휘지로 친구들을 위한 사인을 해 줬다.

사인해 준 뒤에 찾아온 건 음식들이었다. 거기에 친구들끼리 가볍게 한잔하며 서로의 잔을 맞댔고, 아주 신나게 놀다가 친구들이 머무는 모텔에 가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어머, 진짜 그 오빠 대단하다. 나이가 우리랑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능력 좋다.”

“오빠, 이번에 회사를 차렸어, 근데 회사 차리는 거 처음 봤는데 시작은 진짜 누추하더라.”

“어머, 그런 남자 아직 혼자야?”

“내가 알기로 누구하고 사귄다는 말 못 들어봤는데.”

“그럼, 나 좀 소개시켜 줘.”

친구 중 한 명이 재석을 원하는 눈치를 강하게 주자 민경이 살짝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한 달에 한 번 만날까 말까인데 괜찮아?”

“괜찮아. 그런 능력 있는 남자라면 지금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겠어.”

“근데 관심이 있을까?”

“어떻게 물어볼 방법 없어?”

친구들은 한 친구의 연애 사업을 돕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전화 한번 해 보자. 그래서 은근슬쩍 물어보는 거야. 오빠는 애인 같은 거 안 만드냐고.”

“오, 그거 좋겠다.”

그녀들의 계획은 곧바로 실행되었고, 재석은 늦은 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뭐 좀 물어보려고. 오빠는 여자 왜 안 사귀는지 궁금해서.”

-술 많이 마셨냐? 자라, 내일 보자.

재석이 전화를 뚝 끊었고 친구들의 관심도 뚝 끊어졌다.

28(수정)

3.

차를 끌고 촬영장에 가는 길에 재석이 첫마디를 꺼냈다.

“전에 친구들이랑 잘 놀았어?”

“뭐, 잘 놀았어요. 중간에 조금 시무룩한 일이 생기긴 했지만.”

“말싸움한 거야?”

“그건 아니고, 연애 문제 때문에······.”

“그거야, 그럴 수 있지. 연애라는 게 항상 즐거운 일만 있는 게 아니니까.”

재석은 자신이 전화로 한 말 때문에 시무룩한 일이 생겼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보다 너 드라마 시청률 봤어?”

“아뇨. 잘 몰라요.”

“지금 눈꽃연가 시청률이 25퍼센트 넘어섰어. 동 시간대 드라마 중에서 최고 시청률이야.”

동 시간대 드라마가 평균 20퍼센트 시청률을 유지하는데, 그게 깨지고 있었다. 눈꽃연가의 시청률이 다른 드라마를 서서히 밀어내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다른 드라마 찍어 누르고 1위로 유지가 될 거야.”

“진짜요? 다른 드라마 정말 재미있다고 소문이 났던데.”

“그렇지. 그 재미있는 드라마들이 경쟁에 붙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조가 됐으니.”

드라마가 시작되면 거리에 사람이 없다. 정말 수년 만에 벌어진 진풍경이었다.

‘다시없을 죽음의 조. 그 안에서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는 거다.’

눈꽃연가의 시작은 미비했지만, 단숨에 치고 나가는 저력을 보이면서 4화가 시작하기 전에 20퍼센트를 찍었다.

그 뒤로 시청률이 계속 상승세를 보였지만, 그 숫자는 소수점 이하. 그래도 하향 곡선 따위는 없었다.

한번 뺏은 시청자는 다시 고개를 돌리지 못 했다.

현장에 고물 차 한 대가 스윽 고개를 내밀자 촬영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특히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재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왔어?”

“아니, 감독님, 촬영 준비하셔야 하는데 왜 이리 오셨는지······.”

“어허, 알면서 그러네, 덕분에 일 잘 풀리고 있어서 그래. 자네가 준 도움 덕분에 시청률 잘 나오고 있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다 전 매니저의 도움이 없으면 힘들었을 거야.”

“그거야 감독님이 고생하신 덕분이죠. 제가 뭐 한 거 있나요.”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분위기를 이끌었다.

“어허, 이거 또 사 왔네. 사 오지 마라니까. 그거 안 마셔도 촬영에 지장 없어. 회사 새로 차린 사람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걸 사 와.”

재석의 양손에 들려있는 에너지 드링크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돈 없어도 초심을 잃으면 안 되죠.”

재석의 말에 감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지. 초심을 잃으면 이 바닥 정말 힘들지.”

재석은 그렇게 에너지 드링크를 감독에게 가장 먼저 건네고 곧바로 다른 이들에게도 돌렸다.

정말 지치지도 않고 꾸준히 물건을 뿌린 효과는 확실했다.

“고마워요. 정말 잘 마셨어요.”

“하하하, 뭘요.”

다들 재석을 좋아해 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자 재석에게 남은 할 일은 그냥 보는 게 다였다.

부웅.

핸드폰이 울리고 재석은 조용히 촬영장에서 멀어졌다.

“예, 팀장님.”

(재석아, 아역들 어린이 프로에 출연시킬 거냐?)

“하나 찾았어요?”

(찾기는 찾았지. 신지경에게 딱 어울릴 만한 게 나왔거든.)

“그럼, 연결시키세요. 신생 회사라서 들어가기 어렵겠어요?”

(설마, 어차피 회사와 관계없이 그쪽에 얼굴만 들이밀면 되는 일이야. 아직 어리긴 하지만, 신지경 정도면 상당한 미모야.)

“연결만 시키고 그쪽 엄마에게 직접 움직일지 이야기해 보세요. 아니면 팀장님이 직접 움직여야 하니까요.”

(그러지, 다음은 말이야. 문자영인데, 이쪽은······.)

“어린이 프로를 할 만한 나이는 벗어났죠. 그리고 이미 드라마에 출연한 경력도 있고요. 차라리 영화 쪽에 뭐 있는지 한번 보세요. 드라마 판은 할 일이 없어요.”

(흐음, 그렇긴 하지. 근데 연기력이 문제야. 아역이라 통하는 그 적정선이 있지만, 영화 쪽은 드라마하고는 달라.)

영화 쪽 관계자들의 연기에 대한 요구 수준은 드라마보다 높다. 정확히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직접 돈을 내고 들어오는 만큼 그들의 눈을 충족시켜 주는 연기를 해야 했다.

“연기 선생님 한 분을 찾아야겠네요.”

(어디 학원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들 강사긴 하지만, 가격이 비싸서 말이야.)

“음, 그건 좀 더 생각해 보죠.”

아역들에게는 이런 연기 선생님이 확실히 필요했다. 아직 문자영은 연기 실력을 키워 나가는 중이라 특히 말이다.

“연기라······.”

전 회사에 있을 때는 연기 선생님이 있었다. 계약된 연기 학원에서 선생님이 파견을 나와 연기를 가르쳤다.

민경의 경우도 스스로 연기 훈련을 많이 해 왔지만, 회사로 연기 선생님을 찾아가 같이 호흡하며 배우기도 했다.

“연기 선생님을 한번 찾아봐야겠어.”

회사를 차렸으니 고려해야 할 일이었다.

재석은 그렇게 촬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민경과 함께 차에 올랐다.

“오빠, 무슨 고민이 많아요?”

“고민이 하나 있지. 회사를 차렸는데, 연기를 가르칠 선생님이 필요해서 말이야.”

“연기 선생님?”

“그래.”

“차라리 오빠가 하지 그래.”

“응?”

아니 이게 자다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내뱉었다.

“오빠 나랑 할 때 아주 잘했잖아. 이 역은 뭘 어떻게 해야 한다. 지금 어떤 감정을 보여야 한다.”

“그거야······ 대본의 상황을 이해하고 말한 거지 그게 어떻게.”

“오빠, 연기의 절반은 대본을 파악하는 능력이에요. 나머지는 표현력이고. 그리고 오빠가 상대역 해 주면서 연기 실력 쭉쭉 늘었어요.”

“난, 전문적으로 연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야. 그저 대본을 따라 했을 뿐이지······.”

재석은 전생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수많은 연기자를 보며 느꼈던 점을 이야기할 뿐, 그게 연기를 가르칠 수준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어머, 오빠가 겸손하게 내빼기도 하네.”

생전 처음 본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민경은 지금 이 모습에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운 게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지.”

“네가 한번 해 볼래.”

“어머, 오빠, 저 연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저한테 그래요.”

민경도 연기 선생님이란 타이틀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봐, 현직 연기자도 부담스러운데, 매니저가 연기를 가르치라니······.”

“아, 선생님 찾아야겠네요.”

민경도 재석의 말을 듣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결국 연기에 관한 훈련은 전문가를 찾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너, 전에 배웠던 선생님 기억 나?”

“그 선생님은 좀 젊은데.”

“괜찮아. 누구야?”

“안준혁이요.”

재석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누구?”

“안준혁 선생님이요.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제가 오디션 잘 보게 해 준 선생님이에요.”

“진짜 안준혁이야?”

“혹시 아세요?”

“아, 아니, 연기 잘 가르친다는 소문만 들었어.”

재석은 이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야, 전설의 스타를 여섯 명이나 배출한 연기 선생이 민경의 선생님이었어?’

후에 스타가 될 배우들을 양성하면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그 사람 밑에서 연기를 배우려는 사람이 줄을 서지만, 그건 10년이 지난 뒤에 벌어질 일이다.

“선생님 연락처는 알지?”

“물론 알고 있죠. 지금은 안 하고 있지만······.”

“무슨, 자주 연락해야 할 사람에게 연락을 하지 않다니. 오늘 당장 연락 가능해?”

“연락이야 가능하죠. 일단, 문자라도 스윽 보내 볼까요?”

“그래, 문자 보내면 연락이 오겠지.”

민경은 재석 옆에서 오랜만에 연기 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반응은 빠르게 왔다.

부웅.

“어머, 바로 전화 오네.”

“얼른 받아 봐.”

재석은 운전 중임에도 전화에 더 신경 쓰며 재촉했다. 평소에는 잘 그러지 않는 사람이 그러니 민경도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선생님.”

(어, 오랜만이다. 민경아, 그간 방송을 보면서 잘나가고 있는 모습을 잘 봤다. 어떻게 된 게 잘나가면서 연락 한 번을 안 주니.)

“그게 좀 바빠서요.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 제가 일하는 곳에서 연기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사장님이 추천을 좀 해 달라고 해서요.”

(아, 그래서 날 추천한 거야?)

“네, 혹시 몰라서 일단, 여쭤는 보려고요.”

(나야, 좋지. 일이 많아지면 버는 돈도 많아지니까.)

“그럼, 저희 사장님과 만나실래요?”

(진짜? 그럼, 나야 좋지.)

미래에 잘나가는 안준혁도 지금은 연기 선생님이지만 힘들게 살아가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거 손 안 대고 코 풀겠네.’

재석은 바로 옆에서 민경의 전화 내용을 다 듣고 전화가 끊어지자 바로 입을 열었다.

“액수만 잘 맞으면 바로 일하겠는데.”

“정말 그러겠네요.”

재석은 민경 덕분에 안준혁과 따로 약속 날짜를 잡고 만나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바, 반갑습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첫 만남에 안준혁은 재석의 얼굴을 보고 많이 놀랐다.

“사장님이라고 하셔서 최소한 서른은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서요.”

“아쉽게도 아닙니다. 민경이와 같이 회사에서 나와 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별말씀을요. 어차피 민경이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회사를 차리는 것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럼, 민경이와 둘이서?”

“아닙니다. 다른 연예인도 있습니다. 소속 연예인은 네 명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다른 연예인들을······.”

“그렇습니다. 저희 회사에 소속된 연기자들에게 연기수업을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연기 수업이 필요한 이들이 있어서 말이죠.”

“그럼, 바로 연기 수업을 진행하실 겁니까?”

재석은 그의 말이 조금 다급해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돈이 급하십니까?”

안준혁은 그 말에 살짝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표시가 난 모양이네요.”

“흐음, 뭐 약간 그렇습니다. 수업은 바로 진행할 거고. 일단, 묻고 싶습니다. 따로 수업하시는 학생이 있습니까?”

재석이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입시 준비 학생입니다.”

입시 연기라는 말에 연예계에 뛰어들길 원하는 학생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학생들이 많은 가요?”

“아니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입시 연기라면 시기상 지금쯤 학생들이 다 떨어져 나갔을 터다. 새로 연기를 시작하는 학생 말고는 가르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뭐, 없다고 해서 절박한 상황을 보이는 게 좋은 선택은 아니지.’

재석은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했다. 어차피 이 사람을 이용하려는 속셈보다 유명 연기 선생님을 이 기회에 포섭해서 두고두고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럼,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소속사 연예인에게 연기 수업을 해 주십시오. 한 사람당 30만 원은 챙겨 드리겠습니다.”

1인당 30이라는 말에 안준혁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 정도 돈이면 당장 급한 생활이 조금 편해지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직원이 되라는 겁니까?”

“아닙니다. 굳이 따진다면 계약직 직원이 되겠네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도 연기를 가르치실 거니 계약직이라는 말이 편하겠죠.”

살짝 아쉬워하는 안준혁이었다.

‘아쉬워하고 있네. 어차피 정직원 되도 몇 년 지나면 너 학원 차릴 거잖아.’

이미 미래를 알고 있는 마당에, 이 사람 정직원 채용에 굳이 얽매이지 않았다. 문제는 이 사람이 직접 연기 수업을 하냐 하지 않냐가 중요했다.

“제가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몇 년이 지나도 직접 연기 수업을 해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그거야 저야 좋죠.”

“그래서 저는 계약이 필요합니다.”

미래에는 다들 안준혁의 연기 수업을 받으려고 많이도 원하지만, 그게 쉽지 않게 된다.

“제가 원하는 계약 기간부터 말씀드리죠.”

“네, 몇 년간 계약을 원하십니까?”

“5년입니다. 그 후 특별한 말이 없다면 2년마다 갱신입니다.”

“네?”

안준혁은 계약 기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자 너무 깜짝 놀랐다. 이 정도면 5년간은 확실히 책임진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계약 기간을 길게 잡아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선택하십시오.”

안준혁은 단순히 연기 선생을 하는 이유는 금전적인 부분이 컸다. 연기자로서 오래도록 살아남고 싶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아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걸 하면 적어도 배고프진 않겠어.’

안준혁에게 있어서 연극을 계속하려면 이 계약이 필요했다.

“하겠습니다. 조건도 나쁘지 않습니다.”

안 좋은 게 아니라 꽤나 괜찮았다.

“그리고 교육 시간에 관해서는 한 주에 여덟 시간 이상은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물론 1인 기준입니다.”

나중에 안준혁에게 배우려는 사람들을 돈을 싸 들고 와도 못 배운다. 그런 만큼 지금 계약은 재석에게 있어서 아주 좋았다.

지금은 돈 많이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잠깐이다. 나중에는 겨우 한 주에 세 시간도 못 배우는데 백만 원씩 가져간다.

여덟 시간은 정말 과분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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